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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113화 (113/121)

113화. 히든루트 (3)

아이고, 난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했더니.

학대할 만큼 미워했지만 죽어도 좋을 만큼은 아니었을 거라고?

내가 진짜 베로니카였다면 오히려 저 말에 더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베로니카가 아니었으므로 그저 조용히 분노를 삭이며 그럭저럭 납득의 수순을 밟았다.

그리고 그러던 참에, 집사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어쩌면 돌아가시기 전 남작님께 외국으로 떠나라 종용하신 것도, 물론 남작님께서는 거슬리는 조카를 영영 치워버리려는 것처럼 느끼셨겠지만 그분 딴에는…….”

모종의 위협으로부터 남작님을 보호하고자 하셨던 게 아닐까요.

그 말에 나는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지어야 했다.

물론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멍청한 짓까지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생각지도 못한 가설’을 들은 양 눈을 깜빡이며 속으로만 머리를 팽팽 굴렸다.

조지 캠벨이 죽기 전 베로니카에게 외국으로 떠날 것을 종용했었다니.

그건 마치…….

‘최대한 빨리, 아주 멀리, 누구도 너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치렴.’

레나 엘모어가 베로니카에게 남긴 경고와 상통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나?

레나 엘모어는 베로니카가 멀리 도망치길 바랐다.

조지 캠벨은 베로니카에게 외국으로 떠나라고 말했다.

이게 정말 아무 상관도 없이 일어난 우연일까?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캠벨 저택을 나섰을 때 바깥에는 느닷없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빗줄기보다도, 우산을 쓴 채 저택 현관 앞에 서 있는 낯익은 인영을 먼저 발견했다.

사위를 가득 채운 빗소리를 인식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나는 잠시간 그 자리에 멈춰 빗속에 선 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우산 아래에서 고개를 들고, 어쩐지 고민에 젖은 듯한 표정으로 비 내리는 회색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남자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걸까. 내 쪽으로 돌아선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긋한 음성이 빗소리를 뚫고 전해졌다.

“아, 베로니카.”

나는 등 뒤에서 나를 배웅하는 집사의 존재도 잊은 채로 홀린 듯 그를 향해 다가갔다.

“밀리엄? 당신이 왜 여기에…….”

“당신이 여기 있다기에 마중을 좀 나와봤어요.”

다정한 눈웃음과 함께 밀리엄이 말했다.

나는 순간 ‘아, 그런가요.’ 하고 대답하려던 멍한 정신을 황급히 붙잡았다. 마중이라니?

“아니. 내 말은, 병원에 안 있고 왜 여기에 있냐고요.”

“보고 싶은데 당신이 없어서요.”

“설마 또 탈출한 거예요?”

“아뇨. 퇴원을 했죠.”

“아직 며칠 더 입원해 있는 게 좋다고 의사 선생님이….”

“…처음엔 그러셨지만, 당장 퇴원시켜주면 좋은 일이 생기실 거라고 했더니 퇴원해도 좋다고 하셨어요.”

아무 짓도 안 한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밀리엄의 담당 의사는 내 상상 이상의 속물이었고 밀리엄은 그 허점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내가 못 살아. 퇴원하겠다고 의사를 회유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제 정말 괜찮으니까요. 며칠 더 입원해 있으라는 건 아마 입원비를 뜯어내려는 장삿속이었을걸요.”

“내가 보기엔 아닌데요.”

“내가 보기엔 그랬어요. 요양은 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고요.”

“이건 집에서 요양하는 게 아니잖아요.”

“빠른 회복을 위해서는 적당한 운동과 기분전환이 필요한 법이죠.”

우산 아래의 밀리엄이 빙긋 웃으며 말했고,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미련 떤다고 화를 내기엔 환자복이 아닌 옷을 입고 멀쩡하게 서서 웃는 그가 지나치게 반가운 탓이었다.

그래서 허탈하게 웃고 있자니, 밀리엄이 갑자기 질문을 건네왔다. 조금 나직하고 약간은 진지하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그런데 여긴 갑자기 무슨 일로 온 거죠?”

밀리엄은 그렇게 말하며 약간 싸늘한 눈빛으로 캠벨 저택 쪽을 응시했다.

별로 좋은 기억이나 사람이 있는 곳도 아닐 텐데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냥, 집사님께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비어슨 씨에게 말입니까?”

“네. 백부님이 어린 저를 굳이 데려가셨던 이유가 궁금했거든요.”

“그래서, 바라던 답은 얻었나요?”

그렇다고 말하려던 나는 일순 주춤했다. 바라던 답이라.

조지 캠벨이 조카를 데려갔던 이유라면 물론 대충 어림짐작으로나마 알게 되긴 했다.

그러니까 바라던 답을 얻지 못했다고 말할 만한 상황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의문이 해결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외려 더 큰 의문을 안게 되었으니 아니라고 대답해야겠지만…….

“……얻었어요.”

“정말로? 그렇다기엔 영 시원치 못하다는 표정인데요.”

“정말이거든요? 별로 유쾌한 답이 아니어서 살짝 기분이 가라앉은 것뿐이에요.”

나는 내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듯한 밀리엄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대꾸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답을 얻은 것도 맞고 그게 썩 유쾌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니까.

그러나 ‘그렇군요.’ 하고 대답한 뒤에도 은근히 내 표정을 살피는 밀리엄과 눈길이 스쳤을 때, 나는 마치 거짓말이 들통날까 겁내는 어린애가 된 것처럼 마음을 졸여야 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참아내지 못한 나는 억지로라도 밀리엄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애써 밝은 척 말을 꺼내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여기까지 날 마중 나온 건 어느 쪽이에요? 적당한 운동과 기분전환 중에.”

“당신을 만나기 전까진 전자였죠. 조금 전에 후자가 됐고, 지금부터는 쭉 후자일 예정이고.”

“이대로 저택에 돌아갈 계획은 아니라는 것처럼 들리네요…….”

“어쩔 수 없어요. 내가 다 들어버렸거든.”

내 감정을 긴밀히 살피는 듯한 시선은 그대로 유지한 채, 밀리엄이 살포시 눈꼬리를 휘며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대신 그를 빤히 쳐다보며 눈을 한번 깜빡였다.

그것이 질문임을 알았는지, 밀리엄이 돌연 내 쪽으로 살짝 허리를 숙였다.

우산이 낮아지며 금빛 눈이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그렇게 나와 눈을 맞춘 그가 짐짓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납치되던 날, 마차에 두고 내린 짐에 대해서요.”

***

납치되던 날 마차에 두고 내린 짐 이야기를 꺼낸 순간 대충 짐작했던 대로, 밀리엄과 나를 태운 마차가 멈춘 곳은 손튼 부인의 가게 앞이었다.

“뭐가 ‘다 들어버렸거든.’이에요? 그날 나한테 손튼 부인의 디저트를 먹고 싶다고 말한 건 당신이었잖아요.”

“내가 들어버린 건 마차에 두 명분의 디저트 세트가 포장된 채 놓여 있었다는 이야기여서요.”

“그럼 뭐가 달라지나요?”

“많은 게 달라지죠. 당신이 그걸 나와 함께 먹어줄 셈이었단 뜻인데.”

별로 대단히 낯뜨거운 말도 아니었는데 순간 광대뼈 부근이 후끈해졌다.

나는 고개를 휙 돌려 밀리엄을 올려다보았다가, 능청스레 웃고 있는 얼굴을 확인하곤 다시 쌩하니 고개를 내리며 시치미를 뗐다.

“같이 먹어주려던 거 아닌데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완전 헛다리예요.”

“그래요, 그럼. 아닌 셈 칩시다.”

“진짜 아니라니까요?”

“알았다니까요. 그래도 당신은 자비로운 숙녀인 만큼, 완전히 헛다리 짚고 아쉬움에 몸부림쳤던 이 가여운 영혼에게 은총 정도는 내려줄 수 있지 않겠어요?”

디저트 좀 같이 먹는 게 뭐라고 아쉬움에 몸부림씩이나 쳤단 말인가?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밀리엄을 향해 눈을 흘겼다.

사람을 놀려먹기로 작정한 듯 음흉한 웃음기를 한껏 머금은 입가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한참 눈을 흘기다가 무언가 불길한 기분에 가게 쪽을 슬쩍 돌아본 나는, 창가에 서 있는 손튼 부인을 발견했다.

손튼 부인은 아주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웅다웅하는 손주들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듯한 시선에는 다 자란 성인의 자아를 견딜 수 없이 민망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나는 결국 항복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생산성 없는 말꼬리 잡기가 길어질수록 손튼 부인의 인자한 미소 또한 점점 짙어지고, 결국 밀리엄처럼 뻔뻔해질 수 없는 나만 점점 더 민망해질 것이 분명했으므로.

“알았어요, 알았어. 은총이든 뭐든 내려줄 테니까 영광인 줄 알고 얼른 들어가기나 해요.”

내 말에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린 밀리엄은 좀 전까지의 장난질 따위 다 환영이었다는 양 부드럽게 나를 에스코트해 가게 안으로 이끌었다.

손튼 부인과 안나의 환영 인사 이후로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우리는 저번에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았고, 밀리엄은 그가 저번에 시켰던 바로 그 메뉴를 주문했다.

어김없이 등장한 3단 트레이 역시 저번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으나, 나는 저번에 느끼지 못했던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끼며 목덜미를 긁적여야 했다.

그럭저럭 즐거운 시간이 흘러갔다. 밀리엄과의 대화는 중간중간 끊어졌으나 대체로 매끄럽게 이어졌다.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의식적으로 깊거나 진지한 대화를 피하고 있음을 인지했지만, 굳이 그런 스탠스를 바꾸지 않았다.

밀리엄은 특정한 화제를 조금씩 비껴가는 내 태도에 이의를 제기하는 대신,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능숙하게 화두를 돌려주었다.

나는 그런 배려 또한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디저트 타임이 끝나고, 밀리엄이 마차를 불러올 테니 안에서 기다리라며 먼저 가게를 나선 아주 잠깐 사이.

“남작님.”

어쩐지 진지하게 들리는 부름에 고개를 돌리자, 예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고 있는 손튼 부인이 보였다.

“네, 손튼 부인.”

“살다 보니 알겠더군요.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말이 있다면, 아무리 터무니없는 말이라도 일단 전해두는 게 낫다는 걸요.”

“어…… 네?”

“그게… 이제 제 곁에 없는 누군가가 마지막까지 애타게 기다린 한마디란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버리는 것보다는 말이에요.”

늙은이의 주책맞은 오지랖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이는 목소리는 결코 가벼이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차마 그녀의 말에 무어라 대답하지 못한 채 그대로 가게를 나서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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