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22화 (2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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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무고

생각했던 것보다 사마택이란 자의 무공은 훨씬 뛰어난 것 같았다. 이제 갓 기라는 것을 느끼고 단전 쪽으로 끌어당겼을 뿐이었지만 수련 중인 자신의 기를 단번에 눈치 채는 것을 보면 지금보다 더 조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아삼이었다.

어려움은 사마택이라는 환관뿐만이 아니었다. 어딘가에 숨어서 항상 자신을 주시하는 눈도 그의 행동에 제약을 가지고 왔다.

살수지무. 살수의 무공이라는 그 책은 상당히 담백한 제목이었다. 그냥 봐서는 아무것도 아닐 것 같은 단순한 살수들의 무공을 논하는 책인 것 같았지만 실상은 달랐다. 황궁무고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희소성이 있거나 위력이 대단한 무공이라는 반증이었다.

이 책 역시 그런 비급 중에 하나였다. 비록 겉은 너덜너덜해져서 부서질 듯이 위태로웠지만 살수들이 익히는 무공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무공 중 하나였다. 일백년 전에 살왕이라고 불렸던 유명한 살수가 남긴 비급이었지만 그 겉모습과 단순한 제목에 그 가치를 알고 있는 자는 없었다. 그리고 아삼 역시 그 가치를 모르는 상태로 필사하고 있었다.

이제 갓 천자문을 떼고 기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감만 잡고있는 아삼이 이런 비급을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것도 정독이 아닌 필사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우는 데에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간신히 힘을 얻는 방법을 생각해 냈고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읽고 또 읽다보면 언젠가는 이해할 날이 올 것이라고 굳게 믿는 아삼이었다.

'노력만큼 더 좋은 스승은 없다는 말도 있잖아. 외워놔서 나쁠 것은 없겠지.'

누렇다 못해 새까만 책에서는 오래된 책 특유의 곰팡이 냄새가 술술 풍겨나왔다. 그리고 워낙에 낡아서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지 않으면 부서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금방 떨어져 나갈 것 같은데. 중요한 책인가? 너무 오래돼서 이번에 필사를 끝내면 다시는 못 들춰 볼 것 같은데……'

중요하지 않다면 번거롭게 이리 필사하지 않을 것 같았다. 뭔지 모르겠으나 왠지 이 책의 내용을 꼼꼼히 기억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아삼은 더 집중해서 필사를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부분부분 단어를 바꾸는 것을 잃지 않았다. 물론 일부러 단어를 바꿔놓는 아삼이었다.

'중요한 책이라면 나만 아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렇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신체적으로 많이 불리하니 이런 것으로라도 간극을 메꿔야겠지. 이렇게라도 해야 나에게도 다른 아이들보다 유리한 점이 생겨나겠지.'

사마택이 알았다면 경을 칠 일들을 자행하면서, 열심히 필사를 하고있는 아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무작정 바꾸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안전장치를 준비하면서 뜻이 통하긴 통하되 다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바꿔놓는 그였다.

어느새 아삼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필사를 하다가 보니 이 책이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 대충 알게 된 것이었다. 이 책의 가치를 느끼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려운 부분은 읽고 또 읽으면서 이해를 할 때까지 책장을 넘기지 않다보니 그 속도가 너무나 더디었다. 이러면 사마택에게 또 한 소리를 듣는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비록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싫은 소리를 듣는 것이 마음이 좋을 리가 없었다. 특히나 전생에 비슷한 나이라고 생각되는 놈의 꾸중을 들으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더 큰 고역이었다.

'구더기 무섭다고 장 못 담구나? 그놈의 잔소리는 싫지만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바보겠지.'

꾸지람을 들을지언정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아삼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두 번 다시 이 낡은 책을 볼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이 제대로 이해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렴풋이 책의 가닥이 잡혀가는 것 같았다.

번지는 불을 잡기 위해서는 맞불을 놓아야 했다. 이열치열(以熱治熱)라고 더위는 더위로 잡으라는 말이 필사를 하고 있는 책의 요체였다. 기를 숨기는 것 또한 기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전대 살왕이라는 자가 썼다던 이 책의 핵심인 것 같았다.

곰곰이 책의 내용을 곱씹어보던 아삼은 낡은 책의 글을 확인하려는 듯한 행동을 하면서 생각을 이어나갔다.

'우선은 동자공을 이용해서 단전에 기를 쌓아야 하는 건가?'

다시 한 번 흡기의 중요성을 깨달은 아삼이었다. 조금 더 열심히 심법을 익혀야 하겠지만 항상 자신을 지켜보는 천장 위의 정체모를 자가 신경쓰였다. 사마택의 행동으로 미루어 봐서 이곳을 지키고 있는 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흐음…… 어떻게 하면 좋지? 계속해서 필사를 이어간다면 이곳을 벗어날 수는 없을 텐데…… 숙소로 돌아가서 잠을 쪼개야 하는 건가?'

어째 삶이 더 치열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아삼이었다. 한숨마저도 편히 할 수 없는 지금의 처지가 새삼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빨리 힘을 키워야 하는데 힘을 키울 수나 있을런지……'

"잘 되어가고 있느냐?"

언제 돌아왔는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마택의 모습에 깜짝 놀란 아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예의를 갖췄다.

"그래 필사는 얼마나 했느냐?"

가지런히 정리된 종이를 들추던 사마택이 아삼을 향해 물었다. 당연히 답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이 필사된 종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그의 모습에 아삼의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 흘러내렸다. 일부러 내용을 다르게 적은 아삼이었다. 혹여나 그게 탄로나지 않을까 걱정하던 아삼이 긴장해서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두 손을 닦아내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필사된 종이뭉치를 훑어보던 사마택이 중간의 종이를 빼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내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삼을 바라봤다. 어느새 미소를 지운 사마택이 아삼을 향해 엄히 말했다.

"필체는 더할나위 없이 만족스럽다만 그래도 너무 느리다. 좀 더 분발하도록 하거라."

사마택의 하명에 아삼이 고개를 숙이면서 길게 읍을 했다. 자리를 지키는 사마택의 모습에 다시 붓을 들어서 필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사마택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고를 나섰다.

고개를 숙이면서 필사하던 아삼의 얼굴에 조그마한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일부러 중간의 내용을 더 꼼꼼히 필사했던 아삼이었다. 사람의 생각은 모두 거기서 거기로 비슷비슷했다. 대부분 처음이나 끝부분을 신경 써서 처리를 하려고 한다. 그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처음과 끝을 신경썼지만 그동안 봐왔던 사마택은 곰이 아니라 여우였다.

일부러 주의를 주지 않고 처음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던 것과 어딘가에 숨어서 지켜보는 자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던 점.

단순하고 아둔한 자가 황궁무고라는 중요한 곳을 맡을 리가 없다고 판단한 아삼은 이전에 가졌던 생각을 뒤집었다. 그걸 역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그 생각이 맞아들어갔다. 사마택이라는 환관이 검토한 부분은 중간부분이었다. 만약 들키면 실수라 우길 생각이었지만 다행히 자신의 계책이 맞아 떨어진 것 같았다.

'조금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겠어. 괜히 글자를 바꿨나? 나중에 반드시 대조해 볼 텐데……'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깨달은 아삼은 다른 비급을 찾아서 빠른 속도로 필사해 나가기 시작했다. 던져준 책 뭉텅이 속에서 다른 것들과 섞어가며 필사를 한다면 틀린 부분을 쉽게 찾아내기는 힘들 것 같았고, 혹여라도 책을 암기하고 있다는 의심을 피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복면인의 입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나 아이는 아이인지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책을 집적대는 모습에 헛웃음이 터져나오는 그였다.

"그래, 그 동안에 일들을 설명해 보거라."

유현의 말에 정훈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그간의 교육 내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동자공의 수련을 시작하였사옵니다. 유공공께서 말씀하신 방태옥이란 아이뿐만 아니라 두각을 나타내는 다른 몇몇 아이들도 모두 눈여겨보고 있사옵니다."

정훈의 말에 유현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흘렀다.

"그래? 잘 해 보거라. 나중에 우리에게 힘을 실어줄 아이들이니…… 그건 그렇고 그 벙어리라는 아이는 어떻더냐?"

"아삼이라는 아이 말씀이시옵니까? 그 아이는 무공에 소질이 없사옵니다. 영 따라오지 못하는 듯하여 황궁무고로 보냈사옵니다."

"뭐라? 황궁무고? 황궁무고라면 사마택이라는 놈에게 보냈단 말이더냐?"

"예, 쓸 만한 아이인 줄 알았으나 영 진전이 없기에……"

"이런 멍청한 놈. 입이 무거운 아이라 긴히 쓸 일이 있을거라 내 그리 일렀거늘! 정화에게서 뺏어오지 못 할 망정 그런 아이를 제 손으로 갖다 바쳐? 이 반푼이 같은 놈."

화를 참지 못한 유현의 손에 잡힌 연적을 정훈에게 던졌다. 빠르게 날아간 옥으로 된 연적이 정훈의 이마에 부딪치면서 깨져나갔고 피를 흘리던 정훈이 급히 부복하면서 바닥에 머리를 찧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소인이 아둔하며 큰 실수를 저질렀사옵니다. 필히 다시 그 아이를 데려오겠사옵니다. 공공."

생각지도 못한 유현의 호통에 정신이 아찔한 정훈이었다. 쓸모없을 거란 생각에 일부러 사마택에게 보내서 골탕을 먹이려했는데 그 판단이 이런 분란을 가져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유현의 눈밖에 나기 전에 얼른 아삼을 데려와야겠단 생각에 정훈의 발걸음이 사마택의 처소로 향하였다.

"크흠…… 자네가 이 시간에 여긴 어인 일인가?"

야심한 시각에 그것도 정훈이라는 놈이 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알 수 없던 사마택은 못마땅하다는 투로 연유를 물었다.

"야심한 시각에 미안허이. 내 아삼이란 아이를 내일부터 다시 데려와야겠네."

"그게 무슨 말인가! 보낼 때는 언제고 다시 데려가겠다? 자네가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것인가? 이미 내게 온 아이네. 절대 내줄 수 없네."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는 사마택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던 정훈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엄포를 놓듯이 엄히 말했다.

"자네가 주고 말고 할 사한이 아니네. 그 아이는 황제폐하의 명으로 들어온 아일세. 내서당에서 열심히 수련해야 할 아이란 말이네. 자네가 주지 못하겠다면 그건 황제폐하의 명을 거역하는 일이 될 걸세."

황상까지 운운하는 정훈이었지만 그의 말에 발끈한 사마택이 소리쳤다.

"먼저 황제폐하의 명을 거역한 건 자네가 아닌가? 황제폐하의 명으로 들어온 아이를 먼저 내친 건 바로 자네란 말이네."

지지않고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이었다. 유현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아삼이라는 아이가 꼭 필요한 정훈이었다. 그리고 사마택 역시 필사를 위해서 아삼이 필요했다.

"자네도 그 아이가 필요하고 나도 그 아이가 필요하니 그럼 이렇게 하는건 어떻겠나? 하루는 자네가 하루는 내가, 이렇게 격일로 그 아이를 데리고 있으세."

아쉬운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재를 하고 나선 정훈이었다. 정훈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은 사마택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이 버티고 있는다고 해서 계속 그 아이를 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유훈이라는 부례감을 등에 업은 정훈이 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자신의 뒷배가 되어줄 정화 태감은 대원정에 나선 상태였다.

그렇게 아삼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황궁무고와 수련장을 오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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