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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119화 (119/121)

119화. 네버엔딩 (1)

눈을 뜨지 않고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발밑이 흔들거렸다. 한쪽 어깨 위로 익숙한 무게감이 전해졌다.

어느 쪽이든 현실의 내 방에서라면 느낄 수 없을 감각.

그러한 사실을 자각한 뒤에야 천천히 눈을 떴다. 좁은 선실 안의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제대로 돌아왔구나.

‘돌아왔다’는 감상이 조금 우습다고 생각하기를 잠시간, 나는 이내 무게감이 느껴지는 어깨 쪽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잠들어 있는 밀리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총상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얼굴이다.

아직 뭘 해보기는커녕 이제 막 돌아왔을 뿐인데도 그의 얼굴을 보자 기묘한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나는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그의 이마를 향해 손을 뻗어, 흘러내린 앞머리를 살살 정돈해주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끝을 간질이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정리해봤자 금방 다시 흘러내릴 머리칼을 의미 없이 매만지는, 정말이지 별것 아닌 일인데.

그저 다시 이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우스울 정도의 만족감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렇게 한동안 밀리엄의 잠든 얼굴을 감상하며 부드러운 밀빛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다가, 저번보다 조금 일찍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어날 시간이에요, 밀리엄.”

조금이라도 빨리 눈을 뜨고 나를 봐줬으면 좋겠다는 작고 황당한 욕심 때문이었다.

스르르 모습을 드러낸 금빛 눈과 마주하자 주체할 수 없는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섬에 도착했다는 선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고 내 어깨에서 머리를 들어올린 밀리엄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불편하지 않았어요? 그냥 두지.”

“……하나도 안 불편했어요.”

외려 돌아오자마자 당신과 닿아 있는 감각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는 말을 하고 싶을 정도다.

그렇게 생각하니 입꼬리가 더욱 주체할 길 없이 올라갔다.

밀리엄은 그런 나를 조금 신기해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내가 잠든 사이에 뭔가……”

“일이 있긴 했는데, 그건 내려서 말해줄게요.”

그것 말고도 해야 할 이야기가 아주 많았으므로,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갑판으로 나가자 지난번에 보았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풍경이 보였다.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외로운 섬.

나는 저번에 그랬듯 눈앞의 섬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바닷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그리고, 어김없이 먼저 배에서 내린 밀리엄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내밀어진 손 위에 내 손을 올리고서, 대뜸 힘을 주어 그의 손을 꾹 움켜잡았다.

일순 당황한 얼굴을 했다가, 이내 작게 심호흡을 한번 하는 밀리엄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잠자코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아주 황당하고 멍청한 질문을 하나만 할게요.”

“……뭔데요?”

“당신은… 베로니카 캠벨이 맞나요?”

싸늘한 바닷바람이 나와 밀리엄 사이를 쌩하니 휩쓸고 지나갔다.

나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불안감을 안고도 한없이 진지한 밀리엄의 금빛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간 눈을 감았다.

피차 장갑을 낀 채로도 전해지는 손의 온기를 가만히 만끽하자 입술 끝으로 잔잔한 미소가 번져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서야 나는 서서히 눈을 뜨고, 다시 한번 밀리엄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입술을 떼었다.

곧장 입안으로 들이치는 한겨울 바닷가의 차가운 공기를 느끼며.

“……아니요. 나는, 베로니카 캠벨이 아니에요.”

나는 이번에야말로 진실을 입에 담았다.

***

밀리엄은 한껏 당황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내 손을 놓지 않았고, 나는 그의 손을 잡은 채 그레이스톤 섬의 땅을 밟았다.

차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는 그를 앞에 두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 것은, 당초 생각하고 번뇌했던 것보다도 훨씬 쉽고 간단한 일이었다.

나는 정말로 모든 것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나에게 이곳은 게임 속의 세상이고, 나는 베로니카 캠벨이 아니라 그저 그녀의 몸에 들어온 빙의자에 불과하다는 것부터.

사실은 그와 제임스 로웰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전부 알고 있었다는 것을 지나.

내가 본래의 세계로 돌아갔던 까닭에 이 세계가 한 번 멸망했었다는 사실까지 전부.

기나긴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밀리엄은 단 한 번도 중간에 말을 끊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말하자면 내가 늘어놓은 것은 이제껏 그를 기만해왔다는 자백이었음에도 분노하거나 원망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몹시 혼란스러워 보이기는 했으나 그저 그뿐. 세찬 원망을 들을 각오까지 했던 것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면 이 세계는 끝난다는 뜻이에요.”

나의 긴 이야기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은 형량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내 이야기에 대한 밀리엄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밀리엄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혼란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짚고 눈가를 가렸다가 마른세수를 하기를 반복했다.

밀리엄의 침묵이 길어지자 나는 다시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내 말을 어디까지 신뢰할까.

세상의 종말이라는 황당무계한 예언이 사실이고 그게 심지어 나에게 달렸다는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때였다.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마른세수 끝에 손으로 입가를 가린 밀리엄이 별안간,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한숨 같은 실소를 터뜨렸다.

긴장감에 주먹을 말아쥔 나는 어느새 나를 향한 채 세차게 흔들리고 있는 금빛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힘없이 떨어트리며 밀리엄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서…….”

거기까지 말한 그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곤 떨리는 날숨을 내쉬었다.

말이 이어진 것은, 내가 방금 들은 밀리엄의 목소리 끝이 미묘하게 흔들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였다.

“그래서 돌아와준 겁니까.”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고, 나는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어, 네?”

“돌아가기 위해 그토록 애썼다면서, 기껏 돌아간 당신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다시 말을 멈춘 그가 일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시점에 나는 밀리엄이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참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 순간 나 또한 안간힘을 다해가며 참고 있는 무언가를.

“당신에겐 아무 의미도 없고, 사실은 진짜 망해버렸는지 어쨌는지도 알 수 없는 이 세상을 위해 다시 와줬다는 겁니까. 당신이 되찾고자 했던 모든 걸 뒤로하고서?”

애써 참고 있던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울컥 치밀어오른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나는 눈가가 뜨끈해지는 것을 외면했다. 야속함에 떨려오는 숨도 외면했다. 시큰하게 조여오는 심장까지도 외면했다.

그렇게 전부 외면한 채, 치밀어오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데만 온 신경을 쏟았다.

“왜 이 세상이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야……!”

“당신의 세상인데!”

당신이 살아왔고, 지금도 이렇게 당신이 있고,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지지만 않는다면 앞으로도 당신이 살아갈 세상인데.

그런데 어떻게 이곳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가 있다고.

“당신이 여기 있으니까, 그냥 그것 하나로도 나한테는 차고 넘치도록 충분해서, 그래서……!”

그래서 돌아왔다는 악에 받친 외침은, 다음 순간 다급하게 닿아온 뜨거운 입술에 틀어막힌 채 제대로 끝맺어지지 못했다.

나는 그제야 밀리엄이 내 팔을 잡고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찬 파도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눈을 감을 새도 없었다.

외려 넓어지기까지 한 시야의 바로 앞에, 마찬가지로 감기지 않은 밀리엄의 눈이 보였다.

찡그린 미간과 격동하는 시선.

밀리엄은 내가 알던 그가 맞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집요하게 파고들며 입을 맞췄다.

길고 긴 입맞춤은 바위를 때리는 파도처럼 세차게 흔들리던 금빛 시선이 다시 종전의 잠잠함을 되찾은 뒤에야 끝이 났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밀리엄을 올려다보았다.

품 안의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는 언제 그토록 다급했냐는 듯 일견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가 조금 전의 열기에 여전히 반쯤 잠식되어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다음 순간 밀리엄은 마치 그런 자신을 숨기려는 것처럼, 커다란 손으로 내 뒤통수를 감싸 쥐고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그의 가슴에 이마가 닿았다. 나는 쿵쿵 울리는 심장소리가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로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냈다.

“밀리엄. 내가 한 말… 다 믿어요?”

“믿어요. 어떻게 안 믿을 수가 있겠어요.”

[ 과제 0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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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치도 없이 떠오른 시스템창이 사라지길 가만히 기다렸다가, 다시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화내지 않아요?”

“화낼 구석이 있었어야 말이죠.”

“아주 많았다고 보는데.”

“그럴 수도 있지만.”

밀리엄이 내 몸을 더 바싹 끌어당겼다. 너른 품에 완전히 파묻혀버린 나는 이내 팔을 뻗어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는 내 행동에 잠시 움찔하는 듯하더니,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돌아와줬으니까, 됐습니다.”

은은하게 전해지는 체향. 한없이 다정한 한 마디.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눈을 감은 채 몸에 힘을 풀었다.

그랬다가, 이제는 거리낌 없이 전할 수 있게 된 말이 떠올라 눈을 뜨고 그를 불렀다. 밀리엄.

“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거창한 신념 같은 거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런 걸 가질 수 있는 당신을 좋아하고요.”

밀리엄의 몸이 다시 움찔 떨렸다.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것처럼.

“그러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앞으로 몇 번을 더 꺾이고 부러져도, 끝까지 당신의 신념을 믿어줘요. 오늘 나를 믿어준 것처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고민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고민을 계속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리라는 생각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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