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18화 (18/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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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궁에서

    어둠이 내려앉은 늦은 밤에 자신을 정태감이라고 밝혔던 환관이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은밀히 어딘가를 향해 걸어갔다. 이내 그의 발길이 멈춰진 곳은 자금성 내에 있는 제법 커보이는 전각 앞이었다. 종종걸음으로 발을 놀리던 정태감이 멈춰섰고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행동하던 그가 안으로 들어서면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유공공, 소인 정태감이옵니다."

    "들어오너라."

    굵고 낮은 목소리에 정태감이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늙은 환관일수록 목소리가 더 가늘어지고 몸은 더 비대해지는 게 정설이었지만 유공공이라는 환관은 다부진 체격에 목소리도 그렇지 않았다. 일부러 더 낮고 굵은 목소리를 내는 것 같았지만 괴팍한 성격은 다른 환관 못지않았다.

    화려해 보이는 방 안에는 노로한 환관이 하얗게 분칠을 한 얼굴을 하고서는 침상에 누워서 궁녀들의 안마를 받고 있었다. 나른한 표정으로 안마를 받으면서 고급스러워보이는 향을 피우고 있는 방에 들어선 정태감이 그 환관을 향해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침상에 누워서 궁녀들의 안마를 받는 사람은 황후마마를 모시는 환관 유현이었다.

    환관의 직책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진 환감은 바로 장인태감이었다.

    황제를 보필하는 이 환관은 궁 내에서 어지간한 문무대신들 보다도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례감에서 왕을 모시는 장인태감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이가 바로 정태감 앞에 있는 노로한 환관이었다.

    환궁이라는 거대한 곳에서 혼자 독불장군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황제가 유일했다. 황제를 제외한 사람은 그 누구라도 연줄을 대면서 거대한 세력을 만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고 정태감 역시 다른 이들과 큰 차이는 없었다.

    어떻게해서든지 자신보다 큰 힘을 가진 자의 눈에 들어야만 했고, 그가 선택해서 부여잡은 줄은 장인태감과 대적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유현이었다. 황후의 총애를 받으면서 최측근으로 알려진 그인지라 장인태감을 제외하면 환관의 정점에 서 있다고 부를 수 있는 자였다. 물론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환관이 한 명 더 있었지만 지금 그자는 궁에 없었다.

    그런 유현 앞에서 정중히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정태감은 이전에 아이들에게 보였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른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유현의 눈빛에 긴장한 듯이 마른침만 삼키고 있는 정태감이었다.

    "너희들은 그만 물러가 보거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앞깃을 여미던 유현이 안마를 하던 궁녀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궁녀들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면서 조심스럽게 방에서 멀어졌다.

    이윽고 궁녀들의 기척이 들리지 않자 아무런 말도 없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정태감을 보던 유훈이 얄팍한 입술을 들썩였다.

    "그래, 쓸만한 아이들은 있더냐?"

    "금일이 내서당에서 교육을 시키는 첫 날인지라 아직까지 눈에 확 들어오는 아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첫 날, 그 아이를 만났습니다."

    "그 아이? 그게 무슨 말이더냐?"

    "유공공께서 지난번에 언질을 주셨던…… 그 아이 말이옵니다."

    정태감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던 유현은 이어지는 말을 듣고 생각이 났는지 무릎을 치면서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태감이 더욱 몸을 숙이면서 그의 기분을 살폈다.

    "생각났다. 생각났어. 그 방……태옥이라는 아이 말이냐? 그래 그 아이는 어떻더냐?"

    "유공공께서 친히 언급하신 아이인데 말해 무엇하겠사옵니까? 눈에 총기도 가득하고 강단도 있는 것이 잘 교육한다면 유공공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은 없을 것 같사옵니다."

    정태감의 말을 듣던 유현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아이 뿐이더냐? 다른 아이는 눈에 띠지 않더냐? 꽤나 많은 곳에서 자기 사람을 심었을 터인데……?"

    "팽문호의 양자로 들어온 팽인학이란 아이가 있사온데 그 아이 역시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영민한 모습을 보였사옵니다."

    "팽인학이라? 하하하. 천하의 팽문호도 어쩔 수가 없구나. 황상의 한 마디에 양자까지 들인 것을 보면…… 부러질 것 같던 무인의 자존심도 황상의 명에는 어쩔 수 없었을 테지. "

    "그리고……"

    "또 영특한 아이가 있더냐?"

    유훈의 물음에 잠깐 망설이던 정태감이 오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서 한 아이를 생각해냈다. 영특함이라던지 특출한 모습은 없었지만 그 많은 아이들과는 다른 한가지를 떠올린 그가 내친김에 말을 이어갔다.

    "아삼이라는 아이가 있사온데…… 특이하게도 벙어리이옵니다."

    "벙어리? 벙어리라?"

    "……."

    "벙어리에 환관이라? 벙어리라면 일을 도모하는데 더 수월할 것 아니냐? 적어도 입을 놀려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니 그 아이도 주시해 보도록 하거라."

    "예. 유공공."

    "장인태감 쪽에 눈치가 이상하니, 되도록이면 걸음을 자제해야 할 것이다."

    "예. 유공공. 조심 또 조심하겠사옵니다."

    정태감이 고개를 숙이면서 길게 읍을 하자 내려다보던 유현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제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동창이라는 조직은 우리 환관들에게는 손을 들고 반길만한 일이다. 허나, 지금 동창에 배속되어 있는 아이들보다는 앞으로 들어갈 아이들이 더 큰 힘이 될 것이야. 어차피 지금 배속된 아이들이 할 일은 기틀만 다지는 것뿐이다. 무공까지 배운 아이들이 진정한 동창의 동량이 될 것이니 크게 신경쓰거라."

    "예. 유공공."

    "내서당에서 가르치는 아이들 하나하나를 잘 살펴야 할 것이다. 그 아이들이 나중에 동창의 주역이 될 아이들이라는 것은 다시 한 번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을 터. 내 말하지 않아도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능력있는 아이들을 우리 쪽으로 포섭해 놔야 황후마마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네놈이 가진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보거라. 허면 네 앞길은 탄탄대로일 것이다."

    유훈의 마지막 말에 머리를 조아리던 정태감의 얼굴이 밝아졌다. 비열한 미소를 짓던 그가 금새 얼굴색을 바뀌면서 다시 한 번 읍을 했다.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정태감의 모습에 유훈이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앞에 있는 이 환관의 눈썰미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장인태감을 대신해서 자신의 밑에 들어온 것만 하더라고 칭찬해 줄 만한 일이었다.

    황궁에서 환관으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모시는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환관의 권력도 달라지는 법이었고 황후에게 기탁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유훈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황궁에서 황후의 권위를 세워주는 게 자신의 권력을 세우는 법이라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였다.

    황상의 눈이 동창으로 옮겨진 지금, 어떻게든 동창에 들어갈 아이를 하나라도 더 포섭해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놔야 후일을 대비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아는 유훈이었다.

    동창이라는 조직은 황제의 손과 발이 될 환관들로만 구성될 조직이었다.

    직접 황제의 명을 받아 사건을 처리하는 그 조직은 가지고 있는 권한부터 금의위를 상회하고 있었다. 이 곳을 장악해야 자신이 모시고 있는 분에게 큰 힘이 될 것이었다.

    비단, 황후 쪽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권력을 가진 모든 사람들과 그들과 엮인 많은 세력들이 드러나지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황궁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새롭게 떠오르는 동창이라는 관제와 그곳을 채울 환관들을 위해서 분주히 움직였다. 황궁에 있는 무고를 점검해서 적당한 무공을 찾아내고 어린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각 문파에 인원을 착출했다.

    동창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을 모았으며 황궁에 물품을 대는 상인들도 그 흐름을 읽으면서 이득을 쫓았다.

    황제의 손과 발이 될 새로운 관제의 창설은 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서 그렇게 진행되어 갔다.

    동자공.

    동자공은 일반적인 내공심법보다 빠르게 배울 수 있으면서도 육체나 정신에 다른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심법으로 잘 알려져있다. 쌓아올린 내공이 비교적 순수한 편에 속하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펼쳐내는 무공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내용이었다.

    겉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 내공심법은 엄청난 단점이 존재했는데 바로 동정이 깨지는 순간 쌓아왔던 내공이 모조리 상실한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자공이라는 내공심법이 사장되지 않는 것은 그만큼 빠른 속도로 내력을 모을 수 있었고 적은 내력으로도 엄청난 위력을 낼 수 있는 내공을 쌓아올릴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동자공에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자들은 바로 성을 잃어버린 남자들이었다. 바로 환관들이었지만 이들도 쉽사리 동자공이라는 내공심법을 배우지 못 했다. 그 이유는 빠르게 쌓아지는 양기의 내공들 때문이었다.

    극양의 기운이 쌓이면서 선이 굵어지고 남성의 특징이 더 잘 나타나기 때문에 궁녀들과 함께 생활하는 환관들은 되도록이면 이런 내공심법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필요에 의해서나, 궁 내에서 상당한 위치에 오른 환관들은 몰래 이런 내공을 수련하곤 했다.

    물론 늦은 나이에 쌓아올린 공력은 효율적이지 못했고 그 동안 쌓았던 음기 때문에 별다른 이상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위력을 나타내는 자들이 더러 존재했다.

    "앞으로 너희들이 배울 무공의 근간이 될 것이다. 바로 내공심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몸과 마음을 바로잡아 줄 것이다."

    앞에 나선 정태감의 말에 몇몇 아이들의 눈이 빛났다. 쉽게 구할 수 없는 내공심법을 배운다는 사실이 그들을 들뜨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황궁에서 동창이 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심법이라면 보통의 것이 아니라고 판단이 되었다.

    아삼 역시 그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타인의 의지로 황궁까지 들어오게 된 상황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힘의 부재였기 때문이다. 그 동안 지금의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그는, 지금 시대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바로 무공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동자공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우리 같은 환관들은 배울 수가 없지만 아직 어린 너희들은 황제폐하의 성은으로 특별히 사사받았으니 그 은혜가 하해와도 같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아이들의 가녀린 음성에 흡족하게 웃던 정태감은 들고있던 비급을 바라봤다. 하지만 무공에는 문외한이었던 그였기에 딱히 가르칠 방법이 없었다. 같이 나와있던 다른 태감들도 그와는 비슷한 사정이었다.

    '흐음. 뭐라도 해야 할 터인데…… 아직 준비가 덜 되었구나. 내공은 빨리 입문을 해야 그 효과가 좋다고 하던데.'

    잠깐 고민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허투루 시간을 낭비한다면 그 과는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었고 어떻게 해서든 변명거리라도 만들어서 자신의 과오를 줄여야만 했다.

    그 때, 자신의 손에 든 비급을 보고 한가지 사실을 떠올린 그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아래에 있는 환관을 바라봤다.

    "비급은 이것밖에 없는 것이더냐?"

    "그…… 그게. 무공비급이라서 교서관에서도 필사를 하지 못한다 합니다. 황궁무고에 배속되어있는 사 공공에게 가져가 보았으나 이미 맡은 일이 있다고 하여……"

    "사마택 그놈이 직접 그러했더냐?"

    "예. 사 공공이 직접 물리셨습니다."

    태감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던 정태감은 잠시 고심을 하더니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 아이들을 바라봤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본 정태감이 말을 이어갔다.

    "비급이 부족한 관계로 제대로 된 교육을 이어갈 수가 없겠다. 대신에 우선 체력을 단련할 것이다. 그에 앞서서 천자문을 뗀 아이들은 우측으로 나서거라."

    정태감의 말에 우측으로 빠지는 아이들이었다. 그 수가 꽤나 많았지만 그 아이들 중에서 아삼을 바라본 정태감의 눈이 빛났다.

    '사마택 그놈에게 저 놈을 보낸다면 함부로 내치지는 못 하겠지. 황상의 명을 덧붙인다면? 이번 일은 황제폐하의 명과 무관하지는 않을 터. 하하하. 좋구나.'

    앙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마택이 답답해 할 모습을 생각한 정태감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면서 기분 나쁜 웃음을 짓는 정태감의 모습에 굳어지는 아삼이었다.

    '저 자식은 왜 나를 보면서 웃는 거지?

    환생이라는 것을 거치면서 다시 살아난 아삼의 의지와는 무관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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