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3화 (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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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생

    하북에서 제일 유명한 가문을 꼽자면 바로 팽가였다.

    하북팽가.

    오대세가(五大世家)의 하나로 근골(筋骨)이 훌륭한 자손들이 많이 태어나는 가문이었다. 도법(刀法)에 능하며 장법(掌法)에도 조예가 있었다. 가장 유명한 도법은 오호단문도였고 도법하면 팽가를 떠올릴 만큼 그 위세가 대단했다.

    팽가는 무림세가 중에서 상석을 차지할 정도의 위명이 있었고, 군문에도 많은 장수들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그런 하북팽가의 심처에서 멋스러운 턱수염을 늘어뜨린 거구의 중년 사내가 깊은 시름에 잠겨있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이 팽가의 가장 큰 위기라고 할 수 있었다.

    "하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던 그는 팽가의 가주인 팽문호였다. 무림이라는 곳에서 팽가의 가주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가볍지 않았지만 그보다 그는 군문에서 더욱 유명했다.

    정삼품직의 동지(同知)인 팽문호.

    정삼품의 관직의 그는 금의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서열이었다. 그의 위에는 황제를 제외하고 정2품직의 도지휘사(都指揮使) 한 명만 있을 뿐이었다.

    금의위(錦衣衛)

    황제의 거둥 때 의장·궁정 수호, 경성 안팎 순찰, 죄인 체포·신문 등을 담당하였으며, 따로 조옥을 두어 형부의 법률 절차를 밟지 않고 투옥할 정도로 권한이 막강한 명실상부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다. 병권·형권을 모두 가진 황제 독재권의 수족으로 책무를 다하던 세력이었다.

    이런 금의위의 두 번째 서열에 위치한 정삼품의 동지인 그가 한숨을 내쉬면서 시름에 잠긴 이유는 다름아닌 황명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난입사건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물은 것이다.

    때는 영락 16년.

    나날이 커져가는 금의위의 권한과 함께 불안해하던 연왕은 한 가지 묘책을 전해 들었다. 금위의의 힘을 줄이고 이들을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기관을 만들 책략이었다. 그 일을 시행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금의위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희생양이 바로 금의위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팽문호였다.

    자신의 충복 중의 한 명이 팽문호였지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의 희생이 필요했다.

    잦은 시찰을 나섰던 영락제는 다시 한 번 시찰을 핑계로 황성을 나섰다. 시찰을 이유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 때, 돌연 한 명의 무인이 호위하던 금의위를 뚫고 어가(御駕)를 막아섰다. 황제가 있는 어가(御駕)의 60보 안까지 다가선 그자의 무공은 눈에 띌 정도로 고강했고 금의위의 고수들로써도 쉽게 그를 제압할 수가 없었다.

    금의위의 포위를 뚫고 10보를 더 안으로 들어선 그가 어가(御駕)를 향해서 장력을 터뜨렸고 그 근처에서 황상을 호위하던 팽문호는 애도를 꺼내들면서 그가 날린 장력을 흩어버렸다. 이윽고 땅을 박차고 괴인에게 달려든 그는 고절한 가전무공으로 일수에 그자의 목을 날려버렸다. 그 때, 사용한 무공이 바로 유명한 오호단문도의 한 초식이었다.

    그만큼 용맹하고 충정 깊은 그의 행동에 감탄하던 영락제였지만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시련을 줘야만 했다. 무릇 정치라는 것은 하나를 얻기 위해서 다른 하나를 줘야 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호위를 책임졌던 팽문호에게는 황명이 떨어졌다.

    "어가(御駕)의 호위를 소홀히 한, 정삼품직의 동지(同知) 팽문호는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릴 것이다."

    황제의 말을 끝으로 팽문호에게는 치욕적이고 끔찍한 벌이 가해졌다. 차라리 멀리 귀향을 간다거나 관직을 박탈당했다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내려진 형벌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하나뿐인 그의 아들을 환관으로 들이라는 말도 안 되는 황명이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둔 그에게는 청천병력 같은 소리였다. 아무리 황명이라고 해도 쉽게 수긍할 수는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황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고심하던 그였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다. 계속되는 근심에 고수라고 불리던 그도 조금씩 수척해지기 시작했다. 내원에 있는 가주전에서 고심하는 그의 기척에 이질적인 무엇인가가 잡혔다.

    바삐 움직이는 주변의 움직임과 함께 팽문호의 앞에 흐릿하던 인영이 명확해지면서 부복한 채로 꿇어앉으며 밖의 상황을 전해왔다.

    "무슨 일인가?"

    "세가 내로 누군가가 잠입을 했습니다. 가주전을 노리는 것 같습니다."

    "대범하군. 대 팽가에 잠입을 시도하는 자라니. 밤이 깊었으니 신속히 해결하고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시게."

    "존명."

    팽문호의 말에 짧게 읍하고 바로 사라지는 인영의 모습에 당연하다는 듯이 시선을 돌리는 팽문호였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 모습을 다른 사람이 봤다면 놀라서 기겁할 테지만 팽가의 가주인 그에게는 흔한 일들 중의 하나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피풍의를 두른 낯선 괴인이 팽가의 무력단 중 하나인 백호대의 포위 속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제법 여유가 느껴지는 그 모습에 전각 안에서 지켜보던 팽문호의 미간이 꿈틀거렸고 다시 나타나서 부복하는 자의 보고를 받은 그는 침음을 삼켜야만 했다.

    황제가 보낸 전령이었다. 환관같이 보이는 하얀 분을 칠한 얼굴과 함께 얄팍하고 붉은 입술을 보이던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황제 폐하께서 몰래 접견하라는 명을 내리셨소. 최대한 빨리 입궁하라고 하시었소."

    몰래 입궁을 하라는 명을 받든 그가 급히 황궁으로 향했고, 충직하던 팽문호의 야윈 모습에 친히 용상에서 내려온 영락제가 그를 맞았다. 황제의 스스럼없는 행동에 급히 부복을 하던 팽문호는 황공하다는 말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짐이 따로 자네를 부른 이유를 짐작하고 있는 겐가?"

    "황공하옵니다. 폐하."

    "허허허. 조금 전부터 황공하다는 소리 빼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건가?"

    "황공하옵……니다. 폐하."

    "하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과한 면이 있었지. 많이 서운했던 거겠지."

    "아니옵니다. 어찌 소장이 그런 망극한 생각을……"

    "알고 있네. 알고 있어. 내 잘 알고 있지. 20년 동안 함께 해왔던 자네의 우직함과 충정은 너무나 잘 알고 있네. 그래서 그런 명을 내린 것이네."

    "……."

    "짐이 생각하기에 금의위는 너무 많이 커버렸어. 이제는 내 안전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슴이야."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어찌 폐하의 수족이라고 자처하는 금의위가 그런 천인공노할 생각을 가지겠습니까?"

    "물론. 자네처럼 충직한 사내들도 존재하겠지. 허나 황족이던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지."

    "…… 허면 소신이."

    "아니. 고작 쥐새끼 한 마리 잡으려고 충직한 내 사람을 잃을 수는 없지. 명색이 황족인데 자네가 나서는 건 아니 될 말이네."

    "허면 소신은 어떻게 하여야 하옵니까?"

    "자네에게 내린 명을 충실히 이행하면 되네. 다만!"

    "……."

    "굳이 자네에게 아들이 하나일 이유는 없지 않은가? 양자를 들여서 양부가 되어도 그 양자는 자네의 아들일 테지."

    "성은이 망극하오이다. 폐하."

    "허허허. 내 자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네. 기한은 정해져있지 않으니 잘 찾아보고 신중히 결정하게. 이참에 금의위의 힘을 줄일 필요가 있어."

    "하오시면."

    "새로운 조직을 만들 생각이네. 금의위처럼 내 수족이 될 자들로 채워 넣을 것이야. 그리고 그 자들은 환관들로만 만들 생각이네. 그 곳에 자네 사람이 될 만한 아이를 심어 넣게. 그렇게나마 자네에 대한 내 미안함을 대신했으면 좋겠네."

    "폐하의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신 팽문호 앞으로도 영원히 충정을 다 받칠 것이옵니다."

    "허허허. 믿음직스럽군. 좋아. 아주 좋아."

    대소를 터뜨리는 황제의 모습에 몸을 낮췄던 팽문호는 이전보다 편안해진 마음으로 독대를 마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엄청난 내용을 전해들은 그는 절로 몸이 떨려왔다.

    '조금만 발을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야.'

    절로 떨려오는 몸을 추스린 그는 전령으로 보내졌던 환관을 따라서 황궁을 나섰다. 비밀을 엄수하라는 그 환관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그는 세워둔 말을 타고 본가로 향했다.

    등 뒤로 보이는 웅장한 자금성과 비추어 초라해 보이는 자신을 느꼈다. 하북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을 제치고 팽가라는 위명을 더욱 드높인 자신이었다. 그런 팽문호도 천자라고 칭해지는 황제의 앞에서는 바짝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황명을 해결하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금의위를 견제하기 위한 또 다른 환관들만의 세력. 그 무소불위의 힘 앞에서 자신과 가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절한 양자를 들여야만 했다.

    달리던 말을 멈춘 팽문호는 허공에 대고 말을 내뱉었다.

    "게 있느냐?"

    "하명 하시옵소서."

    "세가로 돌아가서 사람들을 풀어라. 13세 이하의 어린 남자 아이를 구하라고 해라. 환관이 되려는 자나 환관의 가능성을 가진 아이들을 모아라. 내 양자로 들일 것이다."

    "……."

    충격적인 팽문호의 말에 부복해있던 무인이 놀라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내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그가 급히 고개를 숙였고 그 모습을 눈치 챈 팽문호는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알아들었느냐?"

    "조…… 존명!"

    환관이 되기 위한 새로운 아들. 그리고 가문을 지켜줄 그 아이를 찾기 위해서 하북성뿐만 아니라 곳곳으로 팽가의 무인과 금의위의 소기들이 흩어졌다.

    두 명밖에 없는 금의위의 정삼품직 동지(同知)인 팽문호의 명을 받은 자들이었다.

    황제의 의중은 그렇게 팽문호를 통해서 실현되어 나갔다.

    그리고 매우 은밀하고 신속하게 근처에 있던 어린 아이들이 팽가로 향했다.

    환관이 될 자질을 갖춘 자들만을 엄선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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