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15화 (15/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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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정

    어두운 방안에 홀로 앉아있던 팽명민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일렁이는 초롱불이 굵은 선을 가진 그의 얼굴을 비췄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표정이 드러났다.

    자신의 사람으로 품으라는 팽문호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아직까지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말이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얻고 싶다고 하더라도 쉽게 얻을 수 있을만한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막히는 초식이나 무공이 있다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을 하면 뛰어넘을 수도 있을 테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도무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팽명민의 눈이 허공을 향했다.

    "거기 있느냐?"

    허공에 대고 말하는 팽명민의 부름에 검은 야행복을 입은 사내 한명이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내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인학이라는 아이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라. 아무도 몰라야 할 것이다."

    팽명민의 하명에 부복하던 사내가 다시 모습을 감췄고 잠시 후, 인학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팽명민의 방 앞에 섰다. 들어오라는 팽명민의 목소리에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선 그가 앉아있는 팽명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일단 거기에 앉도록 해라."

    팽명민이 가리킨 자리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인학이 조심스럽게 앉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팽명민이 아직까지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이인학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유심히 바라봤다.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팽명민의 눈빛을 느낀 이인학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그래 훈련은 받을 만 하더냐?"

    "예. 최선을 다 하고 있사옵니다."

    "네 생각에는 너희 세 명 중에서 누가 팽가의 양자라는 자리에 가장 어울린다고 보느냐?"

    갑작스런 팽명민의 물음에 이인학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걸 묻는 것인지 또 자신은 뭐라고 답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는 그저 무난한 답을 내 놓았다.

    "제가 어찌…… 과정을 지켜보셨던 분들께서 알아서 잘 판단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짐짓 겸손을 떨며 대답하는 이인학의 태도에 가만히 듣고 있던 팽명민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흘렀다. 입은 거짓을 말해도 눈은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인학의 눈 속에서 흐르는 야망을 읽어낸 팽명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원하는 걸 내주어야 하는 법이었다. 어찌보면 세 아이 중 이인학의 환심을 사는 것이 제일 쉬울 것도 같았다.

    "내가 듣기로 너는 자진해서 거세를 했다지? 그 연유가 무엇이냐?"

    "저는 단지 팽가에서 원하는 사람이 되고자 했습니다. 배는 곯지 않을 것 같았기에……"

    "훗, 팽가에서 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배를 곯기 싫었다라…… 스스로 복수를 꿈꾸고 있는 게 아니더냐?"

    정곡을 찌르는 팽명민의 말에 이인학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네가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를 지냈던 이인후 대감의 손이라 들었다. 그리고 너희 가문은 적대적인 자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다 들었는데 맞느냐?"

    팽명민의 말에 이인학이 두 입술을 앙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팽가의 양자가 되어서 환관으로 궁에 들어간다 한들 네 힘만으로 그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 것 같더냐? 무릇 복수를 하려면 상대방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고작 환관 나부랭이가 천하의 이인후 대감을 변방으로 몰아넣은 자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허면 어찌…… 제게 그런 말을 해주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소심하던 태도를 보였던 이인학이 그 모습을 버리고 대찬 모습을 보였다. 그제서야 본 모습을 드러내는 이인학의 태도에 실소를 터뜨리던 팽명민이 그의 얼굴에 바짝 다가가면서 은밀히 속삭였다.

    "나와 거래를 해보지 않겠느냐?"

    갑작스런 팽명민의 제안에 깜짝 놀라 이인학이 그를 바라봤다.

    '갑자기 거래라고? 무슨 속뜻이 숨어있는 건가? 어떻게 하지?'

    혼란스러워하던 이인학의 두 눈동자에 막연한 두려움이 어렸다. 그리고 그런 이인학을 바라보던 팽명민은 그의 마음을 돌아서게 만들 결정적인 말을 내뱉었다.

    "내가 너를 팽가의 양자로 만들어 주마. 허면 너는 팽가를 위해 일해다오. 네가 팽가를 위해 충성을 한다면 우리 팽가는 너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겠다. 그리고 훗날 네 가문을 위한 복수도 모른 척 하지는 않을 것이다."

    "……."

    "어쩌겠느냐? 나와…… 아니 팽가와 거래를 하겠느냐?"

    팽명민의 제안에 이인학의 두 눈이 반짝였다. 아무 말도 없이 잠깐 고민하던 그 아이는 이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네가 할 일은 차차 가르쳐줄 것이다. 일단은 우리 가문에 충성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다른 마음을 품어도 상관은 없다. 다만, 그 마음을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살기어린 팽명민의 말에 덜덜 떨던 이인학은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다짐을 하면서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팽가의 소가주라는 팽명민의 존재가 그에게 확실히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방으로 돌아가는 인학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지어졌다.

    이인학이 돌아가고 난 후, 팽명민이 다시 그 사내를 불렀다.

    "이번에는 황세웅을 데리고 들어오너라."

    잠시 후, 황세웅이 쭈뼛거리면서 방으로 들어섰다. 이인학과 다르지 않는 태도에 씁쓸한 미소를 짓던 팽명민은 이어지는 그의 행동에 눈빛을 빛냈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거기 앉거라."

    팽명민이 권한 자리에 앉은 황세웅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큰 소리로 물었다. 제법 자신감에 찬 그의 목소리였다. 확실히 이인학과는 다른 태도였다.

    "이 시각에 무슨 일이옵니까?"

    "하하하. 늦은 시간에 불러서 내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무슨 일이신지 모르겠지만 괘념치 마시고 편히 말씀하십시오."

    황세웅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환히 웃어보였다.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팽명민이었다.

    "너는 누가 팽가의 양자가 될 것 같으냐?"

    팽명민의 물음에 황세웅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글쎄요? 훈련 결과로 보면 아마도 아삼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삼이라……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흐음… 저는 무(武)에서는 다른 아이들보다 자신이 있지만 아무래도 문(文)은 약하고, 얼음땡이…… 아니 인학이 그 놈은 문(文)은 잘 하지만 무(武)는 영…… 아삼은 둘 다 소질을 보이니 아무래도 아삼이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허면…… 너는 양자라는 자리에 욕심이 없는 것이냐?"

    다시 되묻는 팽명민의 물음에 황세웅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저도…… 되고 싶습니다. 허나……"

    자신이 되고 싶다하여 쉽게 될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는 황세웅이었다. 세상은 원한다하여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니질 않는가? 원한대로 됐다면 자신 또한 이리 떠돌지 않았을 것이었다. 때로는 포기하는 게 편할 때도 있다는 것을 미리 깨달은 황세웅이었다.

    "너는 이곳에 어찌 오게 된 것이냐?"

    딱딱한 어투로 묻는 팽명민이었지만 그 눈빛 속에는 애처로움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물음에 답을 하지 않던 황세웅은 아무런 말도 없이 깊은 한숨을 토해낼 뿐이었다.

    "아무리 어미가 기생이라고 하나 너도 황보세가의 핏줄이 아니더냐? 널 이리 만든 당가가 원망스럽지 않느냐?"

    "어떻게?"

    "……."

    경악한 표정으로 팽명민을 바라보던 황세웅은 이내 고개를 떨궜다. 팽가라는 곳에서 자신의 뒤를 조사했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스스로 못난 머리를 탓하던 그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어갔다.

    "당연히 원망스럽습니다. 그래서 꼭 그 당가 년에게는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원통하다는 듯이 입술을 깨무는 황세웅을 보면서 팽명민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 아이처럼 우직한 아이는 오히려 감성적으로 다가가는 게 마음을 얻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처지에 공감하고 힘을 준다면 필히 마음을 열고 다가올 것이라고 확신하던 그였지만 어쩐지 계산적으로 다가서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다.

    "내 너를 팽가의 양자로 삼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소가주인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구나. 허나 널 버리진 않을 것이다. 아버님께 이야기해 너를 금의위로 삼아달라고 청할 것이다. 네 한을 풀 수 있도록 도와주마."

    팽명민이 황세웅의 손을 꼭 잡으면서 다짐하듯이 말을 건네자 손을 잡힌 황세웅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들었다. 애써 눈물을 참아내던 그가 감격하다는 듯이 팽명민을 바라봤다.

    "이리 마음을 써주시니 감사합니다. 베풀어 주신 은혜는 잊지 않고 꼭 보답하겠습니다."

    황세웅의 눈빛에 팽명민의 마음이 흡족해졌다.

    '이렇게 저 아이의 마음도 얻어진 것일까? 웬지 씁쓸하구나. 하아.'

    돌아서면서도 자신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는 황세웅의 모습에 웃고 있던 팽명민은 그가 방을 나서자마자 씁쓸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가문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지만 황세웅이나 아삼이라는 아이와는 아무런 계산 없이 그냥 순수하게 마음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황세웅이 돌아간 후 팽명민은 다시 한 번 고뇌에 빠졌다. 이제 남은 아이는 아삼이다. 그리고 아삼이라는 아이는 가주인 아버지마저도 알 수 없다고 판단을 했기 때문에 더 어려워하는 그였다.

    '내가 그 아이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그 아삼이라는 아이가 뭘 원하는 지 도무지 알 수 없던 팽명민이었다. 이인학이나 황세웅처럼 복수를 꿈꾸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이인학처럼 야망을 드러내지도 황세웅처럼 우직하지도 않은 아삼은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지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삼의 눈에서는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던 팽명민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더 멀어질 뿐이었다. 그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차라리 후일을 도모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모든 수련이 끝나고 세 아이가 가주전에 모였다. 그런 아이들을 가주인 팽문호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려 보고 있었다.

    "모두들 힘든 훈련을 받느라 애썼다. 다들 열심히 해 줬더구나."

    팽문호의 말에 세 아이들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부터 누가 이 팽가의 양자가 될 것인지 발표하겠다."

    팽문호가 팽명민을 향해 눈짓을 했다. 그러자 팽명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 아이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팽가의 양자는 이인학으로 삼을 것이다. 이제부터 인학은 팽인학으로 부를 것이다."

    팽명민의 말에 인학의 입가에 만족한 듯 미소가 지어졌다. 무엇보다도 아삼이라는 아이를 누르고 자신이 팽가의 양자에 올랐다는 사실이 기뻤다. 아직도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두 아이들 돌아보던 인학은 무표정하게 서있는 아삼을 보면서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봤느냐? 이게 네 놈과 나의 차이이니라. 크크크.'

    기뻐하던 인학의 모습에 팽명민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쩔 수 없이 인학을 선택해야 했지만 스스로는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인학이 한껏 우쭐해하면서 아삼을 바라봤다. 그의 입가에 지어진 비열한 미소를 본 아삼이었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이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인가? 다른 곳은 어떨까?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여행이라는 것을 해볼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기대에 차있던 아삼이었지만 이어지는 팽문호의 말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그였다.

    "약속대로 나머지 두 아이에게도 기회는 주겠다. 황세웅은 금의위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아삼은 황궁으로 들어가 환관으로 인학을 도와줘야 할 것이다."

    팽문호의 말을 들은 아삼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조아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 결정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그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다짐이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힘. 힘이 없구나. 나에게는 저 말을 거부할 힘이 없어!'

    속으로 화를 참던 그는 다시 한 번 힘이라는 것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그리고 꼭 그 힘을 얻으리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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