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11)
  • 8.

    그 사람이 읽는 책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민승규,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어느 날 자신의 인생에 뜬금없이 나타나, 천재지변처럼 이렇게 같이 살게 되었다. 그에 대해 아는 건 그냥 단편적인 정도였다.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같이 사는 데도 자기는 전혀 몰랐다.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의 회사 홈페이지 약력 정도밖에.

    방 양 옆을 가득 메운 책장을 주욱 훑는다. 그동안 잠겨 있기도 했지만 그가 있을 땐 앞을 지나다니는 것도 조심스러웠던 서재였다. 문 열려 있을 때 슬쩍 보았을 때 책이 제법 있다 싶었다.

    그의 결벽증적인 성격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책은 정말 한 권도 나와 있지 않고 정리가 되어 있었다. 아마도 카테고리화시켜서 정리를 한 듯한데 생각지도 못한 책들도 많이 보였다.

    커다란 철제 프레임 위에 나무 하나 얹은 모던하고 넓은 책상 위에는 모니터와 액자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메모지와 연필조차 올라와 있지 않았다. 책상 아래 서랍장 안에 다 넣어놓는 모양이었다. 액자에 들어 있는 것은 가족사진이었다. 찍은 지 좀 된 듯한.

    이 사람에게도 가족이란 게 있었구나. 집에 오면 업무 전화 외엔 통 전화도 받지 않고 해서 가족이 있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훨씬 젊은 온화한 표정의 그, 젊은 여자, 100일 정도 된 듯한 아기. 아마도 백일 사진인 모양이었다. 사진 찍는 게 어색한지 젊은 그는 어색한 표정이었지만 옆의 여자와 함께 그 행복함을 세상에 감추지 않았다.

    그가 잔인하게 굴 때마다 궁금해지곤 했다. 자기와 이 남자는 무슨 악연으로 이렇게 된 걸까. 자기가 무슨 잘못을 지었길래 그가 저렇게 악독하게 굴까? 이 사람이 뼛속까지 그냥 악인이라면 차라리 날 텐데 그렇지도 않았다.

    책상 옆의 책장 맨 하단 넓은 칸에 두툼한 가죽 앨범 하나가 조금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남의 사생활 침해니 절대 봐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호기심에 져버렸다. 아직 그는 회사에 있을 테고 이런 걸 슬쩍 본다고 해도 모를 일이다.

    백일사진인 듯 살이 포동포동한 어린 벌거벗은 아기 사진으로 시작했다. 누렇게 뜬 흑백사진인 거 보니 그인 모양이었다. 제법 잘생긴 남자아이인데 벗은 게 왠지 민망해서 뒤로 넘겼다. 어린 남자아이, 그리고 곱고 가녀린 젊은 여자. 아마도 그의 어머니겠지. 그리고 그와 어머니의 사진만 있을 뿐이었다. 앨범에는 지난번에 왔던 그의 아버지라는 남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그와 가족사진에 있던 여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마 둘은 또래인 모양이었다. 대학 졸업식 사진에 그와 그녀가 있다. 그러나 그에겐 가족이 없었다. 아마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모양이었다. 신혜는 대학 졸업식에는 아예 가질 못했다. 대학 졸업하기 전에 취직해서 회사를 다니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결혼식 사진. 이제껏 본 적 없던 함박웃음을 그는 짓고 있다. 그러다 여자가 임신을 하고 아이가 태어났는지 갓 태어난 아이 사진이 있었다. 사진은 그 백일에 찍은 사진에서 거의 멈춰 있었다. 부인도 아이도 그 이후로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행복하게 웃던 사람들이 아기의 백일 이후 사라진 것이다. 그 이후 급격하게 사이가 나빠져서 이혼? 혹시 죽었나?

    그는 전혀 가정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남자인 듯했는데…….

    왜 그는 부인과 아이를 잃게 되었을까.

    그는 알 수 없는 게 너무나 많은 남자였다. 절대 그녀에게 자신을 드러내길 거부하고 있었다. 이 남자가 자기를 혐오한다 생각한 적이 많았다. 일거수일투족을 좇는 차가운 눈동자. 그런데 그 차가운 눈동자가 달라 보인다. 그 속에 명백하게 담긴 것은 소유욕과 욕망이었다. 그의 차가운 열정이 그녀를 소유한다.

    이 사람은 나에게 왜 이러는 걸까.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그녀를 학대하기 위해서 무슨 행동이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가끔은 고해라도 하듯 의무적으로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 안는 게 분명해 보일 때가 있었다.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 자신의 상처도 감내할 정도로 분노하고 큰 상처를 받은 그건 무엇일까.

    그때 앨범에 앞장 주머니에 꽂아놓은 오래된 주민등록증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의 여자였다. 예전에 만든 걸 갱신하지 않았는지 앳된 얼굴의 여자가 환하게 웃고 있다. 구김살 없이 자란 밝은 인상의 여자였다. 이름은 조수정. 그와 동갑이다.

    승규가 이혼이라도 해서 전 부인인 조수정이 아이를 데리고 간 것일까? 그러나 그는 아이와 연락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고 주말에는 회사에 나가거나 가끔 약속 있어 나가는 것 외에는 일절 움직이지도 않았다.

    빈 페이지를 넘기다 앨범 끝 페이지에 낡아서 누렇게 된 신문기사를 발견했다. 10년 전 5월이다. 10년 전이라면 아직 신혜가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현직 판사 M모씨의 부인과 아들이 음주운전을 한 트럭이 사고를 내서 죽었다는 짤막한 단신이었다. 전에 인터넷으로 그의 회사 홈페이지에서 진짜 그런 사람이 있나 확인했을 때 그의 약력에 판사라고 적혀 있던 걸 본 기억이 났다. 설마 이게 그의 부인과 아들? 그래서 전화하는 사람도 없고 오래된 사진만 있었던 걸까?

    그의 어두운 표정이 약간은 이해가 가려 했다.

    지난 십 년간 그는 저런 얼굴로 살았을까.

    그때 머릿속을 스친 기억이 있었다. 아버지는 교통사고 전담 재판 판사였다.

    혹시 아버지가……?

    앨범을 원래대로 꽂아놓고 방을 나왔다. 노트북을 열고 대법원 사이트에 들어가보았다. 대법원 사이트는 신혜가 알기로 재판 기록을 열람할 수 있게 공개해 놓고 있었다. 사건 기록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조수정의 이름을 넣으니 눈에 띄는 사건이 보였다.

    교통사고 관련 판결. 판사에 아버지 유경택 이름이 박혀 있었다. 찬찬히 읽어보았다.

    트럭이 주차되어 있는 승용차를 음주 후 운전 부주의로 박은 모양이었다. 그 바람에 타고 있던 조수정 씨와 아들 민동주가 현장에서 즉사했다. 단순한 교통사고인 듯 보였다. 그러나 단순히 남자가 교통사고로 운전자에게 징역 몇 년 정도의 형을 선고한 아버지에게 억하심정을 가졌던 걸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일지 신혜는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왜 아버지가 당신에게 어떤 짓을 했기에 그걸 딸인 나에게 풀고 있는 건가요?

    진실은 무엇일까? 그는 아버지에게 어떤 원한을 갖고 있는 걸까? 순간 아버지가 선고한 4년에서 등에 소름이 좌악 돋았다. 그가 말한 4년. 돈은 중요하지 않아 라고 했던 말.

    이 모든 게 복수였다.

    죽은 아버지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으면, 죽어 있는 사람 대신 그 딸에게 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황혼이 마치 세상에 불이 붙은 듯 시뻘겋게 뉘엿뉘엿 지는 해를 둘러싸고 있는데 그냥 멍하게 그림자가 내리우든 말든 시간을 잊었다.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멍하니 소파에 앉아 생각을 한다. 지난 1년여의 기억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의 센서가 켜졌다.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던 신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승규가 거실로 올라와 불을 켜고 소파에 앉아 있는 신혜를 보고 흠칫 놀랐다.

    “왜 불도 안 켜고 그러고 있어?”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있는 거야? 아님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가 다정하게 소파에 앉아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대고 있었다. 등에 올라가 있는 따뜻한 큰손. 하지만 그 마음은 남극의 빙하처럼 차갑고 단단하다. 그리고 그녀를 증오한다.

    “아버지가 그렇게 미웠어요?”

    순간 등을 쓰다듬던 승규의 손이 굳은 듯 멈췄다.

    “무슨 소리야, 그게?”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미웠냐고요! 그래서 나를 이렇게 벌주니까 기분 많이 좋으세요! 내 인생마저 엉망으로 만드니까 그 복수가 되냐고요! 죽은 당신 부인, 당신 자식 내가 어떻게 보상해요? 이렇게 내 몸에 나쁜 짓하면 그 보상이 충분히 될 거 같아요!”

    작은 소리로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흐느끼듯 말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의도적이었던 거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왜 이 남자가 엄마에게 그런 거액의 돈을 빌린 걸까. 왜 그걸 하나로 모은 걸까. 왜 별로 이쁘지도 않은 나를 이 집에 들어앉힌 걸까. 어디 하나 이상하지 않은 데가 없었어요.”

    그런데도 믿고 싶었던 걸까.

    이 사람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 거야 생각하려 했던 걸까.

    왜 난 이렇게 바보 같은 걸까.

    그냥 바보같이 둔하고 멍청한 자신을 탓해야 하는 걸까.

    “무슨 소리 하는 거지?”

    승규는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당신 죽은 부인 사고 담당이었어요. 그 판결 보았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그렇게 미웠냐고요. 형량 적게 줘서? 왜요? 뭐가 문제였는데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지난 1년여의 시간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던 자기가 바보 같아서였다.

    “당신 아버지 말이야. 어떤 인간인지 알고는 있어?”

    “어떤 인간이냐고, 이십 년 이상 같이 산 아니 형식상 가족인 내가 당신보다 더 잘 알 걸요.”

    아버지는 법복을 입은 한량이었고 그 자식인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온갖 비리와 악취 나는 것들로 가득 찬 그런 인간이었다. 죽을 때조차 집도 아닌 정부 집에서 죽을 정도로. 수도 없이 피우던 바람, 온갖 비리들, 명절 때마다 여기저기서 오던 그 선물들을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곤 했다. 체면상 차마 이혼은 못했지만 그 둘이 부부가 아닌 지 오래였다. 유신혜는 그저 그 둘을 부부로 있게 만들어주는 존재 아닌 존재였을 뿐.

    “그 사고…… 그냥 교통사고 아니었어.”

    “그럼요?”

    “내가 그 직전에 조폭 관련된 형사 사건을 하나 맡았지.”

    “그래서 그게 복수로 벌인 사건이란 건가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신 고개가 살짝 끄덕였다.

    “증거가 있긴 한 거예요?”

    “심증이지. 그리고 트럭 운전사는 도박 빚이 많았어. 사채업자에게 쫓겼지. 근데 어느 순간 빚이 싹 정리되었더군. 여기서 뭘 더 의심하지?”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는 계속 말을 했다.

    “분명 나는 그쪽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했고 검사도 그거 조사하다 어느 순간 관두더라고. 그리고 판사인 당신 아버지 그쪽하고 무슨 커넥션이 있었지. 한두 건이 아니었어. 당신 아버지가 관련되어서 돈 받아 처먹은 게! 그 뇌물로 당신네 강남에 40평대 아파트 사고, 고급 승용차 두 대 굴리고, 철마다 골프 여행에 당신 어머니 백화점 VIP카드까지…… 잘 살았지. 안 그래?”

    왜 그런 엄청난 부에 조금의 의심도 안 했던 걸까. 공무원 월급으로 그렇게 사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당신 아버지 어디서 죽었지? 두 집 살림할 비용 어디서 나왔을 거 같아? 트럭기사 그 자식 나오기만 기다렸어. 그런데 감옥에서 죽어버렸네? 그래서 그 검사 새끼 어떻게 할지 두고보자 했어. 이런 뇌물수수로 내가 어떻게 하기도 전에 쫓겨나버렸네. 그리고 변호사 개업했다 안 되어서 자살했네? 젠장! 그리고 당신 아버지가 제일 먼저 죽어버렸지!”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이고 그대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누굴 위해 우는 걸까.

    “그럼 불쌍하게 죽은 내 부인하고 내 자식 새끼의 원한은 어디에 어떻게 풀어야 하는 걸까, 응? 당신이 말 좀 해봐.”

    순간 신혜는 어떤 일이 있었을지 갑자기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아버지가 분명 저쪽에서 뭔가 뇌물 수수를 받았을 테고 그 뒤에 경력이고 직위고 높을 테니 그걸로 승규를 눌렀겠지. 그리고 승규는 법복을 벗고 나와 변호사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그때 형사 사건의 판사였던 그가 형사 사건도 아닌 다른 일을 담당한다는 것만 봐도 그의 심정이 엿보였다.

    아들은 아빠를 대신해 죽고, 딸은 아비를 대신해 죄를 갚는다.

    “처, 처음부터 다 계획된 것이었어요?”

    그는 긍정하지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평소에도 어떤 감정없이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두렵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이제 노골적인 두려움이 느껴졌다. 이렇게 비인간적일 수 있다니. 복수조차 너무나 이성적이었다.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기에 이런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두려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뜨거운 것이 계속해서 흘러나오지만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누굴 위해 우는 것인지도 불분명한 눈물이었다. 죽은 그의 부인과 아들을 위해서인지, 그녀의 증오스런 아버지를 위해서인지, 자신의 신세가 불쌍해서인지, 아니면 복수밖에 남은 게 없는 한 남자가 불쌍해서인지 이제 알 수 없었다.

    “더 듣고 싶어? 당신 아버지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아뇨, 충분해요. 그만, 그만하세요!”

    “당신은 그 돼지새끼 대신 나한테 속죄해야 돼.”

    왜 내가요? 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남자의 그 깊은 분노와 슬픔 앞에서 자신은 한없이 작아졌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그냥 4년 흘러가서 그냥 이 사람에게 이용당하면서도 몰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 이 사람이 뒤늦게라도 알려줬겠지. 일찍 안 게 다행인 걸까. 그러면 요즘 들어 그 다정했던 건 다 연출이었던 걸까. 그 작은 관심조차도? 내일 아침은 이 모든 걸 다 잊길 기도하면서 그냥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걸까.

    그때 그가 아무 말 없이 재킷 단추를 풀더니 소파 위로 던졌다. 그리고 그녀가 입고 있는 얇은 면 원피스의 지퍼를 내렸다. 그새 살이 빠져서인지 원피스는 지퍼를 내리자 바로 미끄러졌다. 하얀색 속옷 차림인데 더 이상 부끄럽지도 않았고 몸에 감각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강하게 숨도 쉴 수 없게 부둥켜안았다. 어깨 오목한 데 얼굴을 묻고 그는 뜨거운 입김을 계속 불어넣었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목에 얼굴을 문질렀다. 그런 작은 움직임에도 온몸이 짜릿했다.

    “놔주세요.”

    눈을 감고 작게 속삭였다.

    “이미 계약서 쓴 건 당신 아니었어?”

    “복수, 그 정도 했으면 내 일 년을 빼앗았으면 되었잖아요. 그 정도면 되었잖아요. 날더러 뭘 더 어쩌라고요? 어쨌든 산 사람은 살아야죠, 계속 살고 과거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거 아니에요.”

    “당신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런 말을 해! 내가 돈 따위가 중요한 줄 알아! 가족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거야! 그건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나? 매일 바람 피는 아빠에, 쇼핑벽 엄마. 어린 시절 생각해 봐.”

    순간 이 남자의 약한 모습에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 철옹성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부인과 아들을 잃고 어디에도 복수하지 못하고 호소하지도 못하고 무너지지 않기 앞만 달리고. 아무리 부가 있어봤자 이런 삶은 행복할 수 없었다.

    행복이란 얼마나 얄팍하고 연약한 것이던가. 그가 꿈꾸던 그것을 갖기 위해 그렇게 부단히 노력했건만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렸을 때 그를 버티게 만든 것은, 언젠가 다 싸그리 복수해 버리겠노라는 오기와 악이었다.

    “아버지가 당신 부인하고 아들 죽였어요? 아니잖아요. 그건 그래요! 그쪽에서 당신 노리고 복수한 거라고 하고 아버지가 돈 받았다고 해도 아버지가 직접 손을 더럽힌 것도 아니고 그거 당신이 원하는 대로, 정의롭지 못하게 처리하셨겠죠. 그러나 결국 지금 어디에도 복수할 수 없으니까 제일 만만한 절 노리시는 거 아닌가요? 그냥 아버지가 제일 큰 죄인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저한테 화풀이 하시는 거 아니냐고요. 제가 아니었다면 그 트럭 운전수 식구들에게 하셨을 건가요?”

    그런데 지금 와서 그게 지난 세월이 얼마나 가치가 있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였다.

    과연 복수를 한다고 해서 과거의 고통이 희석되는 걸까. 물론 그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그에게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욕했던 학부모나 그 자식들은 나중에 지나가다 만나게 되도 기억 하나도 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고통을 준 자는 기억 못해도 고통을 받은 자는 기억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악을 쓴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 과연 복수의 대상이 옳은가.

    “저한테 복수한다고 해서 뭐가 바뀌나요?”

    “뭐가 바뀌냐고? 지금 와서 바뀔 게 뭐가 있겠어. 이미 내 부인이랑 아이가 죽었는데. 그러면 나는 이대로 살아야 하나? 그냥 잊고서? 그 망할 조직은 보스가 칼 맞아 죽고 송두리채 와해되고, 너네 아버지는 복상사하고, 검사새끼는 옷 벗고 나가서 변호사 사무실 차렸다 망해서 자살하고, 트럭 운전사도 감옥에서 시비 걸려 죽었어. 그 사고에 관련된 인간들 다 죽고 없는 마당에 내가 그냥 역시 신은 공평해 라고 하면서 내 인생 살아야 돼? 그 트럭기사는 노름빚이 오천만 원이 넘게 있었어. 트럭기사 와이프는 매일같이 맞아서 멍이 사라지질 않았고 자식새끼라고 사내애들 둘 있는 거 소년원에 하나 가 있더라고. 그 부인은 식당에서 일하고 자식 하나는 감옥에 가 있고, 한 자식은 나이트에서 삐끼해. 트럭기사는 자기 노름빚 갚는 데 돈 썼다면 당신 아버지 얘기 좀 해볼까? 당신 아버지가 받아처먹은 뇌물이 얼마인지 알아? 파도 파도 계속 나오는데 내가 다 질릴 정도더라고. 그 돈으로 당신 어머니랑 당신이 잘 먹고 잘 살았지. 당신 어머니가 몰고 다니던 그 외제차 기억나? BMW였던가? 판사도 공무원인데 월급 얼마라고 그거 사서 몰고 다닐 수 있었겠어? 당신이나 당신 어머니가 못내 그리워하던 그 부가 어디서 온 건지 이제 알 거 같아? 당신 아버지는 내가 판결 때렸던 그 조직에서 받은 돈으로 징징거리는 당신 어머니 차 바꾸고, 당신 대학 가자 어학연수 보내줬지.”

    신혜는 승규의 말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입을 벌리다 못해 이제 입을 틀어막아버렸다. 설마설마 했던 그것들이 정말일 줄은 몰랐다. 어릴 땐 그냥 아빠가 판사여서 잘 사는 줄 순진하게 생각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사회생활 할 때쯤 되어서야 뭔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그땐 이미 재산 다 날려먹은 뒤였다. 복수할 대상이 안 남아 있어, 그리고 아버지가 받은 돈으로 가장 잘 산 게 자신이어서 선택되었다. 눈 감고 귀 막고 그대로 어두운 곳에 도망쳐 숨고 싶었다. 귀를 꼭 막고 얘기를 더 듣지 않으려 하는 여자를 승규가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계약은 계속돼. 쇼처럼 말이지. show must go on."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 되었잖아요? 당신이 원하던 복수 했잖아요. 아버지 딸인 나를 통해서.”

    “그걸로는 만족 못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그럼?”

    “그냥 계약대로 이행하면 돼. 당신은 계속 나한테 괴롭힘당하면서 농락당하고, 나는 당신을 괴롭히고 농락하면서 나쁜놈 되는 거고.”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냥 차라리 돈으로 갚게 해주세요. 일단 집 빼서라도 1억 갚을게요.”

    “돈은 처음부터 문제가 아니었어.”

    “그러시겠죠.”

    그냥 이렇게 3년을 더 농락당해야 하기엔 그들 앞의 진실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지금은 이 부드러운 몸뚱이를 안아서 그 상처를 잊어야 했다. 잠시라도 달콤한 꿈에 빠져 조금이라도 잊고 싶었다. 이 몸을 안고 있는 동안엔 과거의 일들을 다 잊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바닷속에 빠져들 듯 그녀의 몸으로 자맥질을 해야 했다.

    그대로 가녀린 몸을 소파로 밀어서 쓰러트렸다. 그대로 육중하게 하체를 눌러오는 그의 기세는 무섭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냥 내주고 말자, 이제 다 손에 놔버린 허탈감에 그대로 자신을 잊어버렸다. 자신 위에서 숨을 몰아쉬는 남자도, 하체에서 느껴지는 고통도, 마음을 찢어발기는 듯한 아픔도 다 잊었다. 철저하게 유린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부드럽고 다정하고 달콤했던 입술이 쏟아낸 추악한 진실에 그대로 압사당할 것만 같았다. 달콤한 말을 내뱉던 입술은 이제 혀를 뽑아낼 기세로 입안을 휘젓고, 거친 손이 가슴을 거세게 쥐었다 놓으면서 가슴 끝을 괴롭혔다. 거의 칠 듯한 기세로 몰아치는 하체에는 이제 아무 감각도 없었다. 그냥 퍽퍽 살 부딪치는 소리만 귓가에 멍하게 들릴 뿐이었다.

    결국 남자가 작은 신음과 함께 자신을 풀어놨고 그녀의 몸 위로 무너져내렸다. 남자가 몸을 비키자 잠시 가만히 있던 신혜가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주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런 그녀의 가녀린 등을 바라보던 승규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처음부터 타인이었고 한 공간 안에서 일 년이나 같이 살았지만 여전히 타인이었다.

    *

    몸이 나른했는지 소파에서 책을 보고 있던 듯한데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오후 햇살이 뉘엿뉘엿해진 거 보니 이제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인 모양이었다. 점심도 건너뛰었더니 조금 배가 고팠다. 그러고 보니 요즘 유독 피곤하기도 했고 생리 시작 전인지 가슴도 단단해져서 아프고 아랫배가 가끔 아픈 날도 있었다. 몸살기가 있는지 오한도 좀 나는 듯했다.

    그날 이후 그는 계속 자신의 방에서 그녀를 재웠다. 밤에 늦게 들어와서 잠만 자고 나가지만 꼭 괴롭히듯 그녀를 안았고 가끔은 잠이 든 그녀를 깨워서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종종 전화를 걸어 어디 있나 확인을 하는 일이 잦았다.

    점점 더 무기력해지고 있다. 오전에 몇 시에 일어나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어느새인가 늦게 일어나서 늦게 자게 되었다. 마치 그가 오는 시간에 맞추기라도 하듯.

    그냥 집에 멍하니 있어서 그런지 점점 시간 감각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가 그녀에게 그럴 여유를 주지 앉았다. 심지어 도서관에 나가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오늘이 며칠이더라, 벌써 5월도 다 가버렸다. 이제 곧 여름이었다. 그 순간 이번 달에도 없었던 손님이 생각나버렸다. 지난달에 언제 했더라? 대충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니 지난달 10일경이었던 듯했다. 28일인데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생리전증후군처럼 몸이 무겁고 머리도 멍한 게 피곤하기만 한데 생리는 시작하려 하지 않았다. 이미 생리해야 할 때여서 이 주나 시간이 지나버렸다. 대충 날짜를 따져보아도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수술했다고 했는데. 그러나 만약 그의 정관이 다시 이어졌다면?

    머릿속에서 종이 울렸다. 차가운 걸 마시면서 다시 생각을 해보자 싶어서 냉장고의 문을 여는 순간, 갑작스레 욱 하고 올라오는 토기에 신혜는 순간 욕실로 달려갔다. 변기를 부여잡고 한참 토하고 난 뒤에 현기증이 나서 거의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아이가 생긴 거겠지. 병원에 가서 확인을 해야 하는데 두려웠다.

    아이가, 그가 원하지 않던 아이가, 그녀의 몸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녀도 원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작은 분신이란 생각에 배를 감싸 안았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희망을 버려본 적은 없었다. 계속 외로웠고 그 외로움을 해소할 동반자인 남편과 아이는 비밀스런 그녀의 바람. 신은 그녀에게 남편은 안 주셔도 아이는 예비해 두신 모양이었다.

    뱃속에서부터 오는 온기. 아, 남자는 미운데 왜 아이는 낳고 싶은 걸까. 그는 또 그녀의 이 작은 희망을 어떻게 깨부수려 할까. 이 작은 생명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은 왜 드는 걸까. 낳아야 하는 걸까, 그에게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그에게 말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많은 의문이 꼬리를 잇고 그것에 하나도 답할 수가 없었다. 원수의 자식인 그녀의 몸에서 태어나는 아이를 그가 정식으로 인정할까. 일단 정말 임신인지 확인부터 해야 하는지 그거조차 두려웠다.

    아이……. 내, 아이……,

    *

    새벽에 잔뜩 취해서 들어온 남자를 습관처럼 소파 앞에서 기다리다 맞았다.

    “어이! 유경택 판사님 따님!”

    그렇게 자주 술을 마시고 들어와도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잠자리에서마저 흐트러진 적 없는 사람이 언제나 이성의 끈을 놓은 적 없는 사람이 술주정을 부렸다.

    “취하셨어요. 들어가서 주무세요.”

    신혜가 몸을 기대는 그를 억지로 침대에 앉히고 넥타이를 풀기 시작했다. 옷을 벗기자 그는 순순히 몸을 움직여주었다. 그리고 속옷만 입은 상태에서 갑자기 그녀의 몸을 안고 쓰러졌다.

    “꺅!”

    그와 함께 깊숙이 침대에 묻혔다.

    형형한 눈빛. 그러나 그 속에 감도는 익숙한 슬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절망.

    그리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키스하기 시작했다. 물어뜯듯 시작한 키스였다. 그녀에게 고통을 줘야만 하는, 그녀는 고통을 받고 몸부림을 쳐야 하는 이 이상한 상황극.

    그녀의 슬픈 눈을 바라보며 그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그들은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달콤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이제 그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세상을 잊는다. 서로의 존재가 서로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가슴이 아픈데, 그렇다고 놔줄 수도 없다.

    그가 등을 돌리고 누운 신혜를 등 뒤에서 감싸 안았다. 이건 그가 선호하는 자세였다. 가슴을 만지기 좋아서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은 정말 피곤한지 허리를 감싸안았고 자연스레 손은 배에 가 닿았다. 그의 손길이 배에 닿자 살짝 그의 손을 저지했다.

    “왜?”

    신혜의 거부가 못마땅한지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피곤하실 거 같아서…….”

    “피곤하건 말건 내가 결정해.”

    다신 그 얘기를 그도 그녀를 꺼낼 수 없었다. 서로에게 너무나 큰 상처였고 그걸 서로 알기 때문인지 마치 터부라도 된 듯. 그는 자기 앨범을 어디론가 치워버리기까지 했다. 젊은 시절의 그는 같은 사람임에도 그 여자 옆에서 너무나 행복하게 웃고 있었는데 이제 그 잘생긴 미간은 늘 찌푸려져 있었다. 더 좋은 옷을 입고 있고 있음에도 그의 얼굴은 너무나 불행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게 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왜 내가 그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게 무슨 죄라고요? 라고 남자에게 반항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기가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까지 받은 모든 혜택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너무나 잘 알아서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도덕적으로 자신이 결백하다 생각했건만,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이 존재 자체가 범죄에 깊이 발 담그고 있던 걸 아는 순간 여태 간직한 자부심과 자긍심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나 혼자 잘 살면 되지, 제대로 살면 되지라 생각했건만 그게 아니었다. 이 남자에게 속죄해야 하는 건 아버지였지만 자신 역시 그 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말을 하지. 아니 어떻게 안 들키지. 이대로 도망가버려서 완전히 숨어버리면 좋으련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뒤에 있는 남자들이 그녀 뒤를 좇겠지. 이런 생각을 하자 눈물이 갑자기 쏟아졌다. 거의 운 적이 없었는데 그에게 학대를 당할 때조차 눈물이 난 적이 없는데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에 신혜가 당황했다. 일어나려 했지만 그가 잡아서 자기 품에 도로 가둬버렸다.

    한 번도 운 적 없던 여자가 그대로 눈물을 수도꼭지처럼 주룩주룩 흘려대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면서 본인도 당황한 듯 눈물을 닦아내는데 소매끝이 흠뻑 젖을 정도였다. 그가 결국 티슈를 뽑아서 계속 주는데도 그냥 울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신혜를 바라보았다.

    “나는 우는 여자는 불쌍한 것보다는 짜증나던데 그만 좀 그치지?”

    한 번 쏟아져나온 눈물은 여름 장마처럼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어린아이처럼 소리까지 내면서 엉엉 울었다. 눈물 콧물 다 흘리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몸을 비켜주고 그런 그녀를 당혹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전혀 알지 못했다.

    “울면 내가 당신 놓아줄 것 같아?”

    그러나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코가 빨개지도록 울었다. 남자 앞에서 수치 같은 것도 잊은 듯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목을 놓아 울었다.

    이제 나랑 우리 엄마 용서해 주시면 안 돼요?

    왜 이 말을 할 수 없는 걸까. 자기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한쪽에서 고개를 돌린 신혜가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승규는 그런 그녀를 냉철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갑작스런 감정의 변화에 그 역시 당황한 듯했다.

    용서를 하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도 용서를 못했는데 누구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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