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11)
  • 9.

    “왜 잠이 안 와?”

    등 뒤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그가 신혜가 뒤척이는 소리에 깬 모양이었다. 전처럼 방에 돌아가서 자고 싶은데 이 사람은 더욱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낮에는 계속 서성거리며 거실을 왔다갔다하고 밖에 나가도 보지만, 밤에 잠도 오지 않고 계속 뜬 눈으로 새벽까지 있다 잠 드는 날이 허다하다. 그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옆에서 들리지만 누워 있는 신혜에게 잠은 잘 찾아오지 않았다.

    “주무세요.”

    그는 여전히 바쁘고 여전히 일을 많이 하고 여전히 술을 많이 마시고 집에 들어왔다.

    “요즘 계속 잘 못 잤잖아.”

    등뒤로 그가 몸을 붙이면서 바싹 안아왔다.

    지난번에 그의 앞에서 운 이후 안지 않았다. 그런데도 잠은 꼭 옆에서 자게 만드니, 이 사람의 심중은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그가 다시 가슴에 손을 대고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커다란 손이 습관처럼 가슴을 쥐고 목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는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고 그에게 말조차 꺼낼 수가 없다. 낳지 말라고 해도 문제고, 낳아도 문제이다. 낳으면 아이를 그가 뺏어가겠지. 아니 그전에 임신한 걸 알게 되면……

    그는 그녀를 조금도 신용하지 못한다. 그녀도 그를 믿지 못한다.

    아이를 그 몰래 지우던가, 말을 하던가, 아니면 도망가서 몰래 낳던가 해야 했다.

    아이…… 사랑하는 사람과 사이에 생긴 것도 아니고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한 남자의 씨이다. 낳아야 하는 의무감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는데도 망설여졌다.

    낳는 것도 키우는 것도 큰일인 게 분명한데 왜 망설여지는 걸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도망가고 싶은 생각만 있을 뿐.

    등 뒤에서 그의 숨소리가 다시 규칙적으로 변한 걸로 봐서 다시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 등 뒤의 남자를 보았다. 어린아이처럼 그녀 목에 고개를 박고 가슴을 쥔 손에서 힘은 빠졌지만 역시 그곳에 손을 대고 있다. 어린아이가 잠자면서 엄마 가슴을 만지는 것처럼 그렇게 잠이 들어 있었다.

    가만히 남자의 결 좋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인과 아들을 잃고 복수욕에 불타오르던 남자는 상처 입은 야수였고, 자시는 운없는 희생물에 불과했다. 이젠 이 억겁의 고리를 끊어야 했다. 이 뱃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눈을 감으면 책상 위의 그 사진이 떠올랐다. 그의 가장 행복하고 빛나던 한때인 게 분명한 그 시절. 그 시절의 그는 잘 웃고 다정했던 남자였겠지. 사진 속의 남자가, 더 이상 웃지 않고, 무서운 표정으로 그녀를 의무적으로 안기만 하는 남자의 십 년 전의 과거가 그녀에게 대신 웃어주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잡으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일단 숨을 압박하는 이 집에서 벗어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작정 떠나면 그가 화를 내겠고, 어떤 나쁜 짓을 해치울지도 몰랐다. 그래도 일단 그녀가 살려면 도망가야 했다.

    이렇게 피를 말려가면서 그의 처분에 아이와 자신의 인생을 맡길 수는 없었다.

    *

    승규는 멍하니 할 일이 없으니 그냥 소파에 반쯤 누워 있다시피 늘어져 있었다. 탁자 위에는 마시다 만 싱글 몰트 위스키 한 병이 거의 반 이상이 사라진 채 있었다. 잠이 안 와서 집에 새벽에 들어와서 술 마시고 자길 여러 날.

    신혜가 나가버렸다. 그녀의 방을 보는 순간 깔끔하게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그녀의 의사를 알 수 있었다.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하라는 의사인 걸까.

    분명 집으로 갔을 테니 잡아오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차마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게 시들해진다. 앞만 보고 달려오고, 복수만을 생각했건만 복수해서 뭘 어떻게 하냐던 그녀의 울부짖음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때 인터폰의 벨이 울렸다. 그 순간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렸다. 혹시나 그녀일까…… 비틀거리면서 인터폰을 보니 이 순간 가장 보기 싫은 인간이었다.

    “나다.”

    그 단 한마디에 어깨에서 힘이 좌악 빠졌다. 그냥 긴 얘기 하기 귀찮다는 자포자기였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연락하고 오면 얼굴도 못 볼 테니 그러는 거 아니야.”

    ”그나저나 네 집 사람 어디 갔어? 왜 너 혼자야?”

    두리번거리는 게 신혜를 찾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나와 있는 위스키병과 잔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낮부터 술이야?”

    그러자 어깨만 으쓱할 뿐 별 답을 하지 않는 걸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어디 갔어?”

    “누구요?”

    “아가씨, 여기서 같이 살던.”

    “그 사람 제 집 사람 아니고 앞으로도 결혼할 생각 같은 거 없어요!”

    “뭐! 그럼 멀쩡한 아가씨를 왜 데리고 살아!!”

    그 말에 순간 승규는 그대로 열이 확 받아버렸다. 언제나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시는 아버지는 왜 멀쩡한 아가씨 건드려서 애 만드셨는데요?”

    그 말에 아버지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왜 결혼해서 애 둘이나 있는 양반이 열 살은 어린 여자 건드려서 애를 보셨냐고요!”

    그 말에 순간 여태 당당했던 노인의 어깨가 살짝 처졌다. 언제나 태산처럼 높아 보이기만 하던 양반이었다.

    “유부남이면서 그 사람한테 자제 못했던 거나, 너 내 호적에 못 올린 거 하나만으로 이미 내가 너에게 큰 죄 지은 거겠지. 나도 안다, 네가 날 얼마나 원망하는지. 그러나 네가 더 잘 알잖니. 네 엄마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정식으로 결혼하고 혼인 신고해.”

    “그 여자 누구 딸인지나 아세요?”

    그 말에 갑자기 아버지가 긴장했다. 그냥 참한 아가씨, 잘 자란 집안 아가씨라고만 생각했는데. 지난번 동주 애미가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것처럼 이번 아가씨도 그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녀석이 뒤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었던 걸까.

    “유경택이 딸이라고요. 수정이랑 동주 교통사고로 위장해서 죽여버린 그 개새끼에게 징역 4년 선고했던 바로 그 판사요. 돈 받아 처먹고 정부 품에서 심장마비로 죽은 그 개새끼요. 그놈 딸이에요. 그런데 그런 놈 딸이랑 결혼하라고요?”

    순간 얼굴에 충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걸 보면서 승규가 위스키를 그대로 마셔버리고 잔을 탕하고 내려놓았다.

    “너! 일부러!”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직전의 아버지를 보는 승규는 의외로 차분했다.

    “제 호적에 절대 못 들여요. 아버지와 제가 밖에 나가면 남인 것처럼, 저도 그 사람하고 남으로 살 거예요! 그리고 제가 무슨 낯짝으로 결혼해서 새 가족 꾸려서 제 행복 찾아요? 죽은 동주 엄마랑 동주를 제가 무슨 낯으로 보라고요?”

    아버지는 아예 눈을 감으셨다. 순식간에 열 살은 더 늙으신 듯 그 꼿꼿하던 허리에 힘이 빠졌는지 소파 뒤로 기댈 정도였다.

    “이미 아버지는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 그 부탁 거절한 그 순간 저랑 인연 끊으신 거나 다름없어요. 제가 삼십 년 가까이 아버지에게 부탁 한 번 한 적 없었고 혹시나 남들 알까 늘 조심하면서 살았는데 그런 자식 소원 하나 못 들어주는 아버지라면 저 필요없어요. 그냥 저도 앞으로 혼자 이러고 살 테니 신경 꺼주세요.”

    그때 울며불며 눈물 콧물 쏟으면서 심지어 무릎까지 꿇어가며 큰어머니 보는 앞에서 애원했다. 혹시 그가 들어온 걸 남들이 볼까 큰어머니는 그가 가주길 바랐고 그의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나, 지금 대법원장에 이름 오르내리는 얘기 못 들었어? 지금 여기저기서 관심이란 관심은 다 받고 있는 마당에 네 얘기 나오게 되면 난 여기서 끝이야. 네 죽은 처랑 아들은 유감이지만 이미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내가 여기서 유경택에게 압력 넣으면 너 바로 알려져. 너도 나도 끝이야 바로!”

    그떄 그렇게 원망스러웠던 아버지였고, 이제 자기에게 더 이상 아버지는 없다라고 결론 지었다. 고집스레 입을 다문 아들을 바라보며 이제 새하얘진 머리로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아, 이 멍충한 양반아! 너 이제 겨우 서른여덟이야. 앞으로 살 날이 창창한데 왜 죽은 사람 갖고서 고민을 해.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걔가 누구 딸이든 무슨 상관이야? 알면서 네가 데리고 온 것 아니냐!”

    “맞아요. 제가 일부러 빚 핑계로 끌고 와서 온갖 나쁜 짓 다했지요!”

    나이든 아버지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탄식을 끌어내었다.

    “이 사람아…….”

    라고 하는 말꼬리 끝은 곧 한숨으로 변했다. 아들이 그 여린 여자에게 어떤 짓을 했을지 이제야 안 거겠지. 그렇게 겁내하던 얼굴이, 유순해 보이던 어린 아가씨가 아들을 보면 흠칫하던 게 그래서였구나.

    “죽어서 네 자식 얼굴 어떻게 보려고 그러는 게냐!”

    “전 대법원장 조정엽 씨, 제 얼굴 제대로 보고 사십니까! 저한테 미안한 거 하나도 없으십니까? 세상에 내놓으면 다고 돈을 주면 다이고 그런 줄 아시냐고요!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아들의 항변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젊은 날의 과오. 그 일생의 유일한 오점. 그래서 고개를 저아 부정하려 했던 아들. 언제나 속에 감춰둔 아픔과 고통과 상처를 내려놓지 못한 불쌍한 자식. 그에게 승규는 제일 아픈 손가락이었지만 절대 티를 낼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너만은 이렇게 살아선 안 되었다. 너만은! 너는 절대 행복해져야 해!”

    욕망을 위해서 달려온 평생. 부와 명예를 가졌고 가정도 이루었다.

    이제 거의 오열할 듯한 아들을 내려다보며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대학 들어가자마자 어미 잃고, 졸업기도 전에 사시에 붙은 영특한 아들. 사생아로 태어난 게 아깝다라고 늘 생각했다. 그러나 하늘은 마치 그의 미천한 출생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영특한 머리를 준 듯했다. 대학 때 만난 여자랑 연수원 나오자마자 바로 결혼했고, 힘들게 아이를 가졌다. 그 아이를 잃은 후 아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힘들게 꾸린 가정마저 잃은 뒤에 계속해서 방황하고 헤매고 삶에 기대조차 하지 않은 듯 살았다.

    이제 그런 아들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고, 삶의 돛이 되어줄 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한 번도 그에게 곁을 준 적이 없었다. 그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열 마디도 해본 적이 없는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두 부자는 한 번도 서로에게 곁을 주지 않고 언제나 으르렁거리기만 했다. 이제 살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긴 요즘, 인생에서 제일 후회되는 것은 승규를 그의 호적에 올렸어야 하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부인에게서 얻은 두 아들과 같이 키웠어야 했는데 왜 그렇게 부정을 했는지 그게 안타까웠다.

    그는 아들의 인생이 여기서 이대로 무너지게 둘 수는 없었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상처가 많아서 제일 아픈 손가락인 그를 이대로 둘 수도 없고 이러다 어느 순간 세상을 하직할 때 아들을 두고 간다면 넋이 되어 떠돌 것만 같았다.

    “더 할 말 없으면 돌아가세요. 전 계속 술 좀 마셔야겠으니. 술맛 떨어져요.”

    그 말에 노인이 뒤 돌아서서 조용히 가는 걸 승규는 못 본 척 그냥 앉아 있었다.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나니 속이 시원하긴 했다.

    *

    며칠 휴가 동안 술을 퍼마시다가 결국 다시 회사로 나갔다. 갈 데라곤 회사밖에 없는 자신의 인생을 비웃으면서. 일하면 잊혀지겠지. 계속 야근하고 주말에도 회사 나가고 계속 살던 대로 살면 되겠지 믿고 싶었다.

    그러나 집에 들어오면, 지친 몸으로도 신혜의 방 쪽으로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어디도 다 그의 집 같지 않게 을씨년하고 거북했다. 결국 이 집에서 제일 많이 시간을 보내는 서재로 갖고 왔다. 더 이상 방에 들어가 자고 싶지가 않은 건 아마도 신혜를 부를 수가 없어서겠지.

    돈은 넘치도록 많아서 쓰지도 못할 만큼 있는데 무슨 재미로 사는 걸까. 남들은 돈돈 거린다는데 승규에게 돈은 복수를 하기 위한 도구 그 이상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었다. 진짜 가족. 그냥 대충 조건 맞춰서 선봐서 결혼해서 그런 가족을 꾸릴 수 있을까. 언제나 그게 미덥잖았다.

    서류랑 노트북만 있던 책상 위에 어디선가 선물로 들어왔던 와인병을 놓고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거 그대로 쭈욱 들이켰다. 남자는 가만히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바라봤다. 보복이라는 이름 아래 희생되었던 그 젊은 여자와 어린 아이. 그가 잃어버린 것, 이제는 도저히 어떻게든 돈 백억을 주고도 못 살 것.

    세상이 어떻게 되어도 그 둘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 아픈 상처에 새살이 돋는다고 해도 그 자리를 메꿔 준다고 해도 흉터는 남아 있다. 그러나 이제 희미해지고 있는 기억들, 새로운 기억들이 생기고 이제 전처럼 수정이나 동주에 대해서 자주 떠올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신혜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했다.

    그에게 수줍게 웃어 보이던 거, 웃을 때의 작은 보조개나, 달콤했던 키스, 작은 새소리처럼 조잘되던 그 목소리. 그냥 침대 위에서의 그런 게 아니라 그녀 자체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다. 가느다란 어깨, 쭉 뻗은 다리, 조금만 세게 잡아도 멍이 들던 하얗고 보드러운 살결까지. 겁먹은 듯한 눈동자, 그가 툭하면 터트려놓던 입술, 많이 아파했던 첫 번째 정사…… 이 집 곳곳에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신혜가 나간 지 벌써 두 주가 지나 있었다. 그 두 주 어떻게 지난 걸까. 낮에야 회사에서 바쁘고, 밤 늦게까지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순식간에 적막함이 덮쳐온다. 그대로 잠을 잘 수가 없어서 미친 듯이 술을 퍼마시고 다음날 겨우 일어나서 출근해서 일하고, 다시 집에 늦게 들어오고.

    체력의 한계, 정신적인 한계. 겨우 두 주밖에 안 지났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살지? 수정이와 동주가 죽었을 때처럼 하루 해가 다시 길어진 것 같았다. 뭐 그렇게 신혜 역시 잊혀질 것이다. 이 더러운 인생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죽기 전엔 잊었겠지.

    처음엔 가서 바로 머리채를 잡아서 끌고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겁이 났다. 3년 뒤에 그녀가 나가버리면 그땐 자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 지금 벌써부터 이렇다면 3년 뒤엔 더 무서워졌다. 지금 쳐낼 수 있을 때 쳐내버리는 게 좋을지도 몰라. 지금 아니면 평생 못 쳐낼지도 몰라. 마음속의 작은 목소리가 그렇게 속삭였다.

    그렇게 자위하면서 일부러 시간을 죽였다.

    그때 언뜻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달력에 뭔가 체크가 되어 있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그 전달 페이지로 넘겨보았다. 전달에도 역시 체크가 되어 있지 않았다.

    분명 지난달 초에 있었어야 했고 이번 달 초 있었어야 했던 그것. 생리주기가 약간 긴 편이긴 해도 정확한 듯했다. 일부러 시작하는 날짜를 체크해 뒀었는데, 혹시나 하는 사태에 대비해서.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요즘 들어 신혜의 행동 자체가 좀 수상쩍었다. 뭔가 다른데 정확하게 뭐가 다른지 그의 직감이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지난 1년여 동안 주기적이었던 생리, 그걸 건너 뛴 게 두 달.

    그렇다면 혹시 임신? 만약 임신이라면 누구의 아이를?

    순간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여태 신혜의 미묘하게 전과 달라졌다 싶었던 그 작은 행동들에 답을 찾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배에 손을 대었을 때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던 게 유독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자기의 자식일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걸까?

    물론 정관수술을 하기는 했지만…… 내일 바로 병원에 가서 확인해 보자.

    만약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면?

    만약 그의…… 아이를 가졌다면?

    일단 어떻게든 확인을 해야 했다. 당장 그녀가 사는 집에 찾아가서 목을 쥐고 흔들어야 할까. 일단 술을 좀 깨고 난 뒤에 어떻게든 해봐야겠지. 마시던 잔을 치우고 비틀비틀 걸으면서 욕실로 향했다. 샤워하고 나서 커피를 마시고 나면 좀 머리가 좀 맑아지겠지. 그때 그녀를 만나러 가야겠다.

    *

    두 주가 흘렀다. 그의 집에서 나온 지. 처음에는 그가 언제 쫓아올지 몰라 잠이 잘 안 왔는데 하루, 이틀 지나도 그가 올 기색도 없고 심지어 연락조차 안 오니 마음을 좀 놓았던 듯하다.

    병원에 가서 확인했을 때 임신이었다. 삼 개월에 들어선 아이는 착상도 제대로 되었고 건강하게 잘 자란다고 의사가 두 주마다 한 번씩 와서 검진을 받으라고 했다.

    낮에 그대로 푹 쓰러져서 잤더니만 잠이 오질 않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더 큰 결정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나갔을 때 뜻밖에도 밖에 있는 사람은 승규였다.

    초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답지 않게 면도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머리가 젖어 있는 거 보니 집에 들어간 뒤에 샤워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어쩐 일이에요?”

    “잠시 얘기 좀 하지.”

    “전 할 얘기 없어요.”

    “난 할 얘기 있는데 옆집에서 다 들어도 되나?”

    신혜가 뜸을 들이며 문을 열자마자 그대로 그가 성큼 들어와버렸다. 어두움과 함께 그가 들어온다. 예전처럼 불쑥 들이닥친 이 망령. 그는 마치 그녀 인생에 난입했던 그때처럼 또 난입해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 전처럼 겁이 나지 않았다.

    “할 얘기 있으시면 빨리 말하고 가세요.”

    들어오지 말라는 듯이 현관 앞에 팔짱을 낀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승규가 신을 벗고 들어왔다. 신혜는 여전히 앉으란 말도 없이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할 얘기 빨리 말하라고 하니까 그냥 말할게. 지난달 말쯤에 했어야 했을 거 같은데, 이번 달 중순인데도 아직 시작 안 했나 봐?”

    갑작스레 창백하게 변한 얼굴을 보니 그의 예상이 맞은 모양이었다. 이미 신혜는 자기도 모르는 새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혹시, 아이 들어선 거 아니지?”

    “서, 설마요.”

    승규가 마저 안은 뒤에 늘어져 있는 신혜에게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건네주었다.

    “갖고 가서 확인해.”

    “이게 뭐예요?”

    “테스터. 확인해서 나 보여줘.”

    받지도 못하고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뭐해? 안 받고?”

    여전히 받지 못한다.

    “싫어요!”

    “왜?”

    “싫으니까요.”

    “달력에, 날짜 표시해 뒀어. 몇 달 되었는지까지 내가 확인해 줘야 돼? 병원에 가서 정확하게 진단은 받았어? 이제 10주 정도 들어갔겠지?”

    그 말에 신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는 별 표정의 변화 없이 무덤덤하게 내뱉었다.

    “언제까지 말 안 하려고 했어? 말 안 한다고 모를 줄 알았어?”

    설마 그가 그녀의 생리주기를 달력에 표시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책상 위의 탁상달력이 그런 용도였던가. 신혜의 창백한 표정이 그에게 대답을 대신 해주는 듯했다.

    “아이 낳아.”

    “네?”

    “우리의 채무관계를 잊었나 보네? 계약기간은 사 년이었고, 당신은 그중 일 년을 겨우 채웠지. 아이 낳아, 빚 대신에.”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아이 낳아. 빚 제해 주지. 그리고 원하면 아이랑 같이 살아도 돼.”

    갑작스런 진전에 신혜는 그냥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건 예상에 없는 모습이었다.

    “아이 생기면 수, 수술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땐 생길 줄 몰랐던 거고 지금은 이미 생겼으니까. 아이는 낳는 거야.”

    남자는 그 어떤 때보다 눈에서 빛을 발했다. 무서울 정도의 욕심이었다. 심지어 신혜의 눈이 아닌 배를 보고 있었다. 뱃속에서 이제 형체가 제대로 잡혔을지 의심이 가는데 평평한 배를 집요하게 보고 있었다.

    신혜가 한 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어느 샌가 그가 팔을 뻗더니 손을 배에 얹었다. 배를 누르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소유욕이 가득한 손이 그 배를, 그 뱃속의 자궁 속 아이를 잡기라도 하듯이 지그시 압력을 가했다.

    “아이 낳아야 해.”

    그러나 신혜가 아무 말도 없자 재차 말했다.

    “난 이 아이 낳아야 할 의무감 같은 거 없어요. 왜 내가 이 아이를 낳아야 하죠?”

    그 말에 그의 차분한 눈에 갑자기 빛이 번쩍했다.

    “이 아이라고 하는 거 보니 아이가 생긴 게 맞나 보군. 당신 아버지의 죗값 치른다 생각하고 낳아.”

    “아빠가 직접 당신 아이 죽인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저는요? 제가 아버지 딸이어서 당신에게 그렇게 괴롭힘을 당했는데 이 애가 당신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어요?”

    아이만 원하는 걸까. 그걸 인정하는 건 죽기만큼 어려운 일인데 이제 더 이상 뭐를 그녀에게 감추겠는가. 안 괜찮은 게 아니라 죽고 싶었다. 다시 전처럼 부인과 아들이 깡패가 모는 트럭에 깔려 죽어버렸을 때처럼 죽어버리고 싶었다. 외로워서, 이 얼어붙은 심장을 갖고서 억지로 억지로 살았는데, 차마 어머니 생각해서 죽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 아이를 차지할지는 기대해도 좋아.”

    신혜는 그 무서운 표정에 눈을 감아버렸다.

    “아이도, 아이 엄마인 당신도…….”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남자는 진심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또 자기를 몰아가겠지.

    “지금 당장 내가 증오스럽고 지겹더라도 아이 생각해서 그냥 살아. 아니면 법정까지 가던가. 법정에 가서 지저분한 사생활 다 까발려져도 나는 상관없어. 아이만이라도 차지할 수 있다면.”

    신혜가 듣든 말든 그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내가 나쁜 놈이어도 그냥 위장해. 나랑 단둘이 있을 때는 상관없겠지만 아이 앞에선 나도 당신 존중해 줄 거야. 그러니까 평범한 부부처럼 같이 살고 애 낳고 사는 거야. 어지간한 건 다 당신 뜻대로 따라줄 거야. 내가 침실에선 당신에게 나쁜 놈이겠지만 일단 아이한테는 완벽한 아빠고 완벽한 남편일 건 보증하지.”

    아무렇지 않게 남자는 자기 좋은 말을 늘어놓는다.

    “그럼 나는요?”

    “여기서 당신이 도망치는 거 외에 방법이 있어? 도망쳐봐! 도망치면 쫓아가서 아이 태어날 때까지 가둬두고 그 뒤에 당신은 섬에 팔아버릴 수도 있어. 정신병원 같은 데 돈만 주면 얼마든지 독방에 가둬줄걸? 아이 엄마로서 당신을 존중할 거야. 그러나 내 손안에서 벗어나려 하면 그땐!”

    신혜가 주루룩 힘이 빠져 미끄러지려는 걸 남자가 자기 몸에 기대게 만들고 안아서 가둬버렸다.

    “내 손바닥 안에서 그냥 손톱만 한 행복이라도 느끼면서 사람 흉내 내면서 살아.”

    마치 선고라도 하듯 말을 내뱉고, 큰 손으로 그녀의 등 뒤를 둘러버렸다. 이제야 찾은 그의 안식처이자 보금자리를 절대 놓칠 수 없다는 듯이. 그의 구명줄이나 동앗줄을 놓을 수 없었다.

    “당신은 내 거야. 이제 아무데도 못 가. 나랑 계속 살아야 돼. 당신도 아이도 내 거야. 다 내 거야.”

    신혜는 그냥 멍하니 그의 몸에 기대어서 팔을 늘어뜨린 채 그에게 기대 있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험한 세상이었고 엄마도 어느 누구도 그녀를 보호하거나 지켜주거나 위로하지 않았다. 상처를 그렇게 많이 주는데도 이 남자는 그나마 자기를 위로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 작은 온기라도 붙들면 어떻게든 살아지려나. 그는 적어도 자기 소유물인 그녀를 지키기 위해 맹렬하게 싸울 전사였다.

    그거 하나면 되려나. 그러나 그녀의 영혼은?

    그냥 눈을 깜빡거렸다. 이대로 되는 걸까. 그냥 아이 낳게 해준다니 그냥 참아야 하는 걸까. 뱃속의 아이는 아무 잘못도 없고, 사실 이 남자도 자기에게 나쁜 짓 못된 짓 그렇게 많이 했는데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 낳고 이 사람의 부인이 되어서 사는 게 자신이 원하고 행복한 것일까.

    지금 다른 방법이 있던가. 만약 그녀가 도망갈 다른 길이 있었다 해도 이미 그가 봉쇄했을 것이다. 언제나 선택지 하나밖에 주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대로 눈을 감았다.

    여태 그랬던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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