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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13/13)

13장

영양제만 맞고 병원을 나왔다. 태협은 집에 가자면서 연을 차에 태웠고 연은 가는 길이 낯설어 눈만 굴렸다.

“니네 집 들렀다 가려고?”

연은 새별이 기다릴 낀데, 한마디 하고 순순히 차를 타고 가다 도착한 곳에 내렸다.

“와, 달동네에서도 제일 좋은 집에 살더니.”

연이 뒷말을 이어 붙이지 못했다. 달동네와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으리으리한 집들의 향연이었다. 태협은 살짝 굳은 얼굴로 대문을 열어젖혔다. 소담한 정원 뒤로 기하학적인 모양의 주택이 나왔다.

건물을 보던 연이 피식 웃었다. 태협이 궁금한 듯 왜? 하고 물었다.

“아니, 야, 진짜 니 같은 데 사네.”

“……?”

“집 모양이 딱 니 같다.”

연이 깔깔 웃고 과장되게 허리를 숙였다. 모가 많이 난 게 태협을 닮아 있었다.

태협은 눈을 반쯤 뜨고 입꼬리를 떨어뜨렸다. 이번 한 번은 참는다는 표정을 했다. 태협을 상대로 장난을 치던 연이 전면 유리창 안에 보이는 소년을 발견했다. 풀장에서 마음껏 뛰노는…….

“류새별?”

새별이었다. 새별은 낯선 곳에서 낯도 가리지 않고 꺄르르 웃고 있었다. 연이 민망스러워져 태협을 흘끗 보았다. 이미 저만치 걸어간 태협은 문을 열고 들어오라 손짓하고 있었다.

“어휴, 남의 집에서 뭐 하는……. 우와.”

층고가 높은 거실이 드러났다. 감탄을 부르는 규모에 연이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부자는 많구나. 화이트 톤의 깔끔하고 세련된 내부와 통창으로 트인 개방감하며, 딱 봐도 채광이 좋은 집이었다.

“와, 집에 기둥도 있어.”

감탄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연을 태협이 따랐다. 연이 수영장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새별은 물놀이에 정신이 빠져 엄마가 왔는지도 모른다.

“류새별!”

“엄마!”

반바지에 반소매 옷을 입은 새별은 홀딱 젖어 있었다. 춥지는 않은지 걱정했지만, 물에 손을 넣어 보니 다행히 물 온도가 따뜻했다. 연이 습관적으로 결 좋은 머리를 옆으로 쓸었다.

“여기 누가 데려왔어?”

“아저씨 친구요.”

“니 친구? 네가 부탁해서 데려왔어?”

태협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새별은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여러번 보았던 하얀 남자였다.

아, 저 사람 집인가 보다.

“안녕하세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어색히 인사하는 연에게 준화는 부드러운 웃음을 보였다. 쪼그려 앉은 연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모르는 아저씨 쫓아가면 안 되지. 게다가 남의 집에서 이렇게 실례를…….”

“전에 본 적 있어요!”

새별이 상기된 얼굴로 주장했다.

“언제?”

“아저씨가 처음 유치원 왔을 때요!”

새별의 천진난만함에 연이 새별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도, 여기서 이런 장난 치면 안 되지. 빨리 올라와. 집으로 가자.”

“응!”

새별은 미련 없이 바람을 탄 민들레 씨처럼 홀홀 거리며 풀장을 빠져나왔다. 연이 태협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까딱여 요구했다.

“협아. 애 몸 닦을 수건이랑, 네 옷 중에 사이즈 제일 작은 거로 좀,”

“나 안 작은데!”

“……새별이 입을 만한 거로 좀 갖다줘. 얼른, 새별이 감기 들어.”

씩씩대는 새별의 손을 내밀어 잡아 주려는 그 순간, 어깨를 쿡 찌르는 힘이 느껴졌다. 의도가 빤한 터치에 연이 앞으로 허우적댔다.

아, 안 돼! 속으로 외쳤지만 첨벙, 물이 크게 튀었다.

“야!”

물에 빠진 연은 두어 번 어푸어푸하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빨리 일어선다고 일어섰으나 이미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후였다. 소리를 빽 질렀지만, 태협은 느긋하게 눈을 내리깔고 웃었다.

“먼 수작질인데.”

“오늘 여기서 자고 가라고.”

“말로 해라, 말로!”

연이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손으로 벅벅 닦아 내면서 태협을 노려보았다.

“수건 가져올게,”

뒤를 돈 순간, 아까보다 더 크게 물이 튀었다. 수영장 바닥에 닿은 태협은 짧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등장하는 모습이 꼭 인어 왕자님 같네. 감탄도 잠시, 연이 속이 시원하다는 듯 낄낄 웃었다.

“우리 엄마 괴롭히지 말라고 했죠!”

새별은 제법 장난스러운 얼굴로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외쳤다. 도로 뛰어들더니 태협을 공격했다.

연도 물을 손바닥에 퍼 담아 태협에게 흩뿌렸다. 태협이 눈썹으로 불쾌감을 표시하다가 가까이에 있는 새별을 잡고 다이빙시키듯 던져 버렸다.

“아 죽는다!”

연이 물이 잘 먹은 태협의 팔뚝을 내리쳤다. 새별이 빠진 장소에서 검은색 머리통이 두둥실 떠올랐다. 기절한 게 아닐지. 연이 걱정되어서 걸음을 옮겼다. 물 안에서 작은 거품이 일었다. 거품을 뚫고 나온 새별이 신난 얼굴로 두 팔을 하늘 높게 뻗었다.

좋아하는 거야?

황당해서 할 말을 잃었다. 새별은 태협에게 쪼르르 달려가 팔을 들고 흔들었다.

“또! 또요!”

태협은 군말 없이 새별이 하자는 대로 해 주었다. 네다섯 번쯤 지났을까. 연이 태협을 말렸다.

“이제 그만해.”

얼마나 재밌는지 새별이 호흡을 색색거리며 웃고 있었다. 새별이 더 하고 싶다고 떼를 썼지만, 연이 억지로 안아서 데리고 나왔다. 연이 손을 내밀었고 태협은 큰 수건을 건네주었다.

세 식구가 쫄딱 젖은 상태였다. 준화가 별 지랄을 다 한다는 눈으로 보는 것을 목격한 연이 재빨리 아이를 샤워장 안으로 보냈다.

새별이 씻으러 들어가고 연은 수건으로 물기를 탈탈 털어 냈다. 뒤쪽에 음습한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오고 연이 뒤를 휙 돌았다.

그리고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태협의 머리에 수건을 얹고 털어 주었다. 그 와중을 못 참고 태협이 연을 끌어당겼다.

“야, 앞뒤에 사람 있다.”

“새별이 물놀이했으니까 오늘 일찍 자겠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나 뚜렷했다. 모른 척할 수도 없을 만큼 배꼽 사이에 그것이 두드러져 있었다. 댔다, 마. 연이 붉어진 얼굴로 태협의 젖은 몸에 손을 대 살짝 밀어냈다.

태협이 씨익 웃은 다음에 새별이 볼 수 없을 정도로 등을 돌려 연에게 길게 입을 맞췄다.

따뜻한 물에서 한참 놀아서일까, 솜사탕이 물에 닿은 것처럼 보들보들 녹을 것 같았다. 젖은 소리가 꽤 오래 이어지고 태협이 입술을 뗐다.

“우리 이제부터는 매일 이 집에서 보낼 거고, 매 순간이 지금 같을 거야.”

“뭐? 여기 저 친구 집 아냐?”

연이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눈이 마주치자 태협의 뒤로 숨었다. 너무 못 볼 꼴을 보여 준 건 아닌지.

조금 부끄러울 참이었다.

태협은 그런 게 없는지 연의 볼을 부드럽게 늘려 잡았다.

“아니, 우리 집이야. 쟤 돈 없어.”

“어?”

“같이 살자고.”

“…….”

“프러포즈라고, 이 멍청아.”

태협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해서 연이 눈을 깜빡이지 못하고 태협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우리가 살 집이라고.”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릎에 힘이 빠져 주저앉으려는 연의 허리를 태협이 단단히 감쌌다.

“싫어도 못 벗어나.”

“아니, 싫은 게 아니라…….”

연이 주위를 둘러봤다. 차근차근 나아지는 삶을 그렸지만, 이건 좀 부담스럽다.

“쫌 부담스럽네.”

“받아들여.”

“쫌 작은 집은 없드나. 청소는 또 어떻게 하지?”

한 번 날 잡아서 해도 3박 4일간 하고 앓아눕겠다. 연이 중얼거렸다. 태협은 별걸 다 걱정한다며 면박을 주었다. 연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 얼굴로 태협을 보았다.

“협아, 이거 꿈 아니제?”

“어.”

“왠지 깨면, 환상에서 깨서, 내 달동네로 되돌아 가 있을 것 같다.”

한 번에 너무 많은 행복이 들이닥친 기분이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어렸을 적 추운 방에서 잤던 그때 꾸던 꿈 같다. 성냥팔이 소녀가 촛불 사이에서 본 꿈 같은 건 아닐까.

연이 믿지 못하자 태협은 박아 줄까, 한 마디 했다.

“어, 박아 주라.”

연의 말에 태협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연을 잡아끌었다.

아니,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아 달라는 뜻이었는데……. 태협은 자리에 있던 남자에게 새별이 나오면 옷 좀 갈아입히라고 말하고 연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나가야 해?”

“그래 주면 더 좋고.”

두 사람이 지나가는 길마다 물 발자국이 찍혔다. 젖어서 마를 새도 없는 발자국이.

* * *

“아, 시원하다.”

1m 높이의 담장에 기대선 연이 태양이 뜨는 것을 바라보았다. 산을 따라 비탈진 골목길은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아름다웠다. 언제 봐도, 어디서 봐도. 연이 눈을 감고 따뜻함을 감싼 가을바람을 느꼈다.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바람을 즐기다가 마지막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대문을 열고 나섰다.

그러자 눈이 매서운 남자와 마주쳤다. 그는 천천히 어둠 그리고 온도를 몰고 왔다.

“궁상은. 왜 꼭 여기야.”

태협이 연의 등을 감쌌다. 그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새별이 유치원 간 사이 놀러 가자는 연의 말에 속아 태협은 이곳에 끌려왔다.

“없어진다잖아.”

내 세상 전부였던 이곳과 이제는 영영 작별이었다. 벽화를 그려 동네를 살려 보려 했지만, 재개발이 결정 났다. 곧 있으면 철거되어 없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연은 부랴부랴 찾아왔다.

달동네는 많이 변해 있었다. 사람들도 모두 떠나갔다. 누구도 관리하지 않고 10년 가까이 사람이 살지 않았으니, 태협의 파란 지붕 집과 연의 집은 폐가나 다름없었다.

“네가 그걸 왜 신경 써.”

“내 전부였던 곳이잖아.”

“개뿔.”

태협은 바닥의 돌을 찼다. 그나마 연에게 이끌린 채 동네 구석구석을 거닐다가도 연의 집은 꼴 보기 싫다는 듯 들어오지도 않았다.

가야 했지만, 연은 아쉬워 발걸음을 주춤댔다.

때아닌 아쉬움에 묘한 불안도 뒤섞일 무렵, 태협이 손을 내밀었다. 연이 멀뚱히 보았다. 잠시 표정을 굳힌 그가 꽤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연을 불렀다.

“소연아.”

그는 뭐가 걱정이냐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거부할 수 없는 부름을 받은 듯 소연이 손을 내밀고 천천히 걸었다.

꿈이 손에 잡혔다. 태협의 손을 잡고 소연은 녹슨 대문을 넘었다. 태협이 웃었고 소연의 어깨를 감쌌다. 소연은 꿈에 입을 맞추었다.

<달동네 년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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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 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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