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다음 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이 연은 마음이 편했다. 비가 오고 있었다. 새별이 우산을 들고 갔었나. 한가한 생각을 하는 중에 테라스 아래에서 여자가 우산을 접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반갑고 다정하게 인사를 건넨 연에게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 손님은 진열대 앞에 섰다. 연은 손님이 고르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왔다 갔다 고민하던 손님은 로즈라즈베리, 카페, 바닐라 솔티 캬라멜 주세요, 했다.
머릿속에 아까 손님이 우산을 접는 모습이 떠올랐다. 비를 뚫고 온 게 오늘따라 고마워서 왠지 더 얹어 주고 싶었다. 손님의 시선이 여러 번 향했던 곳으로 연이 걸음을 옮겼다.
“초콜릿이랑 밀크티 좋아하세요?”
“네?”
손님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집게가 향한 방향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희 가게에서 제일 잘 나가는 건데. 이것도 맛보세요. 아 혹시, 민트 초코는 드세요?”
초콜릿과 밀크티, 민트 초코에 자몽까지 얹었다. 배보다 배꼽이 커지자 여자는 손을 좌우로 저었다.
“괜찮은데…….”
연이 싱긋 웃자 여자도 같이 웃었다. 세 개를 산 손님에게 서비스로 네 개가 나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신 나갔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었다. 뭐든 나누어 주고픈 마음. 사실 비는 핑계고 이것들을 다 팔고 얼른 들어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손님은 감사합니다, 자주 올게요, 말하고 나갔다. 연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신선한 바람이 폐 속에 가득 찼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웃음이 샌다. 그냥 세상이 꽃밭 같았다. 꽃밭에 드러누워 새별이 오고 태협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아늑했다.
여전히 퉁명스럽긴 하지만 새별과 태협은 꽤 잘 어울리고 있었다. 어제 새별은 태협을 “아저씨 나쁘지 않아.”라고도 표현했다. 마음을 열어 가는 모습이 가슴 찡했다. 아직은 으르렁대긴 하지만 장족의 발전이어서 연은 뿌듯해했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우스워서 연은 그만 웃었다.
그때, 가게 문이 다시 열렸다.
“어서 오세요.”
방긋 웃은 연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도 더 드려야지. 오늘은 덤의 날이니까.
그러나 하늘 높이 날았던 연이 돌풍을 만난 것처럼 연의 기분도 단숨에 땅에 처박혔다. 들어온 사람의 얼굴은 그녀가 평생에 걸쳐 보고 싶지 않은 남자였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를…….”
꽃밭은 사라지고, 연은 뾰족한 가시덤불 위에서 온몸을 수축한 채 입술을 떨었다.
우산을 쓰고 오지 않았는지 남자의 몸에서는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빡빡 깎은 짧은 머리카락과 거뭇거뭇 자란 수염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은 이상하게 검은빛으로 보였다. 순식간에 바닥이 진득한 늪으로 변했다.
“이 씨발년, 은혜도 모르는 씹창년.”
익숙한 욕지거리에 막아 두었던 기억의 샘이 폭발하듯 흘러넘쳤다.
“나, 나가요.”
그는 밀어내려는 연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주먹을 쥐고 달려들 것 같았다.
행복도 선택이고 불행도 선택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하는 가장 큰 실수가 잡아야 할 인연은 보내는 것이고 보내야 할 인연을 잡는 것이라고.
연은 두 가지 다 충실히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어떤 이유로 나를 잡으러 온 것일까.
그래서 그를 보고 밀려든 건 두려움이 아니었다.
연은 ‘엮이고 싶지 않다는’ 본능적인 거부감에 뒷걸음질 쳤다. 이 가게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오물이 묻지 않은 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남자는 손을 뻗었다. 연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아악!”
목이 꺾이며 뒤로 끌려갔다. 두피가 타오르는 것처럼 아팠다. 정배는 익숙한 고성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에 조소를 띠었다. 짧은 웃음에서 짙은 술내가 났다. 그 집에서 늘 있던 곰팡내도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죽일년, 시발년. 내가 너 죽일 거야.”
“하지 마요!”
연은 어디론가 끌고 가려는 정배에게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손톱으로 손등을 누르고 정강이를 가격했다. 악, 소리를 낸 정배가 손을 풀었다.
연은 뒤로 나자빠졌다. 정배의 손에는 긴 머리카락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비가 와서인지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바닥을 기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뒤통수가 잡히고 말았다.
“하지 마!”
남자가 솥뚜껑만 한 손으로 연의 뺨을 내리쳤다. 풀썩 주저앉은 연의 등허리를 밟으려 발을 높게 들었다. 연은 재빨리 움직여 정배의 다리를 붙잡고 겨우 넘어뜨렸다.
“이 씨발! 씨발!”
정배가 바닥에서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버둥거렸다. 긴 시간 내내 이어진 분노를 한 단어로 집약했다.
“이 시발년아!”
정배가 왜 분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연은 숨을 가쁘게 쉬었다. 제가 사라지면 오히려 홀가분해야 할 사람이 아닌가.
연이 시계를 확인했다.
그 와중에, 새별이 생각이 났다. 혹시나 오면 어떡하지, 보고 충격받으면 어떡하지. 멍하게 있는 사이 정배가 일어섰다.
“네가 이러고도 잘 살 줄 알았냐?”
“오지 마!”
“이 쳐 죽일 년!”
자리에서 일어선 정배가 혀가 꼬인 소리를 내더니 의자를 집어 왔다. 그리고 높게 들어 냉장고 유리를 단숨에 깼다. 몸이 맞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모습에 연이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하지 마!”
“애비를 버리고도 잘 살 줄 알았나?”
“누가 아빠야! 무슨 자격으로 당신이 이래!”
쨍그랑, 온몸으로 막았지만, 유리 깨지는 소리는 반복됐다. 오늘 채 팔지 못한 마카롱 위로 유리 조각이 떨어지고 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목이 아프게 조이고 울렁거렸다. 전엔 맞아도 울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오늘은 울음이 날 것 같았다.
이 사람은 날 시궁창에 빠트리는 게 목적인 걸까.
정신이 나가고 눈에 불꽃이 이는 것 같았다.
“니 그러고도 배때기에 기름칠하고 잘 살 줄 알았으면 오산이다. 니는 그래 봤자 내 손아구 안이다. 어데!”
정배는 그렇게 악담을 퍼부었다. 그의 폭력보다 그게 더 무서웠다. 꼭 그의 존재가 행복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처럼 느껴졌다. 연이 눈을 부릅떴다.
“어쭈, 꼬나보나? 사람 죽이겠다? 7년 동안 안 맞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제?”
그래 봤자 니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정배는 바르르 떨리는 턱을 잡고 거칠게 밀었다.
연이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아니, 모든 걸 할 수 있었다.
눈에 섬광이 일고 연은 금방 깬 닭처럼 몇 번 미끄러지다 일어나 주방에 들어갔다. 자신도 모르게 칼을 쥐고 나왔다.
길고 톱날처럼 날카로운 빵칼이었다. 연은 낮은 각도로 칼날을 세웠다. 잘 닦은 칼 위로 연의 얼굴이 비쳤다.
연의 눈에 집념이 어려 있었다.
이제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그러니까 죽일 거야. 당신.”
정배가 우스워 깔깔 웃더니 배를 뒤집어 깠다. 망둥어처럼 부푼 배에는 거뭇거뭇하게 튼 살이 올라 있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아나, 죽여 봐라.”
“…….”
“여 찌르면 죽는다. 죽여 보라고, 이 씨발년아.”
연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경직된 자세를 유지하다가 벌벌 떨리는 손을 꼼지락거려 다부지게 잡았다.
이를 얼마나 갈았는지 턱이 아플 정도였다. 그의 둥근 배가 보였다.
정말 죽일 수 있을까.
죽음 앞에서 뇌는 작동을 멈췄다.
연은 행복해지고 싶었다. 걱정도 고민도 없이. 그런데 이 사람이 자꾸만 방해하려 들면. 없애 버리는 게 맞지 않을까.
나도 할 만큼 했잖아.
연이 어깨를 들썩였다. 찌르면 금방이었다. 금방일지도 모른다. 남자도 저세상에 가는 게 편할지도 모르고, 여기 CCTV도 찍혔으니까, 정상 참작 될지도 모른다.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연이 칼을 들고 한 걸음 다가섰다. 그 순간 정배의 몸이 뒤로 넘어가더니 곤죽이 되는 소리가 들렸다.
연이 칼끝을 치운 채 검은 등판을 바라보았다. 태협은, 기계적으로 사람을 때리고 있었다. 거의 죽일 기세였다. 연이 칼을 놓았다. 주먹이 얼굴을 때리는 소리와 다 죽어 가는 남자의 신음 소리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협아.”
비척비척 걸어가 그날처럼 태협의 허리를 감쌌다.
“협아! 하지 마, 협아.”
자신 때문에 태협이 살인자가 되는 건 원치 않았다. 뜯어말렸으나 태협의 몸은 7년 전보다 더 단단했다. 연의 만류에도 정배의 위에서 뿌리박힌 듯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가까이에서 본 태협은 열띤 증오를 띠어 조금은 무서울 정도였다. 게다가 대답도 없다.
“하지 마, 태협아.”
연이 말리다가 제힘을 이기지 못해 튕겨 나가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필 유리 조각 위로 떨어져서 손바닥에 자잘한 조각들이 가득 박혔다.
“아.”
작은 신음이 나자 태협이 정배의 멱살을 놓고 등을 돌렸다. 정배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코뼈가 부러졌는지 코에서 쉴 틈 없이 피가 나고 얼굴의 뼈들이 으스러진 것처럼 물렁물렁했다.
태협이 주먹을 쓱쓱 닦으며 연에게 다가왔다. 뺨이 붉게 물든 모습이나 손바닥에 박힌 유리 파편을 보더니, 섣불리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작게 욕을 읊조린 태협이 연을 안아 들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안면을 시원하게 강타하는 비를 맞고 있자니, 눈물이 쏟아졌다. 연이 들키지 않기 위해 태협의 목덜미를 감싸고 얼굴을 묻었다.
행복해지자고 사람을 찌를 생각한 자신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봄비는 추웠다. 온기에도 몸의 떨림은 더욱 거세져 갔다.
????????????
눈을 떴을 때, 옆에 태협이 있다는 사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겹쳐진 손안에 온기가 갇혀 있었다. 천장을 향해 눈을 깜빡거리던 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별이는?”
태협은 연의 이마를 눌러 다시 눕혔다. 배에 힘을 주고 일어서려 했지만, 힘이 부족했는지 발만 바둥댔다. 뜻대로 되지 않자 연이 짜증 난다는 얼굴로 옆을 짚어 일어섰다. 기어코 일어나려는 연을 태협이 말리기를 포기했다.
“넌 네 몸보다 새별이가 중요해?”
“당연한걸. 새별이는?”
“집에.”
“가게 보고 안 놀랐어? 완전 엉망진창이었을 텐데.”
“안 보여 줬으니까 걱정하지 마.”
태협이 자신도 그 정도로 생각 없지 않다, 대답하고 이죽거렸다. 그럼 다행이고. 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미동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시선 끝에 그의 오른손 주먹이 보였다. 붕대가 감겨 있었다.
연은 태협의 손을 제 손으로 덮어 감추었다.
“손은 안 아파? 괜찮아?”
“넌 니 걱정만 해.”
태협의 말에도 연은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매번 상황이 꼬이는 게 안타까웠다. 연은 침울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목청을 다듬었다.
“갑자기 어떻게 찾아왔는지 나도 모르겠어.”
풀이 죽은 목소리가 나왔다. 예전부터 아무렇지 않은 척했어도, 가끔은 부끄럽고 또 수치스러웠다. 가능하다면 태협의 눈을 영영 가리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얼마나 정떨어질까. 이런 내가 불쾌하지 않을까.
오늘은 더 그럴지도 모른다.
연이 그의 눈치를 보았다. 태협은 봤을 것이다. 칼을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내 손으로…….
“아빠를 칼로 찌를라 했어.”
이미 들켰기에 연은 고해성사하듯 조심스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마음으로는 수백 번 찌르고 싶었던 그 남자를. 이번엔 정말로 찌르려 했다.
태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연은 제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무리 미워도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래도 아빠고, 그래도 인간인데. 차라리 경찰에 신고를 하든가 내 좀 아프다고 사람을 죽일 생각부터 했다는 게…….”
연의 몸이 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생각해도, 자기 자신에 대해 반감이 일었다. 자기혐오에 빠져 연이 몸을 떨었다. 태협은 어울리지 않게 웃더니 연과 눈을 마주쳤다.
“잘했어.”
“뭐?”
태협이 연의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소름이 돋은 부분에 살결이 닿자 신경이 삐죽 솟는 기분이 들었다. 태협의 손아귀에서 힘이 느껴졌다. 마사지하듯 조물조물하자 살결이 오돌토돌하게 일어났다.
잘했다니?
“앞으로 그렇게 해.”
“…….”
“누구든 네 행복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효과가 있는 건지 연의 떨림이 서서히 멈췄다. 너무 황당해서일까. 연이 거친 숨을 헐떡였다.
“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나 쇠고랑 차면 우리 새별이는,”
“난 진심이야. 하물며 그게 나라고 해도, 넌 그렇게 해.”
미친놈인가. 상스러운 단어가 뇌를 지배했다. 어설프게 위로하는 것 같았지만 연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안도감과 고마움을 느꼈다.
연이 입술을 삐죽이자 태협이 장난치듯 연의 입술을 쭉 빨았다가 놓았다. 연의 몸이 태협을 향해 잠깐 기울어졌다가 민망해져서 고개를 당겼다.
“근데 니가 순순히 당할 애는 아니잖아.”
그렇지 않나? 배시시 웃는 연에게 태협은 칼 줄까? 했다. 연은 됐어, 하고 태협의 어깨를 치고는 수액이 들어가는 모습을 주시했다. 그리고 이거 언제 끝나? 하고 물었다. 새별이 기다리니 빨리 가야 한다며 조바심을 피웠다.
태협은 혈색이 차츰차츰 돌아오는 연의 얼굴을 보면서 남몰래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녀는 전에도 그랬듯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넘겨 버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뒤끝이 아주 긴 남자였다.
그 상종 못할 인간은 평생을 감옥에서 썩게 될 것이다. 태협이 이를 갈았다. 바득바득 소리가 전해졌는지 연이 이마를 콩 부딪쳤다.
“됐다. 괜찮대도.”
심장 박동이 천천히 정상속도를 되찾았다. 예전에는 그 말이 왜 그렇게 짜증이 났었던 걸까. 이제는 고맙기만 했다. 살아 줘서 그리고 또 버텨 줘서.
연의 조잘대는 입에 태협은 제 입을 무작정 맞추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괜찮기를, 제 옆에 살아 주기를, 하는 마음만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