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11화 (1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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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문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이인학이 아닌 아삼이었다. 도저히 천자문을 갓 뗐다던 아이의 실력이 아니었다. 보고를 받은 팽문호마저도 그의 오성에 감탄할 정도였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무가 중에서도 이름이 드높은 팽가였다. 오대세가의 수위를 다투는 그들에게 있어서 문은 단지 학식을 뽐내는 수단밖에 되지 않았다.

무림은 힘이 우선시 되는 곳이었다. 분쟁이 생겨도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로 무림의 생리였다. 힘이 있는 자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억울해도 참고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양 다리를 어깨 너비만큼 벌리고 무릎을 굽힌다. 엉덩이는 무릎과 수평이 되어야 하고 그 상태로 버티는 거다. 이게 흔히 말하는 마보라는 자세고 모든 무공의 기본이다. 하체가 튼튼하고 균형이 잡혀야 어떤 초식이든지 가뿐히 풀어낼 수 있는 거다. 알겠지?"

"끄응. …… 예. 헌데 얼마나 버텨야 합니까?"

"꾸준히 수련하다가 보면 한 식경까지는 버틸 수 있을거다. 지금은 아무래도 처음이니까 일 각만 버티는 걸로 하겠다. 단, 일 각도 못 버티는 아이가 있다면 각오를 해야 할 것이야. 마보보다 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내 손수 그 아이에게 알려주마."

금교두로 불리는 사내의 으름장에 인상을 구기면서 마보를 취하는 아이들이었다. 그 중에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금교두라 불리는 사내를 노려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팽설연이었다. 가냘픈 다리를 떨면서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팽설연의 눈빛에 슬쩍 고개를 돌리는 금교두였다. 하지만 그런 팽설연도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마보자세로 버티고 있는 아삼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쁜 자식, 이번에는 네놈을 꼭 이겨 보일거야.'

학문을 배우면서 가장 많은 칭찬을 받은 아이가 바로 아삼이었다. 칭찬을 듣고서도 당연하다는 듯이 기쁜 표정을 나타내지 않던 아삼의 모습에 못마땅해 하는 사람은 이인학뿐만이 아니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팽설연 역시 그가 못마땅했다. 나이도 자신과 똑같은 10살이었지만 학문에 관해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스스로 무인이라고 생각하던 어린 여아는 자기위안을 해봤지만 분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미 아삼의 집중력은 10살 남짓의 어린 아이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서른일곱의 정신연령을 가진 그였고, 그의 이전 삶은 너무나 가혹하고 치열했다. 차라리 지금 이런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는 시간은 어떻게 보면 그에게는 여유롭다고 말할 수 있었다.

옆에 있는 아삼을 노려보는 두 사람은 질린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힘들지 않은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는 아삼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오기로 버티는 두 아이였지만 부들거리는 다리로 마보를 버티던 아이들은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면서 인내해야만 했다.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아삼 또한 힘이 드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평생 해보지도 않은 동작이 쉬울 리는 없었다. 다만 버티고 버틸 뿐이었다.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애써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노력했다.

'환생을 한 것까지는 알겠는데…… 내 성격은 왜 이렇게 바뀐 거지? 내가 그렇게 승부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아삼이라는 원래 아이의 성격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인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지만 제대로 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고통을 잊고 또 다른 생각을 떠올리던 그는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도 잊은 채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뭘까? 다시 한 번 주어진 삶을 내 뜻대로 살려면 돈이 필요하겠지? 그렇다면 권력의 비호도 있어야 하고, 무공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도 그런 힘이 필요하겠지. 힘…… 힘이라.'

이미 일각이라는 시간은 한참 넘긴 상태였다. 지금 마보를 시키고 있는 금교두도 계속해서 버틸 자신이 없는 것이 바로 가장 기초가 되는 수련이었다. 그만큼 힘든 자세였고 육체적인 고통도 대단했다.

하지만 네 아이들 중에서 누구도 마보자세를 푸는 아이들은 없었다. 땀을 흘리면서도 버티는 것을 보고 그들을 부르려던 금교두였지만 그를 막아서는 인물 때문에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금교두를 막아서면서 마보자세로 버티고 있는 아이들을 지켜보던 팽명민은 눈빛을 빛냈다. 아삼을 중심으로 남은 두 아이들이 기를 쓰고 버텨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매사에 어리광을 피우던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의 흥미를 끌었다.

'설연이와 이인학이라는 아이가 아삼이라는 아이 덕에 계속 버티고 있는 거구나. 묘한 경쟁이 도움이 되는건가? 하하하. 재밌군. 재밌어.'

흥미롭게 바라보던 그였지만 가장 먼저 바닥에 주저앉은 팽설연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아무래도 가장 어리고 여자아이였던 그의 동생인지라 남은 아이들보다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주저앉은 상태에서도 다시 일어서려는 그녀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의외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서 이인학이 주저앉았다. 계속해서 버티고 있는 아삼을 보면서 분해하던 그도 떨리는 발을 부여잡고 다시 마보자세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이익……"

마음대로 되지 않는 다리를 부여잡은 이인학이 분해하면서 침음을 삼켰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아삼은 덜덜 떨고있는 발을 보면서 금교두를 바라봤다. 옆에 있는 팽명민과 함께 놀라워하는 표정을 보니 말했던 일각이 훨씬 지난 것 같았다.

'다리에 감각이 없네. 젠장. 무공이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했던가?'

이전에 들었던 말을 되새기던 그가 마보자세를 풀면서 자세를 바로 잡았다. 서있는 것 만으로도 떨려오는 허벅지에 미비하게 인상이 찌푸려졌고 그가 자세를 풀자마자 바로 주저앉은 황세웅이 크게 웃었다.

"이 독한 놈들! 하마터면 먼저 쓰러질 뻔 했네. 이번에는 내가 아삼을 이겼구나. 하하하. 내가 아삼을 이겼어!"

기분좋은 웃음 소리에 주저앉았던 팽설연과 이인학이 그를 노려봤다. 싸늘한 그들의 시선에 웃음을 그친 그가 어색해하면서 뒤통수를 긁적였고, 떨리는 다리를 주무르던 아삼은 아무말도 없이 이전에 했던 생각을 정리했다.

'힘이라. 그래. 휘둘리지 않고 살려면 힘이 필요하겠지. 전생의 삶처럼 운명에 휘둘리지는 않겠어. 아직…… 아직 나는 젊으니까.'

우여곡절 끝에 힘든 단련의 시간이 모두 지나갔다. 남은 아이들은 기진맥진했고, 잠깐의 휴식을 갖던 그들은 아삼을 바라보면서 불만을 터뜨렸다.

"고작 이런 몸쓰는 일에서 우세를 보였다고 의기양양해 있지는 말아라. 곧 네놈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테니까."

"……."

"뭐야? 인학. 너 아삼에게 질시를 하는 거냐? 무슨 남자가 쪼잔하게……"

"닥쳐요!"

아삼을 보고 으르렁대는 이인학의 행동에 황세웅이 그를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질시라는 단어를 듣던 팽설연이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인학에게 하는 황세웅의 말이 마치 자신을 보고 하는 말같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가주의 딸인 팽설연의 소리에 얼굴을 붉히면서 딴청을 부리던 황세웅이 자리를 옮기면서 어색해진 그곳을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그를 보면서 떨리는 다리를 주무르던 아삼이 몸을 일으켰고 황세웅에게 걸어가는 아삼을 보면서 팽설연이 소리쳤다.

"너는 또 어딜 가는 거지?"

"……."

팽설연의 물음에 뒤를 돌아보던 아삼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황세웅을 뒤따라갔다. 그의 행동에 다시 한 번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하던 팽설연은 분을 삼켰고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인학이 눈빛을 빛냈다.

'저 놈을 싫어하는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었구나.'

아삼에 대한 팽설연의 감정을 엿본 이인학이 몰래 비릿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번 경쟁에서 중요한 변수로 떠오른 팽설연이라는 아이가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리를 빠져나온 황세웅은 연무장 한켠에 받아놓은 물을 향해 걸어갔다. 아무리 무던하고 대범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그였지만 면전에서 면박을 받는 것은 쉬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아직까지 13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상대할 사람은 가주의 금지옥엽같은 딸이었고 어쩔 수 없이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식히려고 물을 떠다놓은 항아리에 다가간 그가 물을 한 바가지 퍼올려서 머리에 쏟아냈다.

쏴아악.

차가운 한기와 함께 시원함이 느껴지자 머릿속이 한결 개운해지는 것을 느끼는 황세웅이었다. 다시 한 번 바가지를 들이 붓고 일어서는 그의 눈에 누런색 천이 올려졌다. 몸을 닦으라고 건네는 그 천에 고개를 들어서 얼굴을 확인하자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삼이 보였다.

"…… 닦으라고 가지고 온 거야?"

"……."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아삼이였다. 그의 행동에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이미 잊었는지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면서 기뻐하는 황세웅이 큼지막한 팔뚝으로 아삼의 어깨를 둘렀다.

"하하하. 역시 아삼 너 밖에 없다. 하하하."

젖어버린 황세웅의 옷에 덩달아 축축해져 버린 그의 옷이었지만 순박한 황세웅의 웃음에 기분이 좋아진 아삼이였다.

팽가라는 곳에 와서 가장 좋은 점 중의 하나가 바로 친구라고 불릴 수 있는 놈을 만난 것이었다. 비록 나이는 맞지 않았지만 꽤 친해질 수 있는 친구가 생긴 것 같았다.

전생의 혼자였던 그에게 나이 어린 친구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멀리서 그들의 행동을 차분하게 지켜보던 팽명민의 얼굴에도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가까이에서 보지 않으면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미미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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