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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103화 (103/121)

103화. 푸른 달리아 (2)

조이는 당장 나갈 수 있는데 왜 그러냐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조이를 향해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입을 열었다.

“조이. 나가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하시고 싶은 말씀이라니……. 저에게요?”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고 해도 좋을지는 잘 모르겠어. 그래도 일단 들어줬으면 해.”

영문은 모르겠지만 알겠다는 듯이 조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다시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헤이즈 씨가 돌아가신 후에 말이야. 너는 범인이 잡힐 때까지 병원에 남아 있겠다고 했었지. 실제로 구관 화재 직후에도 널 본 기억이 나.”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탐정님을 죽인 범인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으니까요.”

“그러다 왕립수사국 사건 당일에 만나서, 우리가 전날의 일을 물었을 때 네가 뭐라고 대답했었는지 혹시 기억하니?”

“어, 글쎄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야근을 하신다는 수사관님들이 평소보다 많긴 했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던 것 같다고 했어.”

“아, 맞다. 그랬었죠, 참.”

“그러니까 너는 그날 피해자들이 야근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

“저기, 남작님.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조이의 목소리가 주춤거리며 기어들어 갔다. 변성기를 지나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다.

나는 한편으로 아까 전 조이가 깨어나면서 냈던 소리를 떠올렸다. 그 직전까지 내가 쓰러진 조이를 보며 받은 느낌도 함께 떠올렸다.

한번 떠오르기 시작한 생각들은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왜 이제야 저희를 인지했느냐고 나를 탓하는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머뭇거리는 조이의 눈을 직시했다. 어두워서 지금은 제대로 색을 분간할 수 없지만 나는 저 눈이 무슨 색인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밝은 갈색 눈이었지. 빛을 비추면 얼핏 금색으로도 보일 만큼 아주 밝은 눈.

눈높이는 베로니카와 정확히 일치해서, 마주 섰을 때 굳이 시선을 올리거나 내릴 필요가 없었다.

정말이지 왜 이제야 알았을까 싶어서 한숨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얼마 전 상기했다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아 잠시 미뤄두었던 어떤 떡밥들을 다시 끄집어냈다.

메이슨 교단에 대한 패트릭 헤이즈의 조사가 그를 죽여야 할 만큼 위험수위를 넘었다고 판단할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구인가.

성 조나단 병원 사건 당시 나와 밀리엄을 구관 204호에 가둔 사람은 누구인가.

왕립수사국 사건에 앞서 앤서니 롭에게 피해자들의 야근 일정을 넘기고, 에드워드 녹스를 도주시킨 이는 또 누구인가.

마지막으로 이브리안 호텔 사건 때 루크 엘모어를 대신해 넬리 엘모어를 호텔까지 데려간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나는 네 번째 떡밥과 함께 내가 그날 엘모어 보육원에서 만난 누군가를 떠올렸다.

나를 숲으로 데려가 탑에 가두고, 대기도의 현장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누군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해, 조이 로. 나는 네가 쓰는 이름이 정말 그것 하나인지 묻고 싶은 것뿐이야.”

조이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 눈을 피하거나 뒤로 물러나거나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조이에게 고정한 시선을 유지한 채 계속 말을 이어갔다.

“왜냐하면 내가 추측하기에…… 누군가는 너를 ‘아리아 오큘러스’라고 부르고 있을 것 같거든.”

나는 그렇게 말하며 눈썹을 들어 올리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어떤 말이든 들을 준비가 되었으니 가감 없이 대답해달라는 의미였다.

입가를 조금 굳힌 조이가 속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하…….”

너무도 명맥한 의미를 담은 실소가 공기를 가르며 터져나왔다.

나는 쓰게 웃는 낯을 한 채 이마를 꾹꾹 누르다 이내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들어 올리는 눈앞의 상대를 잠자코 지켜보았다.

이 순간 말을 꺼내는 일은 응당 저쪽의 몫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껏 내가 알던 조이의 것과는 다른, 그러나 분명히 들은 바 있는 가늘고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칭찬이라도 해드려야 할까요?”

아리아 오큘러스의 음성이었다.

높낮이가 없어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던 저번과 달리 꽤나 앙칼진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결코 다른 목소리라고는 볼 수 없는.

나는 조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리아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상대의 확연히 달라진 눈빛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자 딱히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나타나리라 생각하고 있던 시스템창이 눈앞에 사라락 떠올랐다.

[ 과제 013. ]

아리아 오큘러스의 정체 달성!(보상 : 모노클 1개)

“칭찬을 기대할 만큼 빨리 알아챈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제가 달리 무슨 말씀을 드리길 바라셨는지.”

“그냥… 여긴 어디고 난 왜 잡혀왔는지에 대한 설명 정도? 안 되는 머리를 열심히 굴린 보상으로 그만큼은 요구할 수 있지 않나 싶어서.”

“설명해드리지 못할 건 없지만, 저는 그 전에 이 끔찍한 방에서 나가고 싶은데요.”

아리아 오큘러스—의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는 사정없이 인상을 구긴 채 내가 쥐고 있는 철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진심으로 이 공간을 혐오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까 깨어난 직후의 반응을 보고 설마 하긴 했는데.

“이건 네 짓이 아니라는 뜻이야?”

“네. 그러니까 지금 잡고 계신 그것, 다시 들어올려주실 게 아니라면 차라리 제가 직접 열고 나갈 수 있게 놓아라도 주시지 않겠어요?”

“미안한데 내 입장에서 너는 행동을 함께하기에 썩 믿을 만한 파트너가 아니거든…?”

“하지만 절 제압하고 혼자 탈출하실 재간이 있으신 것도 아닐 텐데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시잖아요.”

그건 그렇지. 저 말과 아까의 반응을 믿는다면 어쨌든 함께 납치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결국 나는 한숨과 함께 다시 손에 힘을 주어 철판을 슬쩍 당겨올렸다.

열린 틈새로 새어 나오는 빛에 반쯤 홀린 것처럼 시선을 빼앗긴 아리아 오큘러스를 보자니 그나마 남아 있던 불신까지 희미해지는 기분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끔찍한 방’에서 몹시 나가고 싶은 마음만큼은 진심인 것 같았다.

물론 나는 금방 안 될 노릇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탈출을 함께하는 것과 신뢰하는 것은 다르다. 탈출하는 동안이라고 마음을 놓아서도 안 되고.

그러느라 잠시 손을 멈췄더니 금세 날카로운 눈초리가 되돌아왔다.

“……알았어, 알았어. 열게. 괘씸해서 심술 좀 부려본 거야. 대신 이 밑으론 내가 먼저 내려간다.”

“제가 또 남작님을 가둬버릴까 봐 염려되시나 보죠?”

“당연하지. 인간은 학습하는 동물이고 넌 전과자고 딱히 갱생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으니까.”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난 뒤 아리아의 반응을 확인하는 대신 있는 힘껏 철판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던 이불을 끌어당겨 적당히 뭉친 뒤 먼저 아래로 떨어트렸다.

구멍과 복도 바닥 사이의 거리가 그리 높지 않아서 그냥 뛰어내려도 될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였다.

이 뒤로 얼마나 더 가야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괜히 잘못 뛰어내려 다리라도 삐었다간 몹시 곤란해질 게 분명했으므로.

그렇게 이불덩어리가 바닥에 무사히 안착한 것을 확인한 나는 구멍 모서리에 손을 걸친 채 다리부터 천천히 내린 다음 이불 위로 뛰어내렸다.

내 뒤를 이어 뛰어내린 아리아 오큘러스의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아 찔끔 당황한 것도 잠시, 나는 이내 내가 서 있는 곳이 단순한 복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충 파악하기로 이곳은 어떤 높은 건물의 꼭대기 부근인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뜻밖의 높이와 구조에 질겁하고 말았다.

이리저리 교차하고 있는 계단이나 통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따위가 보였다. 바닥으로 추정되는 무언가는 한참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이 높이에서는 이불을 백 개쯤 떨어트려 놓는다고 한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소름이 오소소 돋는 기분으로 난간 아래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나를 보며 팔짱을 끼고 서있는 아리아 오큘러스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이젠 여기가 어딘지 알려줘도 되는 거 아니야?”

“짐작하실 법도 하다고 생각했는데…. 일단 빠져나가면서 설명드리죠.”

아리아 오큘러스는 그렇게 말한 뒤 쌩하니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그녀의 걸음을 어떻게 따라해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그냥 내 나름대로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그녀를 따라 걸어나갔다.

빠져나가면서 설명해준다고 말한 주제에 아리아 오큘러스는 통로를 따라 걸어나는 내내 침묵을 유지했다.

행여 누군가에게 들킬까 조심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냥 설명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혹시나 전자라면 협조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일단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내가 참지 못하고 말을 꺼낸 것은, 그녀가 몇 번의 갈림길에서 주저 없이 한쪽을 선택해 나아가는 것을 지켜본 뒤의 일이었다.

“길을 잘 아나 보네.”

“수백 번도 더 다녀본 길이라서요.”

그러셨군. 복도는 수백 번도 더 다녀봤는데 방에서 나오는 비밀통로는 모르고 계셨군…… 어?

나는 여전히 조금 심사가 뒤틀린 채 눈을 굴리다가, 문득 저번에 아리아 오큘러스가 ‘무언가’를 보며 했던 어떤 말을 떠올렸다.

“저기, 잠깐만. 혹시 여기…….”

“이제 좀 짐작 가시는 바가 있으신 모양이군요.”

계속해서 주위를 살피며 앞서 걸어가던 아리아 오큘러스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대뜸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피아벨 대수도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베로니카 캠벨 남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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