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14화 (14/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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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정

    팽가의 양자를 뽑기 위한 수련도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제 세 아이들 중에서 누구를 가주의 양자로 삼을 것인지 정하는 일만 남았다. 물론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를 선택해야겠지만 그것만으로 양자를 택하기에는 복잡한 사정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복잡한 문제들 중에서 하나가 바로 장로들의 존재였다.

    황궁으로 보내질 아이를 뽑기 위한 중요한 논의하기 위해서 늦은 밤, 가주전에 가주와 소가주 그리고 장로들이 모여들었다.

    "다시 한 번 회의를 주최한 까닭은 아시다시피 양자로 삼을 아이를 정하기 위함입니다. 여러 중진들과 장로님들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팽문호의 말이 끝나자 조용하던 방 안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고 가문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사항이었지만 자신있게 앞으로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대장로인 팽철명이 팽문호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물어왔다.

    "가주, 가주의 생각은 어떻소? 어떤 아이가 합당하다고 생각하시오? 의중을 알 수 있겠소?"

    "허허허, 이 자리는 팽가를 이끄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보고자 하는 자립니다. 저는 그저 장로님들의 고견을 듣고 싶은 것뿐이니, 제 눈치 보지 마시고 자유롭게 말씀들을 해 보세요."

    너털웃음을 흘리던 팽문호가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보기좋은 웃음을 짓고있는 팽문호를 잘 알고 있었다.

    무림에서도 높은 위명이 있는 무인이었지만 동시에 정삼품직의 동지(同知)인 팽문호였다. 무림도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었지만 조정 또한 그렇게 만만한 곳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무림이라는 곳은 힘의 논리가 지배되는 단순한 곳이었지만, 권력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황궁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팽문호가 권력의 정점인 금의위에서 동지라는 자리에 오르기까지도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온갖 술수와 권모 그리고 모략이 수없이 펼쳐지는 곳이 조정이었고 어제 함께 웃었던 동료가 오늘은 적이 된 적도 수없이 많았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발목을 잡아서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곳이 황궁이었다.

    정치는 웃음 속에 감추라는 말이 있었다. 자신과 생각이 같다고 해서 입 밖으로 쉬이 꺼내서도 안 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얼굴에 나타내서도 안 되었다. 그저 웃음 속에 자신의 의중을 감추고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 그것이 팽문호가 조정에서 살아남으면서 뼛속 깊이 새긴 내용이었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팽문호였고, 그가 가문을 반석 위에 올린 사실을 잘 아는 장로들이었다.

    "가주,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세 아이들 중에서도 이인학이라는 아이가 팽가의 사람으로 가장 합당하다 생각합니다. 학식도 가장 뛰어나고 또한 무공 수련에서도 뛰어난 집중력을 발휘한다는 그런 아이라면 잘해낼 거라고 사료됩니다. 또한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를 지냈던 이인후 대감의 손이라고 하니 그 영민함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장로 중의 수장격인 작은 아버지 팽철명의 말에 팽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나 소인은 그 점이 마음에 걸리옵니다. 그 아인 필히 자신의 가문을 위해 복수하려 할 터인데 과연 팽가의 수족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장로 중 한 명이 심각한 얼굴로 팽명철의 말에 반론을 하며 나섰다.

    "그렇다면 자네는 누가 합당하다고 생각 하시는가?"

    "저는 황세웅이라는 아이가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가주께서 조정의 녹을 먹고 있다고는 하나 무릇 팽가는 오대세가(五大世家)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무가에서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바로 무(武)입니다. 그 아이의 근골이 팽가라고 칭하기에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근골로 보나 무공 실력으로 보나 그 아이만큼 합당한 아이는 없다 사료됩니다."

    "허나 그 아이는…… 학식이 너무 얕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아무리 무공에 대한 자질이 다른 아이들보다 높고 수련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하나 그래도 궁으로 보내질 아이가 아닙니까? 궁이란 곳이 어떤 곳입니까? 봐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 궁에서 살아남으려면 비상하진 않아도 제 몸 하나 건사할 정도의 머리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 영민한 아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직하지 않습니까? 한번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면 쉬이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황세웅을 지지하는 장로의 말에 다른 장로가 맞장구를 치면서 말을 이어갔다.

    "맞습니다. 자고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 했습니다. 하오나 지금 우리 상황이 상황인지라 꼭 거둬야한다면…… 황세웅이라는 아이처럼 우직한 아이가 적당할 것입니다. 이인학이라는 아이는 영민하다고는 하나 제가 볼 때는 그 영민함이 두렵습니다. 혹여 그 아이가 팽가를 등진다면 그 영민함이 우리에게 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직한 게 다는 아니지요. 아무리 팽가가 뒤를 받쳐준다고 하나, 궁으로 들어가면 자신의 입지는 스스로가 알아서 다져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 팽가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안다 한들 매번 팽가가 도와줄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과연 황세웅이라는 아이가 잘 헤쳐나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한번 물꼬가 터지기 시작하자, 장로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아무 말도 없이 그 상황을 지켜보던 팽문호가 팽명민을 바라봤다. 장로들의 마음은 대략 두 사람으로 좁혀지는 것 같았다. 영민한 이인학과 우직한 황세웅. 하지만 그 누구도 아삼을 거론하는 사람은 없었다.

    "장로님들의 고견은 잘 들었습니다. 헌데 어찌 아삼이라는 아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거론하지 않는 겁니까?"

    의아해하는 가주의 태도에 장로 하나가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말했다.

    "그 아이는 출신도 미천하거니와…… 벙어리이지 않습니까? 출신이야 그렇다쳐도 궁으로 들어가면 팽가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할 터인데…… 그 아이가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그 장로의 말에 다른 장로들 역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벙어리라는 아삼은 팽가의 양자로 격이 떨어질 뿐더러 후일을 도모하기도 힘들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잘 알겠습니다. 여러 장로님들의 고견을 반영해서 소가주와 의논해 보겠습니다."

    장로들이 돌아간 가주전에는 팽문호와 팽명민이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생각에 잠긴 두 사람 사이에서는 고요한 침묵만이 흘렀고, 그 침묵을 깨고 팽문호가 팽명민을 향해 물었다.

    "그래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지금껏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으니 누가 제일 나을지는 네가 제일 잘 알 것 아니더냐?"

    "……황세웅이라는 아이는 우직하고 대범하여 다른 아이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듯 합니다. 이인학이라는 아이는 영민하기는 하나 그 됨됨이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삼이라는 아이는…… 솔직히 소자도 그 아이의 속을 잘 모르겠습니다."

    팽명민의 말에 팽문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뇌까렸다.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세 사람 중에 무(武)에서나 문(文)에서나 가장 두각을 나타낸 아이는 아삼이라는 아입니다. 그리고 이인학과 황세웅이라는 아이는 한 쪽으로 편향되어 있습니다. 한 쪽이 넘치면 다른 한 쪽이 부족합니다. 만약 황궁에서 환관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우선시 되는 것이 실력이라면 아삼이라는 아이가 가장 적합할 것 같습니다. 그 아이를 양자로 삼으심이 어떻겠습니까?"

    팽명민의 말에 팽문호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너도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더냐? 아삼이라는 아이는 그 속을 모르겠다고.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그 아일 양자로 삼기에는…… 흐음. 사람을 대할 때, 가장 껄꺼로운 사람이 누구인줄 아느냐? 바로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처음 그 아이를 봤을 때, 재밌다고 생각되었다. 수많은 사람을 봐왔던 나였지만 그런 아이는 처음이었다."

    "그런…… 아이라고 하심은?"

    "나조차도 그 아이의 속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이인학이라는 아이와 황세웅이라는 아이는 그 목적이 뚜렸했다. 복수와 출세. 특히 이인학이라는 아이는 출세욕 또한 남다르다고 여겼다. 스스로 용이라고 생각하는 토룡같은 아이다. 헌데 아삼이라는 그 아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 속을 알 수 없더구나. 10살 남짓의 아이가 보일 수 없는 침착함이라던지 수련과정에서 보이던 집중력…… 알 수 없는 아이다."

    "……."

    "아무래도 팽가의 사람으로, 환관으로 들이기엔 무리가 있는 것 같구나. 적어도 우리들 손 안에 두려면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허면 두 아이들 중에서 한 명을 꼽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아버님께서는 어떤 아이를 의중에 두고 계시는지요?"

    팽명민이 아버지의 얼굴을 살피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그리고 팽문호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에 눈을 번쩍 떴다.

    "이인학."

    "……."

    "팽가를 대신해야 하는 아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들어가야 할 곳은 다름아닌 황궁이다. 아무래도 궁에서는 권모술수에 능한 아이가 적당할 것 같구나. 이인학이라는 아이의 영민함과 눈치라면 능히 황궁에서 우리의 눈과 귀가 되어 줄 것이다."

    "하오면 나머지 두 아이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황세웅이라는 아이는 내 아래에 둘 것이다. 금의위에 자리를 마련할 생각이다."

    "금의위에 들인다는 말씀이십니까?"

    "황제 폐하께서 새로운 기구를 만든다고는 하나 아직은 금의위의 힘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그 아이의 근골이 아까워서라도 우리 팽가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팽문호의 말을 듣고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팽명민이었다.

    "그럼 아삼이라는 아이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그 아이도 환관으로 들일 것이다. 어차피 남성도 잃은 아이이니 환관으로 삼기에 적합할 것 같구나. 우리의 의중을 따를지는 모르겠지만 연락책으로는 써먹을 수는 있을 게다. 인학이라는 아이를 돕는 것도 좋을 듯 싶구나. 너는 그리 알고 있거라. 이제 황궁으로 가는 기간 동안 필요에 의해서라도 아이들과 친분을 가질 수 있도록 하거라."

    "……."

    "황제께서는 쉬이 무림의 힘을 풀어줄 분이 아니시다. 내 뒤를 이어서 팽가를 이끌려면…… 황궁에 연줄을 대기 위해서라도 그 아이들을 끌어안을 필요가 있다. 처음에 했던 말들을 잘 기억해야 할 것이야.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사람을 관리하는 일이다. 새겨듣도록 하거라."

    팽문호의 말을 들은 팽명민이 인사를 건네고 가주전을 빠져나왔다.

    '이인학이라는 아이를 양자로 들이신다고?…… 왜 하필 그 아이인지.'

    세 아이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였다.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만큼 높았고 가끔씩 드러나는 눈빛은 그 아이가 가진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만큼 속마음을 알기 쉬웠고 다루기도 쉬웠지만 끌리지는 않았다.

    자신과는 잘 맞지 않았다. 되려 황세웅이나 아삼이 더 끌리는 팽명민이었지만 가문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야만 했다.

    마지막 말을 되새기던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이들의 환심을 사기위해서라도 계산적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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