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115화 (115/121)

115화. 히든루트 (5)

1899년의 마지막날 저녁.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회색 하늘을 머리 위에 이고서, 나와 밀리엄은 그레이스톤 섬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파도에 흔들리는 작은 배는 그리 편안한 탑승감을 자랑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나는 뱃멀미와 인연이 없었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채 불편하게 목을 꺾고 잠들어 있는 밀리엄을 가만히 응시했다.

보아하니 잠을 설친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곤 하지만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잠든 밀리엄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당겨 내 어깨에 기대도록 했다. 머리가 움직이는데도 밀리엄은 깨지 않았다.

나는 그의 잠든 얼굴을 한 번 보고, 뱃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 숨소리를 들어보려 노력했다.

그러고서 그에게 이 여정을 제안하던 순간의 일을 떠올렸다.

저택에 돌아온 나를 반갑게 맞이하던 밀리엄은, 내가 다녀왔다는 인사 직후 내뱉은 말에 적잖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나는 그런 그의 심정을 차고 넘치도록 이해했다.

그야 당황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어쩌면 난데없이 그 장소의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 견딜 수 없는 불쾌감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르지.

밀리엄은 그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본능적인 거부임을 모르지 않았으나 나는 계속해서 그를 설득하기 위해 말을 이어갔다.

‘그곳에서의 사건 이후 당신이 수사국을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때의 일이 당신에게 아주 좋지 못한 기억으로 남았으리란 것도 조금이나마 짐작이 가고요.’

그곳에서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속속들이 꿰고 있는 주제에 가증스러운 거짓부렁을 입에 담으며.

‘하지만 밀리엄. 로웰 씨가 사라진 건 어쩌면 기억을 되찾았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그리고 만약 그런 거라면…….’

‘자신에게 의미 있는 장소로 향했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실종되기 전 마지막으로 관여했던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니까요. 그것 이외의 다른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의미가 있을 겁니다. 없을 리가 없죠.’

그답지 않은 사나운 웃음과 함께 확신에 차 뇌까리던 밀리엄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감히 의미가 없다는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이제라도 의미를 만들어주겠다는 서늘한 다짐마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올바른 목적지를 골랐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확정된 이 여정이 밀리엄에게 또 다른 상처나 좌절을 안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야 했다.

그렇게 찾아든 불안감이 지금까지도 시시각각 심장을 뒤흔들고 있는 형국이다.

나는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든 밀리엄의 얼굴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며 어떻게든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다.

히든루트라는 게 어떻게, 어디까지 진행될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여기가 끝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또 다른 불안을 낳는 생각이었다.

꼭 그 생각 때문이랄 것은 없었지만, 나는 마지막 남은 회중시계 아이템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그리고 이마로 흘러내린 밀리엄의 앞머리를 조심스레 정돈해주며 주문처럼 내심 되뇌었다.

여태까지도 잘 해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가 끝이라면 분명 잘 끝날 테고…….

그리고 이 사람은 괜찮을 거다. 내가 무슨 선택을 하게 되더라도, 당신은 괜찮을 거야.

섬에 도착했다는 선장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나는 밀리엄의 머리칼을 정돈하던 손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도착했대요. 일어나요, 밀리엄.”

감겨 있던 눈꺼풀이 스르르 열렸다.

그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가, 자기 머리가 내 어깨에 기대어져 있는 상황을 인지했는지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막 깨어난 사람 특유의 조금 가라앉은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불편하지 않았어요? 그냥 두지.”

“그냥 두기엔 너무 불편한 자세로 자길래요.”

“난 어지간해선 불편한 줄도 모르니까 다음부턴 그러지 말아요.”

“보는 내가 불편했다는 뜻이에요.”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배는 선착장에 완전히 닿았고, 우리는 배에서 내리기 위해 갑판으로 나갔다.

겨울 저녁의 바닷바람은 기껏 단단히 갖춰 입은 겉옷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차가웠다.

나는 내 입을 빠져나간 하얀 입김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희뿌연 입김 너머로 그레이스톤 섬이 스산한 자태를 드러냈다.

그 모습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가 정신을 차린 나를 향해, 먼저 배에서 내린 밀리엄이 손을 내밀었다.

하얀 장갑을 낀 그 손에 검은 장갑을 낀 내 손을 얹은 순간이었다.

한참 나를 응시하던 밀리엄이, 어딘지 조금 비장하게까지 보이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아주 황당하고 멍청한 질문을 하나만 할게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기울이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선연한 금빛 눈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은… 베로니카 캠벨이 맞나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베로니카 캠벨이 맞냐니.

말마따나 황당한 질문이기는 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선 멍청하다기보다 당황스러운 질문에 가까웠다.

그야 물론 나는 베로니카 캠벨이 아니다. 나는 게임 주인공인 그녀의 몸에 빙의한 존재니까.

하지만…….

“……당연하죠. 뭐 그런 걸 묻고 그래요?”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단 말인가?

***

스산하기 짝이 없는 섬의 풍경과 달리, 사건이 일어났던 그레이스톤 저택으로 가는 길은 그리 험하지 않았다.

저택 자체가 절벽 위에 위치한 터라 조금 힘에 부치긴 했지만, 그래도 한때 사람이 살았던 곳답게 계단이 잘 닦여 있어 구둣발로 걸어 올라가는 데에도 무리는 없었다.

그리하여 저택으로 올라가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한 것은 길보다도 밀리엄의 태도였다. 혹은 밀리엄을 대하는 내 마음가짐이거나.

배에서 내리기 직전의 문답 이후 밀리엄은 다소 미묘하게 무언가 달라진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하, 그러게 황당하고 멍청한 질문이라고 했잖아요. 나도 참 당연한 걸 뭐 하러 묻고 있는지…….’

그렇게 웃어넘긴 주제에, 다음 순간 그는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처럼 미간을 찡그렸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에는 이렇다 할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길이 제법 멀어서 소소한 한담 정도는 얼마든지 나눌 법한데도, 그는 내내 묵묵히 입을 닫은 채 한두 계단을 앞서 걸었다.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딜 만한 구간이 나오면 어김없이 몸을 돌려 손을 잡아 주었지만 그저 그뿐.

그러나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그 미묘한 분위기에 신경을 쏟는 대신, 그저 이 섬이 그를 심란하게 만드는가 보다 하고 넘기기로 했다.

회피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식의 회피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대답을 했다. 그게 하필 거짓이었다는 점은 뼈아프지만, 그래서 뭘 어쩌라고?

내가 베로니카 캠벨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자면 여기가 게임 속 세상이라는 진실 또한 입에 담아야 하는데.

이 세상의 일원인 밀리엄에게 그 진실은 그저 잔혹하기만 할 뿐 아무런 가치도 없다.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다. 어떤 진실은 묻히는 편이 모두를 위해 옳을 수도 있다.

알아봐야 쓸 데도 없고 괴롭기만 할 진실을 구태여 반드시 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는 밀리엄에게 그런 것을 감당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베로니카. 잠시 혼자 저택 안을 돌아보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저 얼굴을 보라. 하등 쓸모없는 진실 따위를 얹지 않아도 충분히 많은 것을 짊어진 얼굴이다.

“그럼요. 나는 나대로 돌아다니면서 로웰 씨를 찾아보고 있을 테니까, 이따가 여기서 다시 만나요.”

나는 내가 맞는 선택을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밀리엄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우리는 저택의 중앙 홀에서 행로를 달리했다.

기억을 되새기듯 저택을 한번 훑어본 밀리엄은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밟아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그런 밀리엄의 뒷모습을 잠시간 응시하다가, 이내 저택 뒷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빠른 걸음으로 닫혀 있는 뒷문 앞에 도달한 나는 문고리를 잡기에 앞서 우선 마른침을 삼키고 심호흡을 한번 했다.

//<레드 헤링>을 플레이한 지 10년.

많은 것이 가물거리긴 하지만 비교적 또렷이 기억나는 요소들도 많다. //그리고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 문은 저택 뒤편의 절벽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문고리를 잡고 문을 밀었다. 요란하게 귀를 긁는 소리와 함께 낡은 문이 열렸다.

예상했던 바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풍경이 곧장 눈앞에 펼쳐졌다.

다시금 차가운 바닷바람이 살갗을 때리고 머리칼과 드레스 자락을 흔들었다,

거친 파도가 절벽과 부딪치며 일으키는 소음이 사방에 가득했다.

나는 시야를 가리며 흩날리는 머리칼을 귓가에서 붙잡은 채 절벽 쪽으로 나아갔다.

주변이 파도소리로 요란한 와중에도 내 기척을 느낀 것인지, 절벽 끝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던 남자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익숙한 얼굴을 한 금발의 남자, 제임스 로웰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이했다.

“오늘까지 와주시지 않으면 어쩌나 염려하던 참이었습니다. 남작님. 아니…….”

이윽고, 그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고 느낀 순간.

“이방의 신이라고 불러드리는 편이 정확하겠군요.”

왕국 최고의 명탐정이 말했다. 사건의 종결을 선언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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