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10화 (10/204)
  • 0010 / 0204 ----------------------------------------------

    경쟁

    다음날부터 이어지는 가르침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모두를 힘들게 했다. 특히 갑자기 끼어든 어린 여아는 그 세 아이들을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교두라고 붙여준 무인들도 팽설연의 눈치를 봐가면서 아이들을 가르쳐야했고,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는 팽설연 덕에 아이들을 한계까지 몰아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허억. 허억."

    "후우우. 근데 왜 이렇게 뛰는 것 밖에 안 하는 거죠?"

    "이 아이들에게는 기초적인 것들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가장 먼저 체력을 기르고 어느정도 단련이 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무기술을 가르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우선 실력을 알기 위해서라도 대련을 한 번씩 거쳐야 하지 않나요?"

    팽설연의 강압적인 물음과 눈빛에 대꾸를 하던 교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했다. 세가에서 하나뿐인 가주의 딸이었다. 아직 어리고 귀여운만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던 아이였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기가 힘들었다.

    "그것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라 함부로……"

    "모르니까 지금부터 알아야죠!"

    "허나……"

    똘망똘망한 눈을 치켜뜨면서 당돌하게 바라보는 팽설연의 행동에 곤란해하던 찰나 그 교두를 구원해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련은 무슨 대련이냐? 걷지도 못한 아이들에게 뛰는 법을 가르쳐 줄려고 하는게냐?"

    "오라버니."

    "네가 스스로 이런 교육에 동참하겠다는 말은 아버님에게 전해들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던 모양이로구나?"

    "꿍꿍이는 무슨…… 그냥 이런 지루한 것들보다 박진감 넘치는 것들을 알려주려고 하는 거죠."

    "대련을 하면서 시간을 허투루 소진할 여유가 없다."

    "허투루라니요. 서로 가진 것을 겨루는 것이 어찌 의미가 없다는 거죠?"

    "네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구나. 이 아이들과 관련된 내용은 모두 내게 위임된 사항들이다. 너도 저 아이들과 함께 하기로 했으니 꾀부릴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하거라."

    "치이……"

    "금교두!"

    "예! 소공자."

    "지금부터 한계까지 몰아붙이시오. 설연도 함께 하기로 했으니 이제부터 저 아이들과 같은 신분으로 대하시오."

    "허나. 그것은……"

    "이미 아버님께 허락받은 사항들이오. 한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할 것이오."

    "충. 알겠습니다."

    부복하던 금교두를 보던 팽명민은 지쳐보이는 세 아이들을 바라봤다.

    '시간이 없구나. 시간이……'

    세 아이들에게는 시간이 부족했다. 팽가의 아이가 되기 위해서 두루두루 배워야 할 시간이 부족했고 환관이라는 신분으로 황궁에 들어가기 위한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양자라고 하지만 팽가의 성이 붙여질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환관으로 궁에 들여보내야만 했고 그만큼 공을 들여야만 했다. 궁이란 곳은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곳이었다. 비단 혼자만 목숨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팽가까지 화를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특히 새롭게 만들어질 동창(東廠)이라는 조직에 들기 위해서는 급히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모든 신료들은 들으시오."

    "예. 폐하."

    "아직도 건문제의 잔당들이 날뛰고 있음을 전해 들었소. 음지에서 날뛰고 있는 그놈들을 잡아들이라는데 아직도 미진한 결과를 보이고 있음은 무슨 연유요?"

    "……."

    "입이 있으면 말들을 하시오. 말을! 아직까지 건문제를 추앙하는 세력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 연유가 무엇이오?"

    "……."

    "짐의 말이 말 같지 않은가? 어찌 대답들이 없는 겐가?"

    "황공하옵니다. 폐하."

    화가난 듯한 영락제의 태도에 모든 신료들이 몸을 사렸다. 성정이 불같은 황상의 행동에 이럴 때는 그저 쥐죽은 듯이 몸을 사려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지휘사(都指揮使)! 금의위의 수장으로써 어떻게 생각하시오?"

    "황공하옵니다. 폐하. 소신이 부덕하여……"

    "부덕? 부덕이라. 허허허. 짐이 지난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지금 금의위만으로는 건문제를 추앙하는 자들을 쉽사리 잡아들이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였소. 그렇지 않소?"

    "……."

    "해서 새로운 관제를 하나 만들 생각이오."

    "하오나 폐하."

    "닥치시오. 지금 관직에 오른 자들 중에서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 자들이 누구요? 모두가 맡은 소임을 다했다면 건문제의 잔당들이 이렇게 날뛰고 있겠소?"

    "……."

    "짐은 이미 마음을 굳혔소."

    이미 황제의 명은 떨어진 상태였다. 금의위와 함께 황제의 수족이 될 새로운 기구를 창설하겠다는 의지를 밝혔고 그들을 환관으로만 채운다는 말은 기정 사실화 된 상황이었다.

    자신의 몸을 보신하고 황상을 지킬 수 있는 무는 기본이었고, 온갖 술수와 암투가 빈번한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문 또한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자, 주어진 책들을 펼쳐 보거라."

    이전에 봤었던 꼬장꼬장해 보이던 문사차림의 노인이 앉아있는 네 명의 아이들을 바라봤다. 심드렁해 있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아이들을 보면서 하얗게 세어버린 눈썹을 꿈틀거린 노인이 앉아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논어의 한 구절이다. 조지장사기명야애 인지장사기 언야선(鳥之將死其鳴也哀 人之將死其言也善)이 무슨 뜻이더냐? 답을 할 수 있는 아이가 있느냐?"

    노인의 물음에 선뜻 나서는 아이는 없었다.

    무가의 딸로 무공 수련만 열심히 받았던 팽설연이었다. 그마저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녀였기에 움직이지 않는 글 공부는 더더욱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10살 여아에게 지금 이 시간은 그저 따분할 뿐이었다.

    황세웅 또한 그렇게 영특한 편이 아니었다. 문보다는 무에 관심을 가지던 그였기에 자꾸 새어나오는 하품을 참으면서 눈치를 볼 뿐이었다.

    그리고 아삼 역시 이제 갓 천자문을 뗀 후라서 논어의 뜻을 헤아리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모두가 노인의 눈치를 볼 때, 자신만만해 하는 이인학이 또랑또랑 어조로 노인의 물음에 답을하기 시작했다.

    "새는 죽을 때에 그 울음소리가 구슬프고, 사람은 죽기 전에 하는 말이 선하다라는 말은 무릇 군자란 자신이 옳다 생각하는 말은 혹여 목숨이 위태로울지라도 해야 한다는 뜻이옵니다."

    이인학의 대답에 찌푸려졌던 노인의 얼굴이 활짝 펴지면서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옳다. 옳아. 이 곳에 모두 천치들만 모여 있는 것은 아니었구나. 허허허."

    "……."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던 노인이 대견하다는 듯이 이인학을 바라봤고 이전에 많이 받아봤던 그 눈빛에 절로 어깨가 으쓱해지는 그였다.

    칭찬을 받은 그가 보란듯이 아삼을 바라보면서 비릿한 미소지었다. 자신을 비웃는 듯한 이인학의 웃음에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불현듯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아삼의 아미가 꿈틀거렸다.

    이전 삶에서 많이 들어봤던 책이 바로 '논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서는 관심도 없었고 한가하게 책 읽을 시간도 없었다. 병으로 누워계시는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허투루 시간을 쓸 수는 없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그에게는 그저 먼 옛날에 쓰여진 책일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저 놈의 낯짝을 보니 조금 후회가 되었다. 왠지 저 어린놈에게 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놈. 그에게 이인학은 딱 그런 존재였다.

    주구창창 논어의 구절만 읊조리는 노인의 목소리에 어느덧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조는 팽설연과 황세웅이었다. 하지만 다른 두 아이는 졸음을 참아가면서 노인의 강연을 들었고 두 눈에 불을 켜고 경청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신명나게 강연을 하는 노인이었다.

    "크흠……"

    노인이 회초리로 논어가 놓여진 상을 '딱딱'치면서 졸고있는 아이들을 깨웠다.

    "다음 이 시간에는 오늘 강술한 내용으로 시험을 보도록 하겠다. 다들 열심히 공부해 오거라."

    강연을 마친 노인이 방을 나서자 팽설연의 입이 한댓발은 튀어 나왔다.

    "갑자기 무슨 시험이람? 그렇지 않아도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셔 죽겠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것도 못 알아먹겠습니다. 북방의 오랑캐 말인지 동이의 말인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뻔뻔한 황세웅의 말에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팽설연이었지만 뒤에서 그들을 한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이인학이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야, 얼름땡이. 너는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은 거냐? 그렇다면 나 좀 가르쳐 주라. 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황세웅이 앞서가는 이인학의 어깨에 팔을 둘렀지만 그는 귀찮다는 듯이 올려진 팔을 쳐내면서 걸음을 옮겼다.

    "자고로 학문은 스스로 닦아야 한다고 했다. 아까운 시간을 쪼개서 너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차가운 말을 내뱉고 사라지는 이인학의 뒷모습에 내쳐진 팔을 보던 황세웅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쉽게 다가갈 놈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방으로 돌어온 아삼도 답답함에 땅이 꺼져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서른일곱 살인 자신이 열한 살인 어린 아이의 눈빛에 동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지어보인 비릿한 미소를 떠올린 그가 화를 참으면서 '논어'라는 책을 꺼내들었다.

    '이대로 다 외워버리면 다시는 그딴 재수 없는 표정을 지어보이지는 않겠지. 젠장, 나이먹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원래 몸의 주인이었던 아이의 승부욕이 대단한 것 같았다. 이전 생에서는 찾을 수 없던 승부욕이 생기는 것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책을 외우기 시작하는 아삼이었다. 어차피 천자문만 뗀 실력으로 하루아침에 논어의 뜻을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천자문처럼 달달 외우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시험 본다던 내용은 거기서 거기겠지.'

    이미 대학까지 마쳤던 그였기 때문에 암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수학도 암기라고 생각하고 공식을 외웠던 그였고, 시험이라고 해봤자 무조건 책 내용을 달달 외워서 쓰면 그 뿐이라고 생각했다.

    묘시가 다 되도록 아삼의 방의 불빛은 꺼질 줄을 몰랐다.

    "익히 말했던 대로 이전에 배운 내용에 관해서 시험을 보겠다. 다들 앞에 놓인 붓을 들도록 하여라."

    노인의 말에 긴장한 듯한 아이들이 상 위에 한지를 펴고 붓을 들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노인이 말을 이어갔다.

    "지금부터 논어의 구절을 읊을 터이니 너희들은 그 속뜻을 적도록 하여라.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

    노인의 말이 끝나자 아이들이 저마다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적막이 찾아든 방 안에는 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동안 그 소리가 이어졌고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노인은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 적었느냐?"

    "……예."

    "그럼 이리 가져와 보거라."

    네 장의 종이를 거둬간 노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쓰여진 글들을 바라봤다. 처참하게 구겨지는 표정과 함께 다시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어보이던 노인이 한 사람 한 사람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팽설연, 약통이다. 좀더 열심히 하도록 하거라. 황세웅, 네 놈은 공부를 하긴 한 것이냐? 조통이다."

    혀를 끌끌차던 노인이 멍한 표정을 짓고있던 황세웅을 한심스럽게 쳐다봤다. 그 눈빛에 민망한 듯이 뒷머리를 긁적이던 황세웅이었지만 이내 활짝 웃으면서 뻔뻔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는 그였다.

    "어디…… 이인학. 통이다. 잘 했구나."

    노인의 말을 들은 이인학이 웃고있던 황세웅과 아무런 표정도 없는 아삼을 바라보면서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노인의 말에 올라가던 입꼬리가 다시 내려가면서 웃었던 표정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아삼, 대통이다. 대단하구나. 내 네놈의 오성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제 천자문을 뗀 놈이 이럴 줄이야. 잘 했다. 아주 잘했다. 허허허."

    서른일곱 살인 그가 밤잠을 줄여가면서 달달 외운 논어였다. 그것도 통째로 외운 것이 아니라 시험을 본다던 부분만 외웠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그들은 깜짝 놀라서 아삼을 바라봤다. 하지만 노인의 칭찬에도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던 아삼이었고 담담한 그 표정을 바라보던 이인학은 죽일 듯이 그를 노려봤다.

    '분명히 천자문도 몰랐던 놈이라고 했어. 어제까지만해도 논어의 논자도 모르던 놈이 어떻게……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거지? 저놈은 진정 천재란 말인가?'

    무예 수련은 그렇다쳐도 글공부만큼은 자신 있었던 이인학이었다. 아무리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고 해도 자신의 조부는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를 지냈던 이인후 대감이었다. 어려서부터 조부의 가르침을 받던 자신이 저런 무지랭이 촌놈한테 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그였다.

    앞에서 죽일 듯이 노려보는 이인학이었지만 어린 그놈의 표독스런 눈빛에 겁을 먹을 아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버릇 없는 아이를 지켜보고만 있을 그도 아니었다. 이전에 이인학이 지었던 표정을 떠올린 그가 한 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비릿하게 웃는 아삼의 표정에 노려보던 이인학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똥씹은 듯한 표정으로 아삼을 바라보던 그의 머리 위로 기다란 곰방대가 떨어져내렸다.

    따악.

    "뭐하는 게냐? 무릇 동기가 잘했다면 칭찬을 해줘도 모자를 판에, 그것을 시샘하고 노려보다니!"

    "죄…… 죄송합니다."

    노인의 꾸중에 사과를 하는 이인학이었지만 그 날카로운 눈빛만은 감추지 못했다.

    '두고보자. 아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