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19화 (19/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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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궁에서

    기분나쁜 눈빛을 보인 정태감이 근처에 있는 또 다른 환관을 불러서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삼을 바라보는 눈빛은 절로 그의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었고 따로 불려간 환관도 아삼을 보면서 비열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무슨 꿍꿍이지 저 자식들은?'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아삼이었다. 하지만 일부러 내색할 필요는 없었다.

    모든 아이들이 수련에 임할 때 아삼은 자신을 부른 정태감의 앞에 공손히 섰다. 자신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흘릴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생각했었는데 이리 자신을 따로 부른 걸 보니 필시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자 받거라. 너는 이 비급을 받고서 사마택이라는 환관을 찾아가거라."

    "……."

    "여기에 있는 명태감이 너를 그에게 데려다 줄 것이다. 네가 할 일은 사마택을 도와서 이 비급을 필사하는 것이다. 그가 너에게 손찌검을 하거든 이 서찰을 내보여라. 그리고 꼭 그 사실을 내게 알려야 한다. 알겠느냐?"

    "……."

    "뭘 그리 멍청하게 서 있는 것이냐? 얼른 받아들지 않고."

    정태감의 호통에 정신이 번쩍 든 아삼이 재빨리 내밀던 비급을 받아들었다. 아직 힘이 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지금은 하라는 대로 해야만 별다른 탈이 없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명태감을 따라서 허둥지둥 나서는 아삼의 뒷모습에 정태감의 한 쪽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갔다.

    '사마택, 네놈의 성격이라면 저 아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테지. 급한 네놈의 성격이 네 명줄을 재촉할 것이다.'

    "뭣들 하는 게냐? 수련을 시작하지 않고?"

    정태감이 훈육 환관들을 향해 소리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환관들의 훈육이 시작되었다.

    "자, 지금부터 마보 자세를 취한다. 마보는 이렇게 양 다리를 어깨 너비만큼 벌리고 무릎을 굽힌다. 엉덩이는 무릎과 수평이 되어야 하고 그 상태로 버티는 거다. 알겠느냐? 그럼 다들 해 보거라."

    훈육 환관의 시범을 본 아이들이 마보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허리를 펴거라. 엉덩이와 무릎은 수평이 되어한다고 하지 않았더냐?"

    날카로운 훈육 환관들의 지적에 아이들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지적도 지적이거니와 자세를 취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런 아이들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정태감이었다.

    고개를 돌리면서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보는 정태감의 눈이 방태옥에게 향하였다. 흐트러짐 없이 마보를 하고 있는 모습에 만족한 듯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유공공이 뽑은 아이인데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당연하겠지."

    "아주 좋다. 이 아이처럼 흔들림이 없어야 할 것이다."

    훈육 환관의 칭찬에 이인학에 얼굴이 꿈틀거렸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려고 일부러 힘에 부치는 듯한 표정을 지어댔다. 이런 마보쯤이야 이미 팽가에서 넌덜머리가 날 만큼 수련한 것들이었다. 대략 한 식경은 버틸 수 있는 그였기에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뛰어날 수 밖에 없었다.

    멀리서 이인학 역시 놓치지 않고 주시하는 정태감이었다. 그리고 정태감의 눈에 편안한 얼굴로 마보를 취하고 있는 송창호와 몇몇 아이들의 모습도 들어왔다.

    '이거 생각보다 쓸만한 아이들이 꽤 많구나. 잘만 건진다면 유공공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군.'

    흐뭇한 모습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던 정태감이 조용히 주억거렸다.

    아삼은 정태감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명태감이라는 자를 따라서 내서당을 나서야 했다. 넓디넓은 자금성을 가로지르면서 경계가 삼엄한 곳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전각이 들어왔다. 그 전각을 지키는 금의위의 모습에 절로 침을 꿀꺽 삼킨 아삼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앞서던 명태감이 그에게 주의를 줬다.

    "함부로 눈을 돌리지 말거라. 자칫 오해를 사면 곤란해지는 것은 너 뿐만이 아니다."

    "……."

    "정 공공이 하셨던 말씀을 잘 기억해내고 그대로 따라야 할 것이야."

    명태감의 엄포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삼이었지만 우선은 상황을 봐서 판단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무장을 하고 있는 금의위를 힐끔 쳐다보면서 걸음을 옮기던 그는 웅장한 서체로 써있는 현판 앞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춰 설 수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그 현판을 바라보던 아삼의 눈이 커다래졌다.

    '황궁무고!'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황궁무고였다. 안에 기별을 하고 들어선 명태감이 커다란 덩치를 가진 한 환관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을 전했고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은지 큰 덩치의 환관은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사 공공. 그럼 저는 물러가보겠습니다."

    "…… 무슨 꿍꿍인지는 모르겠다면 네놈도 처신을 똑바로 해야 할 것이다. 정훈이라는 놈을 믿다가는 네놈 목숨도 그렇게 길지는 않을 게야."

    "……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럼."

    읍을하고 물러서는 명태감이라는 환관이 쭈뼛쭈뼛 서 있는 아삼에게 눈치를 건냈다. 그의 눈빛을 받은 아삼이 고개를 숙이면서 명태감이라는 자에게 읍을 하자 그 인사를 무시하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명태감이었다.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천천히 눈치를 살피던 아삼은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덩치 큰 환관에게 다가가서 또 다시 읍을 했다. 인사를 받은 자는 사태감이라고 불리는 사마택이었는데 정태감이라는 자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성격 또한 불같이 급하다고 알려진 자였다.

    "네놈은 누구냐?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것이냐?"

    "……."

    "허어. 참. 네가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

    "이놈이!"

    고리눈을 뜬 사태감이 솥뚜껑만한 손바닥을 치켜들면서 아삼을 향해 내리치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고 품에 감쳐둔 서찰을 꺼낸 아삼이 그의 앞에 가져다 댔다. 분명히 정태감이 한대를 얻어맞으면 보이라던 사찰이었지만 아삼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명을 따를 이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가 일반적인 10살의 아이라면 정태감이 무서워서라도 그의 명을 따랐겠지만 이미 쓴맛 단맛 다 봤던 그였다. 두루뭉술하게 넘겨도 될 일을 굳이 맞으면서 까지 따를 생각은 없었다.

    눈앞에 내밀어진 사찰을 확인한 사태감은 건네진 서찰을 펼쳐보고 눈을 빛냈다.

    "우선 나를 따라서 들어오거라."

    빽빽히 들어선 서고에서 오래된 책냄새가 퍼져 나왔다. 어쩐지 그 냄새가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것 같았고 무고라는 현판을 떠올린 아삼은 천천히 꽂혀진 책들을 둘러보았다. 누렇게 바랜 책부터 돌돌말린 죽간까지…… 이 세상의 책이란 책은 모두 이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 중 하나를 들어서 살피려던 아삼이 죽일듯이 노려보는 시선을 느끼고 급히 뻗은 손을 거둬들였다.

    "네놈 눈치가 목숨을 살렸다. 황궁에서 함부로 이것저것 들추다가는 금새 목이 달아날 것이다."

    "……."

    아무 말도 없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삼의 눈빛에 노려보던 사마택은 되려 당황했다. 단지 놀란 모습이었다. 여타의 다른 어린 환관 아이처럼 질겁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네놈은 누구냐?"

    "……."

    "누구냐고 묻질 않았더냐? 네놈이 대체 누구인데 정훈이 너를 믿고 비급을 필사하러 보냈느냐 이말이다."

    "……."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 아삼이었다. 아니 대답할 수 없는 아삼이었다. 그 모습에 답답해하던 사마택은 다시 손을 번쩍 들어올렸지만 서찰에 써진 글들을 되새기면서 화를 참아야 했다. 황상의 명으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입이 무거운 아이를 보낸다고 적힌 서찰에는 얍삽한 정훈 놈의 의도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마택의 호통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자리를 지키는 아삼이었다. 그 모습에 답답한 듯 사마택이 가슴을 두드리면서 어린 아이를 노려봤다.

    답답하긴 아삼도 마찬가지였다. 정태감이라는 놈이 분명히 뭔가를 꾸민 것 같았지만 정확히 그것을 알지 못 했다. 답답해하던 아삼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책상 위에 놓인 지필묵을 찾아냈다.

    "소인은 아삼이라 합니다. 송구하오나 소인이 벙어리라 답을 하지 못 합니다. 소인은 정태감의 심부름으로 비급의 필사를 허락 맡으러 왔습니다."

    아삼이 일필휘지로 내려 쓴 종이를 사마택에게 내밀었다. 종이를 받아 든 사마택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벙어리인 것도 놀랐지만 아삼의 필체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가 썼다고는 믿기 힘들만한 필체였다. 놀란 눈으로 아삼을 다시 바라보는 사마택이었다.

    "비급의 필사는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윗선에 보고를 해보고 답을 받을 터이니 너는 우선 돌아가보도록 해라."

    사마택의 말에 아삼이 읍을 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돌아선 아삼의 뒷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는 사마택이었다.

    '저렇게 어린 아이가 이런 필체를 지녔다니! 엄청난 명필이 아닌가? 아삼? 아삼이라……'

    깊은 생각에 잠겼던 사마택의 두 눈이 빛났다. 우선 곁에 두고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찌됐든 단 한명의 아이라도 끌어 들인다면 자신과 그가 모시는 상관에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혹여 두각을 나타낸다면 그때 양자로 삼아도 좋을 것 같았다.

    '이번에 들어온 아이라면 동창이라는 조직을 위해서 충원한 것이 틀림없겠군. 이런 필체에 벙어리라…… 우선 저 아이의 뒤를 조사해 봐야겠구나.'

    아삼이 쓴 종이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사마택이 생각을 마치고 아삼이 쓴 종이를 품에 넣었다. 전각의 문을 걸어 잠근 그가 한 곳을 바라보면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잠깐 자리를 비울 것이네. 누구도 들이지 말아야 할 것이네."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던 사마택은 급히 황궁무고를 빠져나갔다.

    황상의 명으로 남해로 대원정을 떠난 정화 태감의 최측근인 그였다. 영락제의 총애를 받던 정화 태감이 없는 틈을 타서 장인태감과 황후의 최측근이라고 알려진 부례감 유공공이 권력을 잡기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바빠진 그였다.

    이윽고 으슥한 곳에 도착한 그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뒤쫓는 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그의 몸에서 뻗쳐나온 은밀한 기운이 주위를 가득 메웠고 자신이 찾은 사람 이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 아삼이라는 아이의 뒤를 조사해 주시게.

    - 알겠습니다.

    - 송기득과 유현의 움직임도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이네. 정 공공이 돌아오시기 전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서는 아니 될 것이야.

    - 유념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 이번에 들어온 어린 환관들의 움직임도 놓치지 마시게. 이런 중차대한 일이 공공께서 안계신 때에 일어나다니…… 최대한 은밀히 움직여야 할 것이야.

    - 예.

    전음으로 대화를 마친 사마택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곳을 벗어났다.

    그가 떠나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한 인물이 급히 그곳을 벗어났다.

    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그자의 뒷모습은 사마택과 비슷한 환관의 복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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