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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무고
사마택에게 고한 게 잘한 짓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혹여나 홍영국이라는 아이의 뒷배가 사마택보다 높다면 사마택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었다. 괜한 화풀이를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불안해하던 아삼이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게 아닐까?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사마택 그 사람의 눈빛은 이미 알고있었다는 듯한 눈빛이었으니까.'
"잘 생각하고 있는 거지? 좋은 소식 기다릴게."
그런 아삼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은 얼굴로 아삼의 어깨를 ‘툭’치면서 스쳐 지나가는 홍영국이었다. 그 모습에 입술을 꽉 깨문 아삼은 휘둘리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힘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젠장. 우선은 무공보다는 권력을 잡아야 하는 건가?'
정태감의 뒤를 따라서 조삼보가 내서당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뒤에는 처음보는 환관들이 따라 들어왔다. 아이들의 앞에 선 조삼보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계속된 침묵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뭐지? 왜 아무런 말이 없는거야? 그리고 저 뒤에 서있는 환관들은 또 뭐고?'
의아해하던 아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뭘 가르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지금 상황을 눈여겨봐야 할 것만 같았다. 지금 상황은 뭔가를 의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처음보는 환관들이 할 일이 없어서 뒤에 서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대략 한 식경이 지나자 조삼보의 뒤에 서 있던 환관들이 말없이 내서당을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서당에는 영문을 몰라서 웅성대는 아이들과 조삼보만이 남아 있었다.
"조용! 오늘은 추적술의 두 번째 기본인 관찰력에 대해서 알려주도록 하마. 조금 전에 내 뒤에 서 있던 환관들을 모두 보았을 것이다. 지금부터 내 물음에 답하도록 하거라."
조삼보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아삼과 아이들이었다.
"내 뒤에 서 있던 환관들이 모두 몇 명 이었느냐?"
'6명'
"모두 6명이었사옵니다."
맨 앞에 서있던 방태옥이 손을 번쩍 들면서 답을했다. 그 모습을 보던 조삼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맞다. 그럼 그들 중 얼굴에 점이 있던 환관은 누구였느냐?"
얄궂은 미소를 짓던 조삼보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인학이 나서면서 답했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에 서 있는 환관의 얼굴에 큰 점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대답에 만족한 듯 얼굴에 미소를 띠던 이인학이 주변을 둘러보면서 아삼을 찾았다. 답을 하지 못하는 아삼을 바라보면서 비릿하게 웃는 이인학이었고 그런 이인학의 모습에 얼굴이 찌푸려지는 아삼이었다.
계속되는 조삼보의 질문에 몇몇 아이들이 어렵게 답을 해나갔다. 아삼 역시 조삼보가 묻고있는 질문의 모든 답을 알고 있었지만 쉬이 나서지는 않았다.
벙어리라서 나서고 싶어도 나서지 못하는 것도 있었지만 이곳에서 튀어봐야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조용히 자신의 실력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괜히 여기에서 알고 있다고 잘난 척을 해봤자, 팽가에서처럼 다른 아이들의 견제만 받을 뿐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게 지금의 상황이었다. 괜히 드러내봤자 좋지 못한 꼴을 볼 확률이 높았다. 자신은 그냥 겉으로는 벙어리인 것만 보이면 그걸로 충분했다. 굳이 실력을 내비쳐서 적을 만드느니 그저 조용하게 지내는 것이 황궁에서나 세상에서나 쉽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아삼이었다.
역시나 10살의 아이가 가질만한 생각은 아니었다.
추적술의 기본을 필두로 해서 추적술의 기본 관찰요소인 흙, 나뭇가지, 풀, 동물 등을 관찰하는 교육이 이어졌다. 그리고 추적자들의 향이나 독인 천리미향(千里迷香)과 산향수(散向水) 그리고 일독환(一毒丸)에 관해서 배웠고 추적자들의 고급기술인 천리지청술(千里地廳術), 야백안(夜白眼), 독상나분(毒翔儺粉) 등의 수련법도 이어졌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선 아삼이었지만 이런 것들은 다른 아이들도 어려워했다. 그런 아이들 중에서도 집중력을 보이는 아삼이었지만 드러내지는 않았다.
실력의 삼 할을 숨기라는 말을 벌써부터 체득하고 있었다.
한 달이 넘는 시간동안 계속해서 추적술의 교육과 수련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수시로 자신을 재촉하던 홍영국이라는 아이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이 내서당에 없었던 아이처럼 그 누구도 홍영국이라는 아이의 부재를 묻지 않았고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벙어리였던 아삼 또한 대놓고 묻지는 않았다. 조금 의아해 할 뿐이었지만 그냥 모른 체하는 그였고 그게 현명하리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런 의문을 가지기 무섭게 한 가지 풍문이 전해졌다. 역모죄였다. 홍씨 성을 가진 관리가 역모죄로 구족이 멸해졌다는 풍문이 들려왔고 그 소식을 들은 아삼은 아마도 그 홍영국이라는 아이도 같이 엮어진 건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었다. 새삼 사마택의 능력에 가슴이 떨리는 아삼이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런 무서운 자와 가까이하고 있는 그였기 때문에 앞으로 행동 하나하나 더 조심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만 했다.
"오늘부터는 이 책들을 필사하도록 하여라."
사마택이 새로운 책 뭉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러자 아삼이 길게 읍을 하고 책상에 앉아서 붓을 들었다. 옆에서 필사를 하는 아삼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사마택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내서당에서의 수련 때문인가? 이 아이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꽤 늘어난 것 같군. 몇 달 사이에 이런 성장을 보이다니…… 역시 지켜볼 필요가 있겠어.'
생각보다 아삼의 성취가 떨어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내서당 내에서도 성취가 남다른 아이들과는 비교하기 어렵겠지만 필사를 하면서 심법을 수련하는 아삼이 일반적인 다른 아이들과 비슷한 성취를 보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사마택의 시선이 천장을 향하고는 거드름을 피우면서 무고를 나섰다. 그가 무고를 나선 것을 느낀 아삼은 주어진 비급을 천천히 필사하면서 열심히 외우기 시작했다.
한참을 집중해서 필사를 하고 있던 아삼은 갑자기 들려오는 헛기침 소리에 깜짝 놀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언제 들어왔는지 화려한 의복을 입은 한 남자가 아삼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인 것을 알아챈 아삼이 고개를 숙이면서 길게 읍을 했다.
"크흠. 사태감은 어디에 있느냐?"
"……."
낯선 남자의 질문에 당황한 아삼은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아삼의 모습에서 이상함을 느꼈는지 낯선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긴히 찾는 책이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느냐? 사태감이 없으니 네가 찾아 주겠느냐?"
"……."
"허어! 어찌 답이 없는 게냐? 혹여 날 도와주기 싫은 것이냐?"
"……."
"지금 네가 나를 무시하는 것이더냐?"
낯선 남자의 말에 아삼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손사래를 쳤다. 말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어찌 설명해야 할 지 난감한 아삼이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특유의 위엄 섞인 눈빛에 쉽게 움직일 수도 없었다. 자신의 몸을 옭아매는 듯한 기운에 지필묵을 들 생각도 못했고 묻는 말에는 답을 할 수도 없었다.
노한 듯한 남자의 얼굴에 당황해 할 때,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복면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 구석에 있는 천장에서 조용히 뛰어 내려온 그가 낯선 남자의 앞에 부복했다.
"황자마마, 이 아이는 말을 하지 못하옵니다. 잠시의 말미를 주신다면 사태감을 찾아오겠사옵니다."
"말을 하지 못한다? 벙어리란 말이냐?"
복면인의 말에 호기심어린 남자의 눈이 아삼에게로 향했다.
'황자라고? 이 사람이?'
호기심을 가진 사람은 황자라고 불렸던 낯선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아삼역시 그와 마찬가지였다. 천장 위에 자신을 지키는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나타난 복면인의 등장은 놀랍지 않았지만 나타난 사람이 황자라니 그 사실이 놀라운 아삼이었다.
황자라는 단어에 아삼은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그 때 그의 귓속에 황자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헌데 이 아이는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이 곳에서 비급을 필사를 하고 있사옵니다. 아무래도 벙어리라 입이 무거울 듯 하여……"
"필사? 필사라?"
남자의 시선이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는 상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다가간 남자가 필사된 종이를 들어서 찬찬히 바라봤다.
"오호, 이 아이의 필체가 꽤 좋구나. 사태감이 왜 이 아이에게 이런 일을 시켰는지 이해가 가는군. 조금만 더 정진한다면 이름을 날릴 정도는 되겠어."
종이를 집어 든 황자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지어졌다. 그때 무고로 들어오던 사마택이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뛰어 들어오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황자마마, 여긴 어인 일이시옵니까?"
"사태감 무슨 일이 있어 그렇게 바쁘던가? 황궁무고를 책임지는 자가 그렇게 한가해도 되는 것인가?"
"송구하옵니다. 마마."
"되었다. 이 아이의 필체가 예사롭지 않구나. 오랜만에 눈이 즐거웠다."
"……."
황자라는 남자의 칭찬에 머쓱해진 아삼이었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였기 때문에 붉어진 얼굴을 들킬 리는 없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리던 그 때 그의 귓가에 익숙한 단어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아삼의 머릿속은 온통 그 단어로 가득 들어찼다.
"그건 그렇고 규화보전이라는 비급이 전해지느냐? 내 그것을 보고 싶구나."
황자의 하명에 사마택이 재빠른 걸음으로 안쪽에 있는 책장으로 황자를 모셨다. 위엄있는 모습으로 앞장서는 황자의 뒤를 사마택이 잰걸음으로 뒤따랐다. 어느새 고개를 들어올린 아삼이 뒤에서 멍하니 그 모습들을 바라봤다.
'규화보전이라고?'
규화보전. 많이 들어본 단어였다. 이전 생에서 들었던 비급 중에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동방불패라는 어릴 적에 크게 유행했던 그 영화에서 나오는 비급의 이름이 바로 규화보전이었다. 그리고 그 규화보전이라는 비급이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아삼이었다.
'저 비급을 내가 볼 수는 없을까?'
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의 모습을 한없이 바라보는 아삼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모습을 숨긴 복면인이 멍해있는 아삼을 바라봤다.
- 불경한 시선을 거둬라. 네놈 목숨은 두 개라더냐?
갑작스런 목소리에 주변을 둘러보는 아삼이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당황해하는 그 모습에 재미를 느낀 복면인의 전음이 다시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 조용히 시립해 있거라. 내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동안 해 왔던 것처럼 행동해야 할 것이다.
들려오는 소리에 다시 읍을 하는 아삼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복면인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노회하고 음흉한 자들만 상대했던 그였기에 생각보다 순진한 아이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호의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복면인의 눈빛을 모르던 아삼은 아무런 말도 없이 두 손을 모으고 가만히 서있었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서있는 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에 들었던 그 비급만 맴돌았다.
규화보전(葵花寶典).
'저것을 필사할 수 있을까?'
무던하게 튀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아삼의 눈에 탐욕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사태감과 황자라던 주고희를 주시하던 복면인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새로운 감정을 드러낸 아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