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6/13)

6장

태협은 최근 잠자리 이외에서 연을 괴롭히는 일에 흥미를 붙였다. 정확히 말해서는 자존심을 긁고, 연의 반응을 보는 일에.

틀릴 때마다 옷 벗기는 게임, 연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질스러운 게임을 하지 않아도 연의 얼굴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시시각각 변했고, 태협은 그것을 즐겼다.

그 반응을 구경할 수 있는 마법의 단어가 하나 있었다.

“너 바보냐?”

이 한 마디면 연은 이를 악물고 죽을 둥 살 둥이었다.

국어에 이어 수학도 가르쳤다. 며칠간 덧셈 뺄셈을, 다음 며칠은 구구단을, 오늘은 평면도형을 끝냈다. 연은 주야장천 공부했다.

그러나 며칠간 무리를 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기어코 소수의 계산을 다 때우고 자겠다던 연은, 저녁을 먹은 직후 꾸벅꾸벅 졸더니 10시가 되기 전에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깨울까, 잠시 고민하던 태협은 평온한 모습을 감상했다. 새근새근 자는 모습이 꽤, 예뻤다. 결국, 놓아두기로 하고 집을 빠져나왔다.

달동네라 딱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평상에 앉아 바람을 쐤다. 부산 날씨는 서울보다 따뜻하다고 들었지만, 달동네는 예외였다. 산에서 내려오는 건조하고 찬 바람은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추웠다. 그래도 나름 볼만한 것은 산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이었다.

고지가 높다 보니 어디를 가든 분위기는 예뻤다. 서울처럼 번쩍번쩍하고 높이 있는 건물들도 많았다. 처음에 얼마나 불만을 느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태협은 이곳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때 태협의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어머니였다.

“예, 어머니.”

태협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 응, 태협아. 잘 지내고 있지?

수화기 건너편 목소리는 좋지 않았다. 모친은 여전히 아들이 달동네로 쫓겨난 것이 슬픈 모양이었다. 반면 제 목소리에는 약간의 즐거움이 가미되어 있을 것이다. 태협이 들킬까 봐 목소리를 일부러 내리깔았다.

“예, 괜찮아요.”

- 아픈 곳은 없고?

“네.”

- 그래, 없으면 다행이다.

“왜 전화하셨어요?”

대화 내용이 늘어지자 태협이 용건을 물었다. 주저주저하는 것에서 용건이 예상 간 태협은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합의에 진전이 없는 듯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 의견 대립이 있었다.

지금에야 대한민국이 인정한 10대 기업 중 하나지만, 조부가 부산을 중점으로 둔 조직 폭력단 매화파의 두목이란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고리대금업으로 사람들 피를 빼먹고 상인들의 푼돈을 뜯으며 돈을 벌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고, 조부는 돈의 흐름을 금방 읽어 냈다. 주먹으로 푼돈을 버는 대신 머리를 써서 돈을 벌기로 했다. 사업 수완은 좋았는지 버젓한 기업 하나를 인수한 후 문어발식으로 운영하여 대한민국의 10대 기업으로 올려놓았다.

그 기업은 부친이 물려받아야 했지만, 조부는 영 부친을 못 미더워했다. 부친은 조부와 비교해 사업 능력도 리더십도 없었다. 성정 자체가 방종하기도 하고 능력이 안 되는 부친은 보다 불법적인 일에 손을 뻗었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여전히 기업을 주먹으로 탈취하고 주가 조작 등 범법을 서슴지 않고 최대한 돈을 끌어모았다.

조부는 그런 아들이 탐탁지 않았다. 이미 10대 기업이고 기저에 깔아 둔 돈이 어마어마했다. 암흑가와는 완전히 분리된 번듯한 기업을 물려주고 싶어 했지만, 아들은 이 돈과 검은돈을 모두 포기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기업 내부에 두 가지 세력이 생겼다. 조부를 따르는 정상적인 기업 임원, 그리고 부친을 따르는 암흑가에 발을 걸친 임원.

태협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고 있지만, 조부의 의견과 결을 함께했다. 태협은 조직의 일을 구태여 양지로 드러내어 오명을 쓰고 싶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부친은 아들이고 가족이고 없었고, 급기야 조부를 위협했다. 태협이 내려오기 2주 전, 조부의 오른팔이 피습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명백한 도발 행위로 부자간의 관계는 틀어질 대로 틀어졌다. 궁여지책으로 어머니가 중간 다리 역할을 했지만, 서재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게 더 상황의 악화를 가져왔다. 그날 큰 소리가 난 후 태협은 곧바로 부산으로 보내졌다.

조부는 태협을 아꼈다. 반면 부친은 아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경쟁자로 보기도 했다. 아마, 제 목숨을 가지고 협박을 하지 않았을까. 태협은 비정한 아비의 지극히 비정상적인 행동을 금방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밤늦게 전화라니. 어딘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무슨 일 있어요?”

태협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그러나 모친이 알려 준 이유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 아니. 할아버지가 화가 많이 풀리셨어. 조금만 더 참으면 돼. 더 참으면 서울로 올라올 수 있을 거야.

모친은 약간 뜸을 들였다. 조금 수상했으나 태협은 눈치채지 못했다. 왜냐하면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다름 아닌 저 자신에게.

이곳을 떠날 생각을 하면 기뻐야 할 텐데,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 듣고 있니?

한동안 대답이 없자, 걱정스러운 음성이 핸드폰 건너에서 들려왔다. 보이지 않겠지만 괜히 태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잘된 일이네요.”

- 그렇지? 할아버지가 너를 가장 아끼셨잖아.

“네.”

- 그런데 부산이 좋은 거니? 한 번을 올라오지 않고. 언제 올 생각이니?

태협의 모친은 서운한 마음으로 물었다. 태협도 기분이 우중충 가라앉았다. 모르겠다.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헷갈리고 또, 혼란스러웠다.

“모르겠어요.”

- 몰라?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친이 태협을 다시 부르고야, 태협이 정신을 차려서 찝찝한 대답을 내어 놓았다.

“아니요, 곧 올라갈게요.”

- 그래, 그리고 태협아.

전화를 끊으려는 태협에게 모친은 할 이야기가 남은 듯 불렀다.

- 준화가 곧 찾아갈 거야.

모친의 목소리가 곧 죽을 듯 낮아졌다. 준화는 태협이 오래전부터 믿어 온 형이자, 할아버지와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곳으로 올 때 모든 일을 진두지휘한 사람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구나. 태협은 마음속에 겨우 뭉쳐 두었던 평화가 흩어져 날아가는 기분을 받았다.

“예, 알았어요.”

- 그래, 좋은 꿈 꾸고, 따뜻하게 지내렴.

네, 짧게 대답한 후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자리에 누웠다. 하늘과 가까워서 그런지 유난히 별이 크게 보였다. 동시에, 눈이 아렸다. 찬 바람이 눈을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 언제 올 생각이니?

왜 나는 한 번에 대답을 못 했을까.

“조금만 더 있다가.”

조금만 더 있다 가고 싶었다. 그 애한테 질릴 때까지만 있다가.

문득 그 애한테 질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한 달을 예상했다. 그런데 두 달이 되었고, 여전히 새롭고 또 재밌었다.

얼마 전, 연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 연은 창문 사이로 달을 보면서 태협에게 물었다.

“와 달빛에는 온도가 없는데?”

“있는데.”

“대포 까지 마라. 안 따숩거든.”

“달은 태양처럼 핵융합을 통해 빛과 열을 내는 항성이 아니더라도 일정한 온도를 내뿜고 있어. 멍청아. 우리가…….”

“진짜 니, 내 말에 하나하나 대꾸하지 마라. 콱, 쥐어박아 뿌고 싶다.”

연의 경고에 태협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조용해지자 연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적당히 뜨시면 사람들이 밤을 더 좋아할 거 아니가.”

“쟤가 사람들 사랑받으려고 태어났겠냐.”

“그랄 수도 있지. 좀 따수벘으면 좋을 텐데.”

태협은 참지 않고 놀렸다.

“그리고 저 거리에서 열 내면 지구엔 생명체가 못 살아. 타 죽어.”

감성을 헤치듯 따박따박 따져 말했다. 실은, 달빛이 스민 얼굴이 외로워 보여서 신경을 돌리기 위해 긁었다. 이런 방식밖에 모르는 게 멋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태협에게는 최선이었다.

“못 살아?”

“어.”

그때 못 산다는 말을 곱씹던 연은 고개를 돌렸다.

“맞나. 그러면 니도 몬 만났겠네.”

어쩌다 논리가 저리로 빠졌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번에는 태클을 걸지 못했다. 연은 유난히 깊은 생각에 빠진 듯이 보였다.

피부를 벨 듯이 바람이 냉랭했다. 오늘 보니 그랬다. 달도 조금만 더 따뜻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따뜻하기는 지랄.

태협이 혀를 쯧 찼다. 그 애한테서 옮은 게 분명했다. 태협은 최대한 생각을 지우고 문을 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간 태협이 흠칫, 다리를 끌었다. 자고 있어야 할 연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연은 정리할 새도 없이 물었다.

“갈 끼가?”

전화 내용을 들었나 보다. 그나저나 또 저 질문이다. 제가 가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고 매번 신경을 곤두세우는지. 태협은 짜증이 난 말투로 대답했다.

“가길 바라냐?”

태협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생각한 대로 ‘곧 갈 거다.’라고 말해도 됐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도 모르는 탓이었다. 언제 질릴지. 갈 것인지 아니면 조금 더 남을 것인지. 조금 더 남는다면 그게 언제인지, 혹은 연이 질리긴 할 것인지.

겨울이 지나 봄이 코앞까지 다가왔으나, 도저히 답을 알 수 없는 물음투성이였다.

????????????

학교에 들어가자 아이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평소엔 경외의 표정으로 봤다면, 오늘은 약간의 비웃음이 달려 있었다.

자리에 앉자 그의 가방을 누군가 엉덩이로 깔아뭉갰다. 태협의 눈이 구겨졌다. 시선을 올리니 다부진 체구의 살덩어리가 있었다.

그것도 제 반만 한 덩치 5명을 거느린.

“야.”

그가 태협을 불렀다. 태협이 시선을 맞추자 남자는 더욱 요란하게 껌을 짝짝 씹었다.

“우리 귀공자님.”

“시발, 서울이나 부산이나.”

공자에 ‘귀’가 붙은 것이 어이없어 태협은 웃었다. 킥킥 비웃는 소리에 남자는 기분이 나빠졌는지 태협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너 웃냐?”

태협은 어깨를 으쓱였다. 얄밉게 놀리는 반응에 상대는 우위를 선점하는 걸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는지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니 달동네 산다며.”

망신을 주려는 것인지 낄낄거렸다. 태협은 놀라긴 했지만, 머지않아 수긍했다. 실제로 거기 살기는 하지만, 잠시 머물다 가는 처지인지라 타격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살긴 하지.”

태협의 순순한 반응에 남자는 봤냐? 봤냐? 하며 아이들을 선동했다. 그들은 달동네 하나로 끝났다는 듯 수군거렸다. 기세등등해진 상대는 태협의 멱살을 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시바, 어디서 굴러먹다 들어온 개 뼈따구 새끼가 센 척하길래, 난 니가 돈이 존나 많은 줄 알았어요, 이 시발로마.”

태협이 단숨에 남자의 손날을 쳐서 멱살을 풀어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옷에 자국이 선명했다. 옷을 탈탈 털어 낸 태협이 물었다.

“그런데?”

“뭐?”

“어쩌라고.”

“이 그지 새끼가. 끝까지 있는 척 꼴값을 떠네?”

그지 새끼라는 노골적인 표현에 태협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눈은 전혀 웃지를 않았다.

“내가 그지 새끼면 뭐가 달라지냐? 돼지 새끼야?”

태협이 유치하게 받아치자 남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남자 고등학생의 기 싸움은 대부분 이렇듯 유치했다. 누가 더 유치하게 상대를 긁느냐의 문제였다.

덩치가 낮게 욕을 뇌까렸다.

“이 시발 새끼가”

“내가 너보다 좀 못나 보이는 게 하나 생긴 거? 그래 봤자 닌 땅달보 돼지 새끼일 텐데.”

간악한 미소를 띤 태협이 정곡을 찌르자 그의 볼에 핑크빛 홍조가 돌았다.

상대는 참지 못하고 태협의 턱을 주먹으로 때렸다. 태협의 고개가 아래로 꺾였다. 직후 순식간에 위아래가 뒤집히고 주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태협에게 자비란 없었다. 심지어 먼저 때렸으니 명분이 생겼다. 즐거운 얼굴로 발길질을 날렸다.

그 일은 남자가 떡이 될 때까지 계속됐다.

기분이 나빴던 참에 잘된 일이었다.

????????????

“존나 늦네.”

시계를 본 태협이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오늘도 바빴다. 열정적인 상담 선생한테 붙들렸고, 나온 직후에는 준화에게 전화가 왔다.

현재 시간 저녁 7시 2분. 3분만 더 기다릴 셈이었다. 7시 5분 15초 전. 막 일어서려는 태협의 앞에 병약해 보일 정도로 하얀 남자가 등장했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였다.

“여기서도 싸우냐, 누가 깡패 집안 새끼 아니랄까 봐, 그래도 한 대 먼저 맞아서 다행이다.”

서글서글 웃은 준화가 벌써 이야기를 들었는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들먹였다. 그 인간은 전치 12주가 나왔고, 준화는 온 김에 일을 무마하고 왔다. 한 번 깝죽거린 결과로 갈비뼈 몇 대가 부러진 건 유감이었지만, 저지른 짓이 있다 보니 그 남자에게도 할 말이 없긴 매한가지였다.

준화는 태협의 옆에 앉아 어깨를 감쌌다. 태협이 히스테릭하게 손을 치워 냈다. 뻘쭘해할 만한 행동이지만, 준화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태협의 성정을 알기 때문이었다.

“존나 늦게 와.”

“미안하다. 좀 많이? 앉자, 이야기 좀 하게.”

태협에게는 한가하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연에게 연락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나오면 연과 연락할 수단이 없다. 연은 전화도 없고 핸드폰도 없다. 네 시간 동안 밥도 못 먹고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절로 예민해졌다.

그러나 이쪽도 급하다는 것을 태협은 잘 알았다. 이야기를 재촉했다.

“무슨 일 있냐.”

“무슨 일 있어야 오는 사이야?”

“비행기를 타고 이 시간에 온 걸 보니 급한 일이네.”

“똑똑하네.”

준화가 칭찬하며 웃었다. 그러나 태협은 웃지 않았다. 손목시계만 자꾸 들여다보았다.

“왜. 누구 만날 사람 있냐.”

“어. 그러니까 빨리 말해.”

“쯔아식 급하기는. 상백이한테 이야기 들었다.”

상백의 이름이 나오자 태협은 이를 갈았다. 오늘 그 새끼한테 했듯이, 아니 그 이상으로 조져 놓을 셈이었다.

태협이 이를 으드득 갈자 준화가 눈을 접고 운을 뗐다.

“걔가 그러더라고. 너 부산에 여자 생긴 것 같다고.”

“지랄 마라고 해.”

“나한테 잘 말해 달라고 하면서 오들오들 떨던데? 아주 안타까워서 눈물이 뚝뚝,”

“가서 똑똑히 전해. 나 서울 가는 날이 제삿날이라고.”

“그래. 서울 와야지. 너.”

태협이 예상치 못한 한 방을 먹은 양 동공을 살짝 떨었다. 준화가 눈치를 채고 말을 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너 여차하다간 여기 아예 처박히게 생겼다.

준화는 심각해 보였다. 전후 사정을 알 리 없는 태협은 알아듣지 못해서 눈을 찌푸렸다.

“자세히 말해.”

“너희 할아버지 쓰러지셨어,”

“…….”

“그리고 너희 아버지는 임원들 찾아다니면서 이사회 회부 준비 중이고. 목적은 당연히…… 회장님 끌어내기.”

????????????

어떻게 올라왔는지 모르겠다. 방황하다 보니 시간은 11시가 넘어갔다. 걸어 올라가면서 계속해서 말들을 곱씹었다.

“너 여차하다간 여기 아예 처박히게 생겼다.”

모르는 사이에 뭔가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태협은 그걸 자신이 몰랐다는 게 자존심이 상해 미칠 것 같았다. 어제 어머니의 말투에서 눈치를 채야 했다.

태협이 발로 차다시피 파란 대문을 열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해 문짝이 떨어지고 찬 아스팔트 위에서 갉히는 소리가 났다. 조용한 동네에 소란은 메아리를 타고 되돌아왔다.

모든 게 언짢았던 태협은 욕을 차지게 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문을 열자 불은 꺼져 있었지만, 연탄불은 켜져 있는지 훈훈한 기운이 덮쳤다. 주위를 돌아보았을 때 연의 흔적은 없었다.

태협은 금세 연을 찾는 일을 포기했다. 오늘은 안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보았다가는 솔직히 분풀이를 할지도.

방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담 아래, 연의 집 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협아, 니 왔나? 어, 니 얼굴이 왜 이러는데? 다칬나?”

바삐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연이 보였다. 연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채로 태협을 향해 달렸다. 말릴 새도 없었다. 태협이 낮게 욕을 읊조렸다.

떨어져 나간 파란 대문 상태를 본 연은 놀라서 뭐고, 한 마디 던지고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은 가라.”

태협은 가타부타 이야기 없이 한마디 했다. 연은 듣지 못했는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태협이 멍 자국을 들키기 싫어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다행히 연은 금세 포기했다. 그리고 기분을 풀어 주려는지 태협의 어깨를 툭 쳤다.

“저거 내 없어져가 저런 기가? 나 여기 왔는데?”

우스갯소리에 태협은 반응이 없었다. 아니, 더 기분이 나빠져 눈썹을 들어 올리고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연은 무안해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이다.”

문득, 태협의 눈에 연의 슬리퍼 차림이 눈에 띄었다. 낡고 밑창이 겨우 붙은 낡은 슬리퍼였다. 발이 빨갛게 언 연은 주인이 돌아온 게 반가운 강아지처럼 방방 뛰고 있었다.

“말없이 간 줄 알고 서운할라캤다이가.”

태협이 발끝에서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연은 꿈에서 헤맨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꽤 오래 태협을 찾은 듯했다.

도대체가. 바보같이 왜.

안 올 것 같으면 그냥 방에 처들어가든가.

“드가자. 춥다.”

연이 그의 손을 붙잡고 이끌었다. 태협은 짜증이 나 손을 뿌리쳤다. 어이없어 차갑게 낄낄거렸다. 잊고 있었다. 하여간 분수를 모르는 인간들이라는 걸.

“협아, 드가기 싫나?”

연은 분위기를 풀려 안간힘을 썼다.

“여서 볼래? 알았다. 그래도 온 게 어디고. 영영 답 모르면 우짤 뻔했는데. 답답할 뻔했다이가.”

연이 짜잔, 소리를 내며 수학책을 건넸다. 삐뚤빼뚤한 글씨를 보던 태협이 책을 홱 뺏어서는 집어 던졌다. 하필 물이 고인 곳에 떨어져 공책은 흠뻑 젖었다.

“야!”

떨어진 문짝처럼 처량한 모양새를 참을 수 없던 연이 종이 덩이를 주우러 갔다.

다 젖었다. 우짤 낀데. 그게 뭐 소중한 거라고 울상이 되어 중얼거렸다. 태협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었다. 겨우, 이런 애 옆에 있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인데, 회사가 먹히기 직전인데. 나는 이런 애 옆에.

미간이 바싹 오그라들었다. 태협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자 얼굴에는 다시 겨울바람처럼 매서움이 어렸다. 태협의 반응이 평소보다 격앙된 것이 걱정된 듯 연이 손을 잡았다.

“협아. 먼 일 있나?”

서늘함이 풍겨 오자 태협이 손을 치워 냈다. 손등에 느껴진 알싸한 감각에 연이 긴장해서 발을 주춤대자 태협이 위협하듯 두 걸음 다가갔다.

“씨발, 내가 좆도 모르는 병신이랑 내가.”

저도 모르게 거친 말이 나왔다. 연은 움찔하더니 놀란 눈으로 태협을 보았다.

“협아.”

“귀찮게 굴지 말고 꺼지라고. 말 못 알아들어?”

오전부터 지금까지, 죄다 그의 신경을 거슬리는 일만 있었다. 죄다 연에게 화를 낼 일은 아니었지만, 화가 났다. 게다가 가라는 말을 왜 알아듣지를 못해서.

태협은 연의 잘못인 양 퍼부었다. 연이 급하게 태협의 손을 잡았다.

“니 걱정 있나?”

“좀 가라고.”

“협아.”

“씨발, 인간 취급 좀 해 줬더니, 너랑 내가 그런 거 나누는 급이 될 거 같아? 꺼지라고. 존나 들러붙지 말고. 넌 내가 부르면 오면 되는, 3개월짜리…….”

태협은 눈을 발갛게 뜨고 따졌다. 감정이 격앙된 태협과 달리 연은 느리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게 시선을 맞추지 않자 흥분이 수그러들었다. 태협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연이 발끝을 꼼지락댔다.

“안다.”

제 말을 듣고나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싶었을 때 연은 웃는 낯을 담담하게 드러냈다.

“3개월이면 얼마 안 남았다. 그자?”

또다. 시발. 심장이 욱신대고 가슴이 답답해져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연이 그 손을 바짝 잡고 놓지 않았다.

“협아, 할매가 니는 새라드라. 내보고는 섬이라카고.”

연이 눈은 마주치지 않고 손만 꽉 잡아 문질렀다. 뿌리칠 수 있었지만 태협은 손만 바들바들 떨었다.

“그래서 갸는 바람 바뀌면 날아갈 낀데 왜 살갑게 구냐고 극정하드라. 니한테 정 주지 말라는데. 우짜지? 이미 든 것 같다. 가슴이 애리네.”

연이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최대한 기분을 끌어 올리려는 것처럼 잡은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내도 안다. 니 가야 하는 거. 그래도 협아, 날아가도 괜찮으니까 그때까지는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것도 안 되나?”

꼭 자신은 막 대해도 괜찮다는 체념으로만 들렸다. 민망해진 건 태협이었다. 연이 고개를 들추고 시선을 헤집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나.”

도저히 폭력을 마주한 사람의 태도 같지가 않았다. 이따위 것은 약과라는 눈빛. 연은 분노를 무색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더불어, 상대의 입을 막는 재주까지.

딱 질색인 그 말투가 그날따라 신경 쓰여서 태협은 입술을 오물오물 물었다.

“거 아프게 와 자꾸 뜯는데.”

“…….”

“말 안 할 낀가 보네. 알았다. 오늘은 따로 자자. 괜히 내가 거슬렸다. 미안.”

나가려는 연의 손목을 태협이 잡아당겼다. 연이 등을 돌리는 게 싫었다. 그래서 싫은 소리가 나왔다.

“너 진짜 병신이냐? 자존심도 없어? 사람이 이런 식으로 말하면 뺨이라도 때리든가. 뭐하러 다 듣고 고개를 끄덕이냐고!”

“몰랐나. 내 원래 그른 거 없었다.”

연은 당당하게도 말했다. 맞은 놈이 발 뻗고 잔다더니. 때린 태협이 두세 방 맞은 얼굴을 했다.

“하, 시발 진짜.”

“살면서 필요 없는 건 그냥 다 쌔비맀다. 들고 있어 봤자. 그런 건 내한테 짐이다.”

저 담담한 말투가 싫다. 그 말투는 제게 대서는 사람들을 반쯤 죽여 놓았을 때보다 훨씬 더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잘 자래이. 내 간다.”

연은 저를 미숙한 사람으로 만들고서 가 버린다. 그녀가 나가고 태협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 시발.”

자신의 미숙함에 질려 태협이 벽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그렇지만 분이 풀릴 리는 없었다. 제 얼굴에 꽂는다면 모를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