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네버엔딩 (3)
총성이 울리자 반사적으로 눈이 감겼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있자니 지난번에 그랬듯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한 시간이 조금 길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 몹시 당황스러운 광경을 목도했다.
들고 있던 총을 떨어트린 채 피가 흐르는 배를 붙잡고 비틀대며 서 있는 제임스 로웰의 모습이었다.
나는 조금 전의 총소리가 기억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음을 그제야 떠올리고 번뜩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구가 제임스 로웰을 향해 겨눠져 있는 것이 보였다.
총을 쥐고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밀리엄이었다.
“이 상황을 처음 겪는 게 아니라고 했죠.”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왼팔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제임스 로웰을 서슬퍼렇게 노려보고 있던 밀리엄이 내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저 작자가 저렇게 나올 줄 알았으면서 내게 숨긴 겁니까? 그렇다면 이번엔 확실히 화가 날 것 같은데요.”
“미안해요.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대충 알겠으니까, 다시는 그런 생각 않겠다고 약속해요.”
어서.
살벌하게 재촉한 밀리엄은 기어이 내 입에서 ‘약속하겠다’는 말을 들은 뒤에야 표정을 풀고 쓰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 영원한 마음도 약속도 없다는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의 집요함이었다.
나는 죄책감에 콕콕 쑤시는 마음을 어색한 웃음으로 애써 무마했다.
밀리엄이 한숨과 함께 다시 제임스 로웰 쪽으로 눈을 돌렸고, 나 또한 덩달아 고개를 움직였다.
제임스 로웰은 여전히 서 있었다.
간간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긴 하지만 결코 쓰러지지는 않는 채로, 로봇처럼 삐걱대며 목을 움직인 그는 밀리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믿을 수가… 없군요.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 세계보다 연인을 우선시할 줄이야…….”
“그렇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런 식으로 해석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만.”
“……하긴, 당신은 이미 진실 대신 가족의 복수를 택한 전적이 있었지요.”
“그건 당신이 지껄여도 좋을 말이 아닌데.”
밀리엄은 당장이라도 또 쏠 수 있다는 듯 제임스 로웰에게 겨눈 총구를 거두지 않고서 살벌하게 뇌까렸다.
“하하……. 그런 것치곤 이제 제법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네요.”
“나도 변한 거겠죠. 말마따나 영원한 게 없는 세상인데 그깟 상처라고 뭐 영원할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정작 그녀의 마음은 변치 않으리라고 보겠다는 겁니까……?”
“믿기로 한 겁니다, 당신과 달리.”
밀리엄이 왼쪽 손을 움직여 내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총구 끝의 남자가 실소를 터뜨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나는 믿기로 했습니다. 이 사람도, 이 사람의 선택도. 이 사람이 긍정해준 내 신념까지 전부.”
“그거 참 대단한 사랑이군요.”
“안일한 낭만주의자라 비웃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요. 그런다고 당신에게 두 번이나 놀아나줄 생각은 없으니까.”
“하…….”
“그날 여기서 당신이 내게 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그 비참한 삶은 여기서 끝낼 겁니다.”
밀리엄이 오래도록 그를 옥죄고 있던 사슬을 끊어내듯 그렇게 선언한 순간, 허탈하게 실소만을 반복하던 제임스 로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나는 그 표정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박탈감. 상실감. 혹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고독.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어가다 덜컥 멈춰버린 제임스 로웰이 고통스러운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그 처량하면서도 섬뜩한 광경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밀리엄은 외려 호수처럼 잔잔한 시선으로 제임스 로웰을 응시했다.
한참 피를 토하던 제임스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입가를 닦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밀리엄 켄트우드.”
질문은 곧장 이어졌다. 이제 진짜 한계라고 말하듯이.
“……이 마지막은, 내게 충분합니까?”
‘당신에게 그런 마지막은 과분하니까.’
나는 피아벨 대수도원에서 제임스를 구한 직후 밀리엄이 서늘하게 내뱉었던 말을 떠올리고, 밀리엄을 돌아보았다.
그는 잠시간 고요한 시선으로 제임스 로웰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예견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총을 내린 상태였다.
밀리엄의 대답이 들려온 것은 내가 다시 제임스 로웰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내게 족한지를 묻는 거라면, 놀랍게도 그렇습니다.”
그 목소리는 조금쯤 서글프게도, 아주 후련하게도 들렸다. 어느 쪽에 가깝든 간에 단순하게 어떻다고 형언할 수는 없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대답을 들은 제임스 로웰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기가 서서히 번지는 장면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래요, 그렇군요…….’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제임스 로웰은 돌연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의 등 뒤엔 깎아지른 절벽이 있었다.
절벽 아래서 굽이치는 파도 소리가 오싹할 정도로 생생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앞으로 한 걸음 나간 나를 막은 것은 여전히 내 오른손을 잡고 있던 밀리엄의 왼손이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내젓는 밀리엄을 보고서 다시 상체를 돌렸다. 제임스 로웰은 어느새 벼랑 끝에 서 있었다.
반쯤 벌어진 입술 새로 떨리는 숨이 빠져나간 순간, 물기 어린 미소를 머금은 제임스의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그렇게 기울어진 몸은, 마지막으로 나를 향해 달싹인 입술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사람이 물에 빠지는 것 같은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사위를 채운 것은 그저 겨울바다를 유랑하다 부서지는 요란한 파도소리뿐이었다.
***
우리는 그레이스톤 저택 안에 모닥불을 지펴놓고 밤을 지새웠다.
밀리엄은 나에게 조금이라도 자라고 말했지만 나는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기분이 싱숭생숭한 까닭도 물론 있었으나 그보다는 해가 뜨는 것을 보기 전까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시간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밀리엄과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나누거나, 말없이 흔들리는 불길을 바라보거나 하는 사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흘러갔다.
결국 나는 새벽의 끝까지 한숨도 자지 않았고 밖이 밝아오기 시작할 즈음 밀리엄과 함께 다시 절벽으로 나갔다.
수평선 저편에서 붉은 해가 일렁이며 떠오르고 있었다.
1900년의 첫 아침.
새롭게 시작될 백년의 첫 일출이었다.
나는 무사히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이 세계를 지켰다거나, 구했다거나 하는 거창한 뿌듯함 따위가 아니었다.
무어라 명확히 형언할 수는 없으나 굳이 표현하자면, ‘내가 이곳에 있다’는 어떤 확인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그때 문득 나는 어제 밀리엄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았을 때 떠올랐던 시스템창을 상기해냈다.
분명 과제 달성 보상이 황금 회중시계였던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오른쪽 아래를 보자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회중시계 아이콘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것을 눌렀고, 곧이어 이제껏 사용해온 것보다 훨씬 크고 화려한 금색 회중시계가 오른손에 쥐여졌다.
그리고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문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황금 회중시계 ]
태엽을 한 바퀴 돌리면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로 돌아갈 수 있다.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
나는 다시 회중시계로 시선을 내렸다. 그것을 이용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 즈음, 몇 발자국 뒤에 서 있던 밀리엄이 곁으로 걸어왔다.
그는 내가 쥐고 있는 회중시계를 한번 일별하더니 곧장 나를 향해 물어왔다.
“그걸 사용하면 당신이 있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조금 불안해하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잘은 모르겠는데, 어째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럼 잘 챙겨둬요.”
“날 믿기로 했다면서요.”
“그래도 사람 일이란 건 혹시 모르…….”
나는 밀리엄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절벽을 향해 팔을 크게 휘둘렀다.
오른손을 빠져나간 회중시계는 허공을 날아 순식간에 절벽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 과제 100. ]
히든엔딩 2 ’Never Ending’ 달성! (보상 : 풀스크린)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사라짐과 동시에, 시야 한쪽에서 반투명하게 둥둥 떠다니던 아이콘들이 사라졌다.
눈앞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리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보고 있는 밀리엄이 보였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고 싶어 하는 듯한 그를 향해 나는 손을 탁탁 털며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 또한 말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마주 보며 웃던 와중에, 밀리엄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계속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는데.”
“뭘요?”
“내 친애하는 숙녀분을 이제 나는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물어오는 목소리가 아주 달큰하고 부드러워서, 나는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밀리엄이 짐짓 야속하다는 듯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내 딴엔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는데 그렇게 웃으면 어떡합니까.”
“아, 미안해요. 갑자기 웃음이 나서.”
“미안하면 알려줘요. 당신 진짜 이름.”
밀리엄은 집요했고, 결국 나는 자꾸만 입꼬리로 향하는 웃음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채로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러고서, 아마도 남은 평생 단 한 사람에게만 불리게 될 이름을 입에 담았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