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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팽명민은 근래에 엄청난 걱정을 가지게 되었다. 평탄하던 그의 삶이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부러워 마지않을 그의 신분과 무공, 가문들도 지금의 걱정을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하아. 어떻게 한단 말이냐? 정녕 아버님은 나를…… 환관으로 보내시려 한단 말인가?'
이제 16세에 들어선 그는 팽가의 자식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근골을 타고났다. 또래로 보이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큰 덩치와 키, 신력을 타고났고 이런 조건을 바탕으로 가전 무공의 성취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또래에서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포함한 정파의 신진고수들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던 그였다.
지금은 관의 힘이 세진 상태였고, 관의 요직에 진출한 아버지의 힘과 그 힘을 바탕으로 세가의 영향력이 커진 지금 어떻게 보면 소가주라는 직책을 가진 그가 손에 꼽히는 실력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의 재능과 노력이 뒷받침 되어서 이룩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엄청난 위세를 자랑하는 아버지의 힘도 가문의 힘도 황제의 명에는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오대세가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힐 만한 당금의 팽가는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름에 잠겨있던 그에게 시름을 날려버릴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양자를 들이신다던 아버지의 뜻과 함께 그 요건을 충족시키는 13세 이하의 사내들이 최대한 조심스럽게 가문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바로 황제의 명을 수행하기 위한 아이들이었다. 그제서야 희미하게나마 웃을 수 있던 팽명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양자로 들이는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도 크게 느껴졌다.
"이제 다섯 명의 아이들 중에서 한 명이 내 동생으로 들어오는 건가?"
비록 필요에 의해서 들이는 양자라고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그들의 행동이 고마웠다. 그래서 양자로 들어오는 아이를 잘 대해주기로 마음먹은 그였고, 얼굴이라도 한번 보기 위해서 출입을 제한하는 건물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와중에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어린 누이를 발견한 것이었다. 팽명민과는 6살 터울인 누이의 발랄한 모습에 웃음을 지으면서 그녀를 부르려고 했던 그였지만 어린 누이가 향하는 곳은 바로 그가 가려고 했던 그곳이었다.
'설연이가 왜 저곳으로 가는 거지?'
막아야겠다는 것보다는 호기심이 더 크게 느껴지는 그였다. 조심스럽게 뒤를 밟던 그가 전각의 지붕 위로 뛰어 올랐고 표횰한 신법은 그가 상당한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안으로 들어선 누이와 두 시비. 그리고 그 앞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는 어린 소년.
'저 아이가 나를 대신할 아이인 건가?'
연약해 보이는 그 체형에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다시 드는 연민의 정에 인상을 푸는 그였다. 환관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남성의 성을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이전에 기루에서 이미 동정을 뗀 상태였던 그인지라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 지는 잘 알고 있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에 누이가 들어간 그곳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일어서려다가 부딪쳐서 엉덩방아를 찧은 설연의 모습에 실소가 터져 나왔고 이어지는 시비의 행동에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버릇없는 시비의 행동을 따끔하게 혼을 내려던 그때, 병약하게 보이던 소년의 주먹에 코피를 흘리고 울어버리는 시비의 모습을 보고 다시 한 번 피식 웃음을 터뜨린 팽명민이었다.
'꽤나 당찬 구석이 있구나. 하하하.'
그가 속으로 흐뭇해 할 겨를도 없이 이제는 누이인 팽설연이 나섰다. 그리고 갑자기 설연을 막아선 덩치 큰 아이. 그 전각에서 튀어나온 것을 보면 그 아이도 병약했던 아이와 비슷한 처지였던 것 같았다.
팽가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덩치를 가진 아이는 황세웅이었다. 고개를 숙이면서 설연을 말리는 모습에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저러는 편이 더 현명하다고 느껴졌다. 현실을 직시하는 그의 행동과 함께 팽설연의 물음에도 답을 하지 않던 병약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팽설연의 화가 폭발했다. 기운을 썼는지 10살짜리 여자아이가 낼 수 없는 속도로 병약한 남자아이의 뺨을 때리는 그녀였다.
말려야하나 고민하던 사이에 그 아이는 또 다른 모습을 보였다. 미리 예상을 하고 머리를 숙이던 그 병약해보이던 아이가 온몸으로 팽설연을 밀어붙이고 유리한 자세를 잡아왔다. 주먹을 말아 쥐면서 들어 올리던 그 때, 멀리에서 지켜보던 팽명민이 지붕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하지만 이내 몸을 일으키면서 주먹을 거둬들이는 그 아이의 행동에 방향을 바꿔서 다시 전각 위로 올라가는 그였다.
그 아이의 행동이 어린 누이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화가 난 팽설연이 진각을 밟아서 일권을 날렸다. 당연히 그 아이는 튕겨져 나갔고 그대로 두면 크게 다칠 것 같은 상황에 팽명민이 날아가는 그 아이를 낚아챘다.
"이잇! 누구야! 그 손 못 놔?"
날선 목소리와 함께 자신에게 날아드는 벽력장(霹靂掌)을 보고 설연의 손을 낚아 챈 팽명민은 어린 누이를 꾸짖고 뉘우치는 팽설연을 돌려보냈다.
자신의 품에 안긴 아삼을 본 팽명민의 얼굴이 굳어졌다. 생각보다 상처가 위중했다. 그만큼 동생인 팽설연의 손속은 매웠고 자비가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네놈들은 본분을 잊은 것이더냐?"
화를 터뜨리며 일갈하는 그의 냉랭한 말투에 주변에 숨어있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와서 팽명민의 앞에 부복하는 그들을 보고 깜짝 놀란 황세웅이었지만 이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팽가라면 응당 이래야만 했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송구하옵니다. 소공자. 허나 설연 아가씨께서……"
"닥쳐라. 내 이곳에 출입을 제한하라는 말을 잘 알고 있거늘. 어디에서 되지도 않는 변명이더냐."
"…… 송구하옵니다."
"내 이 일은 백호단의 단주에게 엄히 물을 것이다. 어서 의원을 불러와라."
"충."
팽명민의 호통에 머리를 조아리던 그들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더 대단해 보이는 이들의 행동에 놀라운 마음을 금치 못하던 황세웅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면서 바로 고개를 숙였다.
"소공자를 뵈옵니다."
"너는 누구냐? 너도 이 아이처럼 내…… 동생이 되기 위해서 온 것이더냐?"
"스스로…… 자진해서 온 것입니다."
"자진해서?"
"네. 그러하옵니다."
"…… 좋다. 대단한 결심을 한 것 같구나. 내 유심히 지켜보마."
팽명민의 말에 더욱 고개를 조아리는 황세웅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첫 만남은 지나가 버렸다.
***
병상에 누워있는 아삼의 호흡이 가늘었다. 그 만큼 그는 위중한 상태였고 10살이라고 하지만 제대로 된 무공을 사용한 팽설연의 위력은 연약한 그의 목숨을 빼앗을 정도로 강력했다.
의원의 지극한 보살핌 속에서 정신을 차린 아삼은 눈을 뜬 채로 천정을 바라봤다. 자신의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인지한 그는 속으로 신음을 참으면서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봤다.
10살 남짓의 어린 여아에게 얻어맞고 기절한 그였다. 그 고사리 같은 손에 잘 못 했으면 목숨을 잃었을 정도라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었다. 물론 그의 몸은 병약한 상태의 어린아이의 몸이었지만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직까지 그는 37살의 이명철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년이 익히고 있던 게 무공이라고? 참나. 정말 어이가 없네. 무공이라니!'
소설로만 들었던 내용들을 직접 접한 그인지라 할 말이 없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면 콧방귀를 뀌면서 웃어넘겼겠지만 직접 당한 일이라서 그럴 수도 없었다.
고작 어린 계집아이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분했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힘이 우선시 되는 사회인가? 그렇다면 힘을 키워야 하나? 무공이라는 것을?'
침상에 누워서 생각에 잠기던 아삼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어렴풋이 본 것만 같았다. 그렇게 곰곰이 생각 중 일 때,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얼마 전에 한번 본 기억이 있는 얼굴이었다. 커다란 덩치를 가진 그 자는 황세웅이라고 밝혔던 남자였다. 13살의 아직 어린 아이였지만 겉모습만 봐서는 약관의 나이처럼 성숙해 보이는 아이였다.
"깨어났구나. 내심 걱정을 많이 했다구."
"……."
"크흠. 말을 못 한다지? 나처럼 그것도 제 역할을 못 하고…… 나는 황세웅이다. 이제 13살이고 앞으로 너와 함께 가주의 양아들이라는 자리를 놓고 겨룰 상대지."
'그래서 뭘 어떡하라는 거지?'
갑작스런 등장과 함께 소개를 해대는 황세웅의 모습에 어리둥절해 있을 때, 아삼을 향해서 손을 내미는 황세웅이었다.
솥뚜껑만한 손을 본 아삼은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에 웃음을 짓던 황세웅이 움직이지 않던 그의 손을 붙잡으면서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잘 부탁한다. 어쩐지 너랑은 친해질 것 같거든. 그 얼음땡이 같은 놈보다."
"……."
"하하하. 몸조리 잘하고 있어라. 다음에 다시 보자."
자기 할 말만 하고 밖으로 나가는 황세웅이었지만 호탕한 그의 성격이 싫지만은 않았던 아삼이었다. 이전의 삶에서 그렇게 친하다고 여겨지는 친구는 없었다. 모두가 자기 살기 바빴었고 특히나 어려움을 겪었던 그에게 도움을 준 친구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가 힘들 때 자신을 외면했던 아픈 기억을 떠올리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그였다.
'황세웅이라……'
손을 붙잡고 인사를 하던 그의 첫 인상이 싫지만은 않았다. 어쩐지 순박한 모습을 본 것 같은 기분에 그의 얼굴에도 미비하지만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까지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남았지만 지금의 삶도 그렇게 나쁠 것 같지만은 않았다. 무공을 쓰는 어린 계집아이만을 제외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