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11)
  • 3.

    “늦었네.”

    그는 소파에 편안하게 기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묘한 불쾌감이 묻어났다. 여유 있게 나른하게 있는 포즈 때문인지 사냥 후 쉬고 있는 흑표범 같아 보였다. 그에게 묻어나는 맹수의 여유. 그녀는 그 앞의 가련한 벌벌 떠는 초식동물일 뿐이었다.

    “죄송해요. 짐 정리하느냐고…….”

    떨리는 신혜의 목소리에서 긴장을 읽었는지 길쭉한 눈이 슬쩍 그녀 쪽으로 향했다 도로 서류로 돌아갔다.

    “짐, 어디에 둘까요?”

    “부엌 옆 작은 방 준비해 뒀으니까 거기에 갖다 둬요.”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하는 이 남자의 말버릇은 오묘했다. 사실 그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하겠단 생각을 했다. 인간의 희로애락이 결여된 듯한 포커페이스의 그는 웃는 듯하면서도 웃지 않았고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광기와 분노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짐만 두고 씻고 내 침실로 와요.”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보고 있던 서류를 들고 방 중 하나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마 그 방을 서재로 쓰는 모양이었다. 40평대 아파트는 꽤 넓어서 드레싱룸이 딸린 베드룸에 꽤 넓은 서재, 작은 방 두 개가 더 있었다.

    그 말 한마디에 더 아무 말도 못하고 방으로 들어가 싱글베드와 옷장 하나만 있는 휑한 방에 짐을 풀어서 급하게 속옷과 잠옷, 세면도구 등을 꺼내 들었다.

    자동인형처럼 옷을 벗고 샤워기 물을 틀고 뜨거운 물 아래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 샤워젤로 몸을 닦는다. 머릿속은 새하얗고 지금 움직이는 건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자동입력된 동작을 하는 인형일 뿐. 보송보송한 두터운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잠옷을 입었다.

    나가야 하는데 그가 기다리는 걸 뻔히 알면서, 여태 기다려서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도 나가기 싫었다. 언제까지 욕실에 더 있을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저절로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치과에 끌려가는 어린애처럼 침실의 나무 문을 바라보면서 한숨지으려 할 때,

    “샤워가 생각보다 좀 길던데, 내가 씻고 바로 오라고 하지 않았나? 기다리는 거 뻔히 알았을 텐데? 내가 전에도 한 말 기억나나 모르겠는데 구르라고 하면 구르고 일어서라고 하면 일어서는 거야!”

    어느새인가 그가 욕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서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미, 미안해요.”

    오늘 이 사람 앞에서 미안하단 소리를 몇 번이나 더 해야 할까.

    “미안한 거 알면 미안한 짓을 하지 말아야지.”

    남자가 욕실 옆 벽에 그녀를 몰아넣었다. 하얀 원피스 잠옷을 입고 발발 떠는 여자와 눈을 마주했다.

    “잠옷이 잘 어울리네요. 벗기는 재미도 좀 있겠고.”

    며칠 동안 시달린 몸 깊은 곳이 아직도 움직일 때마다 신경 쓰일 정도인데 오늘 또 시달리고 나면 정말 내일 출근할 수 있는 걸까.

    그녀가 무슨 생각도 하기 전에 그가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큰 손이 꽤 센 힘으로 그녀의 팔목을 잡아챘고 그대로 그의 방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삭막한 방에 침대 하나 덩그러니 있는 이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로 끌고 가더니만 던져버렸다. 푹신한 이불에 몸이 닿자마자, 그가 온몸을 던져 눌렀다. 크고 무거운 몸에 하체가 완전히 눌려버렸다. 배까지 눌려서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어두운 붉은 조명 아래 눈과 눈이 마주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를 남자의 냉혈동물 같은 눈이 자신을 응시했다.

    “아, 그리고 원래 내가 혼자 자던 버릇이 있어서 낯선 사람하고 자니까 잠이 잘 안 오더라고. 그러니까 끝나는 대로 그 방으로 돌아가면 돼. 당신도 좋잖아, 혼자 자서? 징그럽고 무서운 나랑 자는 것보단.”

    물건처럼 사용한 뒤에는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그나마 잠자리라도 혼자서 편안하게 잘 수 있겠지. 그러나 그가 그대로 입고 있는 잠옷을 훌러덩 벗기는 순간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그대로 눈을 감아버린 신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자 눈을 떠보았다. 그가 그녀의 가슴을 감탄이라도 하듯 홀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속옷 위로 튀어나온 푹신한 살을 그가 손을 대어서 만지고 있었다. 침대 옆 협탁 위 스탠드에 자신의 몸이 드러나는 게 너무나 창피하다. 그렇게 보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홀린 듯 햇빛에 드러나본 적도 없는 그 살을 손가락으로 쓸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평온해 보이는 눈 속 깊은 데 드러난 것은 욕정. 차가운 욕정이었다. 이 순간에조차 그는 이성적이구나 싶을 정도였다.

    살에 그의 손이 닿자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는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그 살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리고 긴장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회사 그만둔다고 말했어요?”

    지금 이 상황에선 어울리지도 않고 뜻밖의 질문이었다. 손이 바쁘게 움직여서 어느새 등 뒤로 가서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고 있었다.

    “네. 근데 사람 구해야 하니 좀 기다려야 할 거 같아요.”

    그 말에 그가 인상을 쓰는 게 보였다. 화를 낼까 두려워서 신혜가 살며시 눈치를 보았다. 브래지어를 치우고 가슴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바로. 내일 가자마자 가급적 빨리 그만둬야 할 거 같다고 말해요. 나는 기다리는 거에 익숙하지가 못하거든.”

    다시 신혜가 눈을 감았고, 그가 그녀를 현실로 불러오기라도 하듯, 체중을 실었다. 묵직한 몸이 하체를 덮듯이 눌러왔다.

    도톰한 귓불을 날카로운 송곳니가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귓가에는 그의 뜨거운 숨이 들어와 간질인다. 귓가에서 익숙하지 못한 낯선 것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신혜가 거부하듯 어깨를 움찔하자, 허리를 쥐고 있는 손 중 하나가 가슴으로 올라와 가슴을 쥐었다. 가슴 끝을 괴롭히듯 쓸었다. 긴장해서 꼿꼿하게 선 작은 구슬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잡아당겼다. 귓가에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며칠 동안 그와의 잠자리에서 배운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그는 약간의 거부에도 더 큰 행위로 괴롭혔다. 손으로 가슴 한 번 밀면, 목을 물어뜯어버리는 식으로 대응했다. 가급적 그의 비위를 맞춰주고 절대 반항을 하거나 해선 안 되었다. 둘째, 그는 그녀의 가슴에 집착했다. 집요할 정도의 집착으로 이미 멍이 빼곡히 가슴에 나 있었는데도 오늘 다시 그녀의 가슴에 손을 대고 있었다. 셋째, 그는 끈질겼고 절대 같은 자세로 움직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지 계속해서 몸의 위치를 바꾸고 뭐가 뭔지 알 수 없지만 요구사항이 많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허벅지 안쪽으로 그의 손이 열심히 비집고 들어왔다. 부드러운 음모를 해치고 그가 원하던 것으로 바로 손을 집어넣었다. 압박감에 고운 이마를 찡그려도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 자신을 묻고 싶은 욕망밖에 없었으니까. 긴 손가락이 좁은 통로를 움직이면서 넓히려 했다. 곧 압박감이 더 커졌고 그는 더 빠르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성급했다. 아직 준비도 되지 않은 몸을 무리하게 벌리며 들어오려 했다. 크고 단단한 것이 준비도 되지 않은 여린 살을 비집고 들어오려 했고 신혜가 작은 신음을 흘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 아파야 하는 걸까. 고통과 모욕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며칠 전에 상처난 입술이 깨지면서 피가 다시 터져나왔다.

    신혜의 여성에 진입하던 승규가 앙 다문 입술에서 피가 나는 걸 보고 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왜 그 피가 나는지 안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혀를 할짝거리더니만 다시 입술을 깊숙이 벌리고 내장이 빨려나갈 기세로 빨아버렸다. 숨을 쉴 수가 없어 등을 탕탕 칠 때쯤에 겨우 호흡곤란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그만의 경고였던 걸까.

    그리고 그의 몸이 다시 들어올 준비를 시작했다. 손가락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단단하고 뜨겁고 맥동치는 남성이 다시 허벅지를 벌리며 연한 살을 해집는다.

    그때 남자가 갑자기 자신의 몸을 거두었다. 신혜가 멍하게 올려다보았자.

    “일어나서 엎드려봐요.”

    “네?”

    “일어나서 엎드리라고요.”

    남자의 반복되는 말에 신혜가 어쩔 줄 몰라할 때 남자의 손이 거칠게 그녀를 일으키더니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세를 취하게 했다. 그리고 등 뒤에서 다시 자신의 몸을 덮쳐오면서 남성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자세가 변해서인지 닿는 곳이 달라졌다.

    다시 열기가 몸을 감싸왔다. 남자가 공격해 들어올 때마다 앞으로 자꾸 밀려갔고 힘을 어떻게든 팔에 주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팔 힘이 빠져 자꾸 주저앉자 그가 통통한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제대로 좀 서 있어요.”

    놀란 신혜가 몸을 조이자 그가 귓가에 작게 신음했다. 낮은 신음, 뜨거운 입김이 귓속에 직접 와닿으면서 소름이 살짝 돋았다. 그의 한 손이 가슴을 쥐며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이 생각할 건 나를 어떻게 만족시켜줄 것인가지, 당신의 희로애락은 생각하지 말고 프로 정신을 갖고 움직여요. 자신이 여기 왜 와 있고 어떻게 하면 나에게 돈을 갚을지 그것만 생각하라고.”

    어떻게 하면 좀 더 그녀를 괴롭게 만들지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신혜는 힘이 빠지려고 하는 몸을 억지로 그가 원하는 대로 버티려고 노력했다.

    그는 부서져라 몸을 부딪쳐오고 계속해서 밀려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쥐고 있었다.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거센 공격에 그대로 주저앉기 직전에 그가 허리를 놓았다. 아무래도 신혜가 힘이 빠지니까 불편한 모양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옆으로 눕자마자 그가 그대로 바로 눕히고 다시 허벅지를 가르고 들이밀었다. 남자는 이제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그녀의 허리를 쥔 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남자의 이마의 땀방울이 신혜의 얼굴로 떨어졌다. 살과 살이 만나 부딪치는 소리와 가쁜 숨소리, 자신의 작은 신음 소리가 어두운 방을 채우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크게 허리를 움직이며 큰 동작으로 와서 부딪쳤다. 곧 몸속을 채우고 있던 단단한 것이 줄어들면서 뜨거운 뭔가가 몸속으로 퍼져나갔다.

    그도 힘들었는지 상체를 유지하던 팔에 힘이 빠졌는지 그대로 그녀의 몸 위에 길게 주욱 늘어졌다. 여운이라도 즐기듯, 그녀의 목에 자신의 얼굴을 묻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남자는 그대로 그녀의 몸 위에서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운이라도 즐기듯 그녀의 벗은 어깨에 턱을 문지르고 있었다. 포식한 후의 야수처럼 그는 느긋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신혜는 달랐다. 완전히 골수까지 빨린 듯 탈진해 있었고 몸이 강제로 쓰였다는 비참함에 멍해져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냥 잠시 빌려준다 생각하려 했다.

    멍하니 등을 돌리고 누워 있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몇 시쯤 되었을까. 등 뒤에서 규칙적인 소리가 나는 걸 보면 잠이 든 모양인데 일어나도 되겠지.

    신혜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가 어깨를 틀어쥐었다.

    “누가 가라고 했어?”

    “주무시는 줄 알았어요.”

    “나 아직 안 자는데? 내가 나가라고 말하면 그때 나가. 내가 아무 말 없으면 그냥 있으라고.”

    “내일 회사도 가야 하고…… 출근하셔야 되잖아요.”

    지쳐서인지 계속 헐떡거려서인지 신혜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이만 주무시고 싶으시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이 지금 나랑 연애해? 내가 당신 존중해 줘야 할 이유가 있던가. 당신 몸에 대한 결정은 내가 해. 내일 회사 나가는 건 당신 사정이지, 내 사정이 아니거든요. 당신은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다리만 벌리고 협조만 해주면 돼.”

    그가 그 말을 하면서 다시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타서 허벅지를 벌렸다. 단단한 근육이 그녀의 연약한 살을 누르고 다시 힘을 찾은 그의 물건이 다시 방금 전까지 괴롭히던 곳을 밀고 들어오려고 했다. 그렇게 들어와서 그녀의 깊은 곳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힘도 들어가지 않는 허벅지 사이를 밀고 들어오는 거에 숨이 턱 막혀 왔다. 너덜너덜해진 몸은 그냥 흔드는 대로 흔들릴 뿐이었다.

    “내가 전에 뭐라고 말했지? 반항하면 당신만 더 다친다고 말했잖아. 이 계약에 동의한 건 누구지? 눈 뜨고 똑바로 봐.”

    신혜가 눈을 뜨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 말을 하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눈은 비정했고 욕망에 들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이 맺히고, 낯선 감정이 안개처럼 올라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걸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말했다. 절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방관자가 되진 않을 거야라고. 그대로 신혜는 눈을 감으려 하자, 남자가 다시 말했다.

    “눈 떠.”

    “못 뜨겠어요! 못 뜨겠단 말이에요.”

    그러자 남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왜? 왜 못 뜨는데? 못 뜨는 게 아니라 안 뜨는 거겠지. 보고 싶지 않아서, 당신 몸을 차지하고 있는 내가 증오스러워서 안 뜨는 거겠지! 떠! 뜨란 말이야!”

    남자가 그녀의 목을 잡고 흔들자 신혜가 결국 눈을 떴다.

    그의 시선에 주박에 걸린 사람처럼 사로잡혀 눈을 깜박거리면서 시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감기는 눈, 그의 이글거리는 눈빛, 흔들리는 몸…….

    이제 아예 허리를 붙잡고 남자가 거세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남자의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몸속에 넘쳐흐르는 낯선 것들이 머리를 침범했고 입이 제멋대로 벌어지면서 신음을 뱉어내었다.

    드디어 그가 마지막으로 몸을 크게 움직이고 신음을 흘렸다.

    끝난 것이었다. 그냥 비몽사몽간에 시달리던 몸이 드디어 놓여났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의 체중이 몸에 좀 실리나 싶었다. 가슴을 압박해서 숨조차 쉬기 힘들어져서 헉헉거리는 걸 보더니 몸을 비켜주었다. 완전히 놓여났지만 이제 끝이라는 안도감과 더불어 탈진해서 손끝 하나 움직이기 힘들어서 숨만 몰아쉬고 있을 뿐이었다. 팔다리가 몸에 붙어 있는지조차 힘들 정도로 지쳐 있었다.

    등을 돌아눕는 순간 거칠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이제 나 잘 거니까 나가.”

    덜덜 떨리는 다리로 겨우 일어났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주우러 구부리자 모로 누워 있던 그의 시야에 동그란 하얀 엉덩이가 그대로 들어왔다. 그냥 다시 침대로 끌고 올까라고 생각할 때 허벅지 사이로 흐르는 뭔가 눈에 보였다. 그가 그녀의 몸 안에 쏟아넣은 그것이 슬쩍 흘러내리고 있었다. 붉은 빛을 띤 그것이. 여자는 걷기 힘든지 절뚝거리면서 나가면서 고개를 돌려 인사까지 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 말을 한 여자는 문을 조용히 닫고 나가버렸다. 남자는 일부러 등을 돌려 여자가 나가는 걸 보지 않았다.

    *

    “가는 길이니 내려주지.”

    신혜는 생각보다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허둥지둥 나갈 차비를 하는 중이었다. 그가 느긋하게 나오다 그걸 보았던 모양이다. 이곳에서 회사까지 얼마나 걸릴지 몰라서 마음이 더 급했다. 아침에 억지로 일어나긴 했는데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지하철역이 바로 앞에 있긴 했지만 한 번 갈아타야 했고 다행히 버스가 회사 앞까지 바로 가는 게 있었다. 버스 노선과 정류장은 미리 봐뒀지만 버스 시간까지 잘 맞출 수 있을지는 조금 걱정되었다.

    “괜찮아요. 요 앞에서 그냥 버스 탈게요. 회사까지 가는 버스 봤어요.”

    그와 출근 같이하는 걸 누군가 보고 뒷말이 나올까 두려웠다. 그는 그녀 인생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 않았는가. 누군가 보고 그가 묻게 되면…….

    “당신 회사 근처로 지나갈 뿐이니까 일부러 데려다 준다고 착각 안 해도 돼.”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태연하게 하는 말에 그의 심기를 상하게 했을까 싶어 눈치를 보았다. 그는 거절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듯이 무작정 그녀를 끌고 나가더니 지하 주차장에 있는 은색 아우디에 태웠다.

    “역삼역 근처에 내려주면 되지?”

    “네.”

    그는 그녀 회사가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자 팔목에 찬 검정색 가죽 스트랩의 시계가 보였다. 길고 모양 좋은 손, 손톱 끝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길에서 지나쳐 가더라도 잘생기고 호감이 가는 남자일 듯싶은 이 사람이 왜 자기에게 이러는지 이해가 안 갔다.

    멍하니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앉아 있을 때 차가 멈춰 섰다.

    “안 내려? 내가 문 열어줘야 하나?”

    “아…….”

    회사 앞인 걸 알고 신혜가 가방을 들고 내렸다. 고맙다는 말하는 것도 잊을 정도로 후다닥 내려버렸다. 그는 문이 닫히자마자 바로 차를 출발시켰고 길에 남겨진 그녀는 멍하니 길에 남겨져서 차가 사라지는 걸 보았다.

    지난밤에 몸을 과격하게 움직인데서 오는 근육통과 잠을 설쳐서인지 머릿속도 뿌옇다. 사무실까지 걸어오는 것 자체도 힘들 정도였다. 빈속에 안 좋은 걸 알면서도 커피라도 마시면서 카페인으로 머리를 돌리려고 움직이고 있었다. 모니터를 보면서 머릿속은 빙빙 도는데 오늘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던 차였다. 파티션 너머 누군가 서는 게 느껴졌다.

    “신혜 씨? 바빠?”

    신혜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회사에 바르고 다니기엔 좀 진하다 싶은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신혜 씨, 아침에 그 사람 누구야? 누가 자기 회사 앞까지 태워다 주던데?”

    분명 같은 직급인지라 유 대리라고 불러야 함에도 천 대리는 꼭 자기 아랫사람인 양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회사에 누군가의 낙하산으로 들어왔다는 천 대리와 신혜는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냥 아는 분인데 출근길에 지나다 보시고 지나가는 길이라고 태워다 주신 거예요.”

    말은 바른 말이라고 승규 사무실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 자기 남자친구 아니고? 어제 집에 안 들어갔나 봐? 남자가 태워다주게.”

    그건 당신 얘기겠죠. 천 대리 남자관계는 소문이 좀 있었다. 차마 비아냥거려주지도 못하고 그냥 억지로 웃었다.

    “아니에요. 어제 집에 안 들어갔으면 어제 입었던 옷 입고 왔겠죠. 남자친구 아니고 그냥 아시는 분인데 출근하다 마주쳤을 뿐이에요.”

    “그래? 나이가 몇 살인데? 결혼은 했어? 직업은? 차 좋은 거 끌던데 집안이 좀 사나 봐?”

    강남 한복판에 수입차야 깔려 있다지만 그걸 이 여자가 잘도 본 모양이었다. 사실 아는 거라곤 이름 민승규, 나이 37세, 미혼, 직업은 유명 로펌의 변호사. 주상복합 아파트 고층에 살고, 돈은 무지 많은 듯 보인다는 게 다였다. 그런데 회사 사람들에게 뭐라고 그에 대해 얘기한단 말인가?

    “그냥 집안끼리 아시는 분이라서 저도 잘 몰라요. 나이는 삼십대 후반이신 듯하고 아직 미혼이세요.”

    왜 갑자기 말을 걸면서 아는 척을 하는지 빤히 보이지만 그냥 이런 정도 얘기만 하고 넘어가려 했다.

    “그래? 나 소개해 주면 안 돼?”

    잠시 신혜가 멈칫했다. 어떻게 좋은 차만 보고 남자 소개받을 맘이 나요? 물어보고 싶었다. 앙큼하게 칠한 붉은 입술이 살짝 위로 호를 그렸다. 망설인다고 생각했는지 샐쭉거렸다.

    “그건 싫은 모양이네? 혹시 갖기엔 그렇고 남 주기엔 아까운 사람 아니야?”

    비아냥거리듯 나오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발끈해 버렸다.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제가 잘 모르시는 분이시고 엄마 아시는 분 아드님이실 뿐이라서 어떻게 뭐라 말하기 좀 곤란해서 그래요. 엄마한테 만나는 분 있냐고 물어는 볼게요.”

    그 말을 한 신혜는 파티션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무시하고 모니터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속으로는 한숨이 나오는데 여자는 마치 뭔가 살피는 듯이 신혜를 보다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날에도 그는 역시 또 회사 앞에 내려주고 가버렸다. 오늘은 어제의 아우디 대신 벤츠였다. 그는 차를 좋아하는지 국산 대형차 외에도 외제차 2대가 더 있었다. 그 세 대를 갖고서 매번 기분에 맞춰 바꿔서 타고 다니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또 천 대리가 와서 말을 건네었다.

    “신혜 씨 오늘은 누가 데려다줬어? 또 엄마 아시는 분이야?”

    속으로는 짜증이 나는데 성격상 그러지도 못하고 그냥 대충 답했다.

    “네.”

    “흐음…… 신혜 씨 보기보다 능력도 좋아. 매일 다른 남자가 아침마다 모셔다주고.”

    그 말에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면 더욱 이상해질 것 같고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곧 회사에 유신혜가 남자 셋 데리고 논다는 소문이 나는 데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거기다 곧 회사 퇴사와 관련하여서, 아침마다 데려다 주는 남자가 약혼자라는 소문도 났다. 은근하게 캐묻는 질문에 대답할 게 별로 없었다.

    결혼해? 아뇨. 그럼 아침의 그 남자는 누구야? 아시는 분이랑 카풀하는 거예요. 남자친구 아니고? 아니에요. 이런 식의 대화를 계속하는데도 소문은 마른 장작의 불씨처럼 퍼져나갔다. 원래 내성적이어서 팀에서 눈에 확 띄는 사람도 아니었고 친한 사람도 몇 없었는데 이제 다들 지나가기만 해도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퇴사 문제로 총무부에 불려갔다 돌아올 때 신혜가 지나가자 여자 둘이 속닥거리는 게 들렸다.

    “그 왜 소문의…….”

    “아, 아침마다 남자가 데려다 준다던?”

    “뭐, 소문에 따르면 룸살롱에 나간다고 하던데? 그래서 아침마다 술 냄새에 쩔어서 장난 아니래잖아.”

    “웃겨. 뻔뻔하게 회사 나오고. 여직원 망신 혼자 다 시켜.”

    “안 그래도 곧 그만둔대.”

    “그쪽이 더 벌이가 좋은가 보지.”

    둘이 속닥속닥 한다고 하는데 신혜 귀에 다 들리게 말하는 거 보면 일부러 들으라는 듯 말하는 것이었다. 여직원들뿐만 아니라 전에는 말도 잘 안 걸던 남자들이 성희롱 비슷한 것도 하고 해서 빨리 회사 관두는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그냥 귀 막고 눈 감고 하던 일을 정리하는 데만 신경을 쓰려고 했다. 정신없이 바쁘고 점심도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 거르는 날이 허다했다. 이 회사에서 유신혜 혼자 일하는 건지 정리할 게 이렇게 많은지도 몰랐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사람들이랑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일도 거절 못해서 온갖 잡일을 다 해왔었다. 그러다 관두려니 업무 인수인계 할 게 이렇게 많을 줄이야. 심지어 야근도 못하니까 집에 일을 갖고 와서 하는데도 회사에선 칼퇴근 한다고 보는 눈들이 좋지 않았다.

    집에 와도 쉬는 게 아니라 그가 오기 전까지는 일을 하고, 휴일에도 언제나 스탠바이 상태로 지내다 보면 피로가 누적된다. 그래도 곧 회사를 관두고 그의 집에만 있게 된다면 그나마 좀 덜 피곤하려나. 집도 정리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래도 엄마가 당분간 돌아오실 것 같지는 않으니까 계약기간이 지나면 원룸으로 이사가서 짐 정도만 보관하게 되지 않을까.

    가끔 만나던 친구들도 보기 어려워지고 점점 갈수록 고립되고 있었다. 전에도 회사 집 오가는 건 똑같은데 전의 생활이 얼마나 평온했는지 그리워질 정도였다.

    그는 원래 바쁜지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오는 날이 많지도 않았다. 또 그렇게 들어오면 반드시 그 방으로 불려갔다. 처음에는 언제 들어온다고 전화하는 것도 아니니 기다렸다 자야 하나 아니면 먼저 자야 하나 고민하다 새벽 한 시가 넘었길래 먼저 자리에 누웠다.

    문득 환한 형광등이 눈을 찌르고 누군가 거칠게 흔든다. 몽롱하게 잠의 왕국에서 강제로 불려와서 눈을 뜨자 환한 불빛에 눈이 시려왔다. 그가 언제 왔는지 머리맡에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막 들어왔는지 재킷을 입고 있었다. 술 냄새가 그녀에게까지 나는 걸 보면 한잔 한 눈치였다.

    “일어나!”

    그가 거칠게 흔들자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제 오셨어요?”

    요 며칠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정말 순식간에 잠이 들어 꽤 깊이 잔 것 같았다. 그가 들어와 방 불을 환하게 켤 때까지 전혀 몰랐으니까.

    “철저하게 나를 중심으로 살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르나 보군! 내가 올 때까지 자지 않고 기다리는 건 물론이고, 내가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나고 내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내라는 거야. 당신 그렇게 둔한 여자야? 이런 거까지 알려줄 정도로? 그냥 같이 살고 필요할 때 다리나 벌려주면 다인 줄 알아? 돈 버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술집에 나가는 여자도 당신보다는 눈치 많이 보고 빠릿빠릿하다고!”

    순간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잠이 확 달아났다. 단순하게 이 사람이 늦게 오는구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는 지금 자기를 기다렸다 자란 말을 하고 있었다. 정부로 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게 아닐까?

    “내가 몇 시에 들어오든지 당신은 나를 맞아야 해.”

    “내일 출근해야 되…….”

    그 말에

    “뭔가 착각하는 게 있는 듯한데 당신은 내 즐거움과 편의를 위한 존재야. 그러니까 철저하게 나한테 맞추라고. 정부라고 하면 편하게 살 줄 알지? 그냥 남자가 오면 다리나 벌려주면 되는 줄 알아? 정부도 아파트 얻고 돈 얻고 가방 얻어내려면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노력이라도 해. 내 즐거움을 어떻게 만들어줄지. 혹시 알아, 내가 마음이 바뀌어서 일찍 놓아줄지. 정 소질 없으면 노력이라도 하라고. 안는 재미도 없으면 시간만 아까워진다고.”

    남자의 독설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건 당신 사정이지. 내가 왜 당신 빚 안 갚게 하고 여기에 두는지 잊었어? 정부가 하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그의 딱딱한 말에 여자가 시선을 돌렸다.

    “내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 당신 삶의 중심은 나지 당신이 아니야. 내 편의에 맞춰서 철저하게 움직이라고. 10분 뒤에 내 방으로 와.”

    아마도 자기 샤워 끝내고 나오기 전에 방에 와 있으라는 의미인 듯했다.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핸드폰 시계를 보니 3시 반. 한시쯤 자면서 기다릴 만큼 기다린 거라고 필요하면 깨울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자기에게 바라는 건 그보다 더한 것이었다. 한숨을 쉬며 그가 욕실에서 나오기 전에 그의 방에 가 있기 위해 문을 나섰다.

    이제는 익숙해진 큰 침대에 멀뚱하니 무릎을 안고 앉아 욕실을 바라보았다. 아직 샤워가 안 끝났는지 물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동안 일과를 생각해 보면 단순했다. 집에 오면 씻고 그가 벗기기 편하게 원피스 잠옷을 입고, 그가 와서 소집해제를 할 때까지 스탠바이 상태로 있었다. 집에 와서 도우미가 해놓은 반찬으로 간단하게 밥 차려 먹고 그가 오길 기다린다. 그는 주말에도 출근하는 모양이었고 금요일 밤에는 약속을 많이 잡는지 술 냄새 풍기면서 들어올 때가 많았다. 언제 들어오는지 알려주지 않았고 그냥 소파나 자기 방에 누워 3분대기조처럼 그를 기다렸다.

    이런 게 정부가 사는 건가. 아버지도 그 많았던 여자들을 다 이렇게 끼고 산 걸까. 돌아가시기 전까지 허구한 날 여자문제로 사고를 터트리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여자들. 그냥 애완견처럼 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무릎을 안고 멀뚱멀뚱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면서 전라로 걸어나왔다. 아침마다 지하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을 해서 그런지 군살 하나 붙지 않았다. 키도 크고 늘씬하고, 팔다리도 길쭉길쭉하다. 저렇게 잘생기고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결혼 대신 정부를 원한다는 게 이상했다.

    한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 출신, 전직 판사, 유명 로펌. 일 년에 십억은 우습게 벌 정도로 잘 나갈 텐데. 그런 사람이 왜 자신 같은 평범한 여자를 정부로 앉힌 걸까.

    애프터쉐이브 로션을 바른 그가 피곤한 얼굴로 다가와 그녀 옆에 앉았다. 매트리스가 살짝 흔들리면서 자연스레 서로의 몸이 닿았다. 그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잠옷의 단추를 풀고 그대로 벗기다 말고 갑자기 한숨을 크게 쉬었다. 슬쩍 눈치를 보니 진한 눈썹이나 길쭉하고 서늘한 눈매에 짜증이 가득했다. 이마까지 찡그린 거 보면 뭔가 기분이 상했다는 건데…….

    “지난번에 용돈으로 쓰라고 체크카드 준 거 기억나?”

    얼마 전에 그가 용돈으로 쓰라고 체크카드를 주는 걸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네.”

    “그 카드 왜 줬다고 생각해?”

    속옷만 입은 채로 그가 그 얘길 꺼내니 신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당신 용돈 하라고 준 거 아니야. 일단 그 카드로 속옷부터 좀 사 입어. 앞으로 내 벗기는 즐거움을 위해서라도. 당신의 가장 큰 의무는 나를 즐겁게 하는 거야. 안 그래? 그 맥 빠지게 하는 하얀 속옷부터 어떻게 하라고. 요즘 고등학생도 그런 건 안 입겠네. 혹시 그럴 목적으로 입은 거면 성공적인 거 같네. 가봐. 다음에도 그런 속옷 입고 있으면 당신 속옷 가위로 잘라서 다 갖다버릴 거야!”

    그가 확 김빠진 듯한 표정으로 턱짓을 했다. 순간 소심해진 신혜가 옷을 다시 입고 주무시란 인사를 하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바로 점심시간에 속옷 브랜드 같은 걸 검색 좀 해보고 퇴근 후에 백화점에 가서 속옷 코너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동안 속옷은 마트에서 대충 사 입어서 사이즈도 제대로 몰랐다. 백화점에 와본 것도 너무 오랜만이어서 사실 좀 당황스러웠다. 일단 속옷 코너를 둘러보긴 하는데 무얼 어떻게 사야 할지 몰랐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얼굴이 확확 달아오를 것만 같았다.

    너무 야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취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만한 검정색 레이스로 된 걸 골랐다. 스트랩은 검정색의 평범한 건데 컵 부분은 레이스로 되어서 꽤 화려했다.

    그걸 들고 고민하고 있을 때 점원이 말을 건네었다.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75B 정도 되는 거 같아요.”

    마트에 많은 75A는 확실히 작아서 75B로 사고 있었다. 몸에 잘 맞지는 않은데 별 관심이 없었다.

    “잠시만요, 제가 재드릴게요.”

    그러더니 신혜가 말릴 틈도 없이 줄자를 꺼내서 신혜의 가슴을 재기 시작했다.

    “75가 아니라 70이시네요. 75면 좀 헐렁하지 않으셨어요?”

    브래지어가 꽉 맞는 건 아닌데 그냥 대충 그게 무난하고 사기도 편해서 그걸 입었을 뿐이었다.

    “어머, 손님 글래머시네요. C컵 입으셔야겠네요. 70C는 잘 없는데…….”

    순간 열이 확 올라서 붉어지자 나이가 좀 있는 듯한 점원이 웃었다.

    “남자친구 생기셨나 봐요?”

    그 말에 신혜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다 안다는 표정을 지었다. 뭘 설명해 주거나 할 수도 없고 그냥 가만 있자 점원이 신혜가 고른 거 외에도 다른 세트까지 보여주었다.

    “이건 푸쉬업이어서 가슴을 모아주거든요. 그래서 가슴에 골도 생기고 해서 발렌타인데이 즈음에 저희 히트상품이었어요.”

    그렇구나. 이런 거 입고 이벤트라도 하나 보다, 평범한 연인들은.

    “그것도 주세요.”

    그가 준 체크카드로 가격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계산을 했다. 속옷 두 세트에 얼마 하는지도 사실 몰랐다. 사인하려고 영수증을 보고 기함한 게 지난 몇 년 동안 유신혜가 산 옷값보다 더 큰 액수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속옷 사입는구나. 다시 한숨이 나왔다.

    “또 들르세요.”

    라고 말하는 점원에게 억지로 피로한 웃음을 보여주고 더 둘러볼 생각도 나지 않아서 그대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버렸다. 화장품도 좀 사고 옷도 좀 살까 했는데 갑작스레 피곤해져버렸다. 그가 체크카드에 넣어준 돈은 훨씬 많은데 쓸 엄두가 잘 나지 않았다. 어떤 옷을 사야 할지, 어떻게 화장을 해야 할지도 전혀 모르니까. 일단 패션지라도 읽으면서 공부해야 하나.

    초등학교 때부터 언제나 학적부에 적혀 있던 성실하고 인내력이 있습니다, 라는 문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게 우습지 않은가. 요만큼도 비뚤어질 줄 모르고 정면으로만 가는 자기가 왜 이렇게 바보 같은 걸까. 그 남자에게 애교라도 부리던가 해야 하는데 도대체 애교는 어떻게 부려야 하는지, 옆에만 와도 무서운데 말은 어떻게 건네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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