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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3/13)

3장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태협은 서울로 올라가 3일을 보낼 생각이었다. 3일간 그 지린내 나는 동네를 갈 이유도, 연을 볼 이유도 없다는 말이었다.

하교를 하자마자 곧바로 서울로 향했다. 차에 타자마자 기사는 비행기 예약 시간을 말해 주었다. 일사천리로 공항에 도착해 게이트를 지나려던 참이었다. 서울을 갈 생각을 하니 비식비식 다채로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클럽도 가고 며칠간 풀지 못했던 것들은 가감 없이 풀 생각이었다.

연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선택해라. 내랑 가서 할매한테 사과를 하든가, 아니면…… 내를 안 보든가.”

태협은 악을 쓰던 연을 속으로 한껏 비웃었다.

지가 뭐라고. 재수 없게. 욕 몇 마디를 날린 태협은 홀가분하게 웃었다.

“좋은 주말 보내십시오.”

배웅하는 기사의 말에 기분 좋게 손을 휘저었다. 아마 오늘부터 연은 독수공방하며 외로움에 사무칠 것이다.

원래 섹스라는 게 그렇다. 하기 전에는 몰랐지만, 알고 난 후에는 계속해서 생각나게 되는.

태협은 주말 내내 몸이 달 연을 상상했다. 제 손가락으로 아무리 들쑤신다고 해도, 다른 남자에게 다리를 벌린다고 해도 그 손가락만 한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겠지. 비교도 안 되겠지.

그 지점에서 태협의 동공이 떨렸다. 출국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다른 남자?

태협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허리를 숙였다 편 기사도 덩달아 멈추고 태협의 눈치를 보았다.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불안함에 입술에 침을 바른다. 불과 1분 만에 도련님은 얼굴색이 죽어 가고 있었다.

태협은 기분이 꽤 절망적이었다. 연이 동네 누군가에게 다리를 벌리는 상상을 넘어, 그 짐승 소굴 같은 곳에서 누가 연을 덮치는 상상도 했다. 어쩌면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연이 누군가를 덮친다거나.

“미친, 씨발.”

상상의 끝은 그 말간 얼굴과 하얀 몸뚱어리였다. 남들에게 그런 얼굴을 보이고, 웃고 울고.

울어? 피가 차게 식었다. 아니, 가슴 한구석이 울렁이고 미친 것처럼 복압이 올라갔다.

텁텁해진 입을 태협은 겨우 열었다.

“씨발, 차 갖고 와.”

“예?”

“차 가지고 오라고!”

가는 동안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스스로 비정상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태협은 숨을 헐떡였다.

뛰다시피 달동네를 올라갔을 땐,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땐, 연이 반대편 담장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붉은 태양을 받아 내는 연의 모습은 색달랐다. 세상에 곤두박질이라도 쳐진 양 아슬아슬한 얼굴로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맑고 걱정 없어 보이던 모습은 오간 데 없이 세상 저편으로 떠밀린 것처럼 아득했다. 곧장 그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다.

하필 또 바로 앞이 3m가 넘는 절벽이었다. 태협은 제대로 닫히지 않는 문을 열고 연의 허리를 감쌌다.

몸이 뒤로 넘어가자 연이 고성을 질렀다. 놀란 소리를 막으려 태협이 입을 이용했다. 소리가 안으로 먹혔다. 잠시 당황했던 연은 혀를 휘감고 받아들이었다. 능숙히, 그리고 예상한 듯이 태협을 받아들였다.

태협은 연을 데리고 곧장 제집으로 향했다. 그는 불안함을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온 힘을 다해 연을 몰아붙였다.

도대체, 네가 뭔데.

겨우 정사가 끝나고 태협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연은 널브러진 채 말이 없었다. 이곳에 온 게 당연하고 또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에 태협은 뒷머리를 북북 긁었다,

“반성은 했나.”

“반성은 개뿔.”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연이 성난 얼굴을 들이밀었다.

“했나 안 했나?”

집요하게 묻는 모습에 태협이 화난 표정을 만들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에 얼굴은 죄다 가려져 있어 눈동자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 모습이 조금 전까지 제가 본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염적이었다.

오싹했다.

그래서 태협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따 할매한테 가서 사과하자. 어에든동 내 도아주께.”

그리고 연은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이따가 언제인데. 그 말만 입가에서 맴돌았다.

한숨을 자고 일어난 연은 정말로 태협의 손을 잡고 할매 집으로 데려갔다. 다만, 태협의 손에는 피자와 치킨이라는 무기가 들려 있었다.

“저번맨키로 그러지 마라.”

태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매 내 왔다, 소리친 연이 문을 열었다. 재수 없는 꼬마의 등장에 할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자가 왜 여깄노.”

“내가 데리고 왔다.”

“치아라, 꼴 보기 싫다.”

“할매, 아가 사과하러 왔다이가.”

“댕기들 때는 은제고.”

“그래도 으른이 받아 줘야지.”

“사과는 개코다. 저 맨상이 사과하러 온 기라고?”

태협은 나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을 풀풀 풍겼다. 연이 팔꿈치로 태협의 배를 가격했다. 그대로 표정을 풀 기미가 보이지 않자 대신 변명했다.

“표정은 저래 봬도 마음은 안 글타. 비단이다. 비단.”

욕설을 중얼거리는 할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난 똥 때리나, 적삼도 저것보다 들 까칠하겠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이 애가 알고 있는 비단은 좀 다른 걸까. 뒤로 물러서서 딴생각을 하던 태협이 연의 재촉에 겨우 입을 열었다.

“죄, 송합니다.”

“뭐꼬 니는.”

“기분 나쁘셨다면…….”

어정쩡한 사과를 하는 태협을 할매는 본데없다며 역정 냈다.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태협의 인생에 최대 굴욕이었으나, 눈으로 욕하는 할매와 그보다 앞에서 눈으로 비난하는 연에게는 어쩔 수 없었다.

“같이 먹으려고 가져왔습니다.”

태협이 박스를 건네자 뒤에서 손이 거칠게 튀어 나왔다. 그는 박스를 가져가서는 거칠게 뜯었다.

“후나, 여서 그렇게 하면 되나.”

할매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후니라고 불리는 남자의 행동거지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몸은 다 컸으나 하는 행동이 꼭 애 같다.

태협이 눈을 가늘게 뜨고 찡그리자 연이 입술 앞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쉿.

“문 생각 하는지 안다. 티 내지 마라.”

허리를 쿡 찌르며 당부한 연이 방에 발을 올렸다.

“할매 묵자!”

“은냐. 무라.”

“머 하노! 안 들오고!”

주방에서 그릇을 가져오던 연이 태협의 팔짱을 끼고 안으로 잡아당겼다. 탐탁지 않게 크음, 소리를 내다가 할매는 엉덩이를 슬금슬금 움직여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연이 웃었다. 그리고 맞제? 하고 묻는다. 태협은 이를 악물었다. 맞네. 그 대답을 하지 않기 위해서.

식사는 꽤 평화롭게 진행됐다. 그리고 가기 직전, 할매는 조금 있어 보라고 말한 후 연과 부엌으로 들어갔다. 훈과 태협 두 사람이 방 안에 남았다.

그만 가고 싶은데 또 무슨 과일을 주겠다고. 문드러진 바나나가 오는 게 아닐까. 발끝을 까딱거리고 있자 지훈이 태협을 불렀다.

“헝아.”

태협이 고개를 돌렸을 때, 지훈은 열정적일 정도로 태협의 얼굴을 뜯어보고 있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욱했다. 학교였다면 눈 깔라고 한마디라도 했을 텐데. 참고 뭐? 하고 물었다.

지훈은 태협이 입고 있는 옷에 피자 묻은 손을 슥 닦았다.

“찜콩.”

아 시발, 태협은 한껏 화가 난 얼굴로 욕을 지껄였다. 그래도 온몸에 힘을 주어서인지 다행히 손은 나가지 않았다.

순간 문이 드르륵 열렸다. 연이 접시에 과일을 들고 등장하자, 지훈이 눈에 모를 세우더니 검지로 연을 가리키고 맹수처럼 으르렁댔다.

“시발년.”

몸에 가득 찼던 힘이 단숨에 풀어진 태협은 손바닥으로 지훈의 뒤통수를 휘갈겼다.

“누가 시발년이야.”

하필 그 순간, 그때 할매가 나오고 말았다. 할매는 어디 귀한 손주를 때리냐며 노발대발했다. 태협은 얘한테 욕을 하는 걸 보고도 어떻게 놔두냐며 대섰다. 그 결과 과일은 먹지도 못했다. 태협이 쫓겨나고 연이 뒤따라 나왔다.

“아 쫌! 승질 좀 못 죽이나!”

태협이 연마저도 짜증스럽게 노려봤다.

“이 미친 동네엔 제대로 된 인간이 하나도 없지. 아주.”

“니만 하겠나! 머심아야!”

다 들었을 텐데도 저한테만 뭐라 하는 연에게 못내 태협은 서운했다.

제집으로 먼저 올라갔다.

????????????

다음 날.

태협은 쉬이 일어나지 못했다. 알약을 몇십 개 입에 처박은 것처럼 머리가 몽롱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 그가 최근 들어 가장 흥미가 생긴 소리가 들렸다. 연의 웃음 소리였다. 어떤 소리인지 정확히 규정하기는 어려웠다. 바람에 나부끼는 방울처럼 맑기도 하고 높은 곳에서 쓸려 내려오는 강물처럼 시원한 소리이기도 하다. 아니면 그 밑바닥에서 쓸려 나가는 자갈돌 소리 같기도 하고.

정작 본인 앞에서는 흐흥, 그런 코맹맹이 섞인 얕은 소리밖에 듣지 못했지만, 가끔 한 번 크게 웃을 때 따라 웃고픈 충동이 들었다.

태협이 무의식을 거닐다 몸을 움찔거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발끝부터 전류가 타고 흘렀다.

“야!”

환상에 더 가까워질 찰나였다. 질긴 고막이 뒤틀리는 소리를 전달했다. 순간 명치끝이 부풀고 깨질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태협이 몸을 뒤집었다. 역한 냄새가 밀려 들어오자 구역질을 막기 위해 입을 가렸다. 환상이 무참히 깨지고서야 시야가 확보됐다. 아침부터 연의 찡그린 얼굴이 흐릿했다.

여전히 꿈인가 하였다.

“연아.”

뭉그러진 발음으로 연의 이름을 말한 태협이 혼몽하게 손을 뻗었다. 길고 얄쌍한 팔이 공중에서 허우적거렸다.

꿈속이 확실한 모양이다. 찬 몸이 만져지지 않는 거 보니. 꿈이라고 생각한 태협이 다음은 분명하게 불렀다.

“연아.”

“미친 머심아야! 정신 챙겨라!”

부드러운 태협의 부름에 대한 반응은 벼락같은 음성이었다. 연은 태협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처럼 태협의 뺨을 연속적으로 때렸다. 아프진 않았지만, 아니 아프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다. 연의 얼굴이 희뿌연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상했다.

“안 인나고 뭐 하노?”

태협이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연이 “상그럽다, 상그러버.” 한 소리 하며 작은 몸에 태협을 얹었다.

태협은 푹 젖은 솜이 되어 연의 어깨에 얹혀졌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한 연이 기합을 넣어 겨우 움직였다.

그는 연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운동으로 잘 다져진 남자였다. 가끔 이고 오는 쌀 포대의 무게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가릴 것이 없어서 시트까지 들고 오다 보니 연은 한 걸음 걷는 것만으로 온몸이 분질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와 이리 무겁노. 죽긋다.”

태협의 평소 식성을 떠올린 연이 그가 들을 수 있는 크기로 구시렁거렸다. 혼자 피자 한 판을 처먹고, 치킨 한 마리 반을 처먹더니. 무시무시하다 무시무시해. 겨우 평상 위에 태협을 앉혔다. 몸이 힘없이 뒤로 넘어갔다.

“미친갱이 아이가.”

그 와중에 서 있는 페니스를 징그럽게 바라본 후 이불을 정리해서 덮었다.

이라고 있을 때가 아인데!

연이 집으로 돌아가 동치미를 한 바가지 퍼 왔다. 그사이에 벌어진 일을 본 연의 발길이 우뚝 멎고 말았다.

“꼬추부터 가려서 다행이네.”

????????????

꿈속의 연을 찾아 한참 헤맸던 태협은 소란스러운 가운데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바로 보이는 건, 역시 연의 얼굴이었다. 입가엔 미소가 걸렸다.

“연아.”

나 덥다, 태협은 눈을 못 뜬 어린 새가 애타게 먹이를 찾듯 손을 뻗었다. 연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태협의 손을 쳐 내렸다.

“와 친한 척이고. 징그럽구로.”

주위 눈치를 보면서 “퍼뜩 인나라고 머심아야.” 한 마디 했다. 뭐? 멍청해 보일 정도로 하얗게 질렸던 얼굴의 미간에 주름이 두드러졌다.

옆에서 조금 걸걸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아! 니부터 찾는다. 우짜겠노. 맘이 에릴라 칸다.”

“오메, 총각 일어났나?”

이건 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얇은 눈꺼풀에는 짙은 쌍꺼풀이 두 겹이 쌓였다.

정신을 차리자 시야에 대여섯 명의 얼굴이 걸렸다.

태협은 놀라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행히 연이 이불을 들어 하체 전체가 보이는 상황을 막을 수 있었지만, 탄탄한 가슴팍과 오밀조밀 자리 잡은 허벅지 근육은 전체에게 공개됐다.

“에그머니.”

길게 뻗은 다리를 보던 동네 사람들의 얼굴이 음흉함에 물들었다.

“건강하다 건강해. 저게 뭐고. 말이가?”

“연아, 니 땡 잡았네. 남자는 자고로 허벅다리다. 허벅지가 좋으믄,”

“아, 아짐요, 그런 사이 아이라니까요.”

와중에 연은 가릴 수 있는 부위는 최선을 다해 가려 주었다.

“안 앉고 머하노, 머심아야.”

강제로 태협을 주저앉혔다. 엉덩방아를 찧자 주민들이 “부랄 안 깨짔나?” 하며 음흉이 웃었다.

웃으면 안 되는 걸 아는데, 연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그 순간 스친 웃음이, 태협이 제대로 기억하는 오늘의 첫 장면이 되었다.

????????????

동네의 만물장수, 정남 아버지가 말하길 연탄보일러의 온수 파이프가 찢어져 연탄가스가 샜다고 했다.

고쳐 놓을 테니 병원에 다녀오라고 하기에 태협은 연과 함께 일산화탄소 중독 증세를 치료하러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정신은 돌아왔지만, 예민하게 솟은 미간은 풀릴 줄을 몰랐다. 수치스러워서, 이대로 머리를 박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짐들이 아 놀리는 게 웃겨서 그런 거지. 나쁜 뜻은 읎다.”

기사를 부르는 것도 싫다면서 병원은 택시 타고 연과 둘이서 갔다. 어여 댕겨 온나, 주민들은 깔깔 웃는 소리가 귓가에 선했다. 태협이 보호자 자격으로 동행한 연에게 따졌다.

“너는 왜 웃었냐고.”

“내야, 아짐들이 웃으니까. 아니, 웃기다이가.”

태협은 그 사이에서 웃고 있던 연의 행동을 지적했다. 열심히 반박했지만, 눈을 감고 뒷골을 문지르는 태협은 이미 잔뜩 상처 받은 얼굴로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신 머시마가 꼼생이맹키로 그르냐.”

“너 동네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 줘?”

“그걸 왜 내한테 화풀이고. 내는 꽁꽁 싸매 줬는데 지가 일어났음서?”

글고 내 아니었으면 니, 싹 다 비줬다이.

연이 다행인 줄 알라는 듯이 중얼거렸고, 할 말을 잃은 태협은 고개를 돌려 연을 노려보았다. 연은 환자를 놀린 게 미안했는지 태협의 머리를 누르고 토닥였다.

“내가 아짐들 입 단단히 단속시키께! 극정하지 마라.”

호언장담하지만 영 못 믿을 얼굴이었다.

“안 되면 내가 니 확 책임질 테니까!”

태협은 황당해서 어안이 벙벙한 채 연을 보았다. 네까짓 게? 그까짓 말로 위로가 될 리가 없었다.

붉어진 얼굴을 보던 연은 보슬보슬한 머리를 잡고 제 무릎에 눕혔다.

“쫌 자라. 도착하면 깨우께.”

택시는 좁았다. 다리가 길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머리를 쓸어 올리는 손길이, 허벅지의 살집이 은근히 편안해서 잠이 왔다. 태협은 아까 전에 있었던 일을 머릿속에서 지우려는 듯 눈을 감았다.

서너 시간 수액을 맞은 후 퇴원하는 길이었다.

“퍼뜩 안 오나.”

연이 먼저 원무과 앞에 섰다. 링겔 처방을 받은 태협은 한결 머리가 편해졌음을 느꼈다.

그러나, 손에 남은 온기가 불편하게 떨어지지 않았다. 링겔을 맞는 몇 시간 동안 손을 붙잡고 잔 것인지 작은 주먹의 느낌이 각인처럼 제 손에 새겨져 있었다.

누가 먼저 잡았을까. 당연히 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태협은 취한 듯 그 상항을 즐겼다. 연이 일어날 때까지 보고 있었다.

태협은 연이 옆에 서서 카드를 내밀었다. 시원하게 결제하는 모습을 연이 신기한 듯 쳐다본다. 결제가 끝나자 두 사람이 병원을 나왔다.

“그라믄 이제 가까.”

연이 한 발 앞서 걸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완력에 의해 끌어당겨졌다.

“갖고 싶은 건?”

“어?”

“뭐 갖고 싶은 건 없냐고.”

이 정돈 베풀어 줄게, 그런 얼굴이었다. 목숨값이니 비싼 것도 사 줄 요량이었다. 하지만 연의 말간 얼굴에는 욕심이 없었다.

“댔다, 니 살면 된 거지.”

“두 번 안 물어.”

태협이 다음은 없다는 듯 협박했다. 그는 뭐든 다 들어줄 기세였고 연도 이 아까운 제안을 흘려보내긴 아까운 모양이었다. 조금 고민하더니 넌지시 꺼낸다.

“당장 말고, 내 필요할 때 말하면 안 되나?”

“언제?”

“생각나면 말하께. 내도 연기를 마이 마시가, 잘 생각이 안 난다.”

어리광 피우는 말에 태협의 입가가 다시 허물어졌다가 돌아왔다. 은인인데, 그 정도 기다림은 할 수 있었다. 그래 봤자, 얼마나 큰 걸 요구할까 무시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인자 됐제? 가자.”

연은 집에 꿀이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재촉했다. 그게 태협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연을 제 옆에 당겼다.

“꿀 발라 뒀냐?”

“아니? 안 가면 뭐 할라고. 짜달시리 할 게 없다이가.”

태협이 연의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나온 김에.”

“어?”

“놀다 가자고.”

“니랑? 내랑?”

치료 덜 됐나? 싶을 정도로 태협의 얼굴은 발갰다. 그러나, 연의 손을 말아 쥐고 끌고 가는 손길에는 망설임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맞잡은 손이 따뜻했다. 느리게 뛰었던 심장이, 손끝까지 피를 전달하는 저릿한 기분이었다.

그게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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