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5/13)

5장

다음 날.

매일 아침 그랬듯 연은 태협의 침대에 누워 있었고, 태협은 아침에 등교를 준비했다. 어제 그 일이 있고 태협이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연은 기운이 영 없어 보였다.

그럴 만도 한 게 어제저녁부터 연은 잠을 설쳤다.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다, 집에 갔다가, 다시 그의 침대에 들어와서 자고 그것도 모자라 뒤척이기도 여러 번이었다.

“교복, 잘 어울린다.”

잘생겨서 그라나. 새삼스러운 칭찬이 이어졌다. 넥타이를 하다 말고 태협은 웃었다. 칭찬에 거침이 없다.

그걸 이제 알았냐. 놀리려 했지만, 입에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반쯤 감긴 눈은 다른 감정을 담고 있었다. 부러움, 그것을 읽은 태협은 입을 닫았다.

별달리 해 줄 말이 없었다. 연을 대하기가 조금은 조심스러워졌다. 그럼 학교를 다니든지, 그 말은 이상하고. 태협은 옷매무새를 대충 정리하고 집을 나섰다.

그가 움직이면 병아리처럼 따라 나와야 할 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태협이 노크하듯 벽을 두드렸다.

“안 나가?”

짜증스러운 재촉에 연은 등을 돌렸다.

“어, 내 쫌 쉬고 있으께.”

“……”

“오늘은 혼자 내리가라. 할 수 있제?”

못할 리가 있냐. 돌아선 태협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제 말은 그렇게 했어도, 지나칠 정도로 세게 하지는 않았다. 하여간, 나태해 빠져 가지곤. 태협은 혀를 쯧쯧 차며 대문을 나섰다.

부지런히 발을 놀리는 태협에게 닿는 시선이 이상했다. 주변을 매섭게 살피자, 진례댁이 엉거주춤 다가왔다.

“여이는, 여이는 개안코?”

“네.”

대답은 짧았다. 가는 길에 행복수우퍼가 보였다. 평상에 어제와 같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지훈이 보였다. 그를 마주한 지훈은 깜짝 놀라 몸을 말았다.

“개새끼.”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아 욕만 뇌까렸다. 구태여 마주치는 건 더욱 사양이었다. 다음부터 저 수우퍼인지 뭔지에 들를 생각도 없고 연을 보내지도 않을 것이다.

마을 어귀에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10분쯤 탔을까, 내내 연이 생각을 했다. 자꾸만 생각이 났다. 붉게 아롱진 얼굴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머리카락. 귀를 간지럽히는 달뜬 숨결과 눈처럼 감싸는 포근한 몸.

“아, 씨발.”

생각만 했을 뿐인데 그의 분신은 자동 기립이었다. 불룩한 앞섶을 본 그는 좆같은 게, 라며 욕을 했다.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연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나저나 아침에 본 그 부러운 눈빛은 무엇일까. 교복이 부러웠던 걸까. 하기야 주위에 자퇴한 애들 말을 들어 보니 아침에 쉬는 건 좋지만, 교복을 입는 것은 가끔 부럽다고 하긴 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 줘야 할까.

고민을 끝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시선 끝에 학교가 걸렸다. 차가 멈추었다. 오후에 오겠습니다, 말하는 기사를 내버려 두고 태협은 어기적대는 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긴 코트를 입고 있다는 게. 기사가 운전하는 차에서 내린 태협을 여전히 신기하게 바라보는 아이로 사이로 유유히 걷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서상백.]

이름을 확인한 그가 귀찮은 투로 전화를 받았다.

“왜.”

- 공자님.

시시덕 웃으며 부르는 말에 기분이 나빠진 태협이 거친 말부터 내뱉었다. 태협은 그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들 딴에는 대단하다 추켜세우는 별명이라지만, 명백히 비꼬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별명의 유례가 그랬다. 클럽에 가더라도 약은 하지 않고 술은 마시더라도 담배와 뽕은 하지 않는, 본인만의 기준을 지킨다는 이유에서 상백과 친구들은 태협을 그렇게 불렀다.

- 문안 인사 여쭙니다. 공자님.

잠잠해진 화기에 장작을 집어넣는 것도 모르고 상백은 놀려 댄다. 태협은 상스러운 욕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그러자 상대의 주절거림이 길어졌다.

- 아니지. 아니야. 지금 네게는 공자님이 아니라, 흐음, 그래 햄! 햄이 어울린다. 부산에서는 형님을 햄이라 부른다지? 햄, 부산 생활은 어떠쉽니꽈? 햄?

“…….”

- 부산 일대는 평정하셨습니까? 햄? 여자들은 좀 만나 봤꼬예?

어설픈 사투리가 듣기 거북할 정도였다. 태협은 짜증 나 침묵을 지켰다. 상대도 일정 시간 침묵을 지키더니 끝내 숙이고 들어왔다.

- 마음이 상하셨다면 사과하겠슴다, 햄.

“…….”

- 진짜 화났냐?

동공이 흔들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 진짜 미안하다, 안 할게.

“용건이 뭐야.”

- 다른 게 아니라 우리 오래 못 봤잖아.

그런가, 하긴 부산에 내려와서 쭉, 서울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옆집 사는 달동네 동갑 여자.

반에 도착한 그가 가방걸이에 가방을 거는 대신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 그런데 햄, 도대체 무슨 재미난 일이 있길래 2주째 서울에 올라오지 않는 겁니꺼? 여기 애들 다 너 기다리고 있쉽니더.

“알게 뭐야.”

- 혹시 거기서 뭐 네 마음에 쏙 드는 보지라도 만난 겁니까? 좋습니까?

놀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태협의 턱 근육에 연신 힘이 들어갔다.

“주둥이 안 닥칠래.”

낮게 읊조리는 말에 일순 반이 조용해졌다. 이미 화가 난 상태에서 들어온 태협의 눈치를 반 아이들이 보고 있었다.

“왔어?”

개중 눈치 없던 학우가 태협을 반겼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안 꺼져? 하고 노려보는 눈빛에 눈을 굴리다 자리를 벗어났다.

“다시 말해 봐.”

- 뭐? 보지?

연을 감히 그따위 상스러운 말로 부르다니. 전신에 불꽃이 이는 것 같았다. 눈앞에 있다면 어제 지훈을 밟았던 것처럼 밟았을 것이다. 겨우 한 마디가 어떻게 이렇게 속을 뒤집을 수 있는지.

짜증이 나지만, 뒤지게 팰 수도 없어 태협은 속을 끓였다.

- 진짭니꺼? 어떤 요물이고?

안 그래도 아침부터 안 좋았던 기분을 전화를 한 인간은 아주 잡쳐 버렸다.

- 부산 내려가면 그 보지 저도 함 무 보겠,

“너 올라가면 뒤질 줄 알아라.”

태협이 감정을 담지 않고 경고했다. 낮게 깔린 톤에 상백은 울대를 떨었다.

- 예?

“기다리고 있으라고 니 잘난 자지, 휘두르지도 못하게 밟아 놓을 거니까.”

그는 입으로 뱉은 말은 꼭 지키는 성정이었다. 그걸 아는 상백의 목소리가 떨렸다.

- 야, 갑, 갑자기 왜 그래. 진짜 화났냐? 내가 아침부터 너무 까불었지. 미안하다, 나는 네가 반가워서…….

이런 식으로 한두 번 놀린 것도 아닌데 태협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당황한 모양이었다. 상백이 애타게 불렀지만 태협은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의 전화가 끊긴 교실은 조용했다. 태협은 분을 삼키지 못하고 핸드폰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방금 전 친하게 지냈던 학우가 어깨를 말고 이미 액정까지 부서진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렸다.

“에헤이, 화내지 말고. 햄.”

상백이 놈 얼굴이 겹쳤다. 태협이 분을 참지 못하고 학우의 뒤통수를 잡아 책상에 내리찧었다.

쾅 소리가 나고 주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학우는 책상 옆으로 쓰러졌다. 기절한 건지 움직임이 없다. 그런데도 공포로 얼어붙은 나머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태협은 혼자만 태평하게 아침에 다 못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

하교가 늦었다. 상담 센터 선생의 설교를 듣느라 시간을 잡아먹은 탓이었다. 그 학우에게도 문제는 없었다. 머리가 닿기 전 손바닥이 책상과 부딪혀서 큰 소리가 난 것이지 현실은 체육복 위로 대가리를 박은 거나 진배없었다.

다만 태협은 위기에 봉착했다.

“회장님께서 알게 되셨습니다.”

“시발.”

할아버지가 알게 됐다는 사실에 태협은 곤란해서 혀를 찼다. 너도 깡패 새끼가 될 거냐며 노발대발하는 그림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 걱정도 잠시, 눈앞에 교복점이 스쳤다.

“사모님께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걱정하시기에,”

“멈춰 봐.”

태협이 기사의 말을 가로막았다. 눈앞에는 교복점밖에 보이지 않았다. 기사가 차를 멈추고 태협이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스마트 라인 교복사입니다.”

“여기 있는 여고 교복, 아니 여자 교복 종류별로 다.”

“예?”

“다 달라고.”

태협이 강렬하게 눈을 치뜨는 것으로 재촉했다. 빨리 챙겨서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은 확인해야 할 게 많았다.

“하복인지. 동복인지. 사이즈는 어떤지 알아야.”

“둘 다. 허리는 이만하고 가슴은, 적당히 아무거나로. 헐렁해서 가릴 수 있는 거.”

태협이 손을 오목하게 모았다가 일자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런 건 왜 궁금해하냐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주인은 바빠 보이는 태협에게 더는 묻지 않았다. 이 근처에만 무려 8학군이 있었다. 주인은 싱글벙글한 채 교복을 챙겼다. 그러다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며, 명찰은 어떻게 할까요. 이름은.”

태협이 눈을 찌푸렸다. 연인데. 무슨, 연이었더라.

“연.”

“예?”

“연만 써 달라고.”

태협의 얼굴 또한 싱글벙글했다.

돌아가는 길이었다. 음식과 교복으로 양손이 무거웠다.

좋아하겠지. 태협이 잔잔한 미소를 띤 채 경사로를 걸었다. 어느새 집 앞이었다.

어찌나 빨리 걸어왔는지 태협은 숨을 헐떡였다. 잠시 문 앞에 서서 숨이 진정되기를 기다린 태협이 파란 대문을 열었다. 끽, 소리가 기분이 나빴지만, 그것마저도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신경은 맹목적으로 한곳을 향했다.

짧은 마루를 단숨에 건너던 그가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발이 시렸다.

연은 늘 태협이 오기 전에 연탄을 갈았다. 그래서 집에 오면 언제라도 따뜻했는데 오늘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냉기가 감돌았다.

태협이 도둑 걸음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서니 침대 위에 검은 실들이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었다. 연이 분명했다.

자는 건가.

주의를 기울이자 숨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야.”

“…….”

“야.”

두 번 불렀는데도 일어나지 않았다. 태협이 연의 몸을 강제로 뒤집었다. 죽은 생선처럼 단숨에 뒤집힌 연은 온몸이 땀에 전 데다가 뜨근뜨근하기까지 했다. 야! 태협이 당황해서 연의 몸을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그러나 연은 기절한 듯 일어나질 못했다.

“일어나 보라고!”

거칠게 흔들자 연이 겨우 눈을 떴다. 태협이 가슴속에 꽉 뭉친 숨을 토해 냈다.

“아, 왔나.”

연의 목에서는 갈라져 쉰 목소리가 나왔다. 헤실거리는 웃음 속에서도 더위가 삐져나왔다.

연을 강제로 일으킨 태협이 옷을 가져와서 건넸다.

“일어나.”

“와 깨배는데. 겨우 잠들었구만.”

“병원 가자. 일어나라고.”

“됐다. 치아라.”

그리고 연은 귀찮은 듯이 혹은 짜증 난 듯이 태협을 밀어냈다. 폭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연은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좀만 지나면 싹 나을 끼다. 아, 연탄 안 핐다. 안 춥나. 춥제. 근데 이제 니가 할 때가 안 됬나? 내가 아픈데 해 줘야겠나. 양심 없제.”

비척비척 일어나더니 뱃가죽을 틀어 쥔 연이 방을 나간다. 황당했다. 뭐 저런……. 태협이 겨우 욕을 삼키고 뒤따랐다. 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쑤시고 아린 팔로 연탄에 불을 피웠다.

“쫌만 있어 바라. 데파질 테니,”

말을 끝내기 전에 태협이 뒤로 바짝 붙었다. 놀란 연이 넘어갈 뻔했지만, 다행히 태협이 더 빨랐다. 안겨 오는 온몸이 불덩이였다. 어쩐지 화가 치밀었다.

“이 상태 될 때까지 뭐 했냐.”

“보면 모르나. 잤다이가.”

실없는 반박에 태협이 눈살을 찌푸렸다. 표정으로는 이미 욕을 한 바가지 먹인 후였다.

“개안타. 이건 아픈 것도 아이고. 진짜 좀만 쉬면 낫는다.”

연이 밀어내자 태협이 갑자기 자리에 앉았다.

“뭐 하는 긴데.”

“업혀.”

“업힐 것도 없다. 가마이 있으면 낫는다. 내 디다. 난제 말하자. 오늘은 내 집에서 자께. 아니 며칠간은.”

“업히라고!”

태협은 바락 화를 낸 후 연의 허벅지를 강제로 잡고 등에 올려 태웠다. 연은 바둥거렸다. 그의 몸에서 떨어지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노라니까!”

“병원,”

“안 간다고!”

“죽고 싶어? 너 지금.”

“진짜! 하지 마라고! 내리라고!”

연은 온 힘을 다해 반항했다. 아픈 와중에 또 그런 힘은 어디서 난 것인지, 태협의 등을 밀어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마당에 넘어졌다.

태협의 눈에 오기가 찼다. 도대체 왜 안 가려고 하는 건지. 작은 감기도 키우는 꼬라지가, 기어코 안 가겠다고 버티는 모습이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안 따라오면,”

문 앞까지 억지로 끈 그 순간, 웁 하는 소리를 낸 연이 입을 가로막았다. 하얀 얼굴이 달빛을 받아서인지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그리고 그의 팔을 뿌리쳤다.

뛰어간 곳은 화장실이었다. 화장실로 들어간 연은 연신 토사물을 내뱉었다. 순간, 태협의 머릿속에 지훈에게 맞아 머리를 찧은 일이 떠올랐다.

뇌진탕의 증상이 아닐까.

우웩우웩, 토사물을 쏟아 내는 소리가 들렸다. 내버려 두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태협의 얼굴이 허예졌다. 문을 열자 연이 소리쳤다.

“오지 마라!”

한사코 거부한다. 변기를 부여잡은 연이 손을 내저었다. 무엇보다 이런 모습을 보여 준다는 것 자체가 싫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태협은 본인이 원하는 건 뭐든 해야 하는 성미였다.

“시발, 내가 왜 네 말을 들어.”

“아, 진짜 나가라고.”

애원하는 말에도 태협은 가녀린 등 뒤로 섰다. 말 진짜 드릅게 안 듣제. 짜증 섞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잡은 태협은 등을 위에서 아래로 쓸었다. 척추 뼈를 훑더니 꾹꾹 눌러 주기도 한다.

등에서 느껴지는 온순한 손길에 연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그리고 며칠 동안 먹은 것을 게워 냈다. 물을 내리고 수도꼭지를 열고 입을 헹구고 얼굴을 씻었다.

연이 뒤를 돌았다.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에는 수치심이 그려져 있었다. 탓을 넘길 생각인지 연은 태협의 어깨를 힘없이 두드렸다.

“진짜 짜증 난다. 나가 달라고 했다이가.”

원망을 담은 주먹에는 힘이 없었다. 그래도 등을 쓸어 준 게 다인 태협은 짜증이 났다.

“두드려 줘도 지랄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손은 다정하고 섬세했다. 태협이 힘없이 널브러진 연을 안아 들었다.

“병원 가.”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는지 그 소리다. 질린 듯 인상을 찌푸린 연은 대문을 벗어나려는 태협에게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병원 가기만 해 바라. 콱, 뒤지뿔 끼니까.”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죽는 건 똑같다, 덧붙인 연이 협박했다. 태협이 오도 가도 못한 채 문턱에 서서 고민했다. 이따위 협박이 뭐라고. 죽는다는 말이 도대체 뭐라고.

“진짜 죽을 거다.”

확인 사살하듯 말이 가슴에 콱 박혔다. 심장께가 찔린 듯 뻐근해졌다. 목에 핏대가 바짝 섰다. 붙잡은 손에도 배려 없이 힘이 가득 들어갔다.

무시하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가면 될 일이었지만 태협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랫입술에서 피 맛이 나도록 물었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죽으면, 지 손해지.

도로 눕히려 들어가니 방이 따뜻했다. 파리한 안색의 연은 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괴로워했다. 무엇 때문에 아픈 건지. 알 수가 없어 더욱 답답했다.

그냥 병원에 가서 죽는 게 낫지 않을까.

그때 똑똑,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라곤 마을 사람뿐이었다. 안 그래도 화가 난 상태의 태협이 그 면면까지 본다면 화병이 나서 돌아가실지도 모를 일이었다. 끼익, 멋대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더 짜증이 났다. 마당의 흙들이 신발 밑창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큼큼, 누군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여이 여기 있나. 여이 남친, 나와 봐라 함.”

진례댁과 아주머니들이 두런두런 떠드는 소리가 났다. 연은 고개를 바짝 들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왜지? 그리고 나가려는 걸 태협이 말렸다.

“어디 가게.”

“아짐들 왔다이가.”

“가만히 있어.”

“아니.”

연은 할 말이 있는지 입을 뻐끔댔다. 보기 좋게 얼굴이 타올랐다. 그 행동이 더 수상해서 태협이 연을 사정없이 침대로 밀어 넣었다.

이것만큼은 질 수 없다는 태협의 표정에 연이 눈을 굴렸다. 그의 성정에 많이 참은 거라는 것을 연도 알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내 여 없다캐라. 아짐들한테 예의 있게 대하고! 주의를 날린 연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미간에 주름을 그려 낸 태협이 문을 팍 열었다. 태협이 등장하자 셋의 시선이 일시에 올라갔다.

“여이 여 있제?”

“예.”

뒤에서 이불이 팔락팔락 흩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이 있다는 말은 못 하고 이불을 걷어차는 듯했다. 태협은 보기 좋게 한 방 먹인 것에 만족했다.

아짐들은 보이지 않는 침대를 살피려 고개를 기웃거린다.

“왜요?”

“아니, 극정이 되가.”

“예?”

“싸웠나, 막 소리 나든데.”

“아니요.”

말이 길어지자 태협의 인내심은 금세 동났다. 유난히 쌀쌀맞은 말투 탓에 말하기 애매한지 아주머니들은 서로에게 눈치를 주었다. 이게 숭쿠고 그럴 일은 아니다이가. 야도 알아야지. 모리나? 모릴껄? 야가 어떻게 알겠노, 난 또 서울 머심아들은 좀 다른가 했지. 아이다, 남자들은 그런 거 한 개도 모린다.

그들은 한참 저들끼리 잔을 돌리듯 이야기를 이어 갔다.

연이 일로 이미 인내심에 한계가 온 태협이 크게 한숨 쉬었다. 정신이 사나워서 그 등을 밀어내고 싶었다. 다행히 진례댁이 먼저 말을 걸었다.

“가씨나 병원 안 간다제?”

마치 알고 왔다는 말투였다. 태협이 눈을 찌푸렸다. 이런 일이 아예 자주 있었던가. 그럼 왜 데리고 가지 않고.

“그러니 그만 가 줬으면 하는데요.”

나름대로 정중히 말했다. 그 매서운 말투를 감상하던 아주머니들은 같잖다는 듯 코웃음 쳤다.

“여이 남친, 니 순정파가?”

“…….”

“마이 좋아하긴 한갑네?”

“형님, 야 얼굴이 극정되서 아주 죽어 삔다는 얼굴 아이가.”

끼룩끼룩, 갈매기가 날아가듯 웃은 그들은 “마, 고마 하이소.” 하는 진례댁 말에 각자 가져온 것을 건넸다.

“죽 싸 왔으니까 맥이고.”

“이거는 진통제다. 아가 마이 아파할 때 한 알씩 뜯어서 물이랑, 집에 물은 있제?”

태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연의 병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민간요법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거는 찜질 돌이그등? 코드 꼽고 아랫배에 놓아두면 좀 따뜻할 거니까. 그렇게 해 주라.”

세 가지를 모두 손에 든 태협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이 세 가지 물건 간 연관성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밤에는 괴롭히지, 아이고 성님 왜 찌르고 그라요. 이게 쩰로 중요한 긴데. 아가 모르는 거 같으니까 내가 아리켜 줄라고.”

“알아들었제?”

못 알아들었다. 그러나 밤에 괴롭히지 말라는 말은 똑똑히 들었다.

“예.”

“그면 다행이고. 어쨌든, 잘 보살피고. 괜히 아 아픈데 옆에서 깔짝대 가지고, 그러니까 기웃대서 열나게 하지 말고. 며칠간은 푹 쉬게. 알았쩨?”

“우린 간데이.”

깔깔, 개구리처럼 웃는 그들이 점차 멀어졌다. 그들이 한 말을 단번에 알아듣지 못해 곱씹던 태협은 이윽고 결론에 이르렀다.

아, 그거.

생리를 시작한 게 분명했다. 그러고 나서는 망설임이 없었다. 받아 온 것들을 가지고 와서는 그들이 말한 대로 했다. 억지로 연에게 죽을 몇 숟가락 먹이고, 약을 먹였다. 그리고 찜질팩을 놓아주자, 전보다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옆에 같이 누워 있을까, 생각했지만 기웃대지 말라는 말을 떠올리고 태협은 평상으로 나왔다.

누워서 생각했다.

저렇게 아프다고?

매달 저만큼 아팠다면, 왜 병원을 안 가고 저러는 걸까.

병원비 정도는 부담해 줄 수 있었다.

태협이 몸을 돌려 누워 두둥실 떠오른 달을 보았다.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그러나 그중에 가장 모르겠고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조금 전 제 행동이었다.

그리고 아까 전엔 왜 그렇게 두려워했던 걸까.

솔직히 말해서 병원에 안 가겠다고 말하는 연을 그대로 여기 놓아두는 게 제 팔을 자르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긴 생각이 이어졌다. 자꾸 하나의 결론으로 쓸려 가려는 것을 태협은 막기에 급급했다.

????????????

일주일이 지났다. 6일 동안 태협은 연의 수발을 들었고 연은 수발을 타의로 받아들였다. 사실 연은 혼자 있고 싶음을 피력해 왔다. 옆에 누가 있는 것도 귀찮다고.

그러나, 집에 간다고 할 때마다 태협은 으름장을 놓으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딱 일주일이 지나고 아픔이 가시자 연은 제집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냥 나오지?”

연의 집 방향으로 난 담장에 기댄 태협이 연이 숨어 있는 곳으로 말을 툭 던졌다. 얇은 벽 너머에서 새된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 부르지 말라고!”

얇은 판자벽을 저와의 사이에 두고 꽥꽥대는 소리에 태협은 귀엽다는 듯 설핏한 미소를 지었다.

“먹튀냐.”

“그렇게 말하지 말랬제? 내는 가겠다는 거 지가 말린 거면서.”

“6일 동안 병간호 해줘, 금욕까지 했는데 이제 풀어 줄 때가,”

“자위를 하든가!”

태협의 생색에 연은 앙칼지게 대꾸했다. 오히려 태협이 순간 당황해서 귓불을 붉혔다. 마치 자위라는 단어가 섹스보다 더 상스럽고 은밀하다는 듯이.

태협이 더 할 말을 찾지 못할 때, 문득 발아래 작은 돌멩이들이 보였다. 돌멩이, 좋은 생각이 났다. 허리를 굽혀 여러 개를 주웠다.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못한 태협은 철제 판 위로 그것들을 간격을 두고 투둑투둑 던졌다.

마치 로미오가 줄리엣을 부르듯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돌들이 닥, 닥, 데구루루 굴러갔다. 툭. 손가락 한 마디쯤 되는 돌멩이가 구불구불한 철판에 부딪혀 구른 뒤 마당에 떨어지는 불규칙한 소리가 일정하게 반복됐다.

대여섯 개쯤 했을까.

“하지 마라! 빵꾸 난다!”

“너 나올 때까지 할 건데.”

약간은 우습게 보일 법한 그 일을 태협은 즐겁게 반복했다. 수면에 작은 자갈돌을 던지듯 퐁당퐁당 집어넣었다.

주위에 돌이 다 떨어졌을 즈음, 문이 열렸다. 하늘로 날아간 뾰족한 돌은 운이 없게도 연의 머리에 떨어졌다.

아! 소리가 나고 태협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돌덩이가 머리에 맞은 모양이었다.

얼른 상황 파악한 태협이 담장을 넘어 연의 집 앞으로 뛰어내렸다. 문으로 가는 것보다 훨씬 빠르겠다는 판단에서였다. 2m 높이였지만 안정적으로 착지하고, 마루에 앉아 있는 연에게 달려갔다. 연은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괜찮냐?”

“내가! 던지지 말라 캤제? 바라, 꼭 이 사달이제. 아프다이가.”

“그러길래 빨리 나오든지.”

연의 지적에 태협은 되레 적반하장이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찼다. 연이 잡고 있는 손을 떼어 내고 정수리를 살폈다. 다행히 피가 나고 그러지는 않았다. 하긴 작은 돌인데. 순간 제 모습이 꼴불견처럼 느낀 태협은 안도감을 숨기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로 놀렸다.

“단단해서 안 깨졌나 보네.”

머심아야! 연이 주먹을 쥔 채 달려들었다. 덜그덩, 플라스틱 소쿠리에 태협이 발이 걸려 넘어지고 연은 그 위를 올라탔다.

“힘이 펄펄 나는 걸 보니 몸도 다 나은 것 같고.”

아래에서 태협이 주먹을 요리조리 피했다. 그러기를 몇 분, 연도 금방 풀어졌다.

부끄러워 외면하긴 했지마는, 하고픈 말이 몇 개 있었다. 예컨대.

“고맙다.”

연이 홍조로 붉어진 볼을 숨겼다. 태협이 그 말랑말랑한 볼 살을 한 손으로 잡아당겼다.

“알면서 지금까지.”

“부끄럽다이가.”

그게 뭐가 부끄럽냐. 그래도 부끄럽다. 맥락 없는 대화가 지지부진 이어졌다. 어쨌든 연은 부끄러움을 강조했고 정작, 아무렇지 않은 건 태협이었다.

“성교육 시간에 안 배웠냐. 생리는 부끄러운 게 아니다. 강사가 안 가르쳐 주던?”

“아, 뭐. 서울 아들은 그렇게 배우는가 보제?”

잠시 떠듬거리던 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태협의 바지 앞섶은 이미 불룩해져 있었다. 사실은 일어난 이유도 이것이었다. 더는 앉아 있기가 남사스러웠다.

연이 손을 내밀었다.

“아나, 정신 차리고 퍼뜩 일나라.”

태협이 연의 손을 잡고 순순히 일어났다. 연이 무게를 실어 그의 몸을 당기는 순간, 완전히 일어선 태협이 연의 몸을 감싸 안았다.

향취가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픈 내내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시원하면서 단향. 그 전엔 너무 뜨거웠다.

중독된 것처럼 한참 숨을 들이쉬고 내뱉기를 반복하던 태협이 한편으로는 평소와 다른 냄새를 맡았다.

연에게 맡을 수 없었던 조금은 꿉꿉한 냄새. 그렇다고 연의 몸에서 나는 건 아니었다. 조금 더 안쪽이었다.

태협은 시선을 들어 냄새가 나는 쪽을 보았다. 방으로 통하는 문이 반쯤 열려 있고, 점등이 깜빡였다. 그리고 어둠에 적응이 된 듯 서서히 시야가 열리는 순간, 동파를 만난 것처럼 몸이 굳었다.

얼마 전, 태협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달동네라고 다 못 살고 다 나쁘지는 않나 보네.

행복수우퍼는 번듯한 건물에 벽지도 꼼꼼히 발라져 있었다. 진례댁 아주머니 집은 최근 새로 페인트칠을 해서 새 건물 느낌이 났다. 정남이네는 그 집 아저씨가 손재주가 좋아서 그런지 유행하는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의 카페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마주한 이 집은, 정말 어디서도 보지 못한 것들이 잔뜩 있었다.

벽에는 곰팡이가 잔뜩 슬어 있었다. 오래된 기와집을 개조하느라 지주가 된 나무는 잔뜩 썩어 있었고 지붕은 녹이 슨 철판이 겨우 비를 막고 있었다. 이미 깨진 문은 비닐을 씌우고 테이프로 발라 겨우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지어진 후 한 번도 수리된 적이 없어 보였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열악함에 아무 말도 못했다.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려니, 희고 또 차가운 손이 그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눈을 가리자 목소리가 전해졌다.

“보지 마라.”

한 치의 떨림도 없는 목소리.

“내도 안다, 무슨 생각 하는지. 그러니까, 보지 마라.”

정작 태협은 본인이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연은 안다고 말했다.

태협이 억눌린 성대를 겨우 틔웠다.

“네가 알긴 뭘 알아.”

“불쌍하다 생각한다이가.”

“아니거든.”

연이 손을 떼면서 눈을 마주치도록 유도했다.

“진짜 아니라고?”

비꼬는 투로 들렸다. 동시에 동정을 바라진 않아. 그렇게 들리기도 했다.

태협이 연의 손을 부여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가 강물처럼 휘감기고, 태협은 물에 빠진 것처럼 숨을 참았다.

그 자리에서, 연을 데리고 나오고 싶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

몸에 열이 올랐다. 그 자리에 누워 있을 연을 생각한 태협이 저도 모르게 근육이 불거질 정도로 전신에 힘을 주었다. 눈에 밟히는 모습을 지우고 싶어 태협은 더 연에게 파고들었다.

도대체 사람 사는 집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그 냉혹한 곳에 혼자 있었을 연을 생각하니 절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연은 목에 핏대를 세워 겨우 신음을 참았다.

온통 붉어진 몸을 보고 있자니, 대단히 흥분되었다. 그런데 흥분을 할수록 불만이 차올랐다. 왜 더 결합되지 못하는 걸까.

홀쭉한 허리에 손을 감고 반대 손으로는 가슴을 터질 듯이 쥐었다. 몸이 완전히 붙었다. 충직한 신음이 흐르고, 치받을 때마다 뿌리 끝에서 목 뒤까지 전율이 올랐다. 그런데, 어째서 왜.

만족스럽지 못한 걸까.

관계를 가지는 중에 자꾸만 다른 생각이 떠오르고, 태협은 문득 이상한 걸 느꼈다.

생각해 보니, 연은 제 이름을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 단 한 번도.

“내 이름 불러.”

“으으…….”

“야, 내 이름 부르라고.”

태협이 연의 작은 턱을 잡고 45도 돌아간 고개를 바로 맞췄다. 눈이 마주치자 숯처럼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다. 동공은 죽음 직전의 미물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쾌락에 혹은 고통에 겨워하면서도 연은 태협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이름, 부르, 라고.”

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협은 오기가 들었다. 짓누르며 끝에서 끝까지 콱콱 박았다. 그러자 평소보다 교성이 높았다. 농락하듯 거친 행위가 계속되었다. 쾌락 속에 전전하던 연이 자존심을 부리듯 입과 눈을 꼭 감았다.

“말, 하라, 고.”

“니도, 안 말한다이가.”

“뭐?”

“니도, 내 이름 안, 말한다고.”

할 말이 없어졌다. 불러 달라고 했을 때에도 퉁명스럽게 거절했다.

“그거랑은 다르지.”

“뭐가, 다른데. 다른 거, 한 개도, 없그등?”

연은 은근히 할 말이 없도록 만드는 화법을 가지고 있다. 정곡을 찔렸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태협이 눈을 빛냈다.

“그럼 네가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태협이 소리가 새어 나오지 못하게 입을 맞췄다. 포동포동한 입술이 불어 터질 때까지, 아파서 더는 못 버틸 때까지. 박고 찔러 댔다.

그리고 연이 참을수록 이익인 건 태협이었다.

이윽고 교성을 지른 연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태협은 절정에 오른 연을 움직임을 멈추고 눈에 담았다.

“안 해?”

“못해.”

못해? 그 말에 태협이 눈썹을 까닥거렸다. 다시 움직임을 재개하려는데 절박한 목소리가 막았다.

“모르는데 우째, 말하노!”

하, 끝까지 장난질이지. 태협이 소리를 내어 비웃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가 부러워했던 교복에도 붙어 있고, 첫 만남에는 손바닥에 써 주기도 했었다. 아주 천천히, 각인이 될 정도로.

“말하라고.”

태협이 목을 그러쥐었다. 턱을 엄지손가락으로 들어 말이 나올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듯 치켜들었다.

연의 눈빛은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어쩐지 두려움, 혹은 그와 비슷한 감정에 허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따위 이름 불러 주는 게 뭐가 대수라고.

연이 시선을 피했다. 문득 등을 타고 소름을 올랐다.

“너, 무슨 생각이야.”

“뭐가.”

태협이 위협하듯 긴 머리카락을 말아 쥐었다. 어쩌면 제 이름 따위 알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연은 여전히 저를 이방인 취급했고, 가면 금방 기억에서 지워 버릴 사람처럼 굴었다.

태협의 눈이 붉어지고 연의 몸은 쉴 틈 없이 흔들렸다. 그러다가 버티다 못한 연이 입을 겨우 벌렸다.

“내!”

난데없이 뻗어 나온 큰 소리에 태협이 바르르 떨던 몸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동시에 절정에 올랐던 그가 슬슬 빠져나오려던 때였다.

“니 이름 진짜 모른다.”

연의 말에 태협은 손에 힘을 풀었다. 말하기가 수월해진 연은 쉴 새 없이 말을 쏟아 냈다.

“글을 몬 읽는다. 교복에 달린 그게 이름인 거 아는데, 몬 읽었다.”

한순간 정적이 돌았다. 연은 숨을 색색 내쉬더니 두툼한 태협의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태협은 황당해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읽은 연의 두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어이없는 거 안다. 그래도 티는 내지 마라. 내도 안 배우고 싶어서 안 배운 건 아이라. 그냥…….”

“…….”

“배울 기회가 없었다.”

다소간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지금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지, 태협은 알 수 없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분명히 중학생까지는 의무교육이었다. 한글을 뗄 정도가 안 되면, 초등학교는…….

“초등학교도 몬 댕기따.”

연은 세상에 그런 불행쯤은 하나씩 다 가지고 있다는 듯, 그런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그러더니 웃는다.

웃는 얼굴에 연의 말처럼 정신이 상그러워졌다. 태협이 연의 얼굴을 감싸는 듯 가렸다. 얕은 콧김이 손등에 내려앉았다.

태협은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그사이 연이 상체를 일으켰다.

금세 욕망을 채워, 팔팔한 그것이 배꼽 위에서 까닥였지만, 연이 어떤 마음인지 모른 척하고 제 욕망만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태협이 멍하게 있는 사이 연이 고개를 바짝 들이댔다.

“니 이름이 뭔데?”

“…….”

“내도 계속 궁금했는데 몬 물어봤다이가.”

놀릴까 봐. 풀이 죽은 모습에 태협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그리고 떨리고 뭉친 혀를 겨우 움직였다.

“안태협.”

“안태협?”

“어.”

“안태협. 이름도 니 같다. 연이, 연이는 내 같지 않나?”

연이 씨익 웃고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감히 동정할 수도 달랠 수도 없는 상황에 태협은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연은 혼자 쉼 없이 떠들어 댔다.

그러다 정신이 나간 채 앉아 있는 태협을 손뼉 한 번으로 불렀다.

“문 생각 하노.”

“아니,”

“아, 협아. 니가 저번에 내 소원 들어준다 캤다이가.”

언제 불렀다고 금세 협이라고 한다. 그러나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태협이 반응이 없자, “언제더라? 아, 연탄 마시고 요단강 건너기 직전에 안 있나.” 하고 연이 친절하게 덧붙여 준다. 태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거 말해도 되나?”

연이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물었다. 태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웃음을 띤 채 말했다.

“내 글 좀 알리도.”

그렇게 말하는 연이 참 대단했다.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움의 척도가 남다른 게 아닐까. 생리는 부끄러워하면서 나체로 글자 알려 달라는 것은 부끄럽지 않은지.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주문처럼 태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까짓 글은, 알려 주면 그만이었다.

바로 다음 날, 태협은 서점에 들러 아이들용 교재를 사 와 연에게 글을 가르쳤다. 유명 사립 고등학교에서 줄곧 전교권에서 놀 정도로 머리가 꽤나 명석하다고 자부했지만, 가르치는 일은 또 처음이었기에 어울리지 않게 걱정했으나 연은 생각 이상으로 잘 따라왔다.

한글 공부의 진도는 빨랐다. 연은 이틀 만에 모음과 자음을 익히더니 며칠 만에 단어를 조합해 냈다. 철자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문장도 곧잘 써냈다.

배우는 게 꽤 자랑스러운 듯이, 돌아오는 길에 보면 연은 늘 행복수우퍼 평상 앞에 앉아 배운 것들을 나누고 있었다.

“할매, 이게 기억이다. 기억. 이게 니언. 이게 디걷.”

“치아라, 이 나이 무서 무슨 한글 공부고. 몰라도 잘 살아따.”

“그래도 알면 좋다이가. 그래야 후이도 갈치고 하지.”

태협이 멀리서 웃었다. 무시나 경멸은 아니었다. 배운 대로 가르쳐 주듯 하면서, 또 그렇지만은 않은 게 귀여웠다.

한참 한글 선생 노릇하던 연이 반가운 듯 화창하게 웃었다. 손을 흔드는 연을 따라, 태협은 저도 몰래 손을 들고 좌우로 흔들었다. 머리 위로 손을 흔드는 그 태도가 그만 낯설어서 금방 내렸지만.

“가자.”

그리고 연에게 다가가 손을 맞잡고 걸었다. 어느덧 집에 도착하고, 연은 8세 애들이 쓸 법한 공책을 좌르르 펴고 물었다.

“오늘은 뭐 알려 줄 낀데.”

하루하루 배우는 기쁨으로 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그러게 오늘은 뭘 하지. 고민하던 태협이 결정하고 상 위에 공책을 펼쳤다.

“오늘은 내가 말하는 거 적어 봐.”

연이 광대를 소복이 올렸다. 그러다가 지난번 끝말잇기가 생각이 난 듯 검지를 위협하듯 까딱거렸다.

“어렵게 하지 마리. 이상한 산기슥인가, 라도늄인가, 그런 거 하지 말라고.”

“알았다고.”

태협이 가만히 고민하더니 겨우 한 문장 꺼내 놓았다.

“그런데 너 성이 뭐냐?”

“그, 러언. 데.”

“아니.”

질문을 대답으로 알아들은 연이 붙잡는 손길에 움직임을 멈췄다. 잡은 손이 떨리고 큭큭, 웃음소리가 들렸다. 연이 고개를 들었다. 태협은 재밌어 웃고 있었다.

“성이 뭐냐고.”

“성? 어, 성.”

연이 말하고 싶지 않은 듯 몸을 뒤틀었다. 그게 태협의 눈에는 망설임으로 보였다.

“너희 아버지 이름의 앞 글자가 뭐냐고. 원래 시험 칠 때 오른쪽 구석에 학년, 이름, 번호 쓴다. 너도 그런 거 해 봐야지.”

설마 고아인가 싶어 태협은 아차 했다. 다시금 그런 거 안 써도 된다고 말을 하려던 찰나에, 연이 대답했다.

“우리 아버지 이름, 시정배.”

다행히 고아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네 이름부터 적어 봐. 시연.”

“내, 이름, 시연.”

시이, 여언. 연이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비록 삐뚤삐뚤한 글씨체지만 글자는 틀리지 않았다.

시연을 적고 나자 연이 태협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근데 내 언제 연이라고 불러 줄 낀데?”

“받아쓰기 100점 맞으면.”

“받아쓰기? 그게 뭔데.”

“지금 하는 거. 내가 말하는 문장, 틀리지 않고 다 맞으면 불러 준다고 그렇게.”

태협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장난인데, 연은 꽤나 불타오르고 있었다.

“진짜가?”

“어.”

“니 딴말하기 없기디?”

태협이 고개를 끄덕이고 본격적으로 문제를 냈다. 문장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태협은 행복수우퍼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은근슬쩍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는다. 연은 태협을 노려보면서도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였다.

[태협은 행복수우퍼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안습니다.]

“아, 뭐 틀린 것 같은데.”

연은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했다. 태협을 봤지만, 그는 냉정하게 외면한다. 그렇게 차근차근 적다 보니 9번이었다.

“지훈과 놀지 않겠다고 태협과 약속합니다. 지훈은 개변태 또라이.”

“야!”

연이 화를 버럭 냈다. 뭐? 물으니 화난 얼굴로 대답했다.

“천천히 말해라, 글고 이거 두 문장이다이가! 밑짱 빼지 마라.”

연이 짜증을 부렸다. 까탈스럽다고 지적한 태협이 그러면 앞의 것만 쓰라고 하고는 마지막 한 문장을 고민했다.

“태협은 시연을…….”

태협은 시연을, 까지 적은 연이 태협을 빤히 주시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태협이 잠시 숨을 죽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저었다.

“다시.”

“아, 왜.”

“출제자 마음이지.”

“하여간, 지 멋대로. 으이구.”

착한 내가 봐준다, 연이 지우개로 종이 위 연필을 깨끗이 지워 냈다. 그리고 기다렸다.

“나는 태협과 섹스를 하고 싶다.”

연은 살짝 몸을 떨었다. 눈은 아니그등?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은 듯 연은 천천히 써 내려갔다.

나는, 태협과 섹스를, 하고, 싶지 않다. 연이 씨익 웃었다. 태협은 입가 근육만 빳빳하게 굳혔다.

빨간 동그라미와 핏빛 빗금이 공책 위에 어우러졌다. 하나하나 고쳐 준 태협이 색연필로 상을 두드렸다.

결과를 보고 연은 시무룩해졌다. 다 맞을 거라 예상한 모양이었다.

“항그 틀렸네. 아, 마이 틀맀다고.”

결과는 60점이었다. 그래도 즉석에서 한 것 치고는 잘했지만, 태협도 아쉬움이 남았다.

“틀렸을 때의 벌칙을 안 정했네.”

“뭐?”

“틀리면 다음에는 옷 하나씩 벗기 그런 거.”

연이 경악하며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맸다.

“뭐고? 저질스릅다. 니가 진짜 변태다. 틀리면 틀리는 거지 거서 어떻게 옷을 벗길 생각을 하는데!”

비난이 쇄도하지만 태협의 얼굴은 해맑았다. 도대체 그게 뭐가 문제냐는 얼굴. 그리고 틀린 개수를 셌다. 10문장 중에서 4문장.

“60점이면 심하잖아. 나는 90점 이하로 내려가 본 적이 없어. 어떤 시험이든. 며칠간 열심히 가르친 보람도 없고.”

바보냐? 그렇게 말이 나올 뻔하였지만, 태협은 이만 말을 줄였다.

“그러니까 나도 보람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연이 입은 상의를 벗기고 침대에 곧장 눕혔다. 연은 쥐고 있던 연필을 놓았다. 며칠, 학구열을 불태우나 했더니.

“하여간 니는 도움이 안 된다.”

대꾸 없이 치마 밑으로 손이 들어왔다. 태협은 팬티를 종아리까지 벗긴 후 얼굴을 들이밀었다.

“틀렸어.”

“아, 거따 대고 말하지 말라니까.”

“내가 네 인생에 유일한 쓸모가 될 거니까.”

연의 드센 버둥질에도 태협은 거침없이 핥고 빨았다.

“하으……. 니 또.”

안으로 수월히 들어가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태협은 짓처넣는 것 이상으로 이런 행위에 정성을 쏟았다. 사실 나쁘지 않았다. 연은 혼자 간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기도 또, 자존심 상해하는 시간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혀가 마구잡이로 자극원을 찾아 움직였다. 입구가 혀와 손가락을 동시에 조였다.

“이제, 흐음, 그만 넣어 도라.”

부풀어 오르는 클리토리스와 메아리처럼 울리는 신음이 더 큰 흥분을 주었다. 그렇게 올라가다 올라가다, 결국 추락하고 부서지는 연의 모습을 보고서야, 태협이 입술을 혀로 닦았다.

연이 색스러운 숨을 몰아쉬었다. 남자의 더운 숨이 다시 입술을 머금고 검붉게 발기된 그것을 단숨에 처넣었다. 연의 몸이 꼬이고, 태협은 그것을 만족으로 느꼈다.

뇌가 절단되듯 생각이 흩어지고 몸에는 본능만이 남았다. 태협은 연의 가슴에 얼굴을 들이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손에 잡힌 건 쾌락에 겨운 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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