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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118화 (118/121)

118화. 로그아웃 (2)

나는 한동안 핸드폰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걸 보며 내가 방금 한 결심을 되새기자니 돌연 헛웃음이 나왔다.

저쪽은 몇 시지? 그런 걸 늘 기억할 만큼 자주 연락하고 살지 않아서 시차가 영 감이 오지 않는다. 어쨌든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힌다는 사실만이 확실했다.

“응, 엄마.”

- 딸! 잘 지내고 있어?

늘 하던 인삿말이다. 나는 여느 때처럼 ‘나야 뭐 평소랑 똑같이 그럭저럭 지내지.’ 따위의 성의 없는 대답을 꺼내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사실 일이 좀 있었어.”

- 좋은 일이었던 것처럼은 안 들리는데. 괜찮아?

“괜찮아. 안 좋은 일도 아니었거든.”

좋은 일도 안 좋은 일도 아니었다. 혹은 둘 모두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을 회상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떤 일은 좋았고 어떤 일은 좋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일어난 사건은 그저 인생을 살다 마주하게 되는 다른 수많은 사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앞으로 일어날 일도 그러하리라는 믿음이 함께 찾아왔다.

다년간의 경험에 따른 예상대로 엄마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캐묻지도 않았고, 괜찮냐는 말 이상의 걱정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대신 딱 한 마디, 담백하고도 통렬한 질문을 던졌다.

- 그렇지만 중요한 일이었구나?

나는 순간 침묵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것이 가장 사실에 가까운 표현이란 깨달음이 들었다.

좋지만도 않고 나쁘지만도 않았지만, 어쨌든 몹시 중요한 일.

그래. 그곳에서의 나날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블루 달리아>의 세계에서 내가 겪은 일은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마주해온 그 어떤 일보다도 중요했다.

그 안에서 만난 사람도, 보고 느끼고 깨달은 감정도……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누군가는 그런 것을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에게도 그럴 것이다.

나는 지금 <블루 달리아>라는 이름의 모퉁이에서 내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돌려버리려 하고 있으니까.

“어떻게 알았어?”

-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니까 네 성격에 엄마한테 일이 있었다고 언질이라도 준 거겠지.

“날 되게 이상한 딸로 만드네…….”

- 만들기는. 넌 원래부터 이상한 딸이었어, 얘.

스피커 너머 엄마의 목소리는 지극히 경쾌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뭔가 더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모든 걸 전부 털어놓을 순 없겠으나 전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전해야 한다. 같은 후회를 두 번 반복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나는 입술을 사리물고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원래는 그랬다 치고, 오늘부턴 못된 딸 해도 돼? 안 된다고 해도 할 거긴 한데.”

- 아니, 얼마나 못된 짓을 하려고 미리 경고씩이나 해주시나?

“엄마, 내가…… 꼭 가야 할 곳이 있어. 해야 할 일도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어서. 그런데 좀 멀어요.”

경쾌했던 목소리가 잠잠해진 것은 그때였다. 바다 건너에 있는 엄마의 숨소리가 귓가로 전해졌다.

‘좀 멀다’는 말에서 무언가를 예상하기라도 한 듯, 별안간 낮고 진지해진 숨소리가.

“이번에 가면 안 돌아올 것 같아. 연락도 못할 거고.”

다짜고짜 멀리 떠나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딸에게, 대체 어딜 가길래 요즘 같은 시대에 연락도 못한다는 거냐고 물을 법도 한데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 역시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고 보니 정말 못된 딸이 된 기분이어서이기도 했고, 딱히 더 해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에, 엄마가 다시 말을 꺼냈다.

- 딸. 옛날에 엄마가 했던 말 기억 나? 여기 오기 전날에, 너도 엄마가 널 버리는 것 같아서 속상하냐고 물었던 거.

“기억하지. 안 속상하다고 했잖아.”

- 그때 그렇게 말해줘서, 원망하지 않아줘서 고마워.

“뭐야, 새삼스럽게.”

- 너 못된 딸 아니라는 뜻이야. 말마따나 아주 가서 영영 안 돌아오고 연락 한 통 없어도, 네가 엄말 버렸다고는 생각 안 해.

엄마에겐 엄마의 인생이 있고 나에겐 나의 인생이 있다.

나는 엄마가 나를 위해 인생의 일부를 희생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엄마를 위해 희생할 필요는 없다고.

서로의 기회와 선택을 막는 족쇄가 되지 말자고.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말자고.

누가 뭐라든 그것은 우리 모녀의 아주 오래된 합의였고, 그 합의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한 작별의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잔인한 짓 같았으니까.

엄마를 안심시킬 만한 설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묻지 않는다는 건 믿어주고 있다는 뜻이었으므로.

그렇게 이것저것 제하고 보니 할 수 있는 말은 한 마디뿐이었다.

“……고마워, 엄마.”

- 어디 가서 뭘 하고 누굴 만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계속 널 응원할게.

응원할게.

그것은 열일곱의 내가 공항에서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엄마에게 했던 인삿말이었다.

나는 그날의 내 인삿말을 돌려준 것이 엄마 나름의 작별인사라는 걸 눈치챘다.

“그것도 고마워요.”

- 오냐.

이윽고 말하지 않아도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한참의 침묵 끝에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다문 입술로 미소를 지으며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회중시계는 내가 핸드폰을 내려놓은 자리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당장이라도 집어 들고 싶었지만, 그에 앞서 나는 우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 마음을, 돌아가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찬찬히 되짚었다.

마음은 이미 너무나 확고했다.

내 선택으로 죽었을지 모르는 이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든, 밀리엄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이 답 없는 감정 때문이든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내가 견딜 수 있는 삶은 그곳에 있었다. 어쩌면 내가 바라는 삶 또한.

그러나 해야 할 일을 짚어보는 일은 조금 힘들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기는 했다. 돌아가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그것뿐이라고 해도 기꺼이 돌아가기를 선택하고 싶을 만큼 간절하게,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 이외의 것들이다. 나는 이왕 가는 것이라면 최선의 결과를 내고 싶었다.

설마하니 내가 무슨 영웅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저쪽 세계의 사람들 모두를 대신해 숭고한 희생을 하는 것이 진정 최선의 결과이겠는가.

나는 분명 다른 형태의, 더 좋은 결말이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게임 자체의 시나리오상으로든 그 너머에든, 세계는 무너지지 않고 밀리엄은 절망하지 않으며 나 또한 살아갈 수 있을 그런 결말이 말이다.

생각해둔 것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게 먹힐지도 모르겠고, 먹히지 않을 경우엔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모든 것이 안개 속에 갇혀버린 상태였으나 의외로 그리 불안하거나 비관적인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어차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고, 사실은 돌이킬 수도 없는 게 인생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돌이킬 기회를 몇 번이나 얻은 나는 외려 아주 운이 좋았던 셈이다.

그러니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 해도 불만은 없다.

여태까지의 모든 선택이 옳았다고는 이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결과로 나는 지금 또다시 저 회중시계를 눈앞에 두고 있으므로.

하지만 다시 한번 되뇌는 것 정도는 상관없지 않을까?

얼마 전 내가 주문 내지 최면처럼 나를 향해 주입하고 또 주입했던 그 말을 외기에는,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나는 오른손을 뻗어 회중시계를 꾹 움켜쥔 채 생각했다.

나는 여태까지 제법 잘 해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아마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가 끝이라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면 분명 길이 있을 테고.

그리고 나는 괜찮을 것이다.

일견 미친 사람의 것으로 보일지 모르는 이 선택은 절대로 나를 후회하거나 절망하게 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되뇌인 끝에 나는 움켜쥐고 있던 회중시계를 집어 들었다.

나름 긴장을 하기는 한 모양인지 그 잠깐 사이 손바닥에 맺힌 땀이 시계 표면과 닿으며 미끌거려 돌연 웃음이 터졌다.

퍽퍽하게 터져나와 그칠 시점을 놓쳐버린 웃음은 어느 순간엔가 물기를 입었다.

눈물이 흐를 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물기를 머금은 웃음은 기어이 눈가를 촉촉하게 만든 뒤에야 멎었다.

도무지 내 뜻대로 조절되지 않던 웃음이 겨우 멎은 뒤, 나는 회중시계를 바로 쥔 채 잠시 고개를 돌려 내 방 안을 훑어보았다.

가장 오랜 시간 함께했던 공간을 뒤돌아보는 이 짧은 시선으로, 미처 하나하나 챙겨 전하지 못한 수많은 작별인사를 대신하기로 하며.

잠시 후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린 나는 마침내 손에 든 회중시계의 태엽을 잡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태엽을 한 바퀴 돌렸다.

주저는 없었다.

후회도 없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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