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art 2-8장 (8/13)

Part 2

8장

7년 후.

새벽바람은 찬, 어느 봄이었다. 아직 겨울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오후가 되니 햇볕이 유리창을 핥듯이 내리쬈다.

칼바람을 맞으며 새벽같이 출근한 연이 작업과 판매를 마치고 한숨 돌렸다. 매대 위에는 물품이 이미 다 나가고 없었다.

연은 현재 작은 디저트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최근 입소문을 타서인지 오후 4시만 되면 진열대 위 마카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늘도 그랬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연은 집으로 가지 않고 가게에 있었다. 작은 테이블에 앉아 바깥을 감상했다. 어제 내린 비로 푸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낭만적이었다.

그때였다.

딸랑딸랑, 문이 열리는 걸 알리는 현관 종의 맑고 고운 소리가 들렸다. 한가로이 볕을 감상하던 연이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죄송하지만…….”

특유의 명랑함이 순식간에 땅에 처박혔다. 인사를 다 마치지도 못했다.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너무 놀랐기 때문이었다.

“가게 좋네.”

약간은 껄렁거리는 말투, 그에 어울리지 않는 낮고 진중한 목소리. 마카롱 가게와 영 어울리지 않는 예민함까지.

“7년 동안 숨어 있을 만큼.”

그가 이곳을 찾을 거라고는 한순간도 예상하지 못했다.

연은 당황해서 입을 반쯤 벌렸다.

“겨우 찾았네.”

남자는 긴 다리로 10평도 되지 않는 가게를 성큼성큼 가로질러 왔다. 연이 저도 모르게 한두 걸음 물러났다.

그가 다가오기에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남자의 향이 났다. 그것도 위험함을 가득 담은.

진열대가 등에 닿았다. 그사이 태협은 연의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안녕?”

태협은 꼭 어제 봤던 것처럼 정답게 인사했다. 연이 대답하지 않자 고개를 잡고 올렸다. 오래 헤매어 눈에 띄게 붉은 눈을 마주한 연은 침을 삼켰다. 그래서인지 태협은 화가 나 보이기도 했다.

연은 까끌까끌한 목을 마른침으로 축였다. 그러고서야 겨우 머릿속에 고이 모셔 놨던 이름을 말했다.

“안, 태협.”

“류소연?”

태협이 알 리 없는 연의 이름을 불렀다. 연은 긴장감에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풍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연을 압도했다.

남자는 7년이 지나는 동안 더 성숙해졌고 세월만큼 깎인 듯 예민해 보였다. 예도 잘생겼지만 지금의 골격은 완전한 남성성을 흘리고 있었다. 좁은 눈과 눈썹 사이와 강인한 턱 그리고 얄쌍하게 뻗은 코가 분위기를 한층 부각했다.

빤히 쳐다만 보고 있던 연이 정신을 차렸다. 지금 얼굴 감상할 시간이 어딨다고.

곧, 올 시간이었다. 태협이 보면 안 될 아이가. 시계를 흘끗 본 연이 짐짓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걸었다.

“잘 지냈어?”

연이 낡은 인사를 건넸다. 태협의 표정이 좋지 않아졌다. 네가 어떻게 그런 걸 물어보냐는 얼굴.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한 와중에 그 표정만큼은 익숙했다. 그는 예전에도 종종 제 말 한 마디에 그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물어보고 싶었어도 그때는 그가 늘 화를 내고 있어서 그러지를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화가 나 있었다.

“아, 내가 조금 당황해서. 여기에 찾아올지 몰랐네.”

“……”

“저기, 어떻게 알았어?”

연은 궁금했다. 여기는 어떻게 알았고 또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을까.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태협은 망설임 없이 입술을 부닥쳤다.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갈증에 시달리는 입맞춤이었다. 그것은 연이 가진 모든 것을 앗아 갈 듯이 졸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모든 것을 뺏기고 만다는 불안함과 달콤한 쾌락에 갇힌 연은 태협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나 태협은 그럴수록 더욱 몸을 바짝 붙여 왔다. 연이 무력해질 정도로 강하게 밀어붙였고, 턱을 바싹 추어올려 아프게 만들기까지 했다.

그때, 태협의 허벅지에 뭔가가 강하게 부딪쳐 왔다. 각도가 뒤틀리고 태협은 뒤를 돌았다.

“엄마를 놔! 이 나쁜 악당!”

아이의 등장에, 아니 아이가 연을 부른 호칭에 태협은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래에는 겨우 배꼽까지 오는 길이의 남자아이가 태협의 엉덩이를 주먹으로 팡팡 때리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모자라다 생각했는지 태협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도망쳐요! 엄마!”

연이 조금 당황한 눈치를 보냈다.

“새별아.”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태협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아이를 일으켰다. 태협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약간 넋이 나간 채로. 새별은 갈고리에 붙들린 생선처럼 펄떡거렸다.

“저리 가! 이 악당아!”

위협하듯 들이대는 행동에 위협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아이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엄마! 이 아저씨 누구예요?”

“그게…….”

뒤이어 해명을 요구하는 듯한 시선이 떨어졌다. 연이 그냥 아는 아저씨야, 대답을 듣지도 않고 새별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우리 엄마한테 무슨 짓이에요! 괴롭힌 거 다 말할 거예요! 경찰 아저씨한테 다 말할 거야!”

“새별아, 그만해. 아저씨가 엄마 괴롭힌 거 아니야.”

차분한 설득에도 아이는 흥분을 도저히 가라앉히지 못했다. 유치원 차를 타고 오면서부터 다 봤다. 키 큰 아저씨가 엄마의 어깨를 잡고 미는 모습을. 유치원에서 다른 아이들이 제게 대하듯 나쁘게 구는 것을 떠올렸다. 새별은 동글동글한 눈을 모나게 떴다.

“떨어져, 이 나쁜 악당아! 나가지 않으면!”

“쉬쉬.”

연은 아이의 시야를 가리고 가슴을 토닥거렸다. 심장께를 두드리는 동작이 꼭 자장가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웠으나, 태협의 마음에는 격랑이 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태협의 얼굴이 차갑게 물들어 갔다.

재회의 기쁨은 잠시였다. 왜인지 농락당한 기분. 태협은 머리를 쓸어 올리고 회한이 담긴 헛웃음을 흘렸다.

“가지가지 한다. 시발.”

“안태협!”

아이 앞에서 욕을 하자 연이 귀를 틀어막고 화를 냈다. 그게 더 화를 부르는지 모르고.

태협이 매서운 눈으로 새별을 쏘아보다가 연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의 시선만으로도 손끝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는 가늠할 수 없었다. 언제나 즉흥적이었으므로.

바짝 긴장해서 연이 새별을 당기자 그는 뒤를 휙 돌아 나갔다. 문이 쾅 닫혔다. 잘 붙어 있던 종이 무참히 떨어졌다.

태협은 타고 왔던 차에 올라타더니 쏜살같이 사라졌다. 연이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고 그 뒤를 쫓았다.

벌써 빠져나간 것인지 그는 보이지 않았다. 왜인지 모를 허망함에 연은 가게 앞에 마련된 테라스 난간에 기대었다.

심란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도 그가 아무 소란을 피우지 않고 사라진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손끝에 땀이 잔뜩 배어 있었다. 감정을 마무리하고 똑바로 섰다. 문 안의 새별과 눈이 마주쳤다.

연은 짐짓 화난 얼굴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이와 짧은 추격전이 펼쳐졌다. 그래 봤자 손바닥 안이었다. 새별은 주방에 들어가기 전에 잡혔다.

“엄마가 손님이랑 있을 때 끼어들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

연이 손빗으로 아이의 이마에 흐트러진 보드라운 머리를 정리했다. 머리를 옆으로 넘기자 귀공자처럼 생긴 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길거리에 나가면 꼭 한 번씩 아역 배우를 시켜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을 정도로 잘생겼다.

하얀 얼굴에 콧대가 두드러졌다. 두툼한 입술은 각질 하나 없이 보들보들했고 눈은 연을 닮아 처졌으면서도 쌍꺼풀이 얕게 져 흐리멍덩한 느낌이 없었다.

겉보기로는 착하고 몽글몽글해 보였지만. 새별은 아기 맹수였다.

“안 했어요!”

새별이 자신은 그런 거 모른다며 고개를 휙 돌려 버린다. 새별은 자존심이 셌다. 그것도 엄청나게. 실제로는 또래에 비해 작은 키 때문에 놀림을 받는 일이 허다해서인지, 아니면 미혼모 밑에서 길러져 놀림을 당해 방어 기제가 생긴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부정할 수 없는 유전자 탓인지. 여하튼 성격이 보통이 아니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응?”

“또 찾아오면 제가 무찌를 거예요!”

새별은 무조건 엄마는 자신이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개업한 후 별의별 일을 다 봐서인지. 아이의 성격은 더 예민해졌다.

연이 씁쓸하게 웃음을 지우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약은? 먹었어?”

“다 먹었어요.”

“시그럽지는 않았고?”

“응. 물이랑 한 번에 꿀떡해서 괜찮았어요.”

연이 새별의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새별은 이제 그런 거 하지 말라며 엉덩이 앞에서 손을 휘저었다. 반응이 귀여워서 연이 새별의 볼에 입술을 깊게 찍어 내렸다.

새초롬하게 눈을 뜬 새별이 손등으로 닦아내다가 도리어 연의 볼에 입술을 눌렀다. 연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배고프지.”

“유치원에서 간식 먹었어요. 자명이가 젤리 들고 와서 나눠 줬어요.”

“자명이가 그랬어?”

“응. 자명이는 착하거든요.”

새별이 작은 손으로 연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네 손가락 겨우 잡는 작은 손이었지만, 따뜻했다. 연이 씨익 웃고는 등을 따랐다.

그리고 조리실로 들어가기 직전, 연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연의 표정은 결연했다. 7년이 지났지만, 태협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는, 오늘 밤에 찾아올 것이다.

????????????

새별을 재워 놓은 후 연이 문을 열었다.

연이 사는 집은 가게 바로 윗집이었다. 가게에 붙어 있는 셋방살이로 시작했으나 현재는 사업이 꽤 잘되어 윗집에 살게 되었다.

사람이 세상에 나면 지 먹을 것은 가지고 나온다고, 연은 베이킹에 소질이 있었다. 게다가 알맞게 마카롱 열풍이 부는 운수도 겹쳤다.

조용히 문을 여닫은 후 도둑 걸음으로 내려왔다. 열 발자국 정도 걸은 후 가게의 보안 시스템을 해제하고 들어갔다. 영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커피 한 잔을 내렸다. 여차하면 이곳에서 새벽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가로등의 LED 빛이 쏟아졌다. 창가에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가끔 달동네가 그립기도 했다.

거기는 달이 컸다. 한눈에 볼 수 없을 만큼. 밝기야 가로등 발끝에도 쫓아가지 못했지만, 달이 풍기는 운치가 있었다.

도시는, 달빛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눈이 아픈 등들이 곳곳에서 사위를 밝히고 있었다. 달이 없어도 휘황찬란한 이곳은, 그곳만큼의 분위기는 없었다.

그때는 몰랐다. 왜 달동네인데 여기는 달빛이 비추지 않을까 원망한 적도 있었다. 달동네는 8시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 오고 나서야 알았다.

그곳의 달빛은 제힘을 다해 밝혀 주고 있었던 것을. 이곳과 똑같이 만들어 주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빛을 뿌리고 있었다는 것을.

연이 머그잔을 쥐고 웃었다. 그걸 운치라고 표현한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 아무리 과거가 미화되어도 그렇지. 긴장감 때문에 아무 생각이나 하면서 30분쯤 지났을까. 가게 문이 덜컹 열렸다.

연이 고개를 들자, 태협이 보였다. 그의 모습은 눈에 띄게 흐트러져 있었다. 살짝 술 냄새도 났다.

연이 사심 없는 투로 말하고 의자를 가리켰다.

“다시 올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어.”

태협은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시선을 보낸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이 조금 무섭긴 했지만, 태협이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연은 믿었다.

태협이 무슨 생각인지 출입문을 잠갔다.

달칵, 작은 소리에 어쩐지 공포심이 일렁였다. 긴 다리로 걸어온 태협은 연이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낮에는 너무 정신이 없어 몰랐다. 지나치게 동적인 공간에 있자니, 감정이 물밀듯 밀려왔다.

태협을 보자 감회가 새롭고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심장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떨리고 시선을 맞추지 못하겠다. 연이 긴장해서 손을 자꾸만 뜯었다.

“야.”

태협이 나직이 불렀다. 연이 용기를 내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때보다 조금 야위었지만, 그만큼 골격이 진해져 있었다. 눈도 더 매서워지고 광대 아래 파인 살이 삭풍처럼 차가웠지만, 그래서 더욱 예전 같았다. 연이 어울리지 않게 웃었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꼭 7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그치?”

연이 기분을 풀어 주려 사근사근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사투리 억양이 살짝 섞여 있지만, 서울 말투가 꽤 자연스러웠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태협은 연을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보고 있었다.

“아까는 둘 다 경황이 없었네. 그래서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반가워. 잘 지냈어?”

그러나 태협은 연을 경계하는 것처럼 쉽게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아니, 입에 담긴 말이 많은데 굴러 나오지 않는 듯 보이기도 했다.

“대답하기 싫어?”

“…….”

“아니면 내가 좀 기다릴까?”

연은 생각나면 말해, 그런 어린애 달래는 말투로 태협을 대했다. 그리고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때 깊이 들이마셨던 숨이 뱉어져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풀렸는가, 싶어 연이 적당히 질문거리를 골라 던졌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

“……김지훈.”

태협이 대화할 마음이 생겼는지 입을 열었다.

“지훈이?”

김지훈이 어떻게 했다는 건가. 더 궁금해졌다. 연도 지훈과 연락을 하고 있었다. 3년 전부터.

3년 전, 연은 달동네에 간 적이 있었다.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일부는 철거되기까지 했다. 행복수우퍼는 건물은 남아 있었지만, 문은 닫혀 있었다.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까 막막할 때, 여전히 남아 있던 진례댁의 도움을 받아 할매와 지훈이 있는 요양원을 찾을 수 있었다.

찾아갔을 때만 해도 할매는 정정했다. 그래서 연은 할매가 몇 년은 더 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끝이 다가왔다는 소식을 듣고 연은 일을 하다 말고 달려갔다.

친부모와 다름없었다. 할매는 그 시절 연의 유일한 보호막이었으니까. 그런 할매의 마지막을 지킬 수 있는 건 슬펐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더 일찍 찾아올 걸 후회하는 연에게 할매는 마지막 기운을 내서 부탁을 했다.

“빵집이나 무시긴가 할 끼라며? 이거 내가 가꼬있던 땅 문서랑 그런 기거던? 하는 데 보태라. ……근데, 할매가 부탁 하나만 하께. 내 가더라도 우리 지후이한테 한 번씩만 얼굴 비주고, 아 요양원 비용만 좀 보태도. 모자란 거 안다. 근데 부탁하께. 할매가 니 말고 누굴 또 믿겠노. 연아, 내 마지막 소원이다. 저 모지리, 니 아니면 내가 누구한테 부탁할 끼고. 어이? 알았제? 내도 눈 좀 편하게 감자.”

사실, 그 돈 없어도 연은 지훈을 잘 챙길 생각이었다.

고마움도 있었지만 지훈에게 개인적인 죄책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훈의 발작이 심해진 데는 연의 탓도 있었다. 어렸을 적 지훈은 연이 정배에게 맞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시발년, 시발년 하면서 연을 죽일 듯 패는 정배를 본 이후로 지훈은 충격이 컸는지 누군가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 울분을 참지 못했다.

가끔 방향이 엇나가긴 했지만, 연은 제 탓이려니 감수했다. 그렇게 연의 사정을 아는 할매는, 할매의 사정을 아는 연은 서로가 가진 것을 주고받으며 마지막을 맞이했다.

과거 생각을 하던 연이 현실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태협도 꾸준히 연락을 했다는 걸까.

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할매가 말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지훈이 태협을 여기로 불렀을 리는 없고. 연이 곰곰이 고민하다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훈이를 네가 어떻게.”

그러나 대화는 이어지지를 못했다.

“그 애새끼.”

“…….”

“그 애새끼, 진짜 니 애냐?”

태협이 악 다문 잇새로 말했다. 눈을 내리깔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화를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연이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디서 주워 와서…….”

“내 형편에 어떻게 애를 주워 오겠어. 내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연이 뚱딴짓소리에 어이없어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태협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래서 네 친자식이 맞다고?”

“응.”

“애비는. 그 새끼 애비는 어디 가고.”

태협은 한층 격앙된 목소리로 닦달했다. 연은 이미 예상한 질문이었지만 난색을 표했다.

“애 아빠는, 없어.”

“하.”

연은 지나치게 담담하게 말했다. 아마 태협은 화가 많이 날 것이다. 연도 알고 있었다. 이런 담담함이 그의 화를 돋운다는 걸.

일부러 그랬다. 차라리 자리를 박차고 나갔으면 좋겠어서. 그러나 태협은 그 소망을 보기 좋게 짓밟았다.

“그럼, 지금 혼자라는 거네.”

이야기는 순식간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낌새를 눈치챈 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 그래도 잘 지내니까 걱정하지 마.”

태협은 시선으로만 연의 움직임을 따랐다. 고양이가 쥐를 손아귀에 넣고 굴리듯, 평온했다. 오히려 연이 마음이 급해졌다.

“그리고, 저, 사실 나는 오늘을 끝으로 더 안 왔으면 좋겠어.”

연이 속에 숨겨 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태협이 이곳에 오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잘 지내고 있고, 너도 잘 지내는 거 확인했으니까. 서로 모른 체하고 이제 그만…….”

그러나 태협의 생각은 달랐는지 눈이 붉게 물들었다. 바깥에서 겨우 들어온 불이 그 모습을 스무 배쯤 부각했다.

순간, 연이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왼쪽 눈 아래에는 점이 하나 있었다. 원래 저런 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작은 점이었다. 정말 눈물처럼 위치해서인지 그의 강인한 이미지가 무너졌다. 모든 방어막이 사라지고 치열한 초원에 날것으로 보내진 것처럼 유약해 보였다.

“넌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거로 보이냐.”

원망이 뚝뚝 흐르는 말에 연은 잠깐 목을 쓸었다. 목소리에 가시가 돋쳐 있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그 원망이 하나둘 맨몸에 꽂혀 연은 망부석이 되었다. 하나도 괜찮지 않은 목소리로 태협은 억울함을 토해 냈다.

“그날 이후로 하루도 제대로 잔 날이 없어.”

태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연을 밀어 넣었다. 예전에는 새별과 함께 잤던 장소이지만, 지금은 자재 창고에 가까운 곳, 쉬기 위해 이불만 덩그러니 놓아둔 그곳을 어떻게 알았는지 태협은 연을 밀어붙였다.

연의 몸을 이불 위에 누이고 태협은 자신을 보라고 연의 턱을 바투 잡았다.

“죄책감에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고.”

“…….”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어, 그 인간이 팔아서 어디 시궁창에서 기어 나오지 못하는 줄로 알았어, 나를 원망하고 저주해서 내가 잠을 못 자는 거라고 생각했다고!”

태협이 스무 살 치기 어린 마음을 꺼내듯 소리를 질렀다. 연은 태협이 하는 말에 압도되어 눈으로만 그 행동을 좇았다.

“그런데 잘 살고 있는 모습 보는 내 심정은 어떤지 알아? 또 어떤 개새끼의 핏줄을 기르고 있는 네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이 어떻겠어. 그런 나한테 잘 살았다고?”

태협이 연의 어깨를 잡았다. 바싹 당기다가 옷을 찢을 듯이 아래로 끌어 내렸다. 연이 당황해서 눈을 굴렸다.

“안태협! 정신 차려…….”

태협의 눈에는 이성이라곤 없어 보였다. 불같은 잔악함만 깃들어 있었다. 연이 그의 손을 묶듯이 잡았지만, 유약한 플라스틱 수갑처럼 금방 풀어졌다.

“그때 사라진 이유가 뭐야!”

“안태협, 쫌!”

“왜 그때 나를 잡지 않았냐고.”

하지 마! 연이 울듯이 말하자 태협은 고개를 툭 떨구었다. 그리고 바람 빠진 풍선처럼 연의 어깨와 쇄골 사이에 이마를 맞대고 중얼거렸다.

“넌 뭔데, 나를 짜증 나게 하냐고.”

7년을 헤맨 태협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힘든 모양이었다.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 흔한 원망도 없었다.

그가 더는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 확신한 연이 몸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담담한 말투로 태협의 이름을 정답게 불렀다.

“협아.”

이 와중에 이렇게 친밀하게 불러도 될까 싶지만, 연은 7년 전과 다름없이 태협을 불렀다. 허파를 조이듯 연의 갈빗대를 누르고 있는 남자의 손이 약해졌다.

“미안.”

다짜고짜 떨어지는 사과의 말에 태협의 얼굴에 진한 빗금이 갔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 나는.”

연이 사과했다. 태협이 여전히 둑에 빠져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생각할 수 없었다. 연의 기억 안에서 태협은 말은 막 해도 한편으론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 같은 건 잊고 잘 살려니 했었다. 실제로 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잘 살았다.

태협의 시선이 연의 얼굴 이곳저곳을 돌아 다녔다. 그 시선으로 그는 여전히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네가 정말 잘 살 거라 생각했어. 너는 나한테 모든 걸 아낌없이 줬으니까, 나에게 미련 따윈 없을 거라고 생각도 했었어.”

연이 그의 여윈 볼을 쓰다듬었다.

“네가 아플 줄은 정말 몰랐어. 미안해.”

태협은 눈을 부드럽게 감았다. 연이 마른침을 삼켰다.

과연 나는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그는 내게 온도였다

차가운 방바닥에 자지 않아도 됐고, 외로워 뒤척이지 않아도 됐다. 그와 나누었던 대화는 격정적이었으나 평화로웠고, 뾰족했으나 따뜻했다.

“그치만…….”

그러나, 언제나 요행을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연은 자랐다. 그때만큼 어리지 않았고, 또 사람의 온기가 그리울 정도도 아니었다. 연은 지금이 좋았고, 또 지금이 흔들리기를 원치 않았다.

연이 태협의 턱을 양손으로 쓰다듬었다. 태협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약간의 틈을 벌리자 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치만, 이젠 아니잖아.”

“…….”

“이제 잘 알잖아. 좋은 기억으로 남겨 두자.”

연이 결국 그를 설득하려는 말들을 이어 갔다. 태협의 눈이 흔들렸지만 이내 입꼬리가 뾰족하게 올라갔다. 태협은 시도 때도 없이 바뀌었고 연은 그의 기분을 쫓아가지 못했다.

“결론이 섭섭할 정도로 시원하네.”

태협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눈은 웃지를 않았다. 결론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연아.”

연은 팔의 솜털이 죄다 일어나는 기분을 느꼈다. 태협은 연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제정신이 아닐 때를 제외하고.

“응.”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나 태협은 이미 그녀의 감정을 눈치챈 듯 웃었다. 그는 꼭 앓은 후 개운해진 사람처럼 연을 향해 방긋이 웃었다.

“사랑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연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거 꿈인가. 현실성 없는 약은 말에 연은 느리고 성근 숨을 쉬었다. 태협은 느긋한 얼굴로 한 번 더 충격파를 던졌다.

“미안한데,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태협은 웃고 있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스위치를 누르며 순간이 암전된 것처럼 무서웠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를 골라. 여기서 섹스를 해서 나랑 결혼하든지, 지겨운 밀고 당기기 끝에 섹스 하고 결혼을 하든지.”

태협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 순간 그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자극을 했을 때, 분을 못 이겨 자리를 박차고 나갔어야 했다. 다시 돌아올지언정.

그러나 7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는 꽤 뻔뻔해져 있었고, 그건 연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가 있었다.

“결정권은 너한테 줄게.”

태협이 선심을 쓰듯이 말했다. 그래 봤자 결과는 똑같았다. 연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대답 안 하면 바로 섹스 하고,”

“싫어!”

그제야 연이 대답했다. 여유롭게 웃은 태협이 양복 안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지금껏 꼭 쥐고 있던 것을 연의 쇄골과 가슴 그 중간 언저리에 꾹 눌렀다.

연이 시선을 내렸다. 노란 바탕에 검정 글씨가 새겨진 명찰이었다.

언젠가, 잿더미에서 살아남은 이름표였다. 연, 한 글자만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한 연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틀렸어. 네가 새야. 나 혼자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복수하듯 한 마디 던진 태협이 가게를 나갔다. 연은 벙 쪄서 숨만 토해 냈다.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쫓아나가지도 못했다.

가게를 나온 태협은 새벽의 청량하고 맑은 공기를 담뿍 들이마셨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 가게는 연을 닮아 소박하고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그리고 7년 만에 만난 연은, 하나 변하지 않았다. 동글동글하면서도 축 처진 눈꼬리도 그대로고 저를 보고 습관적으로 입술을 말아 무는 것도 그대로였다.

그가 날아갈 듯 가벼운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히죽 웃었다. 술기운은 이미 가셨다. 완벽히 제정신인 상태였다.

자꾸만 기분이 좋아서 입꼬리는 계속해서 밀려 올라간다. 사랑한다는 말을 한 직후의 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약간 미친놈 보듯 하는 시선.

연이 자신을 질리게 보는 것이 좋았다. 첫날밤을 보낸 그날에도, 갑자기 이것저것 선물을 줬던 날에도 연은 같은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보고 있자니 가슴에 남아 있는 찌꺼기를 긁어내듯 시원했다.

차에 올라탄 태협은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손짓했다. 여전히 시선은 그녀가 있을 가게에 머물렀다. 다만 거슬리는 게 있다면, 그 꼬맹이의 존재였다.

처음에는 그 바보 같은 게 어디 불쌍한 애 하나를 주워 온 것인가 했다. 알아보니 제대로 출생 신고도 되어 있고 연의 호적 아래에 버젓이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류새별. 그와 헤어진 후 2년 만에 태어난 그 애는,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연과 똑같이 생긴 남자아이였다.

얼굴에 싸늘함이 자리 잡았다. 연과 아이를 두고 떠났다는 그 남자를 찾아야 하는지, 찾아서는 어떤 시궁창으로 처넣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사이에 기사는 집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태협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섰다. 오랫동안 욕정을 참았던 아래는 쉽게 기대감을 거두지 못하겠는지 집에 도착했을 때까지 부풀어 있었다.

평소 조용하고 삭막하던 집 안에 온기와 티브이 소리가 가득했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거실로 들어가자 짝짝짝, 손바닥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귀를 따갑게 울렸다.

“잘 하십니다. 잘 해. 아이고, 팀장 되셨다고 이제 막살아도 될 것 같으세요?”

준화가 발로 손뼉을 쳐 댔다. 비꼬는 게 분명했다. 단숨에 기분이 나빠졌다. 연과의 재회의 여운도 누릴 시간을 주지 않는다.

태협은 혀를 찼다. 옆에서 온갖 말들로 비꼬는 남자를 무시하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식재료보다 맥주 등 알콜류가 더 많았다. 태협은 물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응응, 이제 대답도 안 하시고.”

“좀.”

“예, 예, 제대로 된 기업인 척 좀 해 보겠다고 마련한 봉사 활동 자리에서 장애인 멱살 잡고 뛰쳐나가셨면서요? 어이구, 내가 홍콩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뻔했어요.”

500mL 생수를 한 병 다 비운 태협이 쫑알쫑알 시끄러운 준화에게 페트병을 던졌다. 페트병이 손안에 들러붙듯이 쏙 들어가고 준화가 인상을 사정없이 구겼다.

“너 진짜 돌았니? 거기서 어떻게 멱살을 잡아?”

당시 상황을 전해 들은 준화는 자리에서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오늘은 기업이 주최하는 봉사 행사, 사랑 나눔이 있는 날이었다. 회장 대리인으로 태협과 그 밖의 홍보 모델, 직원이 요양원에 참석해서 후원금도 전달하고 일일 봉사 활동도 하는.

기자까지 초대한 완전한 보여 주기식 행사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난동이 일어났다.

“팀장님께서 나서서 사고 치고 잘한다. 어?”

“달려든 건 나 아니고 그쪽.”

태협이 어설프게 변명했다. 준화는 기묘할 정도로 소리를 올려 웃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피후원자가 먼저 태협에게 시발년 하고 소리치더니 달려들었고, 태협은 멱살 잡고 끌고 간 것일 뿐. 그러나.

“안 그래도 깡패 기업이다, 말이 많은데. 어? 이제 과거 좀 털고 가자는 자리에서 잘 하는 짓이다?”

길었던 알력다툼은, 이제 끝이 났다. 다름 아닌 태협의 부친의 죽음으로. 기업은 뒷세계와 거의 손을 털었고 그 뒷수습의 일환으로 마련한 자리였다.

기자도 참석한 자리에서 이 금수저 망나니는 사고를 쳤고, 몇 시간 동안 연락이 끊겼다. 그사이 술만 처마시고 온 기색이었다.

태협이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평소와 다르게 기운이 없어 보였다. 내심으로 걱정이 된 준화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야. 무슨 일 있었냐?”

그리고 궁금증이 일었다. 직원들에게서 들은 말은 하나같이 가십거리로 삼기 좋은 것들이었다.

“애들 말로는 아는 사람 같다던데.”

“지랄 마. 몰라.”

“그런데 걔 이름은 어떻게 알아. 심지어 자연스럽게 친한 척했다던데? 후니라고. 나한테도 화니라고 안 불러 주면서?”

“모른다고.”

“차라리 아는 사람이라고 말해.”

“몰라.”

“그리고 류소연, 류새별은 또 누군데. 회장님께 이거 보고,”

준화가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자 태협의 눈이 매서워졌다. 한마디만 더 하면 플라스틱 병으로라도 때려죽인다는 눈빛이었다.

“거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연이, 혹시 걔냐? 네가 술 마실 때마다 부르던.”

“정신 사나우니까. 꺼져.”

더 버텼다가는 위험해질 뿐이었다. 준화는 태협을 오래 알았다. 이런 눈빛을 한 태협을 건드리면, 오래전 그 미친 망나니 같은 인격이 나올 것이다. 준화가 단념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 회장님께는 네가 말하든가 해.”

태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럴 셈이었다.

“그럼 나 간다.”

준화가 거실 테이블에 널브러뜨린 종이를 주섬주섬 정리했다. 가려고 현관 쪽으로 발길을 옮겼으나 한 마디에 붙잡혔다.

“잠시.”

“왜?”

태협이 주방 방향으로 턱짓했다. 무언가를 하라는 신호는 분명했으나, 준화는 알아듣지 못했다.

“뭐? 어쩌라고.”

“냉장고에 있는 술 치워.”

“뭐?”

“정리하라고, 안에 있는 것들. 안 마실 거니까.”

준화는 손에 들었던 서류 가방을 놓쳤다. 큰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365일 술을 달고 살던 인간이 갑자기,

“금주를 한다고?”

태협은 “어서 치우기나 해.” 한마디 툭 던지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준화가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기 위해 입을 가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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