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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117화 (117/121)

117화. 로그아웃 (1)

알 수 없는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의 ‘유랑’은 끝이 났다.

달리 무엇으로 이 상황을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돌아왔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까? 게임을 끝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그간 쌓였던 정신적 피로가 적지 않았던 모양인지, 황망한 와중에도 나는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여전히 내 방 침대 위였다. 그 순간 피어오른 것이 실망감이었는지, 혹은 안도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깨어나 확인한 손 안에는 전날 붙든 채 잠들었던 회중시계가 쥐여져 있었다.

멍청하게 회중시계를 내려다보던 중 떠오른 것은 엔딩크레딧 옆의 일러스트였다.

터무니없는 헛소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종말의 예언대로 무너져내리던 하늘.

우습게도, 그 장면을 떠올린 뒤에야 나는 모든 것을 실감했다.

내가 저쪽 세계에서 겪은 일들은 전부 진실이었다는 것. 그러나 이제는 나의 세계로 돌아와버렸다는 것.

그래서…… 내가 돌아와버렸기 때문에, 그 세계는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

실감은 아주 서늘했으나 하나같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잠기운 따위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아주 말짱한 정신으로 악몽 속을 유영하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그런 나를 현실로 끌어낸 것은 친구가 보내온 연락이었다. 심심한데 커피나 마시러 가자는 내용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연락.

그러나 나는 평소와 조금 다른 기분으로 카페에 나왔다.

마음이 급해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온 탓에 10시간 같은 10분을 기다린 뒤에야 친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옛날 함께 <레드 헤링>을 플레이했고, 나에게 후속작 발매 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주었던 10년지기 동네친구.

예상대로 밤을 새가며 <블루 달리아>의 엔딩을 보고 온 참이라는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게임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재미가 없었던 건 아닌데 전작만 못하지 않았어? 아닌가, 추억보정인가?”

얼음이 가득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달그락달그락 휘저으며 친구가 말했다.

설마했던 마음과 달리 그녀는 평범하게 게임을 플레이한 모양이었다.

정신없이 시나리오를 따라 발버둥 치느라 재미 같은 건 느낄 새도 없었던 나는 그저 웃으며 대충 그럴듯한 대답을 했다.

그러고서 조심스럽게 엔딩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엔딩은 뭐 봤어?”

“노멀이랑 히든. 근데 찾아보니까 다른 엔딩도 많아서 다 수집하려면 몇 바퀴는 더 돌아야 할 것 같더라. 넌 뭐 봤는데?”

“나는… 어쩌다 보니까 히든엔딩만.”

“오, 그럼 스포 걱정 안 하고 막 얘기해도 되겠네. 야, 솔직히 히든루트 너무 꿈도 희망도 없는 거 아니냐? 난데없는 메타픽션 전개까지는 내가 그래, 신박해서라도 이해를 하겠는데…….”

히든엔딩의 부조리함에 대한 가벼운 푸념과 한탄이 이어졌다.

나는 친구가 줄줄 늘어놓는 아쉬움 가득한 불호평을 가만히 듣다가,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왜 밀리엄과 플레이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지?

로맨스의 로 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그녀가 ‘추리게임에 로맨스가 웬말이냐’며 뒷목을 잡지 않는 것이 영 미심쩍었다.

결국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먼저 질문하는 쪽을 선택했다.

“너 플레이어랑 밀리엄 관계성 괜찮았어? 나는 네가 되게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러자 친구는 고개를 기울이며 옆목을 긁적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뭐 싫어할 게 있었나? 그냥 주인공이랑 믿음직한 조력자 관계였던 것 같은데. 너 혹시 또 혼자 로맨스 필터 꼈니. 내가 제발 그러지 말라고 했지.”

그녀의 대답에 나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몹시 당황스러운 한편으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와 밀리엄이 쌓은 관계는 본래의 시나리오 속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를 향한 내 감정조차 시나리오의 농간이 아닐까 하며 고민했던 시간들이 별안간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내 감정은 그저 내 감정이고 밀리엄의 것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게 하필 지금이라는 점은, 정말이지 견딜 수 없이…….

“아, 밀리엄 얘기하니까 새삼 아쉽긴 하네. 그래도 전작 주인공인데 거기서 퇴장시키는 건 진짜 너무했어.”

“퇴장……?”

“어. 이브리안 호텔 사건 때 죽어서 퇴장하고 그 뒤부턴 계속 제임스가 조력자 포지션이었잖아. ……우리 같은 게임 하고 온 거 맞지? 너 사실 안 했는데 대충 말만 맞추고 있는 거 아니지?”

나는 밀리엄이 죽었는데도 계속해서 멀쩡하게 진행될 것처럼 보였던 그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때 나는 마지막 남은 회중시계를 써서 시간을 돌렸고, 그렇게 간신히 밀리엄을 살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밀리엄을 살리고 싶다고 바랐기 때문에, 효용과 상관없이 미친 척 저지른 일이었다.

그러니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밀리엄의 죽음 이후로도 게임이 이어지는 시점에서 그의 죽음을 그저 전개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넘겼겠지.

그러니까 시나리오대로라면, 밀리엄은 리디아 에버렛의 총에 맞아 그대로 죽어야 했던 것이다.

거기까지 깨달은 순간 나는 눈앞에 친구가 앉아 있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입을 틀어막았다.

울컥 차오르려는 눈물을 참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다는 핑계로 친구와의 자리를 일찍 파한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형편없이 무너졌다.

겉옷도 벗지 않은 채로 바닥에 주저앉기 무섭게, 가까스로 참고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플레이어와 밀리엄은 조력자 이상의 관계가 아니었다. 밀리엄이 내게 전한 감정은 그의 설정값을 벗어난 행동이었다.

더군다나 본래 그는 이브리안 호텔 사건에서 죽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나는 그를 살릴 수 있었다.

밀리엄 켄트우드는 설정을 따라 움직이는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 자기 의지를 가진 인간이었고, 시나리오는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할 운명이 아니라 거스를 수 있는 무언가였다.

밀리엄이 나와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는 사실은, 내가 게임 속의 세계에 동화되어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황홀한 착각 따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걸 모른 채로 나는 마지막까지 밀리엄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가 어쩌다 그런 의심을 품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게임 속의 밀리엄이 이브리안 호텔 사건에서 죽어야 했던 캐릭터라면.

‘당신은… 베로니카 캠벨이 맞나요?’

그 질문은 게임 캐릭터 밀리엄 켄트우드가 플레이어에게 던진 대사가 아니라, 밀리엄이라는 인간이 나라는 인간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말이었으리라.

그 말에 나는 뭐라고 대답했던가. 당연하다고. 뭐 그런 걸 묻고 그러느냐고 뻔뻔하게 거짓을 주워섬겼지.

그것이 그를 위해 더 나은 길이라고, 내가 아는 진실을 그가 감당할 필요는 없다고 멋대로 재단해버린 채로.

어쩌면 밀리엄은 제임스 로웰이 그랬듯 전부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그게 얼마나 가혹하고 잔인하고 그에게 득 될 것 없는 진실이든 짊어질 각오가 되어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에게서 진실과 마주할 기회를 빼앗았지?

밀리엄 켄트우드의 삶에서 진실이 가지는 의미를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내 대답을 들은 순간 밀리엄이 느꼈을 감정을 상상하자 숨이 턱 막혀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이라고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말이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입에서 흘러나갔을 때 그가 느꼈을 아득한 고독이 끔찍했다.

이제 와 고통스레 사무치는 사실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에게서 진실을 빼앗은 것으로는 모자라 나는.

‘그러니 여기서 죽어줬으면 해요.’

나는 기어이…….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밀리엄 켄트우드 씨를 살리기 위해. 당신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고.’

뒤늦게 찾아온 선택의 무게가 온몸을 짓눌렀다. 나는 기어이 이곳으로 돌아왔다.

진심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그의 곁을 떠나도 좋다고 생각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 순간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그래서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그것은 나의 선택조차 아니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의 내가 진심으로 죽고 싶지 않아서 그런 선택을 한 거라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가도 변함없이 내 목숨을 우선하리라는 확신이 없다. 고작 그 정도의 마음으로 행한 일이었다.

심지어 버튼을 누르는 순간에는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조차 계산에 넣지 못했다.

고작 그 정도의 마음으로 나는…… 그 세계에서 만나 인연을 쌓았고, 모든 일이 끝나고도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과 밀리엄의 미래를 무너뜨렸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중에는 누군가 ‘아직 늦지 않았다’고 표현했던 어느 아이들의 미래도 있었겠지.

내가 거기서 로그아웃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면 그들의 세상과 함께 계속해서 이어졌을 무수한 삶.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목을 옥죄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미칠 듯한 공포 속에서 서늘하게 깨달았다.

이것은 타고나길 나약하고 별 볼 일 없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짐이 아니다.

양자택일의 상황이었다고 해도, 사실은 그 세계가 무너지지 않았다고 해도.

그렇게나 많은 목숨을 짓밟았을지 모른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이렇게 숨이 막히는데, 나는 이 모든 걸 다 잊거나 극복하고 멀쩡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튼튼한 정신력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수많은 목숨까지 갈 필요도 없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 떠오르는 얼굴은 단 하나였다.

나는, 밀리엄의 목숨을 대가로 지불하고 얻은 것일지도 모르는 이 인생을 멀쩡하게 살아갈 자신이 없다.

젖은 눈가를 옷소매로 문지르며 책상에 고이 올려놓고 나간 회중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홀린 듯 몸을 일으켜 책상 쪽으로 다가서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액정에 뜬 발신자를 확인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엄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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