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푸른 달리아 (5)
조금 당황스러웠으나, 어떤 의미에선 아주 이해하지 못할 감정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제임스가 밀리엄을 향해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의 심정을 어렴풋이 눈치챘기 때문이 아닐까?
제임스 로웰의 존재가 그간 밀리엄에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을지는 굳이 가늠해볼 필요도 없을 만큼 자명했다.
그는 제임스가 어서 기억을 찾길 바란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제임스 로웰을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순간 그가 이대로 증오심에 사로잡혀 제임스를 죽게 내버려 두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있대도 이상할 것은 없으리라.
그렇지만…….
[ 1. 밀리엄. 구하고 싶지 않으면 그렇게 해요.
2. 밀리엄, 지금 뭘 고민하고 있는 거예요? ]
나는 눈앞에 떠오른 잔인한 선택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걸 내가 선택해야 한다는 현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고 나에게나 밀리엄에게나 결단은 필요했다. 그래. 그러니까.
나는 입술을 꾹 사리물었다가, 이내 밀리엄을 향해 말했다.
“밀리엄, 지금 뭘 고민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자 밀리엄이 어딘지 조금 멍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는 전에 없이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채 혼잣말을 하듯 입을 열었다.
“베로니카, 나는…….”
“정신 차려요!”
나는 혼란해하는 밀리엄의 어깨를 붙들고 외쳤다.
“저대로 죽게 둬도 정말 괜찮겠어요? 저 사람과의 일을 이렇게 끝내버리고 평생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고요!”
내 말을 들은 밀리엄의 눈빛이 별안간 사정없이 흔들렸다가, 돌연 또렷이 돌아왔다. 급한 마음에 되는대로 내뱉은 말이었는데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밀리엄은 제 어깨를 잡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나가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요. 이렇게 끝내버릴 수는 없죠.”
그것은 내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그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말을 쏟아내느라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제임스에게 손을 뻗는 밀리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밀리엄의 손을 붙잡은 제임스가 위로 올라왔다.
밀리엄은 제임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다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눈을 내리깐 채 파르르 떨리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밀리엄에게, 그러나 그를 올려다보지는 않는 채로 제임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구해주지 않으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잊어버린 우리의 과거로부터…… 그런 식으로 해방되길 바라실 수도 있겠다고요.”
“조금도 바라지 않았다고 말하진 않겠습니다.”
떨리는 손을 꾹 말아쥔 밀리엄이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그렇게 말아쥔 주먹을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를 한번 보았다가, 이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제임스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해방되는 건 기실 내가 아니라 당신일 테고…….”
“켄트우드 씨.”
“당신에게 그런 마지막은 과분하니까.”
서늘한 듯 뜨거운 목소리가 잔잔하게 사위를 뒤흔들었다.
***
손에 들려 있던 모노클이 파스스 사라졌다.
벽에 걸린 액자를 들어내자 안쪽에 걸린 열쇠꾸러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곧장 그것을 낚아챘다.
[ ‘열쇠꾸러미’를 획득했다. ]
리디아 에버렛과의 추격전 이후 우리는, 몇 번 헤매긴 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들키지는 않은 채로 무사히 1층까지 내려오는 데 성공했다.
중앙에 넓게 퍼진 핏물을 봤을 때는 어쩔 도리 없이 속이 메스꺼워졌다.
비위가 상해서라기보다는, 라이오넬 에버렛과의 대화가 떠올라 마음이 불편해져서였다.
그는 자신의 가족들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실은, 마지막 남은 한 사람 정도는 돌아와 주기를 내심 바라지 않았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입안이 썼다.
혹시 이 모든 일이 끝나고 그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누나의 최후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그냥 입을 다무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려나.
그런 씁쓸한 고민을 거듭하며 나는 두 남자와 함께 복도에 늘어선 수많은 방의 문고리를 하나씩 돌려보고 다니기 시작했다.
문들은 하나같이 전부 잠겨 있었다. 문고리를 돌리자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도 모두 같았다.
문 너머에서 낙원으로 향할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신도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입안이 한층 더 씁쓸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잠긴 문고리를 한번씩 돌려보고 다니다 도착한, 유일하게 열려 있던 방이 이곳이었다.
시점이 시점인 만큼 나는 망설임 없이 모노클을 사용했다. 이렇게 단번에 열쇠 꾸러미를 획득할 줄은 몰랐지만.
예상 이상의 소득을 얻어 방을 나서자 먼발치에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멜리사와 경관들이 보였다.
나는 빠르게 가까워지는 그들을 보며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부터 저들과 함께 신도들을 구출하러 나서면 네 번째 사건을 막을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럴 거라고 섣불리 단정 짓기엔 끌려간 아리아 오큘러스가 눈에 밟혔고, 아직까지 마주하지 못한 교주… 벤자민 홉스가 마음에 걸렸다.
열쇠의 발견이나 경관들과의 조우가 생각보다 수월하게 이루어졌다는 것도 명백히 불안한 지점이었다. 분명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냄새가 나는데.
나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멜리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밀리엄을 바라보았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듯 보였지만 낯빛은 창백했고 표정도 일그러진 채였다.
“위브 수사관님.”
“네, 남작님.”
“로웰 씨와 경관님들과 함께 사람들을 구출해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어… 그럴 생각이긴 했습니다만 남작님은요?”
“저는 반대쪽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아까 중앙 홀 안쪽에 큰 문이 있는 걸 봤거든요. 그 안에 교주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교주의 얼굴을 알고요."
내 말에 밀리엄이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그게 무슨…… 베로니카. 설마 혼자 가겠다는 건 아니지요?”
“사람들이 죽는 걸 막는 게 우선이잖아요. 인력을 나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럴 필요가 왜 없습니까. 교주를 체포하는 일도 중요하고 위험해요. 하다못해 나라도 함께……”
“당신은 지금부터 꼼짝도 하지 말고 어디 앉아서 쉬어요. 상처 벌어졌죠?”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흘겨보며 지적했고, 밀리엄은 낭패감 어린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랬다가, 그럼에도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다시 말을 꺼냈다.
“그렇다고 혼자 가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그렇게 나올 것 같기는 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기는 하지.
그러나 나라고 내세울 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구태여 그 방에 다시 데려다 놓으려 했던 정황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교주의 목적은 베로니카를 죽이는 것이 아닐 터였고.
“이상하게 들릴 거라는 건 아는데, 내가 혼자 가야만 알아낼 수 있는 진실이 있을 것 같아서 그래요.”
“베로니카.”
“밀리엄.”
내 것도 아닌 이름쯤 수십 번을 들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나는 내 진짜 이름 따위 영영 모를 남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한껏 진지한 얼굴로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 어떤 마법적 설득력이 주어진다고 한다면 유리한 것은 당연히 내 쪽이다.
“애초에 진실을 알고 싶어서, 위험해질 걸 감수하고 시작한 일이잖아요.”
메이슨 교단이 베로니카를 모종의 이유로 중시한다는 사실은 며칠 전 병실에서 이미 털어놓은 바.
나는 그것이 ‘내가 혼자 가야만 알아낼 수 있는 진실’이라는 말에 일말의 설득력을 불어넣어주리라 믿었다.
나 또한 반쯤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기도 했다.
밀리엄이 아닌 베로니카 캠벨이 <블루 달리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시점에 밀리엄에게 핸디캡이 주어진 건 플레이어가 홀로 최종국면에 임해야 한다는 어떤 암시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마당이다. 남의 개입을 통해 넘을 수 있는 고비는 다 넘었다고 봐야 한다.
더군다나 안전을 챙긴답시고 누굴 달고 갔다가, 그 사람이 전개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건 또 무슨 낭패란 말인가?
나는 어떻게든 혼자 교주를 만날 생각이었다.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없다면 감정에 호소해서라도.
내 말을 들은 밀리엄은 잠시 동안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무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식은땀을 흘리며 순간순간 이마를 찡그리는 것이 영 보기 불안했지만, 나는 굳이 다시 얼른 가서 쉬라거나 하는 말로 그의 고민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깊고 착잡한 한숨과 함께 밀리엄이 말했다.
“……지금 하는 말이 순 억지라는 거, 알고는 있는 거죠?”
“알아요. 하지만 그 몸으로 날 구하겠다고 여기까지 온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요.”
“한 마디를 안 지네요.”
“원래 억지는 지기 싫어서 부리는 거잖아요.”
“조금이라도 다쳐 오면 앞으로 다시는 당신 억지에 넘어가주는 일 없을 줄 알아요.”
짐짓 협박하듯 말한 밀리엄이 결연할 얼굴로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나는 끝까지 반대하고 나서는 멜리사에게 ‘남작님께서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신 모양이니 일단 보내드리자’고 말하는 밀리엄을 잠시간 가만히 응시했다.
앞으로 다시는, 이라.
왠지 심장 한 구석이 쓰라려오는 말이다. 우리에게 ‘앞으로’가 있을까?
만약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선택할 것인가, 혹은 외면할 것인가.
당연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일단 가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일이기에, 나는 이내 몸을 돌려 중앙 홀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