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21화 (2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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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궁무고

    벌써 며칠 째, 황궁 무고에 묶여서 필사만 하고 있는 아삼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다른 놈들은 수련을 하고 있겠지? 이대로 뒤쳐지는 건가? 나는 무공이라는 것에 재능이 없나? 아직까지 기라는 것도 느끼지 못하다니……'

    생각만큼 수월하지 않았다. 특히나 기라는 것은 전의 삶에서 가끔 tv에 나오는 사람들이 차력을 할 때, 있어보이려고 가져다 쓰는 거라고 생각하던 아삼이었기에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흩어져있는 기운을 느낄 리가 만무했다.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으려고 스스로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던 그였다. 힘을 키우기 위해서 다른 아이들처럼 수련을 해도 부족할 판에 하루 종일 필사만 하고 있으니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조급해져만 갔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그놈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한참을 고심하던 아삼이었지만 딱히 방법은 없었다. 필사하고 있는 것이 무공과 관련된 비급 같았지만 당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었다.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기본도 갖추지 못한 그인지라 지금 그가 보고 있는 비급이 아무리 절세적인 위력을 가진 유명한 비급이라도 알아먹을 도리가 없었다.

    천자문도 모르는 아이에게 논어를 쥐어준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심을 하던 아삼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우선은 조금이라도 배웠던 동자공을 꾸준히 수련해 볼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것밖에 다른 방도는 없는 것 같았다.

    필사를 하는 틈틈이 동자공을 수련하는 아삼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기를 느끼지 못하는 그가 그것도 혼자서 수련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필사를 늦춰가면서 열심히 노력해보지만 좀체 진전이 없는 아삼이었다.

    '어지간히 재능이 없는 놈인 것 같군. 그러니까 이곳으로 보내진 건가? 집중도 하지 못하는 놈이 무공은 무슨…… 쯧쯧쯧.'

    정좌를 하고 앉아있던 아삼이었지만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분명히 기라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그 존재를 느껴야하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쉽게 느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것을 찾으려고 고심하는 아삼이었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복면인은 혀를 차고 한심스러워 했다.

    정신을 비우고 마음을 가라앉혀도 모자랄 판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아삼의 모습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저런 덜떨어진 아이를 왜 지키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그였다.

    "오늘은 이 책을 필사하도록 하여라."

    오늘도 여전히 책 한 권을 던져놓은 사마택이 거드름을 피우면서 전각을 빠져 나갔다.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이 책상에 앉아 붓을 드는 아삼이었다.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필사를 해나가던 아삼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잠깐만…… 내가 필사하고 있는 이 책 또한 무공에 관한 책이잖아? 나중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니 그냥 통째로 다 외워버려? 어차피 필사를 하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 그냥 책을 외운다면 나중에 쓸 수 있을 때가 있겠지.'

    생각을 해보니 어차피 언제까지 필사를 하라고 기한을 정해준 것도 아니었다. 천천히 필사하면서 비급을 외운다면 언제가 되어도 써먹을 곳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무공이라는 것으로 얻으려는 힘이었다. 지금은 기조차도 느끼지 못하지만 언제까지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나중에라도 무공을 수련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빠르게 붓을 놀리던 아삼의 손이 느려졌다. 마치 한 자 한 자 공을 들이는 듯 그렇게 천천히 적어가는 아삼이었다. 어느덧 종이 위에 적힌 글자들이 아삼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전에 논어를 외웠던 경험을 살려서 그렇게 통째로 외워가는 아삼이었다. 팽가에 있을 때도 수월하게 외웠던 책들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보다 글자 수는 더 적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자, 이제부터는 지금주는 이 책들을 모두 필사해 놓도록 하거라."

    한 권씩 건네주는 게 귀찮아던 것인지 사마택이 열댓권이 넘는 책을 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양에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는 아삼이었고 그 모습을 확인한 사마택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사마택이 무고를 나갔고 그 모습을 확인하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아삼이었다

    무공에 관한 책이라고 모두 같은 책이 아니었다. 사마택이 던져준 책에는 지금 아삼의 수준에는 맞지 않은 책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래도 후일을 기약하면서 외우고는 있었지만 지금 자신의 수준에 맞는 책을 필사하고 싶어하던 아삼이었다.

    혹시라도 사마택이 던져놓고 간 이 책더미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책이 있을 지도 몰랐다. 막연한 기대감에 책더미 속으로 가져가는 아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멀리서 그 모습을 주시하던 복면인의 눈에는 던져진 양에 기겁해하는 아삼만 보일 뿐이었다.

    눈에 불을 켜면서 책더미를 뒤지던 아삼의 눈에 '무술기공(武術氣功)'이란 책이 들어왔다.

    '동자공이라는 심법 수련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게 바로 기를 느끼는 거라고 했지? 아직까지 기도 못 느끼는 나한테 가장 알맞는 책이려나?'

    '무술기공(武術氣功)'이란 네 글자가 아삼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심호흡을 하면서 미친듯이 뛰고있는 가슴을 진정시킨 아삼이 천천히 책을 펼쳤다. 천천히 그 내용을 읽어보던 아삼의 입이 씰룩거렸지만 최대한 표정을 들키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원하던 그 내용이 책에 가득 들어있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은 그가 붓을 들면서 아주 느리게 책의 내용을 적어나갔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머릿속에 각인시키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필사에 지친 아삼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매번 이정도 시간이 되면 해왔던 행동이었기 때문에 지켜보던 복면인은 하품을 삼키면서 눈을 감았다. 가만히 있을 아삼의 기척을 느끼면서 눈을 감은 복면인은 그대로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무술기공(武術氣功)'이라는 책에 나온 내용을 기억해내던 아삼은 기라는 것에 대해서 대충 어떤 정의가 내려져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상태로 단전이라고 불리는 곳에 자신의 정신을 집중시키면서 공기중에 흩어져 있을 기운들을 천천히 들이마시면서 내쉬었다. 그렇게 몇 번의 호흡을 가다듬다 보니 이전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공기 속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새로운 발견에 들뜬 그가 잠깐동안 다른 생각을 하자 이내 느껴졌던 그 기운들이 다시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래서 정신을 집중하라고 했던 거였나?'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기라는 것을 처음 느낀 아삼이었다. 아직도 부족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조급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아삼이었다. 무슨 일이든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이렇게 조금씩 정진해 나가다보면 언젠가는 동자공이라는 무공도, 여기에서 필사를 하고있는 책들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그때까지 열심히 수련하리라 마음먹는 아삼이었다.

    며칠에 걸쳐서 무술기공(武術氣功)과 알 수 없는 책의 필사를 끝낸 아삼이 또 다시 책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책의 제목만 보고 골라야하므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대충 뒤적이면서 내용을 살펴볼 수는 있었지만 괜히 읽어놓고 다른 책을 집어든다면 혹시나 지켜보고 있을 사람의 의심을 사게 될 수도 있었다.

    자신이 필사하면서 비급을 암기하는 게 들킨다면 그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최대한 은밀하게 익혀야만 했기 때문에 우선은 동적인 움직임을 가진 비급들 보다는 정적 책들을 골라야만 했다.

    '살수지무(殺手之武)? 살수의 무공? 뭐지? 꽤나 거창한 이름인데.'

    호기심에 책을 든 아삼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미 책을 집어든 이상 이 책을 필사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의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다.

    첫 장을 넘기며 조용히 읽어내려 가던 아삼의 두 눈이 빛났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에 집어 든 책이었다. 하지만 아삼이 집어든 책은 상대방의 기척을 감지해서 상대방을 찾아내고 자신의 기척을 숨기는 등 살수에게 꼭 필요한 기술들이 적혀있는 책이었다. 이제 기를 느끼고 무공을 몰래 배울 아삼에게 꼭 맞는 책이었다.

    '이런 게 기연인가? 간신히 기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 기를 활용해서 기운을 숨기는 책이라니…… 이런 행운도 나에게 찾아오는구나.'

    어느덧 아삼의 얼굴에 어렴풋이 미소가 흘렀다.

    "그래, 잘 되어가고 있느냐?"

    갑작스런 사마택의 등장에 놀란 아삼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빨리 얼굴을 굳힌 그가 사마택을 향해서 정중히 예를 올렸다.

    "아직도 이것 밖에 못한 것이냐? 어째 날이 갈수록 속도가 이리 더딘 것이냐?"

    아삼이 필사해 놓은 종이들을 바라보는 사마택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점점 더 좋아지는 필체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삼의 필체에 언제 그랬냐는 듯 서서히 미간이 풀리는 사마택이었다.

    "네놈의 정성은 보이나 그래도 속도가 너무 늦지 않느냐? 좀 더 분발하도록 하거라."

    사마택의 하명에 아삼이 길게 읍하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 아삼을 스쳐 지나가던 사마택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아삼을 유심히 바라봤다.

    '뭐지? 왜 저런 눈빛으로 나를 보는 거지? 설마…… 들킨건가?'

    꿰뚫듯 자신을 바라보는 사마택의 눈빛에 아삼의 뒷목이 빳빳히 굳기 시작했다. 하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삼이었다.

    "네놈 몸에서 흐릿하게 느껴지는 기운들은 무엇이냐? 이 놈! 내 분명 필사만 하라고 했거늘…… 네놈이 비급을 익힌 것이더냐?"

    날카로운 사마택의 목소리에 아삼의 입이 바싹 타들기 시작했다. 여기서 들켰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모면해야 했기에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아삼은 떠오르는 생각에 급히 빈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어서 사마택에게 건넸다.

    "동자공?"

    "……."

    "네 놈이 동자공을 배웠더냐?"

    아삼이 건넨 종이를 바라보던 사마택은 의심스런 눈초리를 풀지않고 아삼을 바라봤다. 그런 사마택을 향해 아삼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정훈이라는 놈이 아이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동자공이었더냐? 하긴, 이곳으로 오기 전에 네놈도 배웠다는 말은 얼핏 들었던 것 같다. 성취를 보이지 못 했다고 하던데……"

    말끝을 흐리던 사마택이 천장의 한쪽 구석을 바라보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아삼을 바라보던 사마택이 다시 한 번 그를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필사를 하라고 데려왔던 놈이 그 시간에 정좌를 하고 무공을 익히고 있었더냐? 내 이번 한 번만은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부터는 그냥 좌시하지만은 않겠다. 알아들었느냐? 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필사만 허락한다. 함부로 비급을 익힌다면 경을 칠 것이야."

    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마택을 향해 아삼이 길게 읍하였다. 그 모습에도 냉랭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사마택이 무고를 빠져나갔다. 사마택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아삼이었다.

    '천장을 주시하던 사마택이었어. 분명히 나를 감시하는 놈이 있다는 뜻이겠지?'

    일부러 그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던 아삼은 감시하고 있다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조금 더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기운이 단전에 쌓였지만 귀신같이 알아내는 사마택의 행동에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그저 게을러 보이는 환관인 줄로만 알았던 사마택이었지만 알고보니 엄청난 고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대로는 힘들겠어. 이제보니 엄청난 고수였잖아? 저 놈의 무공이 만만치 않아. 언제가는 들킬거야. 먼저 기운을 감추는 것부터 중점적으로 익혀야겠어. 그래야만 다른 비급들도 수월하게 익힐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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