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11)

6.

시계를 보니 열두시가 넘어 있었다.

그는 오늘도 늦으려는 모양이었다. 요즘 큰일이 있는지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전보다 늦어 있었다. 전에는 술 마시는 일 아니면 12시 이전에는 가급적 들어오더니 요즘엔 일 때문인지 꽤 지친 얼굴로 새벽 두세시에 들어오는 일이 허다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밀려오는 건 몇 년 동안 잊고 산 외로움과 공허감. 무얼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산 거지, 결론이 이런데?

그리고 남자에 대한 불만감. 그가 뭐길래 내 인생을 이렇게 짓밟아도 되는 걸까.

알 수 없는 남자와 몇 달째 같이 살고 있지만 그의 목적이 무엇인 걸까.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 사람 기다리면서 붙박이 가구처럼 있는 처량한 신세. 반항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그때 핸드폰의 문자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그일까 싶어 잽싸가 액정을 확인했다. 요즘엔 가끔 문자로 뭔가 지시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뭐해?>

지운이었다. 오늘밤 당직인 모양이었다. 지난번에 헤어진 이후 이렇게 문자 메시지를 종종 주고받곤 했다. 사실 특별하게 하는 얘긴 없었다. 한 번 극장에서 영화를 같이 본 적이 있었다. 그가 휴가라고 해서 낮에 영화만 보고 헤어졌다. 낮시간에 나와 있는 것조차 너무 오래 외출하면 그가 나무랄까 조마조마했지만 그는 그날도 새벽에 들어와서 전혀 모르는 듯했다.

<책 봐. 너는?>

<나 당직. 무슨 책?>

<소설.>

<팔자 좋네>

이런 대화 간단하게 오가고 가끔 통화하기도 한다. 사실 통화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해지곤 했다. 지운은 다정다감한 편이고 유머 감각도 있어서 대화하기 편한 상대이긴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기 얘길 제대로 할 수 없고 승규를 감추어야 하기 때문에 방어적으로 나갈 때도 있었다.

<전화해도 돼?>

<내가 할게.>

어차피 문자 메시지 몇 개 보내는 거 외에는 거의 통화할 일이 없는 핸드폰이었다. 신혜가 통화목록을 보자 그 아니면 지운밖에 없었다. 그냥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자신의 좁은 세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싶었다.

그를 제외하면 대화하는 상대가 지운밖에 없었다. .

- 안 자?

“응 책 좀 보느냐고.”

- 너 매일 늦게 자더라? 피부미인은 일찍 자야 돼. 너 은근 올빼미더라.

그 말에 신혜가 작게 웃었다. 전에는 규칙적으로 생활했는데 이제 그의 스케줄에 몸이 맞춰서 움직이다 보니 자연스레 밤에 늦게 자게 되었다. 아침에 그가 일어날 때 일어나서 마중하고 나서 잠시 누워 있다 일어나서 늦은 아침 먹고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했다. 가끔 밖에 나가 쇼핑하고 도서관 가서 책 반납하고 빌려오고. 이게 하는 일의 전부였다.

- 나 내일 쉬는 날인데 잠시 볼래? 커피 한 잔 하자. 아님 밥 먹어도 좋고.

전화통화를 하면서도 언제 승규가 들어올지 몰라 긴장이 되었다. 이제 열두시고 요즘 계속 두시 넘어서 들어오니 아직 오려면 좀 시간이 있었다.

내일은 평일이고 그가 당연히 늦을 테니 커피 한 잔 정도는 상관없지 않을까. 오후 늦게 만나서 커피를 마시자. 그 정도의 여유는 괜찮을 듯싶었다.

“나 일찍 들어와야 돼.”

- 그럼 커피만 마시자. 내일 몇 시쯤 볼래?

“음…… 몇 시부터 시간나는데?”

- 나 4시 이후엔 괜찮아. 그 이후에 너네 집 주변으로 내가 갈게. 나도 어차피 집에 가야 하니까.

사실 지운이 아는 이곳은 집이 아니었다. 그녀의 일터일 뿐. 그가 빨리 들어와봤자 10시일 테니 잠시 얘기할 시간 정도는 있었다.

“그래 알았어. 그럼 사거리 있잖아. 거기에 비하인드라는 카페 있어. 거기서 지금 봐. 저녁은 미안한데 힘들 거 같아.”

- 어쭈, 바쁘시다 이거네.

“미안. 좀 일이 있어서…….”

- 백수가 더 바쁘다니까, 그럼 내일 봐. 잘 자!

그러더니 지운의 전화가 뚝 끊겼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시계를 보니 삼십 분 정도 흘러 있었다. 승규는 오늘도 늦을 모양이었다. 적막한 집안에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 전자제품에서 나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는 오로지 신혜 하나. 오늘 아마도 지운이 전화 안 했더라면 입 밖으로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겠지.

외로움이 왈칵 몰려왔다. 차라리 승규라도 빨리 들어왔으면 좋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이렇게 길들여지는 걸까?

*

도서관에 가서 책 반납하고 새 책 빌려와서 집에 들어오니 어느새 3시가 넘어 있었다. 어제 승규가 새벽 세시가 훨 넘어서 들어오는 바람에 자연히 신혜도 잠을 못 잤던 것이다. 그가 나가자마자 다시 잠이 들었는데 늦잠을 자버렸다. 씻고 밥 먹고 도서관에 갔어야 했는데 도우미가 청소기 돌리는 소리에 일어났다.

도우미랑 부딪치는 게 싫어서 간단하게 씻고 부리나케 준비해서 도서관에 나갔다 돌아왔다. 십오 분 남짓 걸었을 뿐인데 땀에 푹 젖었다. 한여름은 어느새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는데도 더위는 물러갈 줄 모르고 있었다. 여름에 남들은 폭염이다 뭐다 하는데 집 밖을 통 나가질 않으니 더위가 그다지 체감되지 않았다. 가끔 도서관에 갈 때야 아 덥구나 싶은 정도일 뿐.

샤워하고 급하게 속옷을 찾아 입고, 연녹색의 면 티셔츠에 기다란 꽃무늬 저지 스커트, 얇은 면 카디건을 찾아 입고 지갑만 들고 나왔다. 이제 제법 긴 머리는 포니테일로 올려 묶었다.

지운은 카페를 금세 찾은 모양인지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가벼운 안부, 그리고 침묵. 시선이 마주치기도 두려운 신혜는 그저 컵만 바라보는데, 지운은 뭐가 좋은지 연신 웃었다. 좌불안석이라 계속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면서 시계만 보게 되었다. 왜 나왔을까, 그냥 거절할 걸 자신을 자책한다. 그가 퇴근을 일찍하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그럼 집에 혼자 있는 거야?‘

“으, 응.”

“넓은 데 혼자 있으면 무섭겠다.”

지난번에 근처에 내려주면서 그녀가 사는 아파트가 그곳인지 짐작한 모양이었다. 혼자서 넓은 집에 있어서 무섭던가. 그렇진 않았다. 어릴 때부터 익숙한 거라서.

“아니, 별로…….”

지운은 지금 있는 곳이 신혜의 집인 줄 아는 듯해서 그것 역시 신경이 쓰였다.

“혹시 밤에 무서우면 나한테 전화해.”

“너가 뭘 어떻게 해주려고? 그리고 무서울 일이 뭐가 있어?”

아무도 유신혜가 겁에 질려 덜덜 떨어도 도움의 손길을 준 일이 없었다.

“왜 없어? 가끔 밤에 안 무서워 혼자 있으면?”

혼자 있으면 무서운 대신 외로웠다.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못하고 넘어가고 강아지처럼 그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의 비아냥거림에도 이제는 별 신경쓰지 않게 되는 자신의 둔함이 두려웠다.

“저기 혹시 너 말이야. 만나는 사람 없으면…… 나랑 만나보지 않을래?”

올 게 온 거다. 그냥 아닐 거야, 아닐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있었다. 지운과 문자 주고받고 가끔 전화 통화하면서 가슴 두근거렸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와 사귀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지금 비공식적으로 민승규의 정부이고, 그와 동거하는 처지이다. 그런데 남자와 이렇게 만나는 것 자체가 계약 위반일지도 모른다. 왜 이런 거에 욕심낸 걸까. 그 작은 온정 하나에 목 말라서 이렇게 매달리는 자신이 추하게도 느껴졌다.

“미안한데…… 내가 지금 그럴 형편이 아니야. 마음은 고마워.”

“왜 그럴 형편이 아니란 건데?”

“그냥 내가 때가 아니어서, 내가 준비가 안 되어 있어.”

“우리 스물여덟이야. 별로 이른 나이 아니잖아. 이제 결혼 생각할 나이라고 생각하는데…… 나 부모님 건강하시고 노후대비도 되어 있으시고, 차남이야. 이 정도면 괜찮은 신랑감 아니야?”

“네 문제가 아니야. 내 문제지. 내가 준비가 안 되어 있어. 아직 누군가 만나고 할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아.”

신혜를 바라보는 눈길이 실망한 듯했다. 그러나 지운은 은근 집요했다.

“왜 그럴 형편이 아닌데?”

“그냥 집안 사정도 있고 그냥 누군가 만나서 연애하거나 할 상황이 아니야. 미안해. 나는 지금 연애할 맘 없어. 지운이 네가 좋은 사람인 건 아는데 내가 여유가 없는 거야. 미안해.”

지운은 뭔가 캐물으려 했지만 신혜는 더 이상 얘기를 꺼내려 하지 않았다. 결국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더 이상 지운에게 기댈 수는 없겠지. 이런 얘기가 나오지 않기 은근 바랐었다. 계속 여학교에 다녀서인지 처음에 남자직원과 말 나노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남자와 얘기하고 뭔가 하는 건 부담스럽다. 그러나 지운과는 조금은 편안했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은 더 이상 연락하거나 하는 게 불가능했다.

“나 이제 그만 가봐야 돼.”

신혜가 일어서자, 그가 잽싸게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해버렸다.

“바래다줄게.”

“아냐, 안 그래도 돼.”

“그 정도는 하게 해줘도 되잖아.”

가벼운 실랑이 끝에 결국 지운에게 한 번은 져줬다. 앞으로 다시 볼 일 없을 테니까. 지난 한 달간 두근거리게 해줘서 고마워, 라고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할 터였다.

“야, 올해는 왜 이렇게 더운 거야? 밖에 나가지 못하고 병원에 갇혀 있는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덥네. 여름 다 갔다 싶은데 아직도 꽤 덥네. 오늘 같은 날 여자에 채였지, 그냥 어디 가서 술이나 마셔야겠다.”

그 말에 신혜가 작게 웃었다. 그냥 지운의 너스레가 마음이 편해서였다.

사거리에서 아파트까진 금세였고, 그 짧은 거리가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그와 있는 건 부담감도 없고 긴장하지 않아서 편했다. 그러나 그는 승규가 아니다. 낮의 폭염도 이제 좀 가라앉고 해도 완전히 져서인지 풀벌레 우는 소리가 화단에서 간간이 들렸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섰을 때 주변에 보는 눈을 의식한 듯 신혜가 살짝 긴장했다. 멋도 모르는 지운은 끝까지 바래다주려 했다.

“나 들어가볼게.”

하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지운이 갑자기 껴안아버렸다.

“너 정말 좋아했어.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너 보려고 학원에 다녔는데 넌 아는 척도 안 하더라. 결혼식에서 봤을 때 진짜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 김칫국 먹은 거네.”

그땐 정말 수줍음이 많았었다. 사실 공부 잘하는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긴 했었다. 왜 이런 사람과 연애를 할 수 없는 걸까. 조금만 손짓 해도 자기에게 다정하게 다가올 그를 두고 왜 자신은 승규에게 돌아가야 하는 걸까.

갑작스레 그동안 눌러왔던 마음이 폭발하듯 했다.

억울하다.

왜 자신은 그에게 4년이나 얽매여 있어야 할까.

만져보지도 못한 돈 때문에!

그냥 이건 승규에 대한 작은 복수이자, 자기에게 좋아했다 고백하는 지운에 대한 작은 선물이었다.

살짝 까치발을 해서 그의 볼에 입 맞추었다.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에 지운의 얼굴에 당혹감이 나타났다.

“잘 가, 나 그만 들어가볼게.”

그 말을 남긴 신혜가 나비처럼 팔랑팔랑 현관으로 들어가버리자, 넋을 놓은 듯 멍하니 뒷모습을 보다 돌아섰다.

1층 로비의 우편함을 지나가다 보니 우편물이 꽤 많이 쌓여 있었다. 어지간한 고지서는 다 온라인이나 회사로 오게 되어 있는데 뭐가 이리도 많이 와 있는 건지. 우편함을 열어 보면서 승규는 투덜거렸다. 그때 유리문 너머 젊은 커플이 보였다. 집 앞까지 데려다주면서 헤어지는 게 아쉬운지 남자가 여자를 포옹한다.

“먼저 들어가.”

“아냐, 너 가는 거 보고 들어갈게.”

매번 집 앞에서 이런 실랑이였다. 늘 수정이에게 지는 건 승규였다.

“너 돌아서서 가는 거 배웅해 주는 거 좋단 말이야.”

아마도 그 말에 졌던 듯했다. 누군가 자신의 등을 바라보는 게 안심이 되었던 것 같다.

가로등에 보이는 여자의 모습이 낯익었다. 가느다란 실루엣으로 보이는 동그란 이마선과 진한 녹색의 저지 스커트. 오늘 아침에 그를 전송했던 유신혜였다. 남자 볼에 가볍게 키스하고 뛰어들어오는 걸 보는 순간, 그대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폭발해 버렸다.

감히 내 집 앞에서 연애놀음을 해?

순간 손에 힘이 들어가서 쥐고 있던 고지서가 완전 우그러졌다. 승규는 일단 엘리베이터 쪽으로 움직였다. 곧 신혜가 와서 옆에 섰다. 그리고 승규를 알아보고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일찍 오셨네요.”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그녀를 보고 있더니만 엘리베이터가 올라오자마자 먼저 탔다.

그가 보았을까? 보았다면 화를 내었을 텐데 별말 없는 거 보니 못 본 거겠지. 제발 그래야 하는데……. 곁눈질로 그를 살피지만 그는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그저 정면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럼에도 뭔가 그 무거운 공기에 목 뒤의 솜털이 설 정도가 되니 점점 더 불안해졌다.

내리길 주저하는 듯한 그녀를 보고 그가 팔을 잡아끌었다. 대문 열자마자 집으로 밀어넣었고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겨우 신을 벗고 거실로 올라섰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서머 울로 된 재킷을 벗어서 내팽개치듯 소파에 던졌다. 그리고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헐겁게 풀었다. 어두운 거실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실 불을 켰을 때 불상인 듯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그, 안경 너머의 그 무서운 눈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어디 갔었어?”

무심한 듯, 하지만 그 날카로운 눈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좇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부엌에 가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시는 척했다. 요즘 들어 계속 늦었기 때문에 오늘도 늦을 거라 생각했다. 아마도 자기가 집에 없었으면 전화를 했을 텐데.

“친구가 근처에 왔다고 해서 잠깐 만나서 차만 마셨어요.”

아무렇지 않은 척, 그가 못 봤을 거라고 자신을 다독이려 했다.

“누구랑?”

“친구라고 말했잖아요.”

정신이 없는 와중에 신혜가 작게 말했다. 그는 허리를 갑자기 안아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그 친구가 남자던데? 친구랑 포옹도 하고, 서양식으로 볼키스도 하고 참 다정한 친구 사이야.”

하얗게 질린 신혜를 보면서 비아냥거렸다.

“그냥 친구예요.”

놀라서 헐떡거리며 신혜가 그 다그침에 답했다.

그는 자신의 불신을 그녀의 옷을 해집는 것으로 답했다. 검사라도 하듯 꼼꼼하게 옷을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입고 있는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브래지어를 푸르고 티셔츠와 함께 던져버렸다. 스커트 속으로 들어간 손은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위로 올라가 속옷과 함께 스커트도 내려버렸다.

그대로 벌거벗은 채 그의 앞에 서 있는데 신혜는 그냥 묵묵하게 있었다. 어떻게 해도 그가 화를 낸다면 그냥 화를 내게 두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냥 지나가게 두는 것, 그거 외에 그녀가 변명한다 해서 변명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풀어주는 방법이란 걸 알지 못했다.

그대로 침대에 던지고 바로 자신의 몸을 눌렀다. 까끌거리는 천이 맨 다리를 제압하고 그의 몸이 육중하게 내리눌러 숨 쉬기가 힘들었다.

“왜 거짓말을 하지? 무엇보다 내가 이십사 시간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했고 그 조건에 당신도 동의한 걸로 아는데.”

“그냥 차 한 잔 마시는 것도 안 되나요?”

“난 내 물건 무지 아끼는 사람이라서 누군가 손타는 건 끔찍할 거 같은데 말이야. 내가 좀 결벽증이 있는 건 알고 있잖아?”

너무 뻔뻔한 말에 신혜는 할 말을 잊었다.

“그 친구는 왜 만난 건데? 보통 누구 만나러 가면 만나러 간다고 얘기하지 않아?”

“초등학교 동창쯤 만나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이유 필요하지. 보통 남자인 친구는 잠재적인 연인 후보 아니던가, 여자들에게? 4년 후의 스페어라도 만들어둘 생각이었어? 다시는 만나지 마. 나랑 같이 사는 동안에는 나한테만 충실하라고! 알아들었어요.”

그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그녀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는 제대로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제 완전히 나신이었다. 그대로 방으로 끌고 들어가 드레스룸의 거울 앞에 세웠다. 그리고 뒤에 자신이 섰다.

그의 길고 마디가 두툼한 남자다운 손이 한쪽 손은 그녀의 가슴을, 다른 손은 그녀의 아랫배를 감싸안았다.

“이 입술, 이 가슴, 그리고 네 여기, 만질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사 년 동안은요.”

순간 무슨 생각인지 분노한 신혜가 그의 말을 비웃었다. 그 말이 사실이었다.

“사 년이든지 어쨌든 당신은 내 거야! 당분간은 내 거라고!”

소리 지르며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그가 발이라도 구를 듯한 기세였다.

신혜가 정면으로 거울 속의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뻗어 나와 가슴을 감싸고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이 몸의 주인이 누구인지 오늘 확실하게 알려주지.”

그 말을 한 그는 더 이상 말을 하는 대신 온몸으로 보여주려 했다. 몸에 낙인이라도 찍듯 그의 손과 입이 거치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그녀가 얼마나 순진했는지 그가 비웃기라도 하듯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등 뒤에서 그가 그녀를 안으면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길고 결고운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넣어 쓰다듬더니만 어느 순간 머리채를 확 잡아당겨서 머리가 뒤로 쏠리면서 허리가 곡선을 이루듯 호를 그리자, 그 등을 쓸면서 그게 만족스러운지 작게 웃었다.

“지금 이 몸에 이럴 권리가 있는 사람이 누구지?”

“다, 당신이요.”

밤새 쇠뇌라도 시키듯 그는 이런 걸 계속 되풀이했다. 눈을 조금이라도 감을라치며 그가 반 강제로 뜨게 만들었다.

“눈 뜨고, 당신 몸속에서 움직이는 게 누구인지 똑똑히 봐. 이 몸의 주인인지 당신 눈으로 확인하라고.”

자꾸 감겨오는 눈을 그는 억지로 잡아두려 했다.

결국 새벽녘에 그도 지쳤는지 놓아주었을 때 신혜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등 뒤에는 아직 그가 그녀의 가슴을 쥔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단잠이라도 자는지 규칙적인 숨 쉬는 소리를 내며 온몸을 그녀의 몸에 붙이고 있었다. 그가 처음 원했던 대로 그녀의 방으로 가려고 했지만 그가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뜨거운 것이 얼굴을 타고 내려가 베개를 적셨다. 밤새 시달린 온몸이 너무나 아팠다. 눈물이 줄줄 나올 것 같은데 그걸 억지로 눈을 깜박거려서 털어내듯 참아내었다. 서럽고 아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밤새 얼마나 허벅지가 혹사당했는지 안쪽의 낯선 고통도, 밤새 벌어진 채 있었던 허벅지 근육도, 어디 안 아픈 데가 없었다.

그런데 그 등 뒤의 남자는 저렇게 잘 잘 수 있다는 게 원망스럽고 미웠다. 일어나서 여길 벗어나고 싶은데 아침에 악다구니 듣는 게 무서운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

그날부터 그의 본격적인 집착이 시작되었다. 날은 점점 쌀쌀해지고 있었고, 그의 의심도 점점 심해졌다. 시시때때로 전화를 해서 정말 집 안에 있는지 확인이라도 해야 했고 밖에 나가지도 못했다. 퇴근도 전에 비해 일러졌다. 그는 집으로 일을 갖고 와서 자신의 서재에 칩거했다. 그가 집에 들어오면 몸에 긴장이 된다. 그가 어떤 걸로 괴롭힐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낮시간마저 제대로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되자 생각지도 못했던 짜증과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다. 넓은 집인데도 서성거려봤자이다. 답답하다. 창문 하나 제대로 열 수 없는 아파트에서 날이면 날마다 서성거리는 것도 싫었다. 계절은 시시각각 바뀌고 있는데 낙엽 쌓인 거리조차 제대로 걸어볼 수가 없다니.

“저 내일 밤에 집에 다녀와도 될까요?”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보았다.

“왜?”

“아버지 기일이라서 제삿상이라도 차리게요.”

그 말에 그가 갑자기 안색이 굳어졌다.

“안 돼.”

“저에겐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라고요.”

“당신은 내 소유물이고 그걸 인정했잖아, 4년을 이렇게 살기로.”

“어떻게 부모 제사를 모른 척할 수 있어요?”

그 말에 그가 갑자기 확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고 바늘로 찔러봤자 푸른 피만 나올 것 같지, 안 그래?”

지옥에서 온 사신처럼 킬킬 웃어대었다.

뒤로 잡아당긴 머리카락이 마구 뽑혀나가고 거죽이 아팠지만 손아귀의 힘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확 놓아버리자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장승처럼 서 있는 남자가 무서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옷 벗어.”

“네?”:

“옷 벗으라고! 내일 이 집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임 당신 끝장이야. 기대해도 좋아.”

다시 한 번 승규가 그녀의 의지를 꺾어버렸다. 그가 이렇게 말한 이상은 반항하거나 그가 말한 대로 따르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 제사를 안 지낼 수는 없다. 그냥 갇혀 있던 것에 대한 불만이었을까. 이 집에서 지내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굳이 집에 가서 제기를 꺼내서 부산하게 준비를 한 걸까. 작년에는 엄마랑 같이했지만 올해는 혼자 해야 했다. 그냥 시장에서 전이나 잡채 등을 사서 간단하게 상을 차리고 술 따르고 절하고 뒷정리 하고 나니 1시쯤 되어 있었다. 핸드폰은 여태 울리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 터였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거실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던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렇다고 아버지 제사를 어떻게 안 지내요?”

아무렇지 않게 목에 감았던 머플러를 풀면서 신혜가 답했다. 입고 있던 트렌치 코트를 벗는 걸 그가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만날 사람이 없어서 지난번에 그 초등학교 동창인지 만난 거고?”

그 말에 신혜가 눈에 띄게 굳었다.

“그래서 지금 옷이라도 벗을까요? 직접 확인해 보시게? 제가 금수만도 못해서 아버지 제사 핑계대고 남자 만나고 다니는 화냥년인 줄 아세요?”

남자는 그런 그녀를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연한 하늘색의 브이넥 니트도 어린애처럼 휙 벗어서 옆에 던진다. 입고 있던 모직으로 된 체크무늬 스커트도 버튼을 풀고 지퍼를 내려버렸다. 완전히 속옷만 입은 채로 그녀는 도전적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브래지어 후크를 풀어서 던지고 팬티도 내려버렸다.

계속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절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 알몸으로 마주서 있었지만 부끄러운 짓을 안 한 이상 당당했다.

“난 약속한 건 끝까지 지켜요. 당신 걱정이나 하시라고요. 악덕 변호사 씨. 이 몸은 사 년 만 당신 거예요. 당신한테 잠시 임대해 준 거뿐이죠. 잊으셨어요?!”

교과서 같은 말투였다. 본인이 말하면서도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 몸에 주체라고 있긴 했던 건지.

“그래서 당신 몸은 빼앗아도 자유는 빼앗을 수 없다고?”

“그래요. 내가 당신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해서 당신이 이 몸의 주인은 아니라고요. 약속했던 사 년 지나고 나면 이 몸을 내가 어떻게 굴리든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라고요~”

그녀도 이제 그에게 맞서고 있었다. 입안의 혀처럼 달콤하게만 굴고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여자가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대들고 있었다.

“이제는 나도 더 못 참아요. 그냥 섬에 팔아 치우든 룸살롱에 팔아 치우든, 그냥 나 팔아버려요. 당신처럼 정신적으로 고문하는 거 나도 이제 더 못 참아요. 그냥 당신 원하는 대로 해버리라고요. 이제 나도 당신이 지긋지긋해요.”

그가 매섭다 못해 이제 그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그녀의 머리를 잡아챘다.

“방금 뭐라고 그랬어? 다시 한 번만 말해 보지.”

여태껏 내었던 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순간 얼음물에 뒤접어썼던 듯 확 정신이 들어버렸다.

“당신 섬에 팔려간 여자들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아니 그전에 룸살롱에 당신처럼 나이든 여자 누가 받아주나? 그냥 지방 티켓 다방이나 전전하다 섬에 팔려가서 죽을 때까지 못 나오고 뜨내기 선원들이나 상대하다 그것도 못하게 되면 바닷물에 수장되겠지. 그런 거 알기나 해?”

순간 소름이 좌악 돋았다.

“다시 한 번 팔아치우라는 둥의 헛소리 하면 진짜 그대로 해주겠어. 진짜 밑바닥 인생이 뭔지 보여줄게.”

그대로 끌고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밀어버렸다.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침대이다. 그러나 여유를 부리는 건 거기까지였다. 그의 두툼한 입술이 덮쳐왔고 집요하게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숨결 하나 나가지 못하고 그에게 잡아먹혔다. 그대로 잡아먹히기라도 하듯 목 뒤부터 철저하게 검사하듯 핥고 그의 손이 지나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귓불을 문 그가 계속 거친 숨을 그녀의 귓가에 불어넣었고 그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리고 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입이 벌어지면서 작은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꼭 감은 눈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몸을 침대 아래에 내려놓고 자기는 침대 위에 걸쳐 앉았다. 그의 분신은 여전히 꼿꼿하게 서서 하늘을 향해 기립해 있었다.

“해.”

“네?”

“하라고.”

그가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기립해 있는 남성으로 이끌었다. 그대로 뜨겁고 단단한 것이 혀에 닿자 그녀가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그렇게 그가 두고 보지 않았다.

보기에도 끔찍한 크고 검붉은 게 직립해 있는 게 무서웠다. 저렇게 큰 게 어떻게 몸속에 들어간 건지 그것조차 신기하다. 배를 뚫고 나올 듯한 기세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 지난번에 시킨 이후 한 번도 강요한 적이 없었다.

그 순간 그가 갑자기 피식 하고 웃었다.

“얼마면 돼?”

“네?”

“얼마면 되냐고? 한 장이면 돼?”

신혜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 독한 눈에서 상처받은 자존심이 피눈물 흘리는 게 보였다. 그래, 그렇게 나를 미워해. 당신의 몸을 돈으로 착취하는 나를 미워하라고. 동정도, 애정도 이런 건 절대 바라지 않는다고.

“서비스 한 번 해드리죠.”

남자가 눈을 똑같이 마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남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혈관을 드러내며 하늘을 향해 기립한 그것은 검붉은 혈관까지 튀어나와 있어서 무서웠다. 슬며시 그 기둥을 잡았다. 단단하고 뜨겁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입을 벌리고 내려서 그 끝에 입술을 대었다. 그대로 그가 자신의 목을 쥐고 내리 눌렀다. 목구멍 깊숙이 그것이 들어오면서 토기가 일었지만 참았다.

턱이 빠질 것 같았고 벌어진 입술로 결국 침이 흘러서 떨어졌다.

승규는 분홍빛 입술로 그의 흉한 물건을 입안에 무는 걸 지켜보았다. 무릎 꿇은 여자는 옷을 벗고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탱탱한 가슴이 움직였다. 그는 그 가슴을 손으로 쥐었다.

“하려면 제대로 해. 그냥 대충 빨지만 말고 혀랑 이빨도 써봐. 내가 치른 돈의 이자라도 부담해야 할 거 아냐?”

남자의 농담 같은 그 말에 신혜는 물고 있던 남자의 성기를 빨면서 눈을 치켜뜨고 남자의 시선을 노려보았다.

입안에서 그의 것이 점점 더 단단해지기 시작했고 그녀의 머리를 안은 그의 손이 답답한지 좀 더 그의 것을 목 깊숙한 곳까지 넣으려 했다. 그러나 잘되지 않자 거칠게 그녀를 뒤로 밀어 쓰러트렸다.

그대로 침대로 나뒹굴자마자 무거운 몸이 덮쳐왔다. 허벅지를 가르며 들어오기 시작한 쐐기가 그녀의 몸을 억지로 벌렸다.

그가 몇 번 허리를 크게 치더니만 자세를 다시 바꿨다. 뒤에서 안듯이 세워놓고 짐승처럼 안고 가슴을 쥐었다. 목덜미에 와닿는 그의 뜨거운 숨에 등에 솜털이 오소소 설 것만 같았다.

침대 위에서 거의 기다시피 해서 피하려 했지만 그가 그렇게 둘 리가 없었다. 등 뒤에서 온몸을 감싸듯이 겹쳐졌고, 그대로 그녀의 허리를 든 그가 자신의 몸에 맞추었다. 곧 그의 몸이 들어오면서 이제는 익숙해진 좁은 기관 안을 가득 채웠다.

“하, 앗, 으..”

신혜가 가냘프게 신음을 흘리기 무섭게 그가 허리를 움직였다. 크게 치고 오는 동작을 할 때마다 가냘픈 몸에서 소리가 커져 갔다.

도발을 한 이상 뒷감당도 책임져야 했다. 도발까진 달콤했지만 그 대가는 쓰디썼다.

“그만해요 제발.”

벌어진 골반 뼈가 너무나 아팠다. 자세를 바꾸어도 계속 다리를 벌려야 하니 허벅지 안쪽 근육이 무리를 해서인지 경련이 일 것만 같았다. 소리를 내서 제지를 하고 싶은데 말이 머릿속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아, 앗. 제, 제발…….”

그런 의미불명의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겨우 그가 잠시 멈추었을 때

“자, 잠시만요.”

라고 겨우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그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왜? 힘들어?”

그 말에 겨우 고개 한 번 끄덕인 게 다였다. 잠시 휴식 시간을 주는 아량을 베풀 듯이 그가 자신의 몸을 빼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었다.

이게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처음에 안았을 때만 해도 좁아서 많이 아파했지. 그런데 이제 당신 몸에 들어가잖아…… 얼마나 뜨겁고 촉촉하게 젖어서 나를 환영하는지 녹아내릴 것 같아.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반기는 듯해. 그뿐만이 아니지. 내가 안을 때마다 당신 표정이 어떤 줄 알아? 붉게 달아올라서 남자를 아는 요부 같단 말이지. 누가 당신이 몇 달 전만 해도 남자를 모르던 처녀라고 믿겠어? 응?”

그러나 신혜가 고집스레 고개를 저으면서 그의 말을 부정하려 했다. 남자는 다시 허리를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목에 팔을 둘러. 자꾸 움직이잖아!”

그가 화를 내고 있었다.

살과 살이 만나서 부딪치는 찰박거리는 소리가 계속 규칙적으로 들리고 눈을 뜨고 있는 건지 감은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계속되는 남자의 거친 움직임, 그게 만들어내는 쾌감과 고통 속에 현실을 잊어버렸다.

분노는 그의 추진력이었다. 이제 분노와 욕망이 뒤섞여 용광로와 다름없었지만. 불그스레하게 된 그의 눈가에서 매서운 눈이 그녀를 탐욕스레 쏘아보고 있었다.

다시 손을 뻗어왔다.

그녀와 함께 있는 이상 그는 수컷이었다. 민승규가 아닌. 그는 집에 있을 때 집요한 시선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았다. 그 시선의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욕망. 그녀의 몸을 훑을 때 드러나는 그 뜨거운 열정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다리 더 벌려.”

환한 불빛 아래 몸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공포로 발그레했던 볼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어서!”

그가 허벅지를 잡자, 마지못해서 살작 다리가 벌어졌다. 이제는 거의 체념이나 다름없었다. 음모에 둘러싸인 여성 그를 미치게 만드는 그녀의 신체기관이 빛에 드러나자 그의 목울대가 꿀꺽였다. 다시 그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그녀의 모든 걸 빼앗아가려는 듯이. 그대로 정신과 마음까지 그대로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여기 있는 자신은 그저 껍데기. 그냥 껍데기인 육신은 남자에게 주어버리자. 그대로 자신을 잊자.

눈을 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의 방이 아니었다. 익숙하면서도 부담스러운 검은색 시트, 승규의 방이었다. 지난밤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더 자.”

옆에서 큰손이 부드럽게 밀었다. 무리해서 일어나려 하자 깊은 곳의 격통에 그대로 웃 하고 신음을 흘려버렸다. 지난밤 아니 새벽까지 어떻게 혹사를 당했는지 허벅지 근육, 허리, 할 것 없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어나는 순간 몸 안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나와 허벅지를 슬쩍 적셨다. 순간 소름이 오싹 돋았다. 언제나 이 순간이 제일 끔찍했다.

사용된다는 것의 의미.

왜 자신이 여기 이렇게 있는지에 대한 이유.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따뜻한 손을 뿌리치고 일부러 일어났다. 우는 얼굴을 절대 보여줄 수 없기에.

“더 있어도 돼.”

남자는 선심이라도 쓰듯 말하면서 등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그냥 무덤덤하게 속으로 치솟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신혜는 일부러 등을 돌려버렸다.

“등 돌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남자가 뭐에 화가 났는지 다시 그대로 눕혀버리고 올라왔다.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그냥 이렇게 겁에 질려 있고 쫓기듯 그가 원하는 대로 살다가 사 년 뒤에는 놓여난다고? 그 사 년이 오긴 오는 걸까? 너무나 아득하기만 한데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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