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art 1-1장 (1/13)

Part 1

1장

부산. 어느 달동네.

산에서 매서운 겨울 삭풍이 내려와 살갗을 에던 11월의 어느 하루였다. 추워서 깬 연은 얇은 이불을 죄다 끌어모아 몸을 덥혔다.

연탄 땔 때가 됐구나.

올해 연탄 가격이 600원쯤 된다고 했나. 이를 덜덜 떨던 연은 손가락을 접어 계산했다. 좌우간 따뜻해지기만을 기다리던 그때 판자벽 너머에서 분주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거기 안으로!”

연이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추위에 들러붙은 눈곱을 손가락으로 비벼 떼고 소리를 향해 홀린 듯 걸어 나갔다.

문을 열었다. 경첩에 녹이 슬어 문이 비명을 내질렀다. 밑창이 닳은 슬리퍼를 신은 연은 소리가 난 곳을 단번에 찾았다.

근원지는 파란 페인트칠 자국이 일품인 옆집으로 이 동네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늘 비어 있던 그 집이 며칠 전부터 수리를 하더라니. 오늘 사람이 들어올 모양이었다. 죽은 듯 조용한 동네가 오랜만에 활기를 띠어 북적이고 있었다.

“그거는, 여기 두고. 침대는 저기 두고.”

하얀 남자가 덩치들을 진두지휘하고 있었고, 양복 차림의 덩치들은 무거운 짐을 이고 경사진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이 높은 곳까지 저것들을 옮겨 온 것일까.

연은 문득 궁금해져 문에 바짝 붙어 서서 그 행렬들을 지켜봤다. 꼭 개미들 같다. 여왕을 위해 먹이를 옮기는 일개미.

공연히 웃은 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옆집에 들어갔던 덩치들은 나와서 팔을 돌리며 인상을 잔뜩 쓰고 내려갔다. 눈이 마주치면 질문이라도 해 보려 했지만, 그들은 연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재미읍따.

게다가 끝나려면 한참이나 남아 보였다.

쪼매 있다 나와야지.

집으로 들어가려던 연이 뭔가를 보고는 걸음을 되돌렸다. 덩치들이 썰물처럼 빠진 자리엔, 또래의 남자아이가 있었다.

연은 기둥에 붙어 아이를 보는 데에 열중했다. 키는 하얀 남자보다 반 뼘 정도 컸고, 더 잘생겼다. 언젠가 감자를 담아 왔던 전단지에서 본 연예인보다.

윽수로 잘생겼네.

연은 힐긋 옆눈으로 남자애를 보았다. 남자애는 잘생긴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와 저리 인상이고. 연이 괜히 따라 주름을 지어 보였다.

하얀 남자가 소년을 살짝 건드렸다.

“잠시만 있어.”

목소리가 커서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다.

“조금만 참으면 상황 다 풀릴 거고 사모님께서 데리러 올 거야. 학교도 걱정하지 마. 차편도 준비할 거고 아이들 수준도 서울과 다르지 않으니까…….”

남자가 아이를 달래는 모양새에 연은 더욱 궁금증이 커졌다.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예민한 남자애는 기척을 느꼈는지 연을 향해 고개를 뒤틀었다.

헉, 연은 깜짝 놀라 문과 돌담 사이의 기둥에 재빨리 몸을 숨겼다.

우짜노.

거짓말처럼 심장이 빨리 뛰었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았다. 진정하려 했지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그 애가 있던 방향에서 발끝까지 긴 그림자가 이어져 있는 것을 보고 연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인기척에 서서히 고개를 드니, 남자아이가 고작 세 걸음 떨어진 곳에서 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 뭐냐.”

그렇게 물어서, 연은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

소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짐은 빠르게 정리되었는지 덩치들은 금세 사라졌다. 동네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연은 남자아이와 마주치자마자 집으로 후다닥 들어가 다시 이불로 숨어들었다.

우야노, 심장이 막 뛴다.

스며들 듯 아름다운 얼굴이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먼 머스마가 저렇게 생겼노.

이미 남자아이는 시야에, 머리에 각인이 되듯 새겨졌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연은 너덜너덜한 비닐에 싸인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제 키보다 한 뼘 반 큰 담장에 매달려, 남자아이가 있을 만한 곳을 보았다. 아무리 뛰어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뒤집힌 세숫대야를 발견했다. 얼른 주워 온 연은 위로 조그만 벽돌까지 얹어 뒤꿈치를 올리고 옆집을 정찰했다. 남자아이가 평상에 누워 있는 게 보였다.

“우짜면 저래 기노.”

연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2m가 넘는 평상 위에 무심히 누워 있는 모습이 그림 같았다.

또래 남자아이, 그것도, 잘생긴 또래 남자아이.

한겨울이었으나 어디선가 꽃향기가 흘러와 소녀의 가슴을 두드렸다.

연은 계속해서 남자아이만 구경했다. 남자아이는 계속해서 누워만 있었다.

고개만 일로 좀 돌리면 좋을 낀데.

아쉬워 입을 삐죽이는 순간 별안간 남자아이가 고개를 치들었다. 그는 연이 있는 쪽을 곧장 노려보았다.

아이고, 들키뿌따.

놀라 허둥거리다 그만 작은 돌 위에서 휘청거렸다.

으악! 걸출한 소리가 났다. 엉덩이로 떨어진 연은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기어서 벽과 돌기둥 사이에 후다닥 몸을 숨겼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들키지 않았나 보다, 순진하게 생각하고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서는 순간,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너 뭐냐고.”

남자아이가, 정확히 연이 서 있던 그 자리에서 연을 질색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짜증 나서 미쳐 버리겠다는 표정, 그 눈에 연은 겁을 집어먹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변명하려는 연에게 남자아이는 본인의 집으로 넘어오라는 뜻으로 손을 까닥였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 연은 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럽게 새파란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감탄했다. 비 한 방울 샐 틈 없는 양철 슬레이트 지붕과 흰 외관은 튼튼하다 못해 세련돼 보이기까지 했다.

구경도 잠시 발 구르는 소리가 났다. 연이 고개를 들어 올려 소리가 난 곳을 보았다.

남자아이는 평상에 고고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다가오라는 듯 턱짓했다. 연이 가까이에 가자 그녀를 탐탁지 않게 쳐다봤다.

“너 뭐냐.”

“내?”

“그래, 너 뭐냐고.”

연이 무안하고 주눅이 들어서 눈을 내리깔았다. 남자아이가 옆에 있던 플라스틱 통을 툭 차서 쓰러뜨렸다. 자갈이 담긴 플라스틱 병이 데굴데굴 굴렀다.

“왜 계속 나를 보고 있었냐고.”

“니를 왜 보고 있었냐고?”

남자아이가 사납게 쏘아보았다. 구태여 물어보는 연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듯 연을 아래위로 재듯이 훑는다.

“누가 보냈냐?”

“여그로? 아이다. 내 여기서 계속 살고 있었다.”

“…….”

“딴 게 아니고 내는 그냥 신기해서 보고 있었다.”

“…….”

“여가 사람이 잘 안 오고 잘 안 나가는 곳이라 가지고. 진짜 심심해서 본 거지, 나쁜 뜻은 없다.”

그냥, 잘생긴 사람 본 것뿐이다. 흑심 없이.

연이 얼굴이 발그레해져서는 덧붙였다. 고개를 숙인 와중에도 얼굴에 어린 홍조가 잘 보였다. 남자아이가 구겨진 미간을 풀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연의 얼굴과 몸을 훑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 연이 동글동글한 이마를 손톱으로 긁적였다. 추워서 그런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와중에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근데, 니는 이름이 우째 되는데?”

“…….”

“어? 니 이름은 우째 되냐고?”

“원래 남의 이름을 물어보기 전에 자기소개부터 해야 하는 게 예의야. 안 배웠냐?”

상대는 냉철하고 단호하게 중얼거렸다. 연의 얼굴에 화르륵 불꽃이 피어올랐다. 깨끗한 얼굴은 꼭 붉은 칠을 한 도자기 같았다. 연은 한동안 말을 찾는 듯 우물쭈물했다.

오래지 않아 연이 본인을 가리켰다.

“내 이름은 연이다.”

“연? 외자?”

“……여 할매들이 다 내를 연이라고 부르니까 니도 연이라 부르면 된다.”

연이 손짓으로 마을 전체를 가리켰다. 그리고 조금 더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다시 남자아이에게 물었다.

“인자 알리도. 니는 이름이 뭔데?”

남자아이가 꼰 다리를 펴고 일어났다. 긴 다리로 망설임 없이 걸어왔다. 연은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숙였다가 잘생긴 얼굴을 보고 싶어 올리기를 반복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남자아이는 더욱 컸다. 한 마리 들짐승 같았다.

그는 말없이 연의 손바닥에 글을 썼다.

손이 맞닿자 연은 부끄러워 얼굴을 발그레 붉혔다. 손바닥이 간질간질한 게 몸이 움찔움찔했다. 손등에 닿는 큰 손의 감각도,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듯이 움직이는 하얗고 긴 손가락도, 그리고 바로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숨결도, 처음 느끼는 종류였다.

연은 몸을 말고 움츠렸다. 눈이 겨우 마주치자 남자애가 말했다.

“알겠냐?”

“어, 응. 알겠다.”

연의 태도를 고깝게 본 남자아이의 얼굴에서는 또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것은 오만하고, 자신감에 찬 승리의 미소였다.

????????????

서울이나, 부산이나. 여자는 다 똑같지.

연을 보내고 자리에 누운 태협은 반대편 무릎에 종아리를 올리고 까딱여 의미 없는 몸짓을 계속했다.

태협은 오늘 이곳으로 명목상으로는, 유배를 당했다. 할아버지 말로는 허구한 날 술 마시고 나돌아 다닌다는 이유에서였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어쨌든 조부는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아예 먼 곳, 부산의 한 달동네로 집어넣어 버렸다.

태협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고 들었던 것보다 열악한 환경이었다. 이런 곳은 티브이에서나 봤지, 실제로는 처음이었다.

방은 한 칸에 본가의 제 방보다 작았고 욕실과 화장실은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도배장판은 새로 했는지 내부는 깔끔했지만, 회색 슬레이트 지붕은 추잡스러웠다. 게다가 올라오는 길은 어땠던가. 산비탈에 전선은 어지러이 얽혀 있었고 가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꼭 따개비 같았다.

듣기로 연탄을 땐다 했다. 그러나 누구도 태협에게 연탄불 피우는 방법은 알려 주지 않았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나오겠지만, 태협은 태평하게 자리에 누웠다. 남쪽 지방인데 그렇게 추울까 싶었다.

그저 상황이 조금 나아질 때까지 잘 버티자 싶었던 태협은 오늘 아침 보았던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여자아이는 하얗고 또 말간 게 조부가 골동품 시장에서 구해 온 백자 같았다. 값어치가 10억쯤 된다고 했던가.

깨끗한 피부에 얼굴은 반반했다.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곳에 있기는 아까울 정도의 외모였다.

그 여자애는 무릎까지 오는 치마에 딱 달라붙는 상의를 입고 있었다. 물론 시장에서 사 온 듯 이상한 캐릭터가 그려져 있어 동하지는 않았지만, 벗겨 보면 꽤 예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태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약간의 확인만 거치면 될 것이다.

무료한 차에 잘된 일이었다.

????????????

다음 날,

- 도련님 모시러 왔습니다.

전화를 받은 태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이곳에서 할 일도 없었고, 학교 안 가겠다고 어린애처럼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교복을 입은 태협은 빈 가방을 들고 나섰다.

페인트가 덕지덕지 발린 쇠문을 열고 나온 태협은 언 길을 무심히 걸었다. 서너 발자국 걸었을 때, 뒤집은 세숫대야 위에 앉은 연을 발견했다. 그 여자애는 이번엔 태협을 보고 있지 않았다. 높은 고층 건물에 가려진 태양을 보고 있었다.

그가 눈을 찡그렸다. 싸우듯 무모하게 바라보고 앉은 모습이 굉장히 없어 보였다. 태협은 혀를 쯧 찼다. 지지리 궁상도. 내심으로 비아냥대고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발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음에도 연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태협을 확인한 그녀는 시골 강아지처럼 뛰어왔다.

“학교 가나?”

“…….”

“어덴데? 니 어디 학교 다니는데?”

끊임없이 질문한다. 귀찮았다. 태협은 대꾸하지 않고 길을 내려갔다.

어디까지 쫓아올 생각인지. 연은 종종걸음으로 추위에 언 계단을 함께 내려갔다. 태협은 최대한 무서운 표정을 짓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걸었다. 연은 주머니에 꽂힌 손을 보고 안절부절못했다.

“여서 그라면 다칠 낀데. 빼고 가라. 대가리 깨진다.”

주제넘게 잔소리까지 한다. 귀찮으니까, 따라오면 뒤진다. 뒤를 딱 돌아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군데군데 길이 얼었는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태협의 몸은 기우뚱 앞뒤로 흔들렸다.

어어, 눈이 동그래진 연이 그의 팔을 잡고 제 몸 쪽으로 당겼다. 얼떨결에 태협은 연의 어깨에 코를 박았다.

태협이 눈을 힘껏 감고 숨을 멈췄다. 구린 냄새가 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코끝에 새벽녘의 이슬처럼 신선한 향이 스며들었다.

그가 눈을 번쩍 떴다. 한 품에 안기는 몸태도 문제였다. 가슴에 닿는 소복함에, 순간 아랫배가 꼬이며 힘을 찾아가는 게 느껴졌다.

태협은 저도 모르게 힘껏 연을 밀었다.

연은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당황한 태협이 얼굴을 붉혔다.

“기껏 구해 줬드만. 와 미는데, 니.”

엉덩이를 바닥에 찧은 연이 원망하듯 태협을 올려다보았다. 적반하장으로 태협은 욕을 지껄였다.

“미친.”

연과 닿았던 일이 불결하다는 듯이 털어 냈다. 연은 주저앉은 사이 그는 마을 어귀에 와 있던 차를 타 부리나케 멀어졌다.

차에 탄 그는 작게 욕을 지껄였다. 고작 저따위 여자애한테 동하다니. 태협은 차 안에서 짜증을 냈다.

멀리서 태협이 사라지는 걸 보던 연은 모래와 얼음이 뒤섞인 손바닥을 털어 냈다. 쓰러진 잡초처럼 바닥에 붙어 있던 연은 일어나는 게 익숙한 오뚝이처럼 양 무릎에 두 손을 올리고 일어섰다.

마음은 괜찮다. 하지만 그래도 짜증이 나 얼굴엔 불편한 감정이 그득했다.

“미친 머심아 아이가. 저거.”

????????????

하필 시발 남고다.

태협은 골이 난 표정으로 하굣길을 올랐다. 하필 남고였다. 약육강식의 절정인 짐승들의 세계. 퀴퀴하고 찝찝한 땀 냄새와 뒤틀린 욕망의 냄새만 가득한 남고. 어쩌면 다행스럽기도 했다. 그들은 태협에게서 느껴지는 돈과 권력의 냄새를 맡았는지 첫날부터 태협의 눈치를 보며 아양을 떨어 댔다.

태협은 그들 앞에서 피식 웃고 혹은 적당히 무시하는 것으로 그들을 단번에 제 아래에 두었다. 그렇게 서열을 세우는 것으로 하루는 끝이 났다.

강제로 시행되는 야간 자율학습 따위는 무시하고 기사를 불러 학교를 고요히 빠져나갔다. 학교에서도 들은 게 있는 모양인지 더는 잡지 않았다.

차는 아침에 기다리고 있던 곳에서 멈췄다.

“더는 들어갈 수가 없어서요.”

기사는 내일 그 시간에 오겠다고 말한 뒤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태협이 대답 없이 문을 거칠게 여닫고는 위로 걸었다.

“시발.”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였다. 찬 바람에 얼굴이 부르튼 느낌이 드는 것조차. 그는 폐에 무리가 올 정도로 걸었다. 찬 바람을 가득 머금었는지 한구석이 저릿했다.

꽤 숨이 찼을 때 태협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아, 끓어 넘친 더운 숨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자 낡고 쓰러질 것 같은 건물이 보였다. 유리문에 적힌 글씨를 본 그가 피식 웃었다.

“행복수우퍼.”

불투명한 갈색 유리에 흰색 글씨로 행복수우퍼라고 적혀 있었다.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수우퍼.

정글 같은 남고에. 행복수우퍼에.

아니꼬운 얼굴로 지나가려는 태협의 앞을 뭔가가 가로막았다.

“왔나?”

다름 아닌, 연이었다. 연은 아침에 당한 수모는 까맣게 잊은 듯이 그에게 천진하게 말을 걸었다. 태협이 눈썹을 사선으로 삐죽 올렸다.

“밸도 없는 거냐?”

대단도 하다는 얼굴로 비꽜으나 연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그의 팔짱을 꼈다.

“니 밥 안 뭇제?”

연은 태협의 대답을 듣지 않았다. 그의 두터운 팔을 부여잡고 무지막지한 힘으로 잡아끌었다. 막무가내였다. 태협은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희미하게 풍겨 오는 땀 냄새에, 큼큼한 남고에서 맡던 것과 다른 향에 이끌리고 말았다.

“할매, 연이 왔다.”

행복수우퍼 안은 별 볼 일이 없었다. 연탄 몇 장에 감자와 고구마 같은 작물들 그리고 부탄가스와 라면 같은 생필품이 전부였다.

수우퍼라는 이름이 무색했다. 태협이 또한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내부를 훑었다.

그때.

“가시내 또 왔나. 양심도 없제.”

면박 주는 소리와 함께 문이 드르륵 열렸다. 곧 사납게 생긴 할머니가 나타났다. 시선만으로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인상이 매서웠다.

태협은 언짢은 티를 숨기지 않고 할머니를 응시했다.

“만날천날 쳐들어와서 밥이나 축내고. 식충이도 이런 식충이가 읍따. ……뭐꼬 이건.”

욕을 좔좔 내뱉던 할머니는 끌려 들어와 인사도 없이 서 있는 태협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서 있던 연이 할머니에게 태협을 소개했다.

“여 새로 이사 왔다! 우리 집 옆에 파란 대문 집 있제?”

“글서? 니 뭔데? 꼬라지 바라. 짐 내보고 인사해라 이기제?”

“야아, 퍼뜩 인사드리라.”

할머니는 태협에게 인사를 요구했다. 연은 눈치를 주려는지 태협의 허리를 콕 찔렀다. 가만히 눈싸움만 하던 태협은 괄시하듯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눈에는 조롱기가 가득했다.

“그래야 얻어묵지.”

얻어먹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태협은 짜증 난 얼굴로 손을 확 풀어냈다. 연은 몸이 앞으로 쏠려 매대에 팔을 찧었다. 아야, 소리가 났지만 태협은 연의 아픔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행복수우퍼의 미닫이문을 세차게 열고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할머니가 목소리를 높였다.

“저 봐래이. 하이고야 삐대하다 삐대해. 어데서 굴러먹다 온 새끼고!”

외침의 반은 못 알아들었다. 그러나 예의 없다는 등의 안 좋은 말인 건 알겠다. 구태여 예의를 차릴 생각이 없었던 태협은 바닥에 침을 뱉었다. 어차피 짧으면 몇 주, 길면 몇 달 이내에 올라갈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이런 인간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태협은 집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걸었다.

이곳의 추위는 생각보다 매서웠다.

바람은 송곳처럼 틈새를 파고들어 전신을 바득바득 쑤셔 댔다. 침대 위에서 볼을 떨던 태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닥이 냉골이었다. 연탄불이 꺼진 모양이었다. 배도 고프다. 그러나 작은 냉장고에는 생수밖에 없었다.

올라오기 전에 음식점에 들렀다가 뭐라도 사 올걸. 태협은 짜증이 나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주방을 나왔다. 인터넷도 잘 안 터지고, 음식점 몇 군데에 전화를 해 봤지만 배달도 안 되는 지역이란다.

환장하겠네.

그때 끼익, 철문이 힘겹게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도둑인가 싶어 태협이 움직임을 멈췄다. 습관적으로 야구방망이를 들었다. 생각해 보니, 이곳은 보안에 취약한 곳이었다.

밤이면 산짐승이 마당을 휘젓고 이웃과 이웃에서 무언갈 훔치고 뺏을 것이다, 마치 뇌를 지배당한 좀비들처럼. 아마 오늘쯤이면 내가 어느 정도 산다는 걸 알아차렸을 텐데.

긴장한 채로 대문을 주시했다. 파란 대문 사이로 하얀 다리가 걸렸다. 태협은 꼿꼿했던 허리를 무너뜨렸다.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곧이어 예상한 얼굴이 나타났다.

“내다.”

“……”

“드가도 되나?”

빛도 비추지 않는 밤이었으나 연의 얼굴은 뽀얀 게 상앗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태협은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반감을 느껴야 할 연은 오히려 광대를 드러내 웃었다.

정말 밸이 없는 걸까.

“배 안 고프나? 내는 니 배고플 것 같아서.”

연이 등 뒤에 숨겨 두었던 접시를 꺼내 보였다. 성난 표정인 태협을 보고 주춤하면서도 부지런히 발을 놀려 다가와 조심스러운 손길로 접시를 건넸다. 접시 위에는 백설기 몇 조각이 올려져 있었다.

“먹고 자라. 배 곯으며는 니만 손해다.”

툇마루에 올라 서 있던 태협은 가만히 내려다볼 뿐 말하지 않았다. 그만 갔으면 했다. 가면 먹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발끝으로 바닥에 원을 그렸다. 할 말이 있는지 입을 달싹였다. 태협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

“아, 오늘 일 맘 상하지 말라꼬.”

“…….”

“할매가 말은 그케 해도, 맴은 비단이다. 문 여는 거 봤제? 그게 어서 오라는 긴데, 말씨가 그래서 고마 오해할 수 있다. 글타고 니한테 머라 하는 건 아니고, 할매한테 삐끼지 말라고. 아! 이것도 할매가 신경 쓰여서 주는 기다, 말하지 말랬는데.”

오는 내내 생각했던 건지 연은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말을 쏟아 냈다. 태협은 무슨 말을 하는지 관심 없는 얼굴이었으나 연은 귀염성 있게 웃고는 접시를 내려놓았다.

마이 무라, 그렇게 말을 하고 뒤도는 연을 잡은 건 태협이었다.

“야.”

“어?”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가 달빛을 받아 찰랑였다. 달빛은 윤슬처럼 머리칼을 물결 삼아 반짝인다. 깨끗한 눈에는 이채가 돌았다.

여자는 의심 없이 한 걸음 다가왔다. 어깨 끝과 허리춤이 젖어 있는 걸 봐서는 아마도, 씻은 듯했다.

할 게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곳에 본인을 제지할 사람이 없다는 오만한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 태협은 고개를 방문을 향해 살짝 틀었다. 문 앞에서 기웃거리던 연이 안을 가리켰다.

“들어오라꼬?”

외간 남자가 있는 곳에 올 때는 조심해야 하는 법이었다.

비록 이런 선의의 이유였다 하더라도.

“어.”

그는 그녀를 고이 보낼 마음이 없었다.

“먹고 가.”

시발, 미친. 평소 욕지거리를 내뱉는 음성보다 어리고 착했다. 잠시 망설이던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조명 아래에서 본 그녀는, 아까보다 더 뽀얗다. 금방이라도 동해서 덮칠 것 같지만 태협은 그녀를 가만히 보았다. 여자는 그의 방이 신기한지 둘러보느라 바빴다.

“와 근데 니 방 억수로 좋네. 내는 침대를 첨 본다.”

연은 이불 안에 손을 집어넣고 부들부들함에 전신이 녹는 표정을 했다. 폭신폭신한 촉감이 좋은 모양이었다. 직관적인 반응을 그는 비웃었다. 이게 좋다, 하는 이 인간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아이씨들이 올라오면서 고생한 보람이 있네. 그자?”

이것저것 둘러보던 연이 방바닥을 만져 보고 깜짝 놀랐다.

“니, 연탄불 안 피웠나?”

“그게 뭔데.”

“뭐긴 뭐라. 연탄이 연탄이지. 얼어 죽을 일 있나.”

자리에서 일어난 연이 날다람쥐처럼 뛰어 옆방으로 넘어갔다.

“뭐 하려고.”

“여 춥다. 갈켜 줄 테니까. 니도 혼자 할 수 있어야지.”

연탄이든 뭐든, 그만 들어왔으면 했으나 건너간 연은 되레 태협에게 오라고 손짓을 했다. 태협은 눈자위를 꾹꾹 누르며 뒤를 따랐다. 말하지 않아도 연은 연탄 창고를 척척 찾아냈다. 그리고 쌓여 있는 연탄을 보더니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

“이게 다 몇 장이고. 부러버라.”

이따위 검은 덩어리가 뭐가 부럽다고. 연을 비웃던 태협이 순간 숨을 멈췄다. 부지깽이로 연탄을 짚느라 쑥 내려간, 굴곡진 허리가 똑 부러질 것처럼 아찔했다.

“단디 봐라.”

그것을 모르는 연은 시멘트 덩어리처럼 말라비틀어진 연탄을 부지깽이로 빼냈다. 새 연탄을 넣고 번개탄이 있는지 물었다. 알 리 없는 태협이 고개를 으쓱거리자 말도 없이 집으로 내달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태협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혹시 애달파지라고 모른 척하고 있나.

손에 번개탄을 들고 돌아온 연은 불을 붙였다. 조금 있자 동그란 구멍 안이 붉게 달아올랐다. 구멍을 잘 맞춰 또 연탄 한 장을 올렸다.

“쉽제?”

난방을 해결한 연이 뿌듯한 얼굴로 바닥에 놓아둔 뚜껑을 향해 뻗었다.

허리를 숙이자 쫙 붙은 상의에 잘록한 허리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태협의 눈이 심하게 일렁였다.

아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무방비할 리가.

“알겠나? 슬렁슬렁하지 말고 구멍 맞춰서 단디 해야 된…… 머 하는데, 니!”

태협이 연을 부뚜막으로 밀쳤다. 졸지에 앉게 된 연은 당황해서 펄쩍 뛰었으나 태협은 벗어날 수 없게 어깨를 꾹 눌렀다.

그의 손이 닿아서인지 연의 얼굴이 홧홧해졌다.

“니, 니, 뭐 하는 짓인데!”

당황하는 연의 옆에서 태협이 작은 귀에 입술을 바짝 들이대고 말했다.

“이따위 것보다 더 덥게 만들 수 있어. 내가.”

태협이 입꼬리를 밀어 올리고는 차고 위험한 미소를 드러냈다.

“……우예?”

연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태협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태협은 입을 맞췄다.

태협은 숨을 담뿍 들이마셨다. 여자의 몸에서는 앞서 느꼈던 들풀처럼 싱그러운 향이 났다. 입 안에서는 민트 향이 났고.

일단 냄새는 합격이었다.

태협은 길을 올라오면서 목격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지친 얼굴과 꼬질꼬질한 옷, 다 쓰러져 가는 집까지. 더럽고 불결하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이가 옮을 것 같아서 근처에도 안 갔으나, 어쩐지 이 여자애만큼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중에 가장 깨끗한. 그나마 가장 나은 인간, 그렇게 느껴졌다. 실은 그래야만 했다. 믿고 싶은 대로 믿은 태협이 혀로 입 천장을 쓸고 입술을 물어뜯고 가지런한 치열을 훑었다. 반항할 줄 알았던 연은 의외로 움직이지 않았다.

입이 떨어지고 한 칸 방 안에 몸이 완전히 들어오고 나서야 묻는다.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방 안의 온도가 훈훈해졌다.

“니 지금 뭐 한 건데?”

몸이 동한 태협이 서늘하게 웃었다.

“키스.”

몰라? 짧게 대답하고 물은 태협이 연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고 침대 위로 올렸다. 순식간에 침대에 얹어진 여자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보아하니 지금 태협이 하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미 앞섶은 부풀어 있었다. 태협에게는 하나하나 설명해 줄 시간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태협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연이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할매가 그랬거든?”

그놈의 할매. 태협이 반갑지 않은 사람의 등장에 미간을 조였다.

“누가 와가꼬, 내 몸 만지고 그카면 꼬추 차고 도망가 삐라고.”

정정해야겠다.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쉽지. 태협은 그녀의 다리 사이를 무릎으로 벌리고 무릎 뒤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쓸었다.

“그래서 찬다고?”

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협은 그런 여자를 비웃었다.

그래 보든가. 짧은 대답을 남기고 태협은 배 위에 손을 얹었다가 위로 올렸다. 그리고 아래 가슴을 문지르다가 얇은 브래지어 위를 살살 쓰다듬었다. 상의를 들어 올리자, 와이어가 없는 스포츠 브라가 드러났다. 그것도, 시장에서 샀을 법한 싸구려.

순간 식을 뻔했지만, 모조리 벗겨 내자 욕망은 되돌아왔다. 그가 소복한 살성을 움켜쥐었다. 가슴의 정점이 손바닥에 스치자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거 차면 구실을 몬한다 카든데.”

“뭐?”

팬티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려 하자 연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부랄이 터지면 구실을 몬 한다고 했다고. 할매가.”

“…….”

“그래서 내가, 그카면 우짜노? 물으니까, 그건 내가 극정할 일은 아니라 카드라. 금마 인생이 좆될 뿐이라고.”

다분히 위협적인 말에 태협이 잠시 멈췄다가 연의 다리를 제 허벅지 위로 감았다.

“그니까 내 말은 내도 지금 이게 뭔 일인지는 안다고.”

멈추라는 말일까? 사투리가 심해서인지 연의 말은 제대로 해석할 수가 없었다. 태협은 기분을 잡쳤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그럼 꺼지든가.”

말하고서 초조하게 눈을 굴렸다. 초조하고 짜증 난 눈빛을 읽었는지 연은 그의 얼굴을 한 손으로 쓸었다. 촉감은 서늘했다.

“니 보기와는 다르게 쫌 꼬롬한갑다.”

태협은 보기와 다르게 음흉하다는 비난은 알아듣지 못했다. 대신 이 타이밍에 만진다, 태협은 그것을 대답으로 알아들었다. 순식간에 연의 옷을 훌렁 젖히고 입고 있는 모든 것을 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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