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20화 (2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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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궁에서

    며칠 동안 환관이 될 소양을 갖추기 위한 훈육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며칠 뒤, 새벽부터 깨우는 훈육 환관들의 목소리에 아이들이 졸린 눈을 비비면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얼 그리 꾸물대는 것이냐? 빨리 빨리 나오지 못할까?"

    재촉하는 환관들의 목소리에 굼뜨던 아이들의 행동도 재빨라졌다. 그 속에는 아삼도 끼어있었는데 이런 단체생활은 이미 익숙한 그였다. 지난 생에서 2년이 넘는 기간을 군대라는 곳에서 보냈던 아삼이었다. 이럴 때 늦으면 더 큰 화가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삼이 재빨리 처소 밖으로 뛰쳐나갔다.

    맨 처음으로 튀어나오는 아삼을 본 정태감의 눈이 빛났다.

    보면 볼수록 끌리는 아이였다.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라는 점도 그렇고 그 까탈스러운 사마택에게서 용하게도 필사를 허락받은 것도 쉽지 않았을 일이었을 테지만 아무런 탈 없이 소임을 다했던 아이였다.

    그런 아삼을 바라보는 정태감의 눈에는 탐욕이라는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양자라는 것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을 가진 적이 없던 그였지만 지금 그 단어를 떠올리는 정훈이었다.

    "다들 모였느냐? 오늘부터 너희가 이 황궁을 청소할 것이다. 지금부터 환관들이 각자 청소할 구역을 나누어 줄 것이니 다들 맡은 구역을 깨끗이 하도록 하여라."

    말을 마친 정태감이 뒤에 서 있는 훈육 환관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환관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럼 지금부터 호명한 아이들은 앞으로 나서거라. 방태옥, 팽인학, 장소삼, 양하경, 임소린. 너희들은 태화전을 청소하도록 하여라. 태화전은 황상께서 매일 조회를 하는 곳이니 한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예."

    길게 읍한 아이들이 훈육 환관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고 나머지 아이들에게도 각자 청소할 구역이 정해졌다.

    하지만 단 한 아이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호명되지 못한 아이는 바로 아삼이었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멍하니 서있는 아삼을 정태감이 손짓으로 불렀다.

    "넌 가서 지금부터 황궁무고로 가서 사태감을 찾아가거라. 그에게 가서 심법을 필사해 오도록 하거라."

    정태감의 명에 아삼이 황궁무고로 발걸음을 돌렸다.

    자금성 구석구석에서 사그락거리는 비질소리가 귓속을 간지럽혔다. 어두운 새벽을 깨우는 비질소리와 어둠을 밝히는 홍등을 보고 옛 분위기에 취해 걷던 아삼의 발걸음이 멈춰섰다. 자신의 앞에 길게 드리우는 거대한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란 아삼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자, 언제 다가왔는지 처음보는 환관 하나가 자신을 매섭게 내려보고 있었다.

    "네놈은 청소를 하지 않고 어디로 내빼는 것이냐? 다른 아이들이 청소를 하고 있는 모습은 안 보이는 게냐?"

    "……."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이냐? 어찌 대답이 없느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빤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삼의 태도에 화가 난 환관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대답하지 못하는 아삼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매번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그래도 이놈이!"

    결국 참지 못한 환관의 손이 머리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송상호가 그를 막아서며 아삼을 두둔하기 위해 나섰다.

    "태감 나리, 이 아이는 벙어리라 말을 하지 못하옵니다. 그리고 정태감……님의 분부로 다른 일을 하러 가는 중이옵니다."

    송상호의 말에 환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정태감이라는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지만 이내 못마땅한 얼굴로 아삼을 노려보더니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떴다.

    "그만 가 봐. 늦으면 경을 칠지도 모르니까."

    송상호가 아삼을 향해서 환히 웃어보였다.

    송상호란 아이도 그렇고 방태옥이란 아이고 그렇고 왜 다들 자신을 향해 저런 웃음을 지어보이는 것인지 의문이 생긴 아삼은 머리가 아파왔다. 딴에는 호의를 보이면서 웃어보이는 아이들이었지만 그 속에 깔린 의도는 너무나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순수하다고 볼 수 없는 웃음에 찝찝해하던 그가 고맙다는 듯이 한 번 웃어 보이면서 급히 걸음을 옮겼다.

    뭔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행동 하나 하나도 소홀이 넘겨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에 어색한 아이들의 몸짓은 조심해라는 경고로 들려왔다.

    멀어져가는 아삼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서 있던 송상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아삼이란 저 아이를 필두로 연고 없는 아이들을 한둘 씩 모으다보면 어젯밤 몰래 전해받은 명을 이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호의를 베풀면서 다가가면 언젠가는 자신이 내밀 손을 잡아줄 것이고 자신의 능력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송상호였다.

    허나 그런 생각을 가진 아이는 송상호 혼자가 아니었다. 동창 내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세력을 가지려는 각 문파들과 권력자들의 움직임이 벌써부터 분주했다. 그리고 그들의 명을 받은 아이들의 움직임도 덩달아 분주해졌다.

    빠른 시간에 맞이한 아침은 청소로 시작되었고 해가 뜨기 전인 묘시 사이에는 심법을 수련하기 위해서 넓은 공터에 어린 아이들이 앉아있었다.

    동자공이라는 심법을 수련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사뭇 진지해보였고, 그 사이사이에 끼어든 환관들의 모습도 진지했다. 이전에 훈육을 담당했던 환관과는 다른 자들이었는데 하나같이 태양혈이 조금씩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보면 상당한 내공을 수련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심법을 접하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환관들은 아이들을 가르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공을 배운 환관들을 따로 엄선해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만든 것이었다. 그렇다고 정태감의 지위가 변하지는 않았다. 황후의 측근인 부례감 유현의 힘으로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그였다.

    벌써 한 달이 훌쩍 넘게 이어지는 과정이었지만 아직까지 기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은 상당히 많았다. 그 중에는 예상외의 아이가 끼어있었는데 바로 아삼이었다. 필사를 맡았던 아삼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뒤늦게 수련에 참가하게 되었다.

    비록 며칠 차이였지만 그 차이가 다른 아이들과의 격차를 벌어지게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무공이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서 살았던 그인지라 주변에 떠도는 기를 느끼는 것도 힘들어했다.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팽명민의 신법과 초식을 보면서 무공이라는 것의 존재를 알게 된 아삼이었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에 대한 믿음은 깔려있지 않았고 그 상태에서 이어지는 심법이 제대로 된 성취를 가져다 줄리가 만무했다.

    같은 방을 사용하고 있는 아이들에 비해서 아직까지 '기'라는 것을 느끼지도 못한 아삼의 얼굴은 좋지 못했고 집중을 하기도 어려웠다. 의문이 생기는 것을 물어보고 싶어도 말을 하지 못하는 그로써는 답답할 뿐이었다.

    다른 아이들을 따라가지 못한 채 그저 자리에 앉아서 흉내내기에 바쁜 아삼을 한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정태감이었다. 무공에 대해서 모르는 그였지만 지위상으로는 고수라고 불리는 환관의 윗줄에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이들의 상태에 관해서는 매일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전까지 호감을 보였던 아삼의 평을 듣는 순간 그 호감은 산산이 부서졌다.

    '꽤 괜찮은 아이인 줄 알았는데…… 영 시원찮구만.'

    집중을 하지 못하던 아삼이 그의 눈빛을 알아채고 더욱더 진득하니 앉아있었지만 달라진 마음가짐으로도 그 간극을 메울 수는 없었다. 앞선 아이들은 벌써부터 단전에 기를 모으면서 심법을 수련하는데 정작 그는 기라는 것조차 느끼지 못 한 상태였다.

    스스로도 답답해하면서 수련이 끝나고도 힘없이 앉아 있는 아삼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다가온 이인학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훗, 반푼이였구나. 너 같은 놈을 호적수로 여겼던 내가 한심스럽군."

    거만한 태도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인학의 얼굴에 아삼의 얼굴이 구겨졌다. 역시나 첫인상은 쉬이 바뀌지 않은 것 같았다. 괜히 어린아이의 치기어린 행동에 맞장구를 쳐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어지는 다른 일과를 수행하기 위해서 처소로 돌아가야만 했다. 아쉬운 마음에 처소로 들어가려는 그때, 훈육 환관 하나가 안으로 들어가려는 아삼을 불러 세웠다.

    "정태감께서 찾으신다. 얼른 채비를 하고 가 보거라."

    훈육 환관의 말에 처소로 들어간 아삼이 의복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섰다.

    '또 무슨 일이지? 그놈이 좋은 일로 부르는 것 같지는 않은데……'

    정태감이라는 놈이 부를 때마다 매번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을 안겨주었다. 정태감의 처소로 향하던 아삼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불렀는지 고민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단지 불안한 느낌에 머릿속이 복잡해질 뿐이었다.

    "너는 내일부터 황궁무고로 가게 될 것이다. 사마택의 요청도 있거니와 무공 쪽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 같구나. 명일부터 너는 계속 그곳으로 가도록 하거라. 처소도 따로 다시 배정해 줄 것이니 그렇게 알도록 하거라. 그만 나가보거라."

    뜬금없는 정태감의 하명에 아삼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이었기에 그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힘의 부재를 실감하는 아삼이었다.

    "왔느냐?"

    고개를 숙이며 읍하는 아삼을 건성으로 바라보던 사마택이 말했다. 그리고 아삼 쪽으로 책 한 권을 던져 놓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오늘은 그 책을 필사하도록 하여라. 내 노파심에 이른다만 그곳에만 필사를 해야 할 것이다. 행여나 다른 곳에 옮겨적는 다거나 안에 있는 비급에 손을 대려고 했다가는 그날로 네놈의 목숨은 없는 것이다. 알아듣겠느냐?"

    "……."

    엄한 표정으로 엄포를 놓은 사마택의 모습에 아삼이 길게 읍했다. 여전히 대답이 없는 아삼의 모습에 작게 인상을 찌푸린 사마택은 던져진 책을 조심스럽게 받아들면서 한자 한자 써내려가는 아삼의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봤다.

    '간단한 심법하나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아이니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겠지. 말까지 못하니 어떻게 보면 이 자리는 저 아이가 제격일터. 저 많은 것들을 언제 필사하나 했는데…… 그래도 저 놈이 들어왔으니 길할 징조구나. 하하하."

    한 동안 아삼을 바라보던 사마택이 또렷한 필체로 적어내려가는 아삼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전각을 나서면서 문을 닫았고 적막함만 가득한 무고에는 아삼만 홀로 남았다.

    '황궁무고라 앞으로 이곳에서 계속 지내야한다는 것인가?'

    놀리던 붓을 멈춘 아삼이 커다란 안을 둘러봤다. 온통 책과 죽간으로 가득 찬 그곳은 상당히 많은 책들이 즐비해있었다. 잠깐 허리를 펴면서 안으로 걸음을 내딛으려던 아삼은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이토록 중요한 곳에 감시하는 이가 하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 사마택이라는 자가 괜히 자리를 비운 것은 아닐테니…… 나를 시험하는 것인가?'

    움직임을 멈춘 아삼은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써내려가던 책을 다시 보고 있었다.

    어두운 천장 구석에서 그 모습을 살펴보던 인물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윽고 다시 필사를 하는 아이의 모습에 검은색 야행복을 입고있던 복면인의 굳었던 얼굴이 다시 펴졌다. 비록 무고를 지키고 있지만 아직 어린 아이에게 살수를 펼치는 것은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제발 저 어린 환관에게 호기심이라는 감정이 찾아오지 않기만을 바라는 복면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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