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23화 (2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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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궁무고

    아삼에게 암기한 비급을 익힐 기회가 주어졌다. 무공이라는 것이 눈으로만 보고 생각하면서 익힐 수는 없었다. 머리로 이해한 내용을 몸으로 익혀야 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시간과 장소가 필요했다. 아삼에게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온 것이었다.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한다면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힘에 한 발자국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 가슴이 설레는 아삼이었다.

    다음 날.

    금일은 필사를 하러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황궁무고로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함께 내서당에 서 있는 아삼이었다. 잠시 후, 정태감이 쭉 찢어진 눈에 왜소한 체격을 가진 사내 하나와 내서당으로 들어섰다.

    "흠. 여기에 있는 이 사람은 앞으로 너희들에게 추적술을 가르쳐줄 사람이다. 흔치않는 기회니 다들 주의 깊게 잘 듣도록 하거라."

    정태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처음보는 사내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내서당을 가득 채웠다.

    "나는 조삼보라고 한다. 힘들게 두 번은 말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한 번 말할 때 잘 듣도록 하거라."

    매서운 눈초리로 아이들을 둘러보던 조삼보가 자리를 비켜주는 정태감을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심상치 않은 외관을 가진 그의 모습에 겁을 집어먹은 듯한 아이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추적술이 무언지는 알고 있느냐?"

    조삼보가 맨 앞에 선 방태옥을 향해 물었다.

    "전문적으로 누군가를 추적하는 기술을 추적술이라 하옵니다."

    자신있는 얼굴로 대답하는 방태옥의 모습에 뒤로 빠져있던 정태감의 얼굴에 만족하는 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옳다. 강호는 갖가지 사건도 많고 은원(恩怨)이 얽히고설키는 곳이다. 그래서 사건을 일으키고 급히 몸을 피해야 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고 누군가를 추적해야 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그런 자들을 쫓기 위해서 발달된 것이 바로 추적술이라고 불리는 기술들이다. 오늘은 첫 날이니 만큼 기본부터 닦도록 하겠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이 내서당이라는 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화장실은 물론이거니와 밥도 먹을 수 없다. 혹여 정 참지 못하겠다는 놈은 조용히 밖으로 나가거라."

    말을 마친 조삼보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팔짱을 낀 그가 쭉찢어진 눈으로 그곳에 서있는 아이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어리둥절한 아이들이 어쩔 줄 몰라하면서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조삼보를 따라서 자리에 주저앉은 아이가 있었으니 바로 아삼이었다.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삼을 필두로 다른 아이들이 하나 둘씩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어느덧 한 시진이 지났다. 슬슬 좀이 쑤시는지 여기저기서 바스락거리는 아이들의 옷자락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또 한 시진이 더 지나자 이번엔 터질 듯한 방광을 부여잡은 채 몸을 꼬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결국 참지 못한 몇몇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미동도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조삼보였다. 그리고 그런 조삼보를 따라 아삼을 비롯한 몇몇 아이들 역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제법 버티는 놈들이 되는구나. 어디 얼마나 버티나 한번 볼까?'

    조삼보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 미소를 놓치지 않던 아삼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끝까지 버티는 게 중요한 것 같군. 아마도 그걸 시험하는 것 같아.'

    어느덧 해가 져서 내서당의 안은 어둑어둑해졌다. 어두워진 내서당 안에 촛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그 안에 좌정한 조삼보와 방태옥, 송상호, 이인학 외 몇몇의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물론 아삼 역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들 다시 들어오거라."

    조삼보가 밖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추적술의 기본이 무어라고 생각하느냐? 바로 인내심이다. 누군가를 추적하다 보면 뒷간을 갈 겨를도 그렇다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밥을 먹을 새도 없을 때가 다반사다. 하여 오늘은 인내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 본 것이다. 예상외로 많은 아이들이 남아있었다."

    좌정한 아이들을 바라보는 조삼보의 얼굴은 무표정해 보였지만 내심 많이 놀라고 있었다. 처음에 스스로가 추적술이라는 잡스러운 기술을 배울 때만 해도 이렇게 참아내지는 못했다. 사실 절세 무공을 배워서 큰 이름을 떨치고 싶었지만 그럴 깜냥이 그에게는 없었다. 밥을 벌어먹을 수 있는 것을 찾다보니 남들이 꺼려하는 것들을 찾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그것에만 매달리자 간신히 밥벌이는 할 수 있게 된 그였다.

    이제는 달인이라고 칭해도 모자라지 않을 조삼보의 마음에 든 아이들의 수가 다섯 손가락을 넘어간다는 일은 대단한 일이었다. 흡족해하는 조삼보는 그런 아이들을 눈여겨 본 후에 금일 있었던 일들을 마무리 지으면서 정해진 처소로 움직였다.

    몇 시진을 밥도 먹지 못하고 앉아만 있던 아이들은 뻐근해진 두 다리를 절면서 처소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그때 절뚝거리면서 힘겹게 걷고 있는 아삼의 팔을 부축하면서 한 아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아? 끝까지 버티다니 대단한데? 난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 막판에 포기했는데……"

    대단하다는 듯이 엄지를 치켜세우면서 활짝 웃어보이던 아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삼을 보면서 멋쩍게 웃었다.

    "난 홍영국이라고 해. 네 이름은 아삼이지?"

    '이건 또 뭐지? 일면식도 없는 놈이 갑자기 왜 이렇게 엉겨붙는 거지?'

    갑자기 나타난 처음보는 놈이 왜 이렇게 살갑게 대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아삼이었다.

    사람이 친절하게 구는 경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원래 태생적으로 착한 사람이라서 본능적으로 살갑게 대하는 것이 그 경우였고, 나머지 하나는 뭔가를 바라고 접근하는 경우였다. 아무래도 첫 번째는 아닌 것 같았다. 지금껏 살아왔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본 적도 없었고 겪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면서 옆에 붙은 아이를 경계하게 되는 아삼이었다.

    "네가 황궁무고를 들락날락 거리면서 필사를 하고 있다지? 사실…… 내가 너한테 긴히 부탁할 일이 있는데……"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에게 바싹 붙으며 속삭이는 아이의 모습에 아삼의 미간이 찌푸려지면서 속에선 기다란 한숨이 새어나왔다.

    "황궁무고에 있는 무공을 알 수 있을까? 몰래 하나만 빼서 알려줄 수 있어? 당연히 대가는 후하게 지불해 줄게. 아무래도 내서당에서 배우는 것들에는 한계가 있잖아? 황궁무고에 있는 무공을 하나라도 배워두면 나중에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어때?"

    홍영국의 말에 아삼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다. 그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에 스스로 한심스러워 하던 그였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만 돌아가는 게 아닌데……'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다시 각오를 다지던 아삼을 똑바로 바라본 홍영국이 재차 속삭였다.

    "네가 도와준다면 대가는 섭섭잖게 챙겨 줄게. 이래봬도 내 뒷배가 제법 든든하거든. 결코 실망하지 않을 거야. 원한다면 네 뒤를 봐줄 수도 있어."

    아삼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 일을 사마택이 알게 된다면 자신의 목숨은 그날로 끝이었다. 이 놈이 어떤 놈인지 그리고 그 뒷배가 얼마나 든든하지 모르겠지만 괜한 일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크흠. 지금 대답해 달라는 것이 아니야! 조금 더 생각해 보고 그때 말해줘."

    홍영국의 말을 들은 아삼이 단호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얼굴이 굳어진 홍영국이 아삼을 노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당연히 좋은 말이 나올 리가 만무했다.

    "내가 잘 생각하라고 했지! 네가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너희 가족들이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몰라. 나를 돌봐주시는 분이 성질이 아주 불같으신 분이거든. 그 분이 아마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홍영국의 말에 아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런 아삼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홍영국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가족을 지키려면 잘 생각해봐야 할 거야. 곧 다시 만날 수 있을거야. 그럼 다음에 또 보자."

    멀어져가는 홍영국의 뒷모습을 매섭게 노려보는 아삼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삼을 바라보는 숨어서 바라보던 한 쌍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 번뜩거렸다.

    황궁무고로 향하는 아삼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어젯밤 일을 밤새 고민하느라 잠도 자지 못한 아삼이었다.

    '가족이라…… 어떻게 하지?'

    누워있는 자신을 일으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던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을 지켜준다던 두 아이를 떠올리던 아삼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가족을 가지고 위협을 하는 놈이라니. 어린놈이 벌써부터 그렇다는 건…… 그 뒤에 있는 놈의 생각인 건가? 그 놈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가족들이 위험해 질 텐데…… 팽가가 잘 돌봐준다고 했지만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그 놈의 말을 들어주면 내가 위험할거고…… 그 놈의 뒷배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위에 있는 놈이라면 그것도 골치 아플 텐데……'

    "이제 오느냐?"

    깊은 생각을 하면서 무고에 들어서던 아삼이 갑작스런 사마택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바로 고개를 숙이면서 읍을 했고 그런 아삼을 향해 의뭉스런 미소를 날리는 사마택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것이냐?"

    사마택의 말을 들은 순간 아삼은 이질적인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평소라면 필사할 책들은 던져주면서 아무런 말도 없이 무고를 나설 그였지만 이번에는 웬일인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설마?'

    순간 아삼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무고에 있을 비급을 필사하는 나를 그냥 방치하지는 않겠지. 지금 나를 바라보고 있을 놈이 무고 안에만 있을까? 혹시라도 나를 항상 감시하고 있는 거라면……'

    누군가 자신을 계속해서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등 뒤로 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애써 내색하지 않던 아삼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 무고 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 중한 책들이고 나는 그런 책들을 필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를 가만히 놔둘 사마택이 아니겠지.'

    뭔가를 아는 듯 자신을 꿰뚫어보는 사마택의 눈빛에서 확신을 얻는 아삼이었다. 결국 결심을 굳힌 아삼이 종이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마택에게 종이를 내밀고 무릎을 꿇으면서 머리를 조아리는 아삼이었다.

    받아든 종이를 읽던 사마택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느새 사마택의 시선이 천장으로 향했고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아삼을 내려봤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을 느낀 아삼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면서 애원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어어'라는 듣기 싫은 목소리로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는 모습에 사마택의 입이 떨어졌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 알아서 처리 할 것이다. 너는 네 맡은바 소임을 다하면 된다."

    안도하는 듯한 아삼을 바라보는 사마택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입가에 미비한 미소가 지어지던 사마택은 아직도 고개를 들지 않는 아삼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영특한 놈이로군. 그 짧은 시간이 기류를 읽는 것을 보면 제법 눈치가 있는 놈이야. 벙어리에 눈치가 빠른 영특한 아이라……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가? 하하하.'

    어느새 사마택의 눈도장을 받게 된 아삼이었다. 이것이 길일지 흉일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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