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푸른 달리아 (3)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나는 ‘피아벨 대수도원’이라는 말에 어금니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자문했다.
오늘이 몇 일이지?
물론 그것은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납치된 이후 얼마나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으니까.
설마 벌써 25일이 지나버린 건 아니겠지?
여태까지 플레이어로서의 내 포지션이라는 게 늘 이미 일어난 사건을 뒤늦게 해결하는 입장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니까 요컨대 각자 그릇에 맞는 일을 해보자는 겁니다. 나는 그날까지 무슨 수를 써서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교단에서 빼내기 위해 노력할 테니…….’
‘그게 어려우시다면, 부디 다가오는 12월 25일에 아이들이 피아벨 대수도원에 가는 것만이라도 막아주십시오.’
……아니야. 아닐 것이다. 설마 벌써 25일이 지나버리지는 않았을 거야. 마지막 사건 정도는, 스케일이 미쳐버린 만큼 분명 막을 기회도 함께 주어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내딛으려다가, 이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버렸다.
아직 12월 25일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래서 아직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기회가 있다고 한다면…….
그 기회는 이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남작님?”
멈춰버린 나를 눈치챈 아리아 오큘러스가 다시 뒤를 돌아 나를 불렀다.
나는 대답을 하거나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대신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생각했다.
‘……저희는, 또 다른 파벌 같은 게 아닙니다.’
아리아 오큘러스는 매우 높은 확률로 루크 엘모어가 말한 ‘저희’ 중 하나일 것이다.
루크 엘모어는 자신들이 또 다른 파벌 같은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어쨌거나 교단에 속해 있는 이상 어떤 식으로든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을 터.
나는 이쯤에서 그들의 진의와 목적에 대해 알아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목표로 두는 게 맞는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크게 한번 숨을 들이켜고, 주먹을 꾹 움켜쥔 채, 질문을 건네기 위해 아리아 오큘러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하필 그 시점에.
“찾았다! 저쪽이야!”
머리 위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울려퍼졌다. 그에 뒤이어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순식간에 인상을 구긴 아리아 오큘러스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내 팔을 낚아채어 빠르게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추격자들을 따돌리려는 아리아의 노력은 가상했다. 그녀는 정말로, 나라는 혹을 달았다는 사실조차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달렸다.
그러나 다구리에 장사 없다는 옛말은 여기서도 빛을 발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둘로 갈라져 쫓아온 추격자들 탓에 나와 아리아 오큘러스가 끝내 양쪽에서 포위되고 만 것이다.
이쪽도 저쪽도 막혀버린 상황. 나는 하얀 로브를 뒤집어쓴 추격자들과 그들을 노려보는 아리아 오큘러스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잠깐의 대치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아리아 쪽에 있던 추격자 중 하나가 그녀를 붙들었다.
그러고는 힘껏 저항하는 그녀의 뒷목을 손날로 쳐 기절시켰다.
어우, 세상에.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 앞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축 늘어진 아리아 오큘러스의 몸을 어깨에 들쳐 업은 이가 잠시 내 쪽을 보는가 싶더니 돌연 말을 꺼냈다.
“남작님은 다시 방으로 모시라는 교주님의 지시다.”
그 말을 듣고, 내 뒤쪽에 서 있던 추격자 중 둘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방금 전의 장면을 떠올린 나는 기겁을 하며 외쳤다.
“내, 내 발로 갈게요!”
그러자 다가오던 두 사람이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너무 다급해서 빽하고 소리를 질러버린 탓인지 맞은편의 남자도 조금 놀란 눈치로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럴 상황이 아닌 걸 알면서도 조금 민망해졌지만 나는 일단 최대한 당당한 체를 했다. 그리고 나름 항복의 의미로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절대 저항 안 하고 곱게 따라갈게요. 그러니까 기절시키지 말아요.”
아직 오늘이 몇 일인지도 모르는 와중이다.
도로 끌려가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다시 정신을 잃고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내 말을 들은 맞은편의 남자는 잠시간 침묵하더니, 이내 내 쪽으로 다가왔던 두 사람에게 다시 지시를 내렸다.
“정중하게 모시도록.”
두 사람이 남자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내 양팔을 붙들어왔고, 나는 그들이 인도하는 대로 몸을 돌렸다.
하얀 로브를 푹 뒤집어쓴 두 사람에게 끌려가며 나는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나머지 추격자들과, 개중 대장격으로 추정되는 남자와, 그의 어깨에 힘없이 걸쳐진 아리아 오큘러스의 모습이 빠르게 멀어져갔다.
두 명의 신도 역시 나를 데리고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다시 방으로 모시라고’ 했으니 아마 아까 그 방으로 데려가려는 거겠지.
나는 길이라도 외워두려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러나 워낙 정신없이 지나온 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길이 있는 걸까.
두 신도가 날 데리고 나아가는 길은 아주 낯설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분명 올라가야 할 텐데도 묘하게 내려가는 계단이나 내리막길을 지나는 일이 잦았다.
심지어는 중간중간 멈춰 서기도 했는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 같으면서 묘하게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기도 했다.
설마 이 사람들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다시 그 방에 끌려가지 않아도 된다면 그건 좀 달가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별안간 또다시 걸음을 멈춘 두 신도가 어째선지 내 팔을 놓았다.
나는 순간 지금이 도망쳐야 할 타이밍인지를 고민했다.
도망칠 수 있을까? 난 달리기가 빠른 편도 아니고 베로니카의 몸은 이미 지쳐 있는 상태인데…….
“이럴 땐 고민할 게 아니라 일단 도망치고 보는 겁니다.”
……음?
느닷없이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상황에서는 절대 들려올 리 없는,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
나는 내가 이제 기어이 환청까지 듣나 생각하며 고개를 옆으로 들어 올렸다.
“공연한 저항으로 다치거나 하지 않은 건 백번 잘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나 틈을 보였는데 여기까지 순순히 끌려오다니…….”
“……남작님께서도 분명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셨겠지요.”
그러나 환청이라기엔 너무 생생한 데다 지속력이 상당했고 부록까지 딸려 있었다.
반대쪽에서 들려온 목소리까지 귀에 익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 생각도 않은 채 눈앞의 하얀 로브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로브 끝자락을 잡은 순간, 나직한 한숨 같은 게 들리는가 싶더니 상대의 손이 내 손목을 부드럽게 붙잡아왔다.
그러고는 휙.
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브의 모자 부분을 뒤로 넘겨버렸다.
이윽고 너무도 익숙한 밀색 머리와, 어쩐지 조금 원망의 빛을 담고 있는 금빛 눈이 시야에 잡혔다.
나는 입을 벌리고 있음에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만 깜빡거렸다.
손목을 잡은 따뜻한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간 것은 그때였다. 조금도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그것이 제 존재감을 알아달라는 무언의 압박이라는 걸 무의식중에 깨달았다.
그제야 벌어진 입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밀리엄……?”
“가끔은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야 할 필요도 있어요, 베로니카.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밀리엄이 왜 여기 있지?
“남작님께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셨다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해졌을 것 아닙니까. 켄트우드 씨, 야속하신 마음은 알겠지만 남작님께 너무 뭐라고 하지는 마세요.”
“……로웰 씨?”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제임스 로웰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여전히 입을 벌린 채 앞뒤를 번갈아 보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똑바로 파악해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피아벨 대수도원에 납치되어 온 상태고, 감금되었던 방에서 탈출했다가 추격자들에게 붙잡혀서 도로 끌려가던 참이었고, 그런데 날 데려가던 추격자들이 알고 보니 밀리엄과 제임스였고, 그렇다는 건 다시 말해…….
“두, 두 사람 혹시 날 구하러 온 거예요?”
“혹시라니. 세상에, 베로니카…….”
밀리엄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자기 이마를 짚더니 그대로 마른세수를 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합니까. 당신이 대로변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했다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다고…….”
“아니, 방금 건 말실수……가 아니지. 당신은 가만히 있었어야죠! 환자가 어딜 막 돌아다니고 있는 거예요?”
미쳤나 봐, 진짜! 나는 밀리엄의 어깨를 짤짤 흔들고 싶은 기분이 되어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입을 쩍 벌렸다.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돌아다니고 있는 겁니다. 아까도 봤겠지만 뛰어도 아무 이상 없을 만큼 아주 멀쩡하고요.”
“설마 내가 당신이 퇴원해서 찾으러 올 정도로 오래…….”
“그건 아닙니다, 남작님. 남작님께서 납치되신 지는 이틀이 지났고, 켄트우드 씨는 현재 공식적으로 의사 선생님 몰래 병원을 탈출해 있는 상태입니다.”
“미쳤나 봐, 진짜!”
그럼 결국 아직 환자라는 건데 저걸 한 대 때릴 수도 없고!
제임스의 부연설명을 들은 나는 어이를 상실한 채 눈을 부릅뜨고 밀리엄을 올려다보았다.
절대안정을 취해야 하는 환자 주제에 내 앞에서 뜀박질씩이나 해놓고도 자긴 그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는 듯 뻔뻔하기 그지없는 얼굴이다.
솔직히 몇 마디 더 쏘아붙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안도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 쉽사리 입이 열리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여기까지 와버린 것을 어쩌겠는가.
이제 와서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게 가능한 상황도 아니니 그냥 이 이상 무리하지 못하도록 잘 감시하는 수밖에.
결국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꾹 닫았다.
그제야 내 손목을 놓은 밀리엄이 이번에는 내 뺨을 감싸고 엄지로 이마를 매만지며, 그래도 조금 전보다는 내 눈치를 좀 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없어요. 당신보다 내가 백 배는 멀쩡할걸요.”
“혹시라도 당신이 잘못됐을까 봐 지난 이틀 동안 내가 얼마나…….”
“잠깐만, 잠깐만요. 밀리엄.”
나는 급히 그의 말을 끊었다. 쉴 틈 없이 이어질 게 분명한 낯 뜨거운 염려의 말들이 부담스러워서는 아니었다.
이틀. 이틀이라고 했지.
조금 전에 제임스도 그랬고 방금 밀리엄도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 내가 납치된 지 이틀이 지났다는 건…….”
“맞아요.”
내 말에 밀리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이 12월 25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