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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102화 (102/121)
  • 102화. 푸른 달리아 (1)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함께 힘겹게 눈을 떴다.

    잠시간은 정신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나는 주위를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기억을 더듬었다.

    벤자민 홉스가 메이슨 교단의 교주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가, 느닷없이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고…….

    거기까지 떠올렸는데도, 몸 아래가 푹신하다는 사실은 아주 잠깐의 낙관적인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사실은 전부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식의 착각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꿈이기를 바라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채로 그런 착각에 빠져 있던 나는, 몸이 조금 편할 뿐 모든 것이 낯설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주위를 확인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낯선 감각. 낯선 공기. 낯선 냄새…….

    밀리엄의 병실도, 켄트우드 저택의 침실도, 베로니카의 방도 아니며 현실의 내 방은 더더욱 아닌 공간.

    나는 여전히 깨질 듯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을 덮고 있던 도톰한 이불이 스르륵 흘러 내려갔다.

    근래 들어 제대로 쉬지 않은 탓인지 정체불명의 약기운 탓인지 몸이 마치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움직였으나 일단 손발은 자유로웠다.

    이윽고, 제법 넓지만 조명이라곤 촛불 두어 개뿐이라 다소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낯선 방 안의 풍경이 보였다.

    가구라곤 내가 올라 있는 침대 하나와 한 사람이 겨우 쓸까 말까 한 작은 식탁 하나가 전부인 이상한 방.

    촛대가 달린 벽에는 자세히 보니 웬 나무 막대기며 채찍 따위가 걸려있다.

    뭘 위한 방인지는 몰라도 퍽 좋은 일이 일어날 만한 곳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뭐 어디 창고 같은 데 내던져져 있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인 일이지만.

    더럽게 춥다는 점에서는 창고와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디서 찬바람이 들어오나 했더니 문과 마주 보고 있는 벽 위쪽에 어른 손바닥만 한 창이 나 있었다.

    나는 쇠창살이 쳐진 창을 황당한 기분으로 올려다보았다.

    손이 닿는 높이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여닫을 수 있는 형태조차 아닌 창이, 벽난로도 없는 방에 사람을 약올리듯 나 있는 꼴이라니.

    그것은 내 상상 속 이 방의 용도를 더욱 험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나는 대체 얼마나 오래 쓰러져 있었던 것이며, 대관절 어디로 끌려온 것일까.

    무엇보다 이 갑작스러운 납치는 도대체 누구에 의한 것일까…….

    죽이지 않고 납치해왔다는 점에서 일단 에드워드 녹스의 짓은 아닐 것이다.

    생각을 이어가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 나는 흘러내린 이불을 다시 끌어올려 몸에 둘렀다.

    그렇게 하고 보니 굳이 침대 위에 내려놓고 친절하게 이불까지 덮어주었다는 점도 조금 마음에 걸렸다.

    바스락, 하는 소리가 바닥 부근에서 들린 것은 그때였다. 나는 급히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촛불의 빛이 닿지 않는 부근이라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쓰러져 있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아, 맞아. 조이.

    나는 나보다 먼저 괴한의 습격을 받았던 조이의 모습을 그제야 상기해냈다.

    그렇다면 저기 쓰러져 있는 이는 높은 확률로 조이일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과 함께 괜히 속이 쓰려왔다.

    아니, 같은 방에 가둬놓고 누구는 침대에 고이 눕혀 이불까지 덮어줬으면서 누구는 바닥에 대충 내동댕이 쳐놓다니.

    나는 몸에 감고 있던 이불을 한 팔에 들고, 다른 손으로는 벽에 걸린 촛대를 빼들고서 침대를 벗어나 조이—로 추정되는 인영—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우선 들고 있던 이불을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몸 위에 덮어준 다음, 촛불을 쓰러진 이의 얼굴 가까이로 조심스레 가져갔다.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나 조이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이불 아래로 슬쩍 보이는 차림새가 기억과 달랐다.

    본래 입고 있던 낡고 헐렁한 옷이 아니라, 얇아 보이긴 하지만 아주 말끔하고 하얀 옷이다.

    내 옷은 그대론데 왜 조이만 옷을 갈아입혀 놓은 것인지는 모를 노릇이었으나 처음 보는 차림새의 조이는 어딘가 낯설었다.

    게다가… 의식 없는 모습을 처음 본 까닭일까?

    무표정하게 눈을 감고 있는 조이의 얼굴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선이 가늘면서 다소 성숙하게 보였다.

    원체 활기찬 데다 희노애락이 얼굴에 확실히 드러나는 아이라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는데, 잠든 모습만 봐서는 열몇 살짜리 소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으, 으음…….”

    그때, 내가 아는 조이의 목소리보다 다소 얇은 신음이 들려왔다.

    불빛에 눈이 부셔선지 깨어날 때가 되었던 건지 조이가 잠시 미간을 찡그리더니 이내 번쩍 눈을 떴다.

    나는 조금 놀라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눈을 뜬 조이는 나를 보고 무어라 말을 하는 대신 황급히 몸을 일으키더니 불안한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이윽고 조이의 얼굴에 기묘한 빛이 드리워졌다.

    그것은 당황이라기보다 절망에 가깝게 느껴졌다. 두려움도 엿보였다. 그러나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단 마치 학습된 공포 같았다.

    나는 말없이 선 채로, 나도 모르게 그런 조이를 관찰했다.

    정신이 드냐고, 괜찮냐고 말을 걸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비단 조이가 눈앞의 나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절망과 공포에 얼룩진 낯으로 방 안을 보던 조이가 별안간 내게 시선을 돌린 것은 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남작님.”

    “정신이 좀 드니? 나도 방금 깨어난 참이야.”

    “시간이, 얼마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나도 모르겠…….”

    “얼른 여기서 나가야 해요.”

    그렇게 말하는 조이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절망이나 공포 같은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걸… 그냥 회복이 빠르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도 좋은 걸까? 침착하고 결연한 표정이 몹시도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는 시점에서 한시라도 여길 빠져나가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므로,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손발도 풀려 있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으로 향한 나와 달리, 조이는 문 쪽을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다른 뾰족한 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눈길 한번 줄 필요도 없이 당연히 잠겨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문은 바깥에서 잠겨 있었다.

    제법 낡아 보이는 나무 문이라 잘하면 리볼버를 이용해 열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그랬다가 납치범들에게 총소리가 들리기라도 한다면 탈출을 광고하는 꼴이 될 터였다.

    문의 아래쪽에는 등 뒤의 창을 두어 개 정도 이어붙여놓은 듯한 크기의 작은 문이 나 있었고, 그 앞에 빵과 우유가 올려진 쟁반이 놓여 있었다.

    음식을 넣어줄 구멍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애초부터 누굴 가둬두기 위해 만들어놓은 방인 모양인데…….

    점점 찝찝해지는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나는 문제의 구멍을 막고 있는 판자를 슬쩍 밀어보았다. 판자가 끼익 소리를 내며 바깥쪽으로 밀렸다.

    물론 사람이 드나늘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구멍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애초에 내 목표는 바깥 상황을 확인하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몸을 최대한 낮추고 구멍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아주 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방보다는 밝은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히 문 앞을 지키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사람도 없는데 그냥 확 총으로 문고리를 부숴버릴까?

    아니야. 그러기에 문밖의 복도는 지나치게 소리가 잘 울릴 것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문을 열 방법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혹시 다른 통로 같은 게 있지는 않을까.

    그 즈음에서 몸을 돌린 나는 벽을 더듬거리다가 침대 아래로 손을 넣어보거나 하며 방 곳곳을 살피고 있는 조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살랑거리는 하얀 옷을 입은 조이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은 어딘가 낯선 한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조금 익숙한 기분을 떠오르게 했다.

    아까부터 계속 머릿속에서 번져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잠시 입을 열었다가 이내 꾹 다물었다. 지금은 일단 이 방을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일단 방 안의 다른 곳을 살펴볼 심산으로 걸음을 내디뎠는데, 발치에 걸리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나는 자연히 고개를 숙여 발밑을 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던 검은 카펫의 끝자락이 발끝에 닿아 살짝 어그러져 있었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제 와서는 조금 아득하게까지 느껴지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204호에서는 어떻게 탈출한 거예요?’

    ‘당신이 밟았던 그 철판이요.’

    성 조나단 병원 204호에 홀로 남았던 밀리엄이 찾아냈다고 말한 뜻밖의 탈출로.

    나는 발끝에 힘을 주어 카펫을 휙 걷어냈다. 풀썩 하는 소리에 조이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걷어낸 카펫 아래는 온통 검어서, 그냥 평범한 바닥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몸을 숙이고서 그 위로 주먹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쿵쿵, 바닥을 두드렸다. 이윽고 들려온 것은 나무나 돌이 아닌 철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아무래도 수상해서 가장자리를 더듬어봤는데, 홈이 파여 있더라고요.’

    나는 밀리엄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리며 눈앞의 철판을 열심히 더듬거렸다. 어느새 조이는 내 옆으로 다가와 있는 상태였다.

    조이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도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채 계속 철판 위를 더듬던 나는 마침내 손가락이 딱 들어가는 기다란 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제대로 찾아냈다는 뿌듯함은 잠시였다.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고 생각한 나는 조심스럽게 문제의 홈을 위로 당겨보았다.

    조금 뻑뻑하긴 했지만 철판이 살짝 들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짝 벌어진 틈으로 아래를 살폈다.

    천만다행으로 아래는 적당히 밝은 복도였고, 별다른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 철판을 완전히 열고 나가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철판을 더 위로 당기는 대신 조심스럽게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함께 몸을 숙이고 앉아 있는 조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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