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7/13)

7장

여자애들이 화가 났을 때는 주로 어떻게 풀어 줘야 할까. 아니, 연이 화가 났을 때는 어떻게 풀어 줘야 할까. 태협은 집에 돌아오는 내내 고민했다.

저번에는 은근슬쩍, 구렁이 담 넘듯이 몸을 섞는 것으로 끝냈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렇게 풀 수 없었다. 용납이 되지 않았다.

연이 좋아하는 게 뭐더라. 먹을 것과 책, 필기구. 그리고…… 모르겠다. 그러다 연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아무거나 사고 걸음부터 옮겼다. 양손 가득 먹을 것과 연이 좋아할 만한 것을 들고 달동네 경사를 탔다.

“아.”

경사를 타다가 머릿속에 핸드폰이 스쳤다. 그것부터 사 줄걸. 그럼 어제처럼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내일 사 줘야겠다.

오늘따라 동네 초입인 행복수우퍼 앞이 부산스러웠다.

가쁜 숨을 내쉰 태협이 시선을 천천히 올렸다. 진례댁이 무서운 일을 당한 표정으로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리게따. 그냥 난리가 난기라! 두 달 만에 나타나서는 또 아부터 잡는다!”

평소 같았으면 무시하고 지나갔을 텐데 오늘따라 그 내용에 관심이 갔다. 그때 동네 사람들이 태협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그리고 태협 앞을 가로막았다. 태협이 무례하게 고개를 까딱거렸으나 그들은 오히려 손을 펼쳐 막았다.

“니 드가면 안 댄다.”

앞을 막아서는 그들은 태협을 보호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비켜,”

“안 된다니까. 아이씨들이 말리고 있으니까, 좀 이따 가라.”

“무슨 말씀인데요?”

태협이 눈을 찌푸렸다. 해명을 요구해도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알 필요 읎다. 그냥 눈 딱 감고 있어라. 5분만 이따 가라. 니 가 봤자 연이처럼 대갈통만 깨지지, 헙.”

아주머니 중 한 사람이 연이 이야기를 꺼냈고 진례댁이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이미 말이 나간 후였다. 태협의 시선이 산 끝 너머로 향했다.

“아이라! 아짐이 말 잘모댔다.”

“그, 그래. 내가 말 잘모댔다.”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들이 붙잡지도 못할 정도로 태협은 산길을 빠르게 올라갔다.

멀리서부터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가 난무했다.

“이 씨발년이 며칠 혼자 뒀다고!”

“태우지 마라! 하지 마라고!”

“아 뒤지겄다! 정배야, 정신 차리라! 아 죽는다. 하지 마라!”

“이년 뒤져도 어차피 아무도 모릅니다. 이년 죽이고! 내! 천당 갈랍니다!”

짓밟는 소리가 멀리서 들릴 정도였다.

“이 미친년이 교복? 니 주제에 교복이 가당키나 하드나? 그리고, 그리고 이 옷들은 뭔데, 니, 몸 팔고 댕기제! 그럼 화대 벌었을 거 아이가! 돈 내놔라! 돈!”

태협이 문을 끽 열었다. 시야에 들어온 모습은, 참혹했다. 사 준 옷과 학용품들이 죄다 드럼통 안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연은 남자의 허리를 감싸 쥔 채 몸을 말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하고 눈이 멀어 버린 기분이 들었다. 마당에 있는 누구도 그런 태협을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니 언제 팔아 뿔라고 했거든? 밥만 축내고 하는 일 없는 거 없어도 내가 고운 마음으로 키워 줬드만, 아악!”

태협이 불길이 있는 방향으로 정배를 밀었다. 드럼통이 넘어가고 타고 있던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남자가 불 위를 굴렀다. 바로 일어나지 못해서 순식간에 옷에 불이 붙었고 남자는 고통을 호소했다. 몸을 흙바닥에 본능적으로 뒹굴었다. 그사이, 태협은 친히 불을 꺼 주겠다는 듯 남자가 있는 곳을 밟아 재꼈다.

“미친 새끼! 니 뭐꼬!”

한참을 맞던 남자가 그래도 맷집이 있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협의 어린 티가 나는 얼굴을 뜯어보더니 음흉히 웃었다.

“니가 이 시발년 따뭇나? 아이네. 콜때기네. 데빌러 왔나? 내가 얘 애비 되는 인간인데 누구 마음대로 데리가라드노? 화대를 줄 거면 나한테 줘야지 어? 마담 불러라!”

정배는 그래 봤자 어린놈이라고 생각했는지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태협은 분을 참지 못하고 남자를 있는 힘껏 때렸다. 누군가 태협을 말리려 했지만, 말릴 수 없었다. 그래 봤자 덜 여문 아이라고 무시했던 정배는 버티기 힘들어 신음만 내뱉었다.

태협은 사람을 죽일 생각인지 머리를 집중해서 가격했다. 남자의 얼굴이 피떡이 되자 여린 팔이 태협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하지 마라. 협아, 하지 마라.”

한동안 계속되다가 태협이 연의 발을 밟고서 두 사람이 동시에 넘어갔다. 다시 일어서려는 태협의 눈에 흐트러진 연의 얼굴이 보였다.

온통 눈물이 범벅이고 뺨에 손자국이 선명했다. 연은 태협의 손목을 겨우 두 손으로 잡은 채 울고 있었다. 드디어 우는 모습을 본 태협이 웃다가 몸에 힘을 풀었다.

꼴린 건 울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냥,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한쪽 얼굴이 부풀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연이 소라게가 얼굴을 감추듯이 고개를 반쯤 숨기고 태협의 허리를 온 힘을 다해 껴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였다.

“하지 마라. 죽이면 안 된다.”

그건 정배를 걱정하기보다 태협을 걱정하는 말에 가까웠다.

“따라와.”

태협이 겨우 움직임을 멈추고 연을 끌었다. 가는 중에 기사를 불렀다. 내려가는 길에 마주친 동네 사람들은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어서 사라지라는 것처럼 길을 텄다.

호텔로 직행한 그는 룸에 들어서자마자 연이 입고 있는 옷을 몽땅 벗겼다. 온몸이 푸른 멍이었다. 태협이 손을 가져다 대자 연은 아픈 듯 움찔댔다.

“미친.”

태협이 눈을 질끈 감았다. 두고 볼 수 없었다. 기분이 꼭 시궁창에 빠진 것처럼 참담했다. 그러나 최악에 또 최악의 모습만 보여 주는 연만큼은 아닐 것이다. 연은 얼굴을 가린 채 내놓지를 못했다.

폐가 아플 정도로 숨을 들이켠 태협은 숨을 죽이고 터트리듯 내뱉었다.

“나랑 서울 가.”

이런 곳에 혼자 둘 수 없었다. 연도 그렇게 할 거라 생각했다. 당장 가자고 떼나 안 쓰면 다행이지. 그러나 마른 눈물을 닦은 연은 다른 대답을 했다.

“내가 서울 가가 뭐 하겠노.”

그리고 지금 일이 아무것도 아닌 양, 눈물을 닦아 내고 상처를 감추려는 듯 옷을 입었다. 태협은 예상을 벗어난 상황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서 할 거 없어도 가라고. 도망치라고, 이 시궁창에서.”

“도망도 디딜 땅이 있어야 가는 거지. 나한테 그런 게 어딨는데. 내 뒤는 절벽이다.”

암 것도 없다. 씁쓸하게 대답하는 연을 잡아당겼다. 연이 아픈 것도 잊어버린 채 태협은 어깨를 꽉 눌려 눕혀 놓았다.

“내가 되어 준다고. 디딜 땅이든 뭐든, 내가!”

“개안타, 협아.”

눈을 마주친 연이 발갛게 물든 볼을, 상처 나 터진 입술을 드러내고 웃었다.

“웃지 말고! 시발!”

아릴 정도로 입꼬리를 당겨 웃기에 경고했다. 멋쩍어하던 연이 이번에는 말로 속을 뒤집어 놓는다.

“니 할아버지가 서울 오라 카드나?”

“가자고.”

“언제 갈 낀데?”

“같이 가자고.”

“가면 말해 준다 했디?”

연은 말을 돌릴 목적이 있는 것처럼 동문서답했다. 서로의 표정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다행이라 느껴야 할까.

연은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개안타. 내는 여가 좋다. 말만 들어도 고맙네. 니는 아가 착하긴 하다. 말만 좀 예쁘게 하믄,”

대책 없는 긍정, 아니 무심함에 태협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픈 걸 알고, 조금 더 소중하게 대해야 하는 것도 알지만, 그러지 못했다. 태협이 이를 깍 물었다.

“그럼 나 너 버릴 거야.”

“…….”

“서울 가면 너 버릴 거라고. 안 찾아오고 생각도 안 할 거라고. 그러니까,”

따라오게 만들기 위해 나름 강수라고 두었지만,

“그래도 개안타.”

연의 말에 모든 게 무력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미친, 태협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되는 대로 지껄였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어느 것 하나 괜찮지 않을 것 같은데. 지는 뭐가 이렇게 다 괜찮다고 하는지.

“내는, 그런 거 익숙하다.”

세상에 이 말보다 더 짜증 나는 말이 있을까. 태협이 눈을 부라리고 연의 멱살을 쥐었다.

“그냥 잡으라고! 못 이기는 척 잡으라고! 내가 잡혀 줄 테니까!”

태협은 목에 핏대를 세워 발악했다.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마저 남은 자존심까지 모두 다 깎여져 버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태협이 울부짖었다.

“그냥! 잡으라고!”

공허한 외침이 계속됐다. 처절한 그날의 관계는 연이 지칠 때까지 계속됐다. 그러니까 전신의 푸른 멍을 보면서. 잡을 곳 없는 처절한 행위는 붙들려 저를 따라간다고 할 때까지 계속됐다.

????????????

등에 푸른 멍은 가실 즈음, 태협이 연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이제는 한시라도 연락이 안 되면 불안했다. 그러니까, 따지자면 태협 본인을 위한 선물과 다름없었다.

연이 입꼬리를 내리고 숟가락도 내리고 한 손으로 냉큼 받았다.

“오와. 이거 내 끼가?”

핸드폰을 보고 연은 눈을 반짝였다. 그 정체를 모르지는 않았다. 태협은 줄 듯 말 듯 하얀 손바닥을 핸드폰으로 툭툭 치다 내려놓았다.

“어.”

연은 핸드폰 모양을 확인했다.

“니 꺼랑 같은 거 아니가?”

“더 좋은 거.”

따끈따끈한 신상이었다. 글나? 연이 꺄르르 웃었다. 순순한 모습에 태협도 꽤나 만족스럽게 반응했다.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달라는 말에 핸드폰을 조작하는 방법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리고 가장 처음 무엇을 하겠냐고 물었다.

연은 핸드폰 조작에 신경을 집중하다가 고개를 바짝 들었다. 태협은 대답을 은근히 기대하는 기색을 비쳤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연의 입이 드디어 벌어졌다.

“할매한테 전화해서 오늘 부업거리는 머가 있는지 물어,”

“야.”

선물해 준 보람이 없는 말이었다. 무심함에 서운할 즈음 태협이 조그맣게 말했다.

“다른 사람 말고 나랑.”

연이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팔꿈치로 태협의 어깨를 밀었다.

“머심아, 서운한 것도 많다.”

“…….”

“내는 니 그런 거 안 좋아하는 줄 알았다이가.”

“…….”

“아! 내는 니랑 사진 찍고 싶다.”

연이 태협의 곁으로 바싹 붙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되는데?” 묻고 핸드폰을 내밀었다.

태협은 연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한 손으로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안쪽 카메라 화면이 전면에 떴다. 은근히 사진 찍는 것에 약한 태협이 연의 모습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흘끔댔다. 수줍었다. 수줍은데, 그 마음에 연이 불을 지피고 바람을 퍼 날랐다

“내 몰랐는데, 니랑 내랑 쪼매 닮은 것 같지 않나?”

연이 화면을 가리켰다. 태협이 시선이 제대로 꽂히자 연이 태협과 닮은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일부러 입을 내밀고 오른쪽 눈썹 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화면을 통해 보니 정말 닮았다. 태협이 헛기침을 하고 대충 촬영 버튼을 눌렀다.

“아, 뭐 이래 대충 찍는데.”

결과물을 확인한 연이 어이없음을 토해 냈다. 살짝 흔들린 데다가 두 사람 모두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태협은 화면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다시, 다시. 매매 해라. 매매.” 연이 똑바로 하라고 말한 후 핸드폰을 건네 협박했다.

“함만 더 찍자.”

“싫어.”

“아, 함만 더 찍자고.”

연이 졸라도 태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밥이나 먹자며 시선을 돌렸다. 태협은 정말로 찍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핸드폰을 들고 동분서주하던 연이 지쳐 잠에 빠졌다. 팔베개를 하고 여린 몸을 끌어안고 있던 태협이 연이 잠든 사이 눈을 떴다. 연의 핸드폰을 슬쩍 들고 갤러리로 들어갔다.

그사이 상당한 양을 찍었는지 온갖 것들이 찍혀 있었다. 하다못해 방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페트병과 다 쓴 연탄 같은 것들도. 그리고 태협의 사진도 있었다. 태협이 언짢아 눈매를 칼처럼 갈았다.

하나같이 못 나왔다.

제 눈에는 이렇게 못나게 보이나 싶었다. 잘생겼다고 하더니.

불만을 가진 채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첫 사진은 딱 한 번 찍었던 태협과 연의 인물 사진이었다. 태협은 못 나왔을지언정 연은 예쁘게 나왔다.

설핏 웃은 태협은 제 핸드폰에 그 사진을 전송하고 자리에 누웠다. 당연히, 보낸 기록은 지웠다.

????????????

상처는 모두 사라졌다. 뽀얀 얼굴의 연은 최근 품에 안기 벅찰 정도로 몸이 따뜻했다. 몇 시간 전에 일어난 태협은 연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시간은 잘 갔다. 태협은 가는 줄을 몰랐지만. 그는 만족스럽게 어깨를 감쌌고 그 때문인지 연이 눈을 떴다. 눈이 마주치자 연은 태협의 판판한 가슴에 기어 올라와 뺨을 댔다.

끊어질 듯 얕은 숨결이 닿자 아랫배가 욱신댈 정도로 불편했지만, 이 작은 평화를 깨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연이 불현듯 생각난 것을 이야기했다.

“아! 내 검정고시 볼 끼다.”

“검정고시?”

“어. 아짐들이 그라대? 학교 안 다녀도 검정고시라는 게 있다고. 그래서 내 그거 해 볼라고.”

연은 “내 쫌 도아도라.” 조잘조잘 떠들어 댔다. 태협이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정고시라면 나쁘지 않았다.

“먹고 노는 김에 그런 것도 해 놔.”

연이 눈을 부라렸다.

“나 안 놀았그등? 공부 열심히 했그등?”

주먹으로 태협의 가슴을 통통 때렸다. 태협은 믿어줄게, 새침하게 말하고 주먹을 잡고 손등을 이불에 넣고 가만히 문질렀다.

손등에 그것이 닿았지만 연은 모른 척했다. 태협은 연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잘하라고 하면 힘이 날 것 같은데…….”

간절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태현은 잘하라고, 한마디 했다.

연이 뽀샤시하게 웃었다.

“암만. 잘할 끼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글면……. 오늘 나가서 책 사도.”

연의 제안에 태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가자며 연이 일어났다가 눈을 찌푸렸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색이 되어서는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했다.

“왜?”

태협은 연이 최대한 그 집에 안 갔으면 하고 바랐다. 필요한 건 여기 다 있었다. 그 집에 갈 이유가 도대체 뭔지.

“아, 니는 몰라도 된다. 쨌든, 준비하고 있어라.”

연은 기어코 떠나갔다. 지도 여자라고 꾸미려나 보다. 생각한 태협이 웃음을 띤 채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꾸민 다음 향수로 갈무리를 할 때 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를 돌려 사람을 확인한 태협의 눈이 곧 커다래졌다.

연이 아닌 준화였다.

준화는 급한 얼굴로 태협을 찾다가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까딱거렸다.

“놀러 가니?”

태평스럽게 거울을 보고 있는 태협이 한심한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뭐야.”

“나와. 가야 하니까.”

준화 뒤에 있던 덩치들이 태협의 입을 막은 채 끌고 갔다. 태협이 발버둥 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파란 대문을 지나가는 때, 마침 연이 입을 가린 채로 제집에서 나왔다.

발을 끄는 소리에 태협이 연이 있는 쪽을 다급하게 보았다. 연은 놀라 굳은 채 서 있었다. 태협이 빠져나가려 발악했지만, 몸이 단련된 덩치들에 의해 그럴 수 없었다. 말들이 두꺼운 손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때 연이 태협과 눈을 마주쳤다. 뿔이 잡힌 황소처럼 반항하던 태협이 한순간 죽은 듯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고 가슴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에게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그리고 속삭였다.

“잘 가. 협아.”

태협의 눈에는 잠깐 이슬이 비췄다.

“서울 가면 너 버릴 거라고. 안 찾아오고 생각도 안 할 거라고. 그러니까,”

“그래도 괜찮다. 내는, 그런 거 익숙하다.”

그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분명 자신이 연을 버리고 서울을 가는 것인데, 본인이 버려졌다는 생각을 했다.

한 걸음만 다가와 줬다면, 이름을 불러 줬다면 이렇게 서운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심장이 질주한 것처럼 바쁘게 뛰고 몸에 힘이 빠졌다. 움직임이 잦아들자 그들은 태협을 수월하게 끌어갔다.

태협이 고개를 숙였다.

연과 다르게 그는 이별에 익숙하지가 않았다.

타의로 차에 태워진 태협은 즉시 공항으로 가게 됐다.

“회장님 깨어나셨고, 너희 아버지 뒤지게 깨지게 생겼어…….”

준화가 가는 길에 상황을 설명했다. 가장 불편한 자리에 앉은 태협은 몸을 숙인 채로 있어 듣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야, 듣고 있냐? 너는 바로 서울로 가서,”

“형님.”

오른쪽에 있던 남자가 준화의 말을 끊었다.

“도련님 상태가 삐꼬롬한데, 갠찮겠습니까?”

준화가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야. 불러도 태협은 심장을 쥔 채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준화가 머리를 잡고 들어 올리니, 얼굴에 땀이 범벅인 채 태협이 넘어갈 듯 숨을 쉬고 있었다.

“야!”

언성이 높아지고, 양옆의 두 사람이 태협을 흔들었다. 준화는 태협이 이런 잔꾀를 부리는 성격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아플 리가 없었다……. 그 순간 태협의 지병을 떠올렸다.

운전하던 남자가 다급히 물었다.

“더 가면 고속도로인데. 어떻게 할까요?”

“젠장!”

“어떡할까요? 형님!”

“뭘 물어! 애부터 살려야 할 거 아니야! 시간 없으니까, 바로 병원으로 가.”

????????????

태협이 눈을 끔뻑거렸다. 하얀 천장에 떠오르는 기억을 하나하나 그려 보았다. 차에 태워졌고 심장이 불규칙적인 박동으로 아팠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병원에 왔다는 사실까지 기억해 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링거 바늘을 뽑은 태협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났을까. 택시 기사에게 물으니 3일이 지났음을 알려 주었다.

곧장 태협은 달동네로 향했다. 존재감을 알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정신을 혼몽하게 만들 정도였다. 고동 소리가 꼭 살아 있다는 울부짖음 같기도 하고 불안함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했다.

태협이 등장하자 달동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니 여이 남친 아이가. 어째 왔노. 얼굴은 와 이라는데……. 야야! 어디 가노! 아이고, 이게 문 일이고.”

끌려가는 것까지 봤던 사람들이 태협을 조금은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태협은 시선을 헤집으며 걷고 또 걸었다. 결국엔, 달동네의 가장 끝, 파란 대문짝이 인상적인 그 집 문을 열었다.

온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황량했다. 멈춰 서서 억지로 침을 삼키자 목에서 비릿한 쇠 맛이 났다. 바닥에 널린 것들을 확인하는데 눈앞이 아찔했다.

바닥에는 태협이 그동안 연에게 사 주었던 책과 핸드폰이 차곡차곡 올려져 있었다.

연이 있어야 할 자리에 대신 놓여 있었다. 그 위엔 그사이 많이 정갈해진 글씨가 찢어진 종이 위에 쓰여 있었다.

[태협아, 나도 잘 살게.]

“하.”

태협은 숨을 토했다.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이 씨발.”

너무 화가 나서, 아니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눈물도 안 나고 웃음만 났다. 문득, 그날 잿더미가 된 옷 사이에서 그나마 멀쩡했던 교복이 보였다. 그을렸지만, 형체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걸 또 주워 온 모양이었다.

궁상맞다 욕을 늘어놓으려다 명찰을 발견했다. 명찰에는 연, 겨우 한 글자가 쓰여 있었다. 옷에 붙어 있던 그것을 떼어 낸 태협이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세게 쥐었다.

꼭 술래잡기하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멍청이가.”

못 찾을 리 없었다. 연은 가릴 데 없이 드러난 소녀였다. 아름다움은 어디든 자취를 남긴다.

태협이 도망가는 그 등을 떠올리고 흥분했다. 시연은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름도 거주지도 아니까. 추적은 금방이었다. 다만 조금 걱정되는 건 혹시 그의 아버지에 의해 팔려 가서 고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래도 찾아내겠지만. 찾아서 제 곁에 두겠지만.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려가는 길에 행복수우퍼가 눈에 띄었다. 혹시 저기에 있진 않을까. 태협이 미닫이문을 거칠게 열자 할매가 튀어나왔다.

“그래 가꼬 빠사지것냐! ……머고. 니.”

불호령을 치던 할매는 태협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니가 우짠 일이고. 가시나가 니 서울 갔다드만, 와 여 있는데.”

할매는 퉁명스레 말했다. 태협은 흐려져 가는 정신을 티 내지 않으려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속에서 쓴물이 올라오려는 걸 겨우 막고 물었다.

“시연이 어디로 갔습니까?”

“누구?”

할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 본다는 얼굴이었다. 답답해서 짜증이 난 태협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런 설왕설래를 할 시간은 없었다.

“시연이요. 연이.”

“왐마.”

할매가 웃음기를 더해 탄식했다.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기는 듯 보였다. 도대체 즐길 데가 어딨다고. 태협이 발끈하려는 걸 눈치채고 할매가 “우습다, 우스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년이 지 이름이 시연이라 카드나? 그년도 참 요물이제.”

그리고 할매는 태협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줄줄 내뱉었다.

“갸가 이름이 어딨노. 출생 신고도 안 돼 있던 년한테. 이름?”

이름은 에라 개콩이다! 할매는 누군가를 비난하듯 소리를 높여 웃었다. 태협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몸이 생각만큼 움직이지 않았다. 발이 돌이 된 듯 무거웠다.

겨우 입만 뗐다.

“출생 신고가 안 되어 있다니…….”

“애미는 낳자마자 버리고 가, 그나마 있던 애비가 출생 신고 안 해서 주민등록 번호도 없다. 애초에 없는 아라고.”

“…….”

“그래 가꼬 학교도 못 가, 아파도 병원도 못 가고 골골골 누워만 있는기라.”

“연이,”

있는 연이를 왜, 없다고 말하는지. 태협은 이 상황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연이 아니라면, 연은 왜 자신을 연이라고 소개한 걸까.

할매가 답을 알려 주었다.

“것도 걍 맨날천날 지 애비한테 시발년 시발년 하면서 처맞아가 불쌍해 가꼬 우리가 연이, 연이 불러 줬던 거지, 지 이름은 읎다.”

“그러면 진짜 이름은 뭡니까.”

“지금까지 뭐 들었노? 이름 없다고. 아니지, 지는 알 거 아이가. 니는 모리나? 붙어 다니드만, 그런 이야기도 안 해 주더나.”

그년 참 꼬롬하다 꼬롬해. 비꼬는 말에는 안쓰러움이 더러 들어 있었다. 그래도 누구보다 정이든 건, 연이 서너 살 때부터 먹여 키웠던 할매였다.

할매가 가물가물한 기억 중, 선명한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태협이 끌려가고 시정배 그 인간이 다시 집 안을 뒤집었다. 연은 그다음 날 새벽녘 조용히 찾아왔었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왔는지 연은 동네를 떠나겠다는 말을 했다.

“할매, 연이 가요.”

“갈 데는 있나.”

“읎지. 그런데, 여 있으면 죽을 것 같아서 갈라고.”

연은 뺨에 보라색 물을 들인 채 웃었다. 할매는 드디어 그 집구석을 벗어난다는 연을 말릴 수 없었다. 오히려 후련해서 손을 내저었다.

“그래. 가서 잘 살고.”

“할매. 내 자리 잡으면 데빌러 오께.”

“지럴. 니나 잘 무꼬 잘 살어. 인사해도, 안 받아 줄 거니까.”

서운해서 그런 말을 했다. 너무 아프게 밝아서. 그나마 줄 거라곤 가게에서 파는 쪼가리들이 전부라서, 미안해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할매는 핏기가 아예 가신 태협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니도 걍 알라 카지 마라.”

시선이 돌아왔다. 텅 빈 시선이었다.

“그냥 니는, 니대로 살아라. 눈알 몇 개 터진 채로 갔어도,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그걸 위로라고 하는지……. 황당한 마음에 헛웃음이 날 정도였다.

그때 지훈이 깼는지 뒤에서 앙알댔다. 할매는 “우리 손자 일어났나.” 하며 달랬다. 태협은 더 듣기도 싫어 나왔다.

“달동네 이름은 왜 달동네인 걸까. 정작 달동네는 달이 비추지 않는데.”

언젠가 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처럼 달동네는 암흑처럼 휩싸여 있어 한 치 앞을 볼 수 없었다.

행복수우퍼의 낮은 계단을 걸어 나오던 태협이 자리에 쓰러졌다. 전신에 힘이 쭉 빠지고 눈앞이 까맸다.

버틸 재간이 없었다.

연의 말이 맞았다.

결국, 달은 우리를 비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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