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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120화 (120/121)
  • 120화. 네버엔딩 (2)

    “이런. 사이 좋게 함께 오실 줄은 몰랐는데.”

    밀리엄과 함께 찾은 절벽 위에서, 제임스 로웰이 뜻밖이라는 듯 말했다.

    나는 그가 종적을 감추기 전 밀리엄에게 내가 베로니카 캠벨이 아닐 수 있다는 쪽지를 남겼다는 이야기를 막 들은 참이었다.

    저번에 내가 병실에 들어갔을 때 밀리엄이 급히 구겨넣은 쪽지가 바로 그것이었으리라.

    그걸 생각하고 보니 ‘사이 좋게 함께 오실 줄 몰랐다’는 말에서 뼈가 느껴졌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제임스는 나를 보며 감탄하듯 말을 이어갔다.

    “전부 털어놓으신 겁니까? 그 정도의 용기를 갖춘 분이셨다니 제가 당신을 과소평가했나 봅니다.”

    이미 한번 시행착오를 겪고 돌아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평가야말로 사실에 가까울 터였으나 나는 굳이 정정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가 침묵하자 제임스는 잠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커다란 달이 뜬 하늘이다.

    “이렇게 된 마당에 제 평가 따위가 무슨 소용일까 싶기는 합니다만.”

    나는 저 하늘이 아주 가까운 미래에 거짓말처럼 무너져내릴 수 있다는 것을 이미 내 눈으로 확인한 바 있다.

    “이렇게 된 마당이라.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는 이 순간을 말하는 건가요?”

    “하하, 당신과 이 세계의 미래에 대한 제 추리를 늘어놓을 기회는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당신이 내 존재를 납득하기 위해 마지막 예언을 믿기로 했다는 이야기라면 굳이 듣고 싶지 않아서요.”

    내 말에 제임스 로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잠시간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대강 알겠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우리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게 처음이 아닌 모양이군요. 그렇지요?”

    “부정하지 않을게요.”

    “보고 오신 것은 이 세계의 끝일 테고.”

    나는 그것 또한 부정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대신 손가락 끝을 움찔 떨었다.

    그 움직임을 제임스 로웰이 놓쳤을 리 없으므로 구태여 대답을 덧붙일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나는 대신에 지난 대화에서 제임스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정의와 진실이 언제나 정답게 함께하는 관계라면 좋겠지만, 세상 일이란 이따금 아주 부조리해서 정의롭지 않은 자가 추구한 것이 진실일 때도 있다는 말.

    종말의 예언과 교단의 탄생 중 어느 쪽이 먼저였으리라 생각하느냐던 질문.

    그리고 그 뒤에 이어졌던 제안까지.

    “긴말을 할 필요가 없어진 듯해 기쁩니다. 설마하니 같은 선택을 하기 위해 돌아오신 건 아닐 테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 제안을 받아들이기 위해 돌아온 것도 아니에요.”

    아마도 곧장 지난번의 제안을 다시 한번 꺼낼 요량이었을 제임스 로웰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보았고, 나는 말을 꺼내기에 앞서 잠시 밀리엄을 보았다.

    부러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한 발 뒤로 물러서 있는 밀리엄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안심하라는 뜻이라기보단 이번에도 믿어달라는 의미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내 미소를 본 밀리엄이 덩달아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여전히 불안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채였으나 그 모습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됐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제임스 로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요는 내가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러자 잠시간 말없이 날 바라보던 제임스가 별안간 실소를 터뜨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했더니.”

    “돌아가지 않고 이 세계에 남을게요. 그럴 작정으로 돌아왔어요. 계속 이곳에서 살다가, 죽을 때도 절대 본래 세계로 돌아가는 길은 선택하지 않을게요. 그렇게 내 영혼이 여기 남게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속 편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제가 그 약속을 어떻게 믿습니까?”

    다급하게 늘어놓던 말을 끊고 날아온 것은 날 선 질문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순간 당황해서 말을 멈춘 채 눈을 깜빡이며 제임스 로웰을 응시했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이야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죠.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이란 게, 제가 안심하고 이 세상의 운명을 맡길 수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아니, 이보세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지극히 단정적인 한 마디가 쐐기처럼 날아와 박혔다.

    역시 고작 이 정도로 저 남자를 설득해보겠다는 건 너무 나이브한 생각이었을까?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확언하는 것 이외에 나에게 달리 어떤 수가 있단 말인가.

    이것은 유형의 무언가를 담보로 삼을 수 있는 약속도 아닌데.

    “어떤 마음도 약속도 신념도 결코 영원하지 않아요. 아니, 애당초 인간의 마음만큼 변하기 쉬운 것도 없죠. 저는 그런 불안정한 것을 믿고 안심할 수 있을 정도로 안일한 낭만주의자가 못 됩니다.”

    제임스 로웰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쐐기로 변해 내 가슴을 쿡쿡 쑤셔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라도 저런 반응을 보일 것 같긴 했다. 나 역시 타고나길 낭만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으므로.

    막말로, 뭐 틀린 소리가 있어야 반박을 하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나는 한때 분명 변치 않으리라 여겼을 마음이 싸늘히 식어 삐걱거리다 못해 파탄나버리는 광경을 고작 여덟 살 나이에 눈앞에서 목도한 인간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만나자며 손가락을 걸고 한 약속이 서서히 빛바래져가는 경험도 해보았다. 거기에는 심지어 일조하기까지 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지.

    꼭 그런 경험들이 아니라도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제임스의 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만큼 변하기 쉬운 것은 없다. 담보 없는 약속만큼 깨지기 쉬운 것도 없다.

    인간은 늘 변하고, 계속해서 변하고, 정말이지 끝도 없이 변한다. 어쩌면 변하기 때문에 가치를 가지는 생물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인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몇 마디에 다른 것도 아닌 세계의 운명을 맡기라니 헛소리도 정도껏이지.

    이게 그저 당장의 상황을 면피하고자 가벼운 마음으로 주워섬기는 빈말이 아니라는 보장은 어디 있으며.

    설령 진심이라 한들 이 진심이 내 인생의 끝까지 이어지리라는 근거는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영원히 변치 않는 마음 같은 건 낭만에 불과하다. 혹은 지독하게 허황된 환상이거나.

    그리고 그러한 낭만에 글자 그대로 목숨을 내거는 가련하고 천진난만한 중생…… 아니, 낭만주의자야 물론 존재하긴 하겠으나 최소한 제임스 로웰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도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제임스 로웰의 심정을 백번 천번 이해했다. 그래서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순간 내가 가진 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달라’는 말뿐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 말이기에 그를 설득할 도구로는 적합하지 않으리라.

    “이 세계를 당신의 변덕에 맡길 수는 없어요. 저는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이 확실해지길 바랍니다.”

    “그랬다가 내가 또 지난번과 같은 선택을 하면 어쩌려고요?”

    “그러실 리 없죠. 적어도 지금은.”

    남의 속을 훤히 꿰뚫어보는 듯한 언사였다. 제임스 로웰의 시선이 여보란 듯 밀리엄에게로 향하는 것을 보며 나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그의 말은 이번에도 틀린 구석이 없었다. 나는 다시 총을 맞는다고 해도 절대 로그아웃 아이콘을 누르지 않을 작정으로 이곳에 돌아왔다.

    그렇게 얻어낸 삶을 멀쩡히 영위할 자신도 없고, 최소한 지금의 심정으로는 밀리엄이 죽는 것을 지켜보느니 내가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러므로 최악의 경우 다시 제임스 로웰의 총에 맞게 된다면 나는 그의 바람대로 여기서 죽어줄 생각이다.

    그리고 그런 내 속을 저 남자는 제대로 들여다본 거겠지. 억울하고 분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내 옆에서 어떻게든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하고 있을 밀리엄을 생각하며 내심 뼈아픈 사과를 전했다.

    아까 전 밀리엄에게 나는 그간의 모든 일을 털어놓았지만 단 하나, 지난번 이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끝났는지까지 전해주지는 않았다.

    그러니 지금 밀리엄은 제임스가 나를 총으로 쏴 죽이려 한다는 사실도, 그 총에 맞은 내가 이번에는 기꺼이 죽음을 택할 작정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밀리엄의 왼팔을 꽉 붙잡았다.

    행여라도 제임스가 총을 꺼내 나를 겨누었을 때, 레너드 에버렛의 칼날 앞에서 그러했듯 또다시 내 앞을 막아서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상태로 제임스 로웰의 말을 들었다. 내게는 더 이상 그를 설득할 말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제게는 지금이어야만 합니다. 당신의 선택을 가장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나는 어금니를 꾹 물고서 제임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가 겉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그것은 예상대로, 저번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분명한 권총이었으나 몸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눈을 감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한결같이 제임스 로웰을 바라보았고, 제임스 로웰은 저번보다 훨씬 빠르게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총성은 바로 다음 순간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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