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11/11)
  • 에필로그

    “엄마, 저한테 돈이라도 맡겨놨어요?”

    순간적으로 마치 수백 번 더 말했지만 계속해서 나오는 말을 또 습관적으로 내뱉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아이고 서방 죽고 딸마저 나를 박대하네, 아이고 내 팔자야.>

    “나, 엄마가 키웠어요? 말은 바른 말이라고 할머니가 키우셨지? 나 어릴 때 엄마 얼굴 기억도 안 나는데? 그리고 최소 생활비로 그거 드렸으면 되었지, 뭐가 또 더 필요한데요? 이번에 또 사고 쳐봐요, 내가 다신 엄마 얼굴 보는지. 지난번에도 카드 만들어달라는 거 제가 안 된다고 말씀 드렸죠?”

    <얘, 다른 집애들은 지 엄마 해외여행도 척척…….>

    “내가 엄마 사고친 걸로 엄마 해외여행 열 번 갔어요.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뭐라고 그러셨어요? 그냥 비행기 티켓만 사달라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우셔서 제가 사드렸죠? 돌아오시고 나서도 제가 다시 카드 만들면 절연한다고 했는데 카드 만들려고 하다가 걸리셨던 거 기억 안 나세요?”

    <너는 애가 어떻게 그렇게 박정하니? 네 남편 돈 잘 벌잖아! 고생한 엄마한테 그쯤도 못해 주니?>

    “엄마 사시는 그 아파트 어디서 나온 거예요? 엄마 매달 받아가시는 백만 원 어디서 나온 거냐고요? 그 정도 해드렸으면 됐지 거기서 어떻게 더 바라실 수가 있으세요?”

    <얘 이번엔 잘 쓸게.>

    이제 더 이상 돈 빌릴 데도 없으니 더욱더 난리였다. 살고 있는 집도 본인 명의가 아니니,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을 터였다.

    “엄마, 남들이 들으면 욕해요. 내 친구들은 다 손주들 엄마가 키워주시고 반찬 갖다주신다는데 엄마는 반찬도 못해 애들도 싫다 해. 그럼 뭐 어쩌라고요? 엄마가 나 낳아주신 걸로 큰돈 덥썩덥썩 드리면 자식이 노후대책이지 그게 뭐예요? 내리사랑이란 말 모르세요? 돈 얘기 꺼내시려고 전화하실 거면 다신 전화하지 마세요. 그리고 제가 말씀드렸죠? 다시 엄마 빚 안 갚아 드릴 거고 빚 갚으라고 누가 전화하면 그냥 감옥에 들어가시던가 말든가 하시라고 제가 전에 말한 거 기억나죠?”

    청산유수 신혜의 싸가지 없는 말에 엄마는 결국 다시 내 팔자를 연발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신혜 역시 표정이 좋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마도 구두쇠 이모에게 엄청나게 혹사당한 모양이었다. 돈 있을 때나 환영하지 돈 없는 동생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미국에서 일하는 식당에서 혹사당한 뒤에 살이 쭉 빠져서 돌아왔다. 당연히 승규의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같이 살고 싶어했으나 전에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별말 못하고 승규가 투자목적으로 사둔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신혜가 최소 생활비로도 백만 원 정도만 매달 송금해 주는 게 다였고 거의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뭐가 그래도 섭섭한 게 많은지 하루면 멀다하고 전화해서 돈 얘기를 꺼냈고 그때마다 신혜는 거절했다. 계속 거절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엄마의 욕심에 지칠 때도 너무 많았다.

    “장모님이 또 카드 만들어 달래?”

    딸을 안고 어르고 있던 그가 돌아보면서 말했다. 집에 오자마자 딸내미부터 안아서 부비적거리더니 이제 겨우 샤워하고 나오자마자 다시 딸을 번쩍 안아든 참이었다.

    그가 아이를 안고 다가오자, 약간 긴장한 게 눈에 보였다. 같이 산 지 삼 년이 지나도 아직 그의 손길만 닿아도 긴장하거나 놀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자기 집안의 수치에 대해선 그에게 더욱 창피해했다. 부부 사이에 이런 게 뭐가,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녀는 그에게 이런 수치를 보여야 하는 게 자존심 상했다.

    “네. 이번엔 잘 쓴다고 말하지만 카드사고 친 게 한두 번이어야죠.”

    그 말을 하는 신혜는 울적해 보였다. 장모에게 전화가 올 때마다 이런 표정을 짓곤 했다. 생일이나 명절 때마다 돈을 적게 주는 것도 아니고 가끔 해외여행도 보내주곤 하는데도 늘 뭐가 그리도 부족한 걸까.

    인상을 살짝 쓰면서 탁자 위에 놓아둔 커피에 입을 대는 순간, 다시 컵을 내려놓았다.

    “왜, 어디 불편해? 체했어?”

    ‘웁’ 하고 올라오는 소리를 내더니만 인상을 쓰는 신혜를 보면서 승규가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아니, 약간 속이 좀 안 좋아서요.”

    그 말에 승규의 얼굴에 불이라도 켜진 듯 안광이 번쩍했다.

    “아이 가진 거 아니야?”

    혼인신고 하고 같이 산 지 3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성실한 아내이자 엄마의 역할은 했지만 그를 남편으로 인정하는 거 같진 않았다. 그냥 의무감에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그를 딸의 아빠 정도로만 인식하는 듯했다. 단둘이 있을 때의 긴장감은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남자와 여자. 가해자와 피해자였다. 그는 언제나 그녀가 도망가지 않을까 의심하고 감시하고 작은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녀는 그의 눈치를 보면서 언제나 조심스레 비밀스럽게 움직였다. 둘 사이에 신뢰는 아무것도 없는, 모래 위의 집처럼 아슬아슬한 관계. 이것이 그들이 꾸민 종잇장처럼 얇은 가정이었다.

    아이가 하나 더 태어나면 달라질까. 세월이 좀 더 가면 달라질까. 잘못 끼운 단추는 평생 가는 걸까.

    그가 아이를 소파에 내려놓더니 서재에 가서 뭔가 갖고 왔다.

    “이게 뭐예요?”

    “가서 지금 해갖고 나와봐.”

    테스터였다.

    이런 건 언제 사다놓은 거야. 신혜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그는 왜 안 들어가냔 눈치였다.

    완주도 불시에 생긴 애였고 그 뒤로 조심하고 있었다. 둘째까지 낳아가면서 그에게 잡힐 생각은 없었다. 아직도 이 남자와 평생을 같이 보내야 할지 의심하고 있으니까.

    “바로 화장실 갔다오지?”

    안 그러면 들어와서 보기라도 할 기세라서 그녀가 마지못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포장지를 풀긴 했는데 그걸 들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둘째가 생겼으면 어쩌지? 딸 때야 뭣도 모르고 낳았다지만 둘째가 생기면 어쩐다지?

    결혼생활이 나쁘냐면 그건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했던 말을 철저하게 지켰으니까. 전처럼 막 대하지도 않았고 그의 부인으로 그녀를 존중하고 아이에게도 아낌없이 애정을 베풀었다. 남들이 보면 완벽한 가정. 그러나 남자와 여자, 남편와 아내로서는 언제나 아슬아슬하다.

    그는 언제나 일거수일투족 그녀의 움직임을 좇는다. 친구를 만나는 것도 어디 가는 것도 늘 불안해했다. 그녀 역시 그가 무서웠다. 인상을 조금만 써도 과거처럼 굴까 두려웠다.

    그런데 둘째라니…….

    역시나 임신이었다.

    빨간색 줄이 두 개 나타나자 신혜는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서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네, 나가요.”

    “뭐야?”

    기다리고 있던 그가 들고 있는 걸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 지저분한 거 묻은 걸 뭘 그렇게 봐요.”

    남자는 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약간 목이 멘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 생겼네.”

    남자는 정말 기쁜지 눈빛이 촉촉해져 있었다. 완주도 저렇게 예뻐하는 걸 보면 둘째도 무척 예뻐하겠지. 그냥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자기한테도 잘하는데 뭐가 이렇게 불만인 걸까.

    본성은 나쁜 거 같지 않고 조금 비틀린 것뿐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무슨 상처가 이리도 많아서 나쁜 놈인 것처럼 이리도 위장하고 살았는지. 자신에게 그렇게 나쁜 짓을 했는데도 왜 동정이 가는지도 모르겠고, 이 사람 살아온 나날들이 불쌍하기도 하니, 사람 마음이란 게 참 모르겠다 싶었다.

    그냥 지금은 잘 모르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지난 3년, 생각해 보면 좋은 남편이었다. 친구들 주위 사람들 다 인정하는.

    좋은 아빠이기까지 했다. 정말 큰일 아니면 일도 거의 줄여버리고 돈 많이 벌어봤자 뭐하냐면서 회사도 반쯤 퇴직하다시피 했다. 8시에 나가 7시에 들어와서 저녁 같이 먹고 아이랑 놀아주고 목욕시켜주고 재운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건 거의 다 들어주었다.

    그렇다고 미운 마음을 봉합하고 그냥 사는 것만은 아니었다. 가끔은 이 남자가 이렇게 덫에 밀어넣은 게 너무 미워서 때려주고 싶을 때도 있었다. 어떻게 당신은 그렇게 잘 수가 있어요? 이런 마음이 들어서 자는 사람을 베개로 때리고 싶은 날도 있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마음이 누그러지고 있었다.

    그의 팔이 그녀의 몸을 가둬버렸다.

    “꺅!”

    신혜의 작은 비명에 곧 풀어줬지만 안은 것을 풀지는 않았다. 그가 어떤 기분일지 알기에 신혜는 잠시 가만히 있어줬다.

    “역시 그날인가?”

    지난달 초인가에 바쁜 일을 하나 해치웠는지 휴가를 내고서 하루 종일 침대에서 나가지도 않고 뒹군 날이 있었다. 아이 봐주는 아주머니에게 부끄러울 정도로 그는 침대에서 내보내주려 하지 않았다. 아마 그날인 모양이었다. 별다르게 피임을 하지 않아도 둘째가 생기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아이가 생겼으니. 완주도 기적처럼 그들에게 왔는데 이번 아이 역시 어떤 기적을 만들어낼까.

    신혜가 창피한지 볼에 홍조가 살짝 떠올랐지만 그래도 웃고 있었다. 그가 그런 그녀가 마냥 사랑스러운지 이마를 맞대고 눈을 마주했다. 진짜 사이가 좋은 건지, 아니면 좋은 척하는 건지 이제 둘 다 잘 몰랐다. 살 섞고 한 침대에서 갓난아이 키우면서 살게 되니 바빠서인지 그 가슴에 묻어둔 지난 일들이 조금은 희미해지고 상처에 새살이 돋으면서 어떤 건 잊히는 듯했다.

    이게 남들이 말하는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선 보고 결혼한 부부처럼 서로 알아가면서 살면 되겠지,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위안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