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116화 (116/121)

116화. 히든루트 (6)

‘네 명의 기사가 사명을 다한 1899년의 마지막 밤. 이방의 신께서 유랑을 마치시매 세계는 무너지고 이 땅의 누구도 새 시대의 아침을 맞이하지 못하리라.’

내가 이방의 신이라고.

놀라거나 부정해야 할 타이밍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자각’한 시점에서 이미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리엄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를 기다린 것도 맞습니다. 다만 당신께 더 중요한 용건이 있었을 뿐이에요.”

어쩌면 어느 순간부터 어렴풋이, 확신까진 아니겠으나 그럴 수 있겠다는 짐작 정도는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짐작하고도 외면했겠지. 밀리엄에 대한 감정을 외면하고 이곳에서의 내 변화를 외면했던 것처럼 그렇게.

심지어는 그보다 훨씬 쉬웠을 것이다. 지금도 솔직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나는 빤히 보이는 것을 못 본 척 외면하는 일에 제법 소질이 있었다.

그러니까… 언제부터였을까?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이것도 짐작일 뿐이지만 아마 에드워드 녹스의 마지막 말을 들은 순간 즈음부터였지 싶다.

그때 에드워드 녹스는 베로니카의 숨이 끊어진 것을 분명히 확인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손에 죽은 기억이 없으므로, 가장 희망적인 가설은 에드워드 녹스가 광기에 사로잡힌 나머지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겠지만…….

기실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은, 내가 ‘이미 죽어 있던’ 베로니카 캠벨의 몸에 빙의했다는 것이었을 터다.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면 설명되는 것이 제법 많았다.

레나 엘모어는 딸에게 최대한 멀리 도망치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고, 조지 캠벨은 조카를 해외로 빼돌리려다 ‘배신자’가 되어 교단에 의해 살해당했다.

레나 엘모어의 노트에 적혀있던 적합자니 영혼이니 소환의식이니 하는 단어들로 미루어 짐작해 보자면. <블루 달리아>의 플레이어는 애당초 메이슨 교단의 ‘소환의식’을 통해 ‘적합자’인 베로니카 캠벨의 시체에 소환된 ‘영혼’이라는 설정이 아닐까?

교단의 일원이었던 레나 엘모어와 조지 캠벨은 베로니카가 이방에서 올 영혼을 담기에 적합한 자로서 살해당할 운명임을 알고 그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베로니카는 끝내 교단의 지시를 받은 에드워드 녹스의 손에 살해당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써 그녀의 몸을 차지한 것이 플레이어, 메이슨 교단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방의 신’.

플레이어인 나는 지금껏 착실하게 시나리오에 따라 게임을 진행해왔다.

진짜로 빙의해버리는 바람에 이것을 내 생존과 직결시켰을 뿐, 내가 평범한 플레이어였다면 그 일련의 과정은 단순한 유희거리였을 테고.

그것은 분명 ‘유랑’이라 표현하기에 무리가 없는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제임스 로웰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어느 틈엔가 그의 어깨너머로 떠오른 달이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1899년의 마지막 밤.

“세계가 무너지리라는 예언을 믿는 건가요?”

“지금으로선 믿지 말아야 할 근거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악질 사이비 집단이 추앙하던 엉터리 예언서를…….”

“정의와 진실이 언제나 정답게 함께하는 관계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세상 일이란 이따금 아주 부조리해서 정의롭지 않은 자가 추구한 것이 진실일 때도 있죠.”

메이슨 교단이 부정하고 악랄했다고 해서, 그들이 믿은 대상까지 거짓된 것이란 보장은 없다는 소리였다.

열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고, 제임스 로웰은 계속해서 유수처럼 입을 놀렸다.

“다른 예언들은 확실히, 마지막 예언에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그 더러운 범죄자들이 쑤셔넣은 엉터리였을 겁니다. 하지만 종말의 예언도 그럴까요? 그 예언과 교단의 탄생 중 무엇이 먼저였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전자가 먼저였다고 생각한다는 건 알겠어요.”

“그렇지 않고는 당신의 존재를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요. 세상의 종말을 추리해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기꺼이 죽겠다는 게 당신이 말한 ‘더 중요한 용건’인가요?”

“아하하. 그럴 리가요.”

제임스 로웰이 퍽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손톱만큼의 호의도 보이지 않았다.

여보란 듯 휘어진 그 눈에 담긴 것은 다름 아닌 적개심이었다.

“구체적인 상이 그려지는 건 아니지만, 이 세계는 당신에게 본래 한낱 유희거리에 지나지 않았겠죠. 당연히 우리를 당신과 동등한 존재로 여기지도 않았을 테고요.”

“그건…….”

“이제는 아니라고 굳이 변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정도는 밀리엄 씨를 보는 눈이나… 에드워드 녹스를 죽인 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거든요.”

유희거리니 어쩌니 하는 것을 그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제임스 로웰은 설정상 왕국 최고의 명탐정이다. 그 설정을 마구 폭주시켜 자신과 세계의 존재에 대해 추론하게 만든 결과가 이것인지도 모르지.

내가 알 수 없어 속이 타는 건 이 상황이었다.

이 상황은 대체 어디까지가 게임의 전개고, 어디까지가 그 너머인 거지?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말해주는 게 좋을 거예요. 슬슬 당신 화법이 짜증 나기 시작했으니……까.”

짜증스레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바라보았을 때, 제임스 로웰은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우측 아래를 보았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낭패감뿐.

이럴 때야말로 요긴하게 쓰였을 더블액션 리볼버는 히든루트에 진입하면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 화법이 거슬린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여기서’ 죽어주지 않겠습니까?”

“뭐, 뭐라고요?”

“당신이 ‘유랑을 마치고’ 돌아가면 이 세계는 무너질 겁니다. 그러니 여기서 죽어줬으면 해요.”

‘무사히 귀환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어찌 여행의 끝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방금 들은 것처럼 생생하면서 꿈결처럼 아득하기도 한 누군가의 질문이 머릿속에서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때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연 사람이 누구인지는 뻔했고, 분명 이 말도 안 되는 순간 몹시 보고 싶은 얼굴일 것이 분명했으나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제임스 로웰!”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밀리엄 켄트우드 씨를 살리기 위해. 당신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고.”

이대로 내 손에.

그렇게 말하는 제임스 로웰의 입꼬리가 정말이지 재수 없게 비틀려 올라갔다고 생각한 순간, 총성이 울렸다.

처음엔 아무 감각이 없었다. 그래서 아주 잠깐은 빗나간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잠깐이 지나기 무섭게 끔찍한 격통이 몸통 전체를 휘감았다.

이바나의 칼에 찔렸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찔린 곳이 어디인지라도 알 수가 있었는데.

이번엔 그저 너무,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처럼 아파서 대체 어디가 아픈 것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내 것 아닌 몸으로 내 것임이 분명한 통증을 느끼며 그대로 쓰러졌다.

등 뒤에서 달려온 이가 허물어지는 내 몸을 받쳐 안는 것이 느껴졌다. 무어라 울부짖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를 어떻게 움직여야 볼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시시각각 희미해지는 시야의 한쪽 밑, 본래 리볼버 아이콘이 있던 지점에 문 모양의 새로운 아이콘이 떠올랐다.

나는 힘겹게 눈에 힘을 준 채 문 모양 아이콘 위에 적힌 글자를 확인했다.

로그아웃.

분명 언젠가는 대체 왜 존재하질 않는 거냐고 애타게 찾았던 것 같은 바로 그것이 눈앞에 있었다.

나는 달달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나도 모르게 상처를 부여잡았던 모양인지 손은 온통 시뻘건 피로 흥건하게 젖은 채였다.

정말이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아파서. 너무나 미치도록 아파서, 어떻게 해서든 이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눈앞의 로그아웃 아이콘을 누르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날 이토록 고통스럽게 한 저 남자의 행동을 전부 허사로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힘겹게 들어 올린 베로니카의 붉은 손이 로그아웃 아이콘과 맞닿도록 내버려두었다.

뒷일 같은 건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에야 보고 싶었던 얼굴이 보였다. 마치 날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 뺨을 붙잡고 오열하는 밀리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귀가 먹먹해진 것인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동아줄 삼아 시야를 유지하며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당신은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 해. 내가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당신만은…….

당신만은, 괜찮아야 하는데.

그런데 방금 내가… 무슨 선택을 했더라……?

[ 과제 098. ]

히든엔딩 ‘End of the World’ 달성! (보상 : 뿔의 문)

혼몽한 와중에 스르륵 떠오른 시스템창이 야속하게도 밀리엄의 얼굴을 가리더니 이내 새하얗게 번져갔다.

가만히 있는 나를 향해 거대한 문이 다가왔다.

그렇게 천천히 눈꺼풀이 닫히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번쩍하고 눈이 뜨였다.

직전까지의 고통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위는 그저 고요하기만 했고, 몸 아래는 푹신했다.

뒤이어 또렷해진 시야에 제일 처음 잡힌 것은 양손에 가로로 쥐여져 있는 스마트폰이었다.

……스마트폰이라고?

나는 다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 몸은 익숙한 침대 위에 올라 있었다. 익숙한 벽지와 익숙한 바닥. 익숙한 책상과 익숙한 책장이 보였다.

내가 있는 곳이 현실의 내 방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나는 스마트폰 화면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진짜 종말을 맞이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너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절벽 끝에 선 제임스의 뒷모습을 그린 세피아톤의 일러스트 옆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설마 전부 다 꿈이었던 걸까 하는, 너무나도 허탈하고 믿고 싶지 않은 생각에 나는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침대 위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 순간, 검은 스마트폰이 떨어진 하얀 이불의 한쪽 구석에서 빛나는 둥그런 물체가 보였다.

홀린 듯 손을 뻗어 물체를 집어든 나는 금세 그것을 알아보았다. 한 손을 꽉 채우는 부피감이 지나칠 정도로 익숙했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이곳에 있을 리는 없는 물건.

낯익은 회중시계가, 내 손에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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