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금0 타사X 요게X
7.
핸드폰에 뜬 번호를 보고 승규는 인상을 확 썼다. 안 받으면 받을 때까지 전화를 해대겠지. 그 집요한 성정을 모르는 게 아니라 받으면서도 기분이 나빴다.
“네, 민승규입니다.”
-나다.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낯선 사람인 양 아무렇지 않게 안부를 물으면서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추한 인간. 자신과 피를 반은 나누었지만 그 인간을 생각하면 위액이 거꾸로 올라올 것만 같았다.
-요즘 왜 연락도 없는 게냐?
왜 연락 안 하냐고? 물을 걸 물으셔야지.
-가까운 시일 내 서초동에 한 번 들러라. 네 어머니가 너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하셔.
“저희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지 이십 년은 되셨을 텐데 저승에서 전화라도 하셨나 보네요?”
승규의 비아냥에 아버지는 아랑곳없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혼자 살 거야? 이번에 꽤 참한 아가씨 하나 잡아뒀다고 한다. 한 번 만나보지 그래?
“됐어요. 그냥 저 혼자 살게 두세요. 멀쩡한 여자 데려다 병신 만들 일 있으세요?”
-한 번 만나라도 봐. 한 번 갔다왔다지만 애는 꽤 괜찮아. 내 고등학교 후배 딸이야.
그럴 줄 알았다. 그냥 아무나 들이댈 리가 없었다. 수정이랑 결혼할 때도 집안이 너무 평범하다고 못마땅해하셨지. 집안이 평범한 게 부러웠다. 화목하고 단란한 가족이, 평범한 부모가 부러웠다.
“안 봐요. 그냥 전에도 없는 듯 살았던 아들, 이제 와서 하나 더 있다고 뭐가 달라지십니까? 저 이 세상에 없다 생각하고 무시하고 사세요. 계속 그러셨던 대로. 노망이라도 나셨습니까? 갑자기 왜 안 하시던 행동을 하시는지 모르시겠네요?”
승규의 거친 폭언에도 핸드폰 너머 그는 씨근덕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전 같으면 불호령에 난리를 쳤을 텐데 그도 이제 늙은 모양이었다. 홀애비 아들이 걱정되는지 이렇게 안부 전화를 하는 걸 보면.
이대로 살다 죽겠거니 했다. 가끔 아버지가 불러서 가서 인사하는 게 다였을 뿐이었다. 아빠라는 소리 한 번 해본 적도 없었고 고등학교 졸업해서 대학 갈 때야 비로소 아버지가 있는 줄 알았다.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에야 사실을 말해 줬다.
어머니는 자식이 사생아인 게 미안하고 안타까워했다면, 이 남자에게 자신은 지우고 넘어가야 할 오욕에 불과했다.
아버지만으로도 심란한데 대학동기인 최 변호사마저 방에 들어와 뭔가 떠보는 기색이었다. 최 변호사의 아버지이자 이 회사의 대표는 아버지와 대학 동기였다. 아마도 아버지가 대표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어이, 민승규. 요즘 바람났다면서?”
그 말에 순간 움찔한 건 사실이었다.
“소문 자자하드만. 사무실 귀신이 요즘 칼퇴근 한다고. 주말에는 나오지도 않는다면서?”
“그런 이유로 바람났단 소문이 난 거야?”
“지난 몇 년간 어떻게 살았나 본인 가슴에 손 얹고 생각 좀 해봐. 밑에 애들 생각해서 적당한 시간에 퇴근하고 주말에 사무실 나오는 건 자제하라고 내가 몇 번이나 얘기했냐?”
경쟁이 치열한 이 사회에 야근은 기본이고 특근은 필수였다. 그중에서도 눈에 띌 정도의 일중독자인 승규였다. 그 말에 승규가 허허 웃었다. 워커홀릭 오브 워커홀릭이라고 최 변호사가 농담할 정도였다. 술자리에서 원망소리 들은 적도 제법 되었다.
“그래서 네 말대로 하고 있잖아. 가급적 사무실에선 일 안 하기.”
“단지 그런 거야?”
“응.”
“진짜?”
“그럼. 뭐? 내가 진짜 바람이라도 났으면 어떻게 하려고?”
“아니 여자 만난다면 그 여자한테 좀 잘해 주라고 선물이라도 보내려고 했지. 이 사무실 귀신 치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승규가 허허 웃었지만 그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짜샤, 나 진짜 심각하다고. 오죽이면 아버지마저 불러서 너 무슨 문제 있냐고 물었다니까.”
“대표님이?”
“어, 너 진짜 괜찮은 거냐고? 설마 너 성정체성에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단 얘긴 차마 못했다만…… 여자 안 만나냐고 누구 소개해 주시겠다고 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진땀 빼는 줄 알아?”
물론 선 얘기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니고 만나라고 하는 거 거절한 것도 백 번은 될 터였다.
이제 그만 잊을 때도 되지 않았냐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말하곤 했다. 그런데 그가 잊을 수가 없는데, 아니 그마저 잊으면 누가 그들을 기억할까.
최 변호사가 나가고 난 뒤 그는 사무실 책상 서랍에서 액자를 꺼내었다. 이제 더 이상 책상에 둘 수 없는 오래된 액자. 오랜만에 보는 사진에서 젊은 그, 수정이, 그리고 동주. 셋이서 자신을 바라본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치운 지 오래이건만. 이젠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오늘이 바로 수정이와 동주의 제삿날이었다. 상조차 차릴 수 없어 가슴에 묻은 그녀와 아들. 납골당에 아침에 찾아가 꽃을 앞에 놓아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좌절감은 물귀신처럼 지난 십 년간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무거운 추처럼, 그림자처럼 계속 뒤에서 따라다니는 그 기억들과 죄책감에서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결국 그 죄책감이나마 어떻게든 없애보려고 꾸민 일이었지만 결국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
초인종 소리에 놀란 신혜가 인터폰을 들었다. 택배기사인가 싶었는데 흐릿한 화면으로 뜻밖의 인물이 보였다.
“누구세요?”
모니터에는 풍채가 좋은 노신사 얼굴이 보였다.
“나 승규 애비 되는 사람이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신혜가 당황했다. 승규 아버지라는 사람이 엘리베이터로 올라오는 동안 승규에게 일단 메시지를 보내긴 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부산하게 왔다갔다 하면서 일단 손님 맞을 준비를 급하게 하기 시작했다.
다시 현관 초인종이 울리자 신혜가 화급하게 나갔다.
“네, 나가요.”
문을 열어주자, 노인이 성큼 들어왔다. 아버지라고 하더니만 승규도 나이 들면 저리되는 걸까. 짙은 눈썹이나 날카로운 눈매가 아버지와 참 많이 닮았다 싶었다. 승규도 저렇게 풍채가 좋아질까. 지금 좀 마른 게 아닌가 싶었는데.
“들어오세요. 아드님은 지금 안 계세요.”
“알고 왔소이다.”
그가 주인인양 느긋하게 소파에 앉자, 신혜는 안절부절 못했다.
“마실 거 드릴까요?”
“차 한 잔 주시오.”
이 사람도 남의 위에 군림하던 사람이구나. 근엄한 얼굴이나, 금테 안경을 썼는데 나이에 비해 꽤 키가 크고 허리가 꼿꼿한 걸 보면 승규가 친탁을 한 모양이었다. 신혜는 부엌으로 가서 전기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천장에서 차통과 다기 세트를 꺼내었다.
사실 승규 아버지는 심술을 부리려고 일부러 차를 달라 한 거였다. 현미녹차 티백이나 나오겠지 싶었는데 의외로 제대로 된 다기 세트가 나오자 조금 당황했다. 여자가 음전하게 뜨듯하게 데운 잔에 다관에서 차를 따라 그의 앞에 내밀었다. 그냥 예의상 한 모금 맛을 보는 척하려고만 했는데 의외로 향도 좋고 맛이 텁텁하거나 쓰거나 심심하거나 하지 않았다.
“맛있구먼.”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네요.‘
생각보다 더 음전하니 다행이다 싶었다. 요즘 퇴근이 빨라졌다는 얘기에 혹시나 싶어서 찾아온 것이었다. 혹시 이상한 여자 만난 게 아닌가 싶어 마흔 다 되어가는 아들 걱정이 되어 나와본 참이었다. 아가씨가 나이도 적당해 보이고 얼굴 보니 곱게 자란 인상인 게 첫인상만으로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같이 사는 거 보니 서로 좋아하는 거겠고, 그럼 날만 잡으면 될 듯했다.
“그래 우리 승규랑 만난 지 얼마나 되었소?”
그 말에 신혜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제 거의 일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계절이 얼마나 빨리 바뀌는지 어느새 겨울이 와버렸고 해도 바뀌었다. 그냥 이제 평온한 나날이었다. 승규도 신혜도 서로 지쳐 서로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게 되는.
“1년 정도 되었어요.”
“그래 부모님은 뭐하시고?”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지금 미국 이모네 가 있어요.”
약간 처진 동그란 눈이 순해 보이는 게 마음에 들었다.
결혼 안 하고 혼자 사는 날이 길어져서 걱정이 커지고 있었건만 덜컥 웬 여자와 같이 산다기에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음전해 보여서 다행이다 싶었다. 못 배운 애도 아닌 듯했고 부모 밑에서 대학 나와서 회사 다니다 승규 만나서 이렇게 사는 거라면 곧 결혼을 하겠지.
그냥 뒤에 조사하면 다 나오겠지만 아들이 고른 여자를 믿어보고 싶었다. 음전하게 생겨서 나쁜 마음 품거나 그럴 것 같지도 않았고 승규 보는 눈이 까다로울 테니 어련히 잘 골랐겠거니 싶었다. 전처인 수정이도 애가 평범한 집안인 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사람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살아 있었더라면 안정적으로 잘 살았을 텐데.
“차가 아주 맛있네. 평소에도 차를 자주 마시나 보오?”
“네. 그냥 좀…….”
신혜는 당황하면서도 차분하게 대답을 하려 애썼다.
“우리 애가 고집이 세지?”
그 말에 신혜가 약간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려 슬쩍 웃었다.
“고집만 센가, 성격도 약간 불퉁스러운 게 여자한테 잘 못할 거 같던데?”
그 노인이 슬쩍 떠보는데 신혜는 그냥 조용히 웃었다. 사실 맞기는 한데 그렇다고 긍정을 할 수도 없었다. 슬쩍 노인이 시계를 보니 이제 슬슬 승규가 들이닥칠 때였다. 분명 자기가 올라올 때에 메시지라도 보냈겠지. 회사랑 집이 먼 것도 아니니 금방일 것이다. 그 성격이 오면 한댓거리 할 게 분명한데 아가씨 앞에서 하는 게 좋을 게 없을 듯했다.
“차 잘 마셨소.”
일어나기 무섭게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빨리 승규가 들이닥쳤다. 신혜 연락 받자마자 바로 택시 타고 집으로 달려온 참이었다. 회사에 소문이 좀 나 있다 싶더니만 뭔가 들은 얘기가 있던 거겠지. 노인네 바로 여기저기 들쑤셔서 같이 사는 여자 있는 것도 확인한 모양이었다.
“여기 어쩐 일이세요?”
“아버지가 아들 집에 오는 게 그렇게 흠이야?”
승규가 거의 노인을 몰아내듯 끌고 나갔고 뒤에서 신혜가 노인에게 인사를 겨우 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걸 기다리면서 승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아버지 없는데요. 제 성이 뭔지 잊으셨습니까?”
그런 비아냥거림에도 그는 별 말 없이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 눈 안의 측은한 동물 보는 듯한 동정에 더 부화가 치밀어올랐다. 노인네는 그가 화를 내든 말든 자기 할 말을 했다.
“저애, 괜찮더라. 어서 날 잡아서 결혼이라도 해.”
그 말을 한 노인은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버렸다.
잠시 후 배웅을 하고 돌아온 승규는 굉장히 화가 났는지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평상시 화가 나도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 저렇게 화를 낼 정도면 얼마나 분노한 걸까. 긴장한 신혜가 주춤거리면서 부산한 척 싱크대로 찻잔을 들고 갔다.
“앞으로 저 영감 찾아오면 문 열어주지 마. 만나지도 말고 일절 어떤 접촉도 하지 마.”
“그래도, 당신 아버지인데 제가 어떻게…….”
“넌 내 부인 아니야. 저 인간하고 넌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그러니까 쫓아내. 그래도 되니까.”
그 말에 신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는 민승규 씨 집안 에 끼고 싶지도 않고 가족관계도 궁금하지 않고, 접점을 갖는 것도 싫어요. 그런데 그런 건 알아서 중간에서 막으셔야지 왜 저한테 알아서 하라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알아서 하라는 게 아니잖아. 무조건 접점 만들지 말라고 하는 거지.”
“제가 싫은 소리 하게 만들지 마시고 중간에서 알아서 아버님 못 오시게 하시던가 하시라고요.”신혜 역시 속상해서 지지 않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승규는 정말 화가 났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신 문을 쾅 하고 닫고 나가버렸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정말 바쁜 때, 이게 무슨 타이밍인지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지친 머리로 잠시 눈을 감았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굉장히 큰 건이어서 전력을 다 해야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신혜에게 찾아갔다는 걸 듣는 순간 회의하다 말고 뛰쳐나와 버렸다.
오늘 집에 들어갈 수 있는지나 모르겠는데, 아니 일주일 뒤에 좀 정리가 되면 좀 덜 바쁘려나? 한동안은 신혜 얼굴 보기도 힘들겠지? 피곤한가, 왜 이리 약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자책하며 그는 다시 일 생각에 전념하려 했다.
*
보조로 일하는 변호사 자리에 최근 일 관련해서 간단하게 얘기하고 있는 차였다. 갑자기 사무실이 입구에서부터 술렁이는 게 느껴졌다.
“어, 대법원장님.”
전직이긴 하나 대법원장이 나타나자 다들 긴장하는 건 당연했다. 대법원장과 이 로펌의 대표와 대학교 선후배 관계에 제법 친하다는 것은 다들 아는 일이었다. 저녁 약속이라도 있는지 그가 오후 늦게 사무실에 나타났다.
승규는 순간 나타난 아버지에 짜증이 나려 했다. 그냥 업계 동료를 만나러 온 척했지만 그에게 할 말이 있어 온 게 분명했다. 막 큰건 치우고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하려던 차여서 더 신경이 쓰였다.
“민 변호사, 오랜만이에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가 밖에서 승규에게 아는 척했다. 승규는 떨떠름하게 그러나 유능한 변호사답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었다. 속으로 이빨을 갈아도 겉으로 내색할 수 없다.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노인네에게 묻는 듯이 승규의 작은 심술이었다.
“나야, 뭐 항상 그렇죠. 뒷방 노인네 건강이야.”
승규의 그런 심술을 눈치라도 챈 듯 허허 하고 사람 좋게 웃는 그 가증스런 얼굴에 승규는 미간에 힘이 쏠리려는 걸 의지로 막았다.
전 대법원장의 모습에 다들 긴장하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전 대법원장과 민승규가 무슨 접점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을 건네었으니 술렁일 만했다.
“잠시 얘기나 하지, 민 변호사.”
아무래도 시선이 두려웠는지 전화로 막 하던 하대가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기 방으로 들어오자 옆에 가방을 두고 앉았다. 잠시 후 비서가 차를 내려놓고 가자마자 승규가 다그쳤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저 약속 있어서 나가봐야 돼요.”
“잠시 너 보러 들렀다.”
“저 같은 사람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셔서 들르셨는지 모르겠네요?”
유들거리는 승규에게 그가 허옇게 센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날 안 잡아?”
“무슨 날요?”
“결혼해야지. 같이 사는 아가씨도 있는데. 이미 네 형들 애들은 이제 제법 크다.”
배다른 형제들 얘기에 승규가 살짝 인상을 썼다. 그의 두 아들 중 아무도 법조계로 오지 않았다. 밖에서 낳은 승규만 같은 업계로 온 것 자체가 인생의 아이러니였다.
“어째 손자들만 득시글거리고 손녀 하나 없나 몰라. 아들만 셋이더니만. 내 팔자에 딸이나 손녀는 인연이 없나 보다.”
손자만 있다고 투덜거리지만 벙실벙실 웃고 계셨다. 얼마나 좋은 아버지인지, 할아버지인지 그는 모른다. 그는 아버지로서 그가 어떤지도 전혀 몰랐고, 할아버지로서의 모습도 전혀 몰랐다. 동주에게는 조금의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가 아들이 태어났다고 전화했을 때도 덤덤하게 받아들였던 노인네가 다른 손자에게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도 축하한다고 말해 주시는 게 그렇게 어려우셨어요? 그때, 아버지에게 전화했을 때 제가 듣고 싶었던 얘기가 뭐였던데요?
“왜 동주 때는 그 말씀 못하셨어요? 왜요? 동주도 아버지에게 축하받으면서 태어날 자격이 있는 애였어요. 왜 그땐 못 그러셨어요?”
그 말에는 십 년 전에 찾아가서 한 번만 도와달라고 울부짖던 그때의 그 비장함이 숨어 있었다.
지금도 그때, 눈앞에서 그 일이 눈에 훤했다.
아이가 태어난 지 백오십 일 정도 되었으려나. 날이 좋은 가을이었다. 잠시 올려다본 하늘이 정말 새파랗고 바람이 좀 차갑긴 하지만 볕이 쨍쨍해서 추운 줄도 몰랐다. 장인의 생일이라 본가에 가서 하루 자고 돌아오던 참이었다.
승규가 운전석에서 먼저 내리려고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한쪽 구석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박아버렸다. 그는 운이 좋았는지 그대로 튕겨나가면서 찰과상 입은 게 다였다.
순간 구르면서 정신을 잃었다가 정신 차리자마자 온몸이 아픈 것도 잊고 차로 뛰어갔다. 트럭이 어떻게 갖다 박았는지 차 뒷좌석이 완전히 찌그러져서 거의 앞좌석에 붙어 있다 시피 했고 뒤에 아들 동주와 앉아 있던 아내 수정은…… 붉은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아파트의 누군가 119를 불렀는지 삐뽀삐뽀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차문을 쥐고 그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누군가 강제로 그를 끌어내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병원이었다.
아이도 수정이도 한순간에 그렇게 가버렸다.
억울했고 분했고 슬펐다. 이대로 그냥 보낼 수 없었다.
마지막이다 싶어 아버지를 찾아갔던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그의 집에 찾아간 것도, 그의 부인을 만난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밖에서 만난 적도 몇 번 없는 양반, 결혼한다 말했더니 통장으로 아파트 사라거 5억 송금해 준 게 다인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에게라도 그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다.
사고 직전에 승규가 맡았던 재판이 조폭 관련된 것이었다. 아마도 그거 관련해서 사고를 일으켰을 거라는 심증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냥 트럭 기사가 음주운전해서 그랬을 거라고 검사도 재판관도 몰아갔다.
“그 사고 분명 그놈들 짓인 거 아시잖아요.”
그러나 아버지는 무표정하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옆에 그의 부인이 앉아 깔보듯 그를 바라보았다. 다 큰 어른이 눈물로 범벅인 거 흉하겠지. 그래도 아버지인데 아들이 이렇게 부탁하는데…….
“나, 지금 대법원장에 이름 오르내리는 얘기 못 들었어? 지금 여기저기서 관심이란 관심은 다 받고 있는 마당에 네 얘기 나오게 되면 난 여기서 끝이야. 네 죽은 처랑 아들은 유감이지만 이미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내가 여기서 유경택에게 압력 넣으면 너 바로 알려져. 너도 나도 끝이야 바로!”
아버지는 끝까지 매정했고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미친 새끼는 4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결혼하란 소릴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나 이제 살 날 많지 않아. 가기 전에 네놈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거 보고 싶다.”
도와달라고 했을 때, 그때는 왜 그렇게밖에 못한 것일까. 이제 살 날보다 갈 날이 많은데 왜 그렇게 후회될 일들만 남아 있는 걸까.
그가 태어난 걸 뒤늦게 알았을 때 걱정이 되면서도 자기 몰래 아들 낳아 키워준 그 사람에게 고마워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혼자서도 훌륭하게 잘 커준 아들에게 왜 그렇게 모질게 대한 걸까. 갈수록 가슴의 짐은 그였다. 그의 다른 두 아들이야 그가 없어도 잘 살겠지만, 언제나 위태위태하게 걷고 있는 이 아들이 그의 마음의 짐이었다. 평생 부정하면서 살아야 했던, 언제나 세상의 이목만 중요시 여기던 못난 애비의 십자가였다.
눈가에 눈물이 고이려 하는 걸 털어냈다.
“전 대법원장님, 전 처음부터 행복이 뭔지도 모르는 놈이었고, 앞으로도 모를 겁니다.”
지옥의 불길 한가운데 잇는 것처럼 야차처럼 얼굴을 구기고 내뱉는 아들을 바라보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가슴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그것. 욕심이 부른 것에 이제 칠순이 넘은 그조차도 그 억겁은 어떻게 풀 수 없는 것이었다. 부와 명예를 취하기 위해 내려놓았던 많은 것들 중 하나, 이제 그의 양심을 찌르는 단 하나인 아들을 바라보며 칠순노인은 한숨만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