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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105화 (105/121)
  • 105화. 푸른 달리아 (4)

    “그게… 사실입니까?”

    밀리엄이 주춤하며 되물었고 나는 짐짓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이가 아리아 오큘러스였다니…….”

    기절한 채 끌려간 조이를 걱정하는 두 사람에게 조이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해준 직후였다.

    밀리엄은 생각 이상으로 충격을 받은 듯싶었다. 그는 얼굴에 고스란히 떠오른 경악감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고 뭐고 할 새도 없이 당장 오늘이 12월 25일이라는 말을 들어버렸던 조금 전의 내 얼굴이 꼭 저랬을까?

    제임스 또한 심각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조이와 크게 접점이 있지 않았던 그에게도 적잖이 당황스러운 소식인 모양이었다.

    “아, 물론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란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사람이 그렇게 험한 방식으로 끌려갔으면 그게 누구든 걱정은 하는 게 도리죠.”

    나는 혹시나 내 말이 타이밍상 ‘그러니까 조이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매정한 말로 들렸을까 싶어 급하게 첨언했다.

    솔직히 나도 걱정이 됐다.

    엄밀히 말하자면 조이… 아니, 아리아의 신변 자체를 걱정한다기보단 그녀에게 미처 답을 듣지 못한 의문들을 신경 쓰는 것에 가까웠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그녀가 잘못되지 않길 바란다는 점에서는, 대충 걱정이라 포장해도 거짓말이 되지 않을 터였다.

    아무튼 내가 본의 아니게 터뜨린 폭탄 덕에 잠시간 찾아왔던 침묵 이후,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제임스였다.

    그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로브 안쪽에서 폭죽과 성냥을 꺼내 들고는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 다음 폭죽 끝에 불을 붙여 창밖으로 휙 던졌다. 이윽고 펑 하고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리며 창문 바깥으로 빛이 번쩍했다.

    “밖에서 경관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개인 사유지라 범죄사실이 확실해지기 전까진 대규모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해서요. 남작님을 찾고 나면 납치 사실이 입증되니 곧장 신호를 보내기로 했죠.”

    하기야 12월 25일에 피아벨 대수도원에서 메이슨 교단의 신도들이 단체로 죽어 나갈 것이라는 말로는 경찰을 설득하기 어려웠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납득하는 사이, 밀리엄이 난간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단 최대한 빨리 저쪽에 합류해서 이곳 상황을 설명하고 사람들을 구출하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조금 회의적입니다, 켄트우드 씨. 낙원에 가겠다며 자기 발로 모인 사람들이 이쪽에서 구하려 든다고 순순히 협조적으로 나와주겠습니까? 그냥 보육원 아이들만 확보한 뒤에 교주를 찾아내 체포하는 편이…….”

    “억지로라도 끌어내야지요. 저 많은 사람들이 종말이니 낙원이니 하는 헛소리에 속아 죽는 꼴을 두고 볼 순 없습니다. 교주도 물론 찾아내야겠지만.”

    나는 어쩐지 소소한 듯 소소하지 않은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는 밀리엄과 제임스를 번갈아 살폈다.

    보아하니 여기 들어오기 전부터 어느 쪽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지 의견이 갈렸던 모양이다.

    왠지 내 의견을 말해야 할 것 같은 타이밍이었으므로 나는 빠르게 내 입장을 정리했다.

    “저도 사람들을 구하는 쪽에 최대한 많은 인력을 할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로웰 씨. 자기 발로 온 광신도들과 얼결에 끌려온 사람들을 구분할 수도 없는 데다가, 일단 많은 신도의 신변을 확보해둬야 후일 교단에 대해 조사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요.”

    ‘후일’이라는 대목에서 제임스 로웰의 눈가가 움찔 떨린 것 같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반응에 일일이 신경을 쓸 수 있는 시점이 아니었다.

    제임스가 굳이 무어라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교주를 빨리 찾아내야 하는 것도 사실이죠. 그러니까…….”

    “미안한데, 베로니카. 지금은 일단 다시 움직이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말을 끊고 들어온 밀리엄이 내 팔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 시선은 반대쪽을 향한 상태였다.

    나는 밀리엄이 보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가 어째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는지를 깨달았다.

    “어머나, 거기 계셨군요.”

    반대편에서 리디아 에버렛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뛰고 있지는 않았으나 금방이라도 달리기 시작할 것 같은 모양새였고 손에는 총을 든 채였다.

    물론 그녀는 혼자였고 우리는 셋이었으므로, 머릿수만 놓고 보았을 땐 이쪽이 유리해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밀리엄은 환자고, 나는 내가 몸싸움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짐 덩어리라는 걸 알고 있다.

    총을 쏴서 다리를 맞춰 제압한다거나 할 수 있으면 좋을 테지만 나는 움직이는 물체를 제대로 조준해 맞출 자신이 없었다.

    리디아 에버렛 역시 총을 들고 있는 이상, 연달아 두 발밖에 쏠 수 없는 나보다는 가진 총알도 많고 맞출 상대도 많은 그녀가 유리할 터였다.

    게다가 수적으로 열세라는 걸 알 텐데도 혼자서 저렇게 서슴없이 달려드는 걸 보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닐까?

    지난날 밀리엄과 대등하게 몸싸움을 벌였던 수잔 로이드를 떠올리자 불길함이 엄습했다.

    리디아 에버렛이라고 수잔 로이드 같은 수준의 체술을 익히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나?

    나는 내 팔을 붙들고 곧장 달리기 시작한 밀리엄을 따라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제일 뒤에서 달리게 된 이는 제임스였다.

    나는 날 듯이 달리는 중간중간 뒤를 돌아보며 리디아의 태세를 확인했다.

    우리의 뒤를 바싹 쫓아오고 있는 그녀는 이쪽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도로 내려놓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지만 지난번 밀리엄을 대뜸 총으로 쏜 전적이 있는 그녀가 행여 밀리엄이나 제임스를 쏘게 될까 조심하고 있을 리는 없다.

    나는 그녀가 이쪽으로 총을 쐈다가 실수로 나를 맞추게 될까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대로 계속 거리가 좁혀지다간 제일 뒤에 선 제임스가 표적이 되리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밀리엄, 손 좀 놔줘요. 내가 제일 뒤로 가는 게 낫겠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뛰어요!”

    내가 다급히 외쳤지만, 밀리엄은 죽어도 놓지 않겠다는 듯 외려 팔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나를 바짝 끌어당겼다.

    그렇게 얼마간 더 달렸을 때 눈앞에 나타난 것은, 척 보기에도 몹시 위태로워 보이는 흔들다리였다.

    밀리엄은 미친 듯이 출렁이는 다리를 아무렇지 않게 밟아 달렸다.

    나 역시 그에게 붙들린 채 서너 걸음에 한 번은 공중에 붕 뜨기를 반복하느라 조심스럽게 다리를 건널 여유 따위는 없었다.

    문제는 제임스였다. 내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어째선지 다리를 앞에 두고 일순 뜀박질을 멈추고서 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상태였다.

    금세 다시 달리기 시작하긴 했지만, 그 잠시의 망설임 탓에 리디아와의 거리가 완전히 좁혀져 있었다.

    그사이 다리 반대편에 도착한 나와 밀리엄은 일단 발을 멈추고 다리 중간의 제임스와 리디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제임스는 더 뛰어봤자 따라잡히리라는 걸 알았는지 아예 몸을 돌려 리디아를 마주 보았다.

    나는 불안한 심정으로 제임스의 뒷모습을 보며 더듬더듬 손을 뻗어 밀리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제발 두 사람 다 여기까지 맨몸으로 온 건 아니라고 해줘요.”

    “입구에서 몸수색을 당했습니다. 신도인 척 위장하고 들어오느라 응할 수밖에 없어서….”

    “폭죽은 들고 왔잖아요!”

    “돌보던 보육원 아이들과 마지막 불꽃놀이를 하겠다고 우기고 우겨서 겨우 가져온 거예요.”

    “그럼 진짜로 맨몸이라는……”

    탕! 하는 총성이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잠시 리디아와 제임스에게서 눈을 뗐던 나는 다급하게 다시 그들 쪽을 보았다.

    다행히 제임스는 총에 맞지 않은 상태였다.

    딱 그 점만이 다행이라 문제였지만.

    리디아가 쏜 총을 제임스가 피한 것인지, 혹은 다리가 출렁거리면서 조준이 잘못된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총알이 절묘하게도 다리를 지탱하고 있던 줄 하나를 끊어버린 모양이었다.

    다리가 크게 흔들렸다.

    줄이 끊어지기 무섭게 급히 달려 다리의 거의 끝까지 다다른 리디아와 제임스가 동시에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것이 보였다.

    더 크게 휘청한 리디아의 몸이 다리 아래로 완전히 빠져나가는가 싶었을 때는 일순 안도감이 들었으나, 그것은 정말 일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다리 아래로 추락하던 리디아가 제임스의 발목을 붙들었다.

    끊어지지 않은 쪽의 다리 난간을 간신히 낚아채 매달렸던 제임스가 이를 악물고 사나운 표정으로 아래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발목을 흔들었다. 그것이 분명 맞는 선택이었는데도, 나는 순간 그 거침없는 행동에 조금의 위화감을 느꼈다.

    이윽고 리디아 에버렛의 손이 곧장 속절없이 미끄러졌다.

    뒤이어 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저 아래 바닥에서 들려왔으나 나는 제임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리디아 에버렛은 추락했고, 제임스 로웰은 다리 끝에 간당간당 매달려 있었다.

    혼자 올라올 수는 없는 모양새지만, 그래도 이쪽에서 손을 뻗으면 어찌어찌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베로니카의 팔은 짧아서 닿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바로 밀리엄을 보았다.

    그러나 곧장 달려나갈 줄 알았던 밀리엄은 그 자리에 멈춘 채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다리에 매달린 제임스 로웰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흔들리는 눈빛. 꾹 움켜쥔 주먹.

    그 순간 나는 밀리엄이 갈등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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