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묵시록 (9)
“어머나, 캠벨 남작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하하, 그러게요. 손튼 부인. 그간 별일 없으셨나요?”
“이 늙은이에게 일이 생겨봤자지요.”
손튼 부인은 지난번 밀리엄과 왔을 때 딱 한 번 보았을 뿐인 나를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밀리엄이 고민 없이 말한 메뉴는 손튼 부인의 디저트였다.
나는 곧장 조이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 가게가 병원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차를 타니 도착까지는 정말로 금세였다.
손튼 부인과 안나는 살가운 환영과 함께, 우리를 지난번 밀리엄과 내가 앉았던 자리로 안내해주었다.
메뉴판을 받았을 때는 혹시 내가 조이에게 메뉴를 추천해주어야 하는 상황인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다행히 조이는 원하는 바가 확실한 아이였다.
주문을 받으러 온 안나는 메뉴판을 조목조목 짚으며 말하는 조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주방 쪽으로 조르르 사라졌다.
음식은 금세 나왔다. 저번에 밀리엄이 주문했던 것과 같은 거창한 3단 트레이는 아니었고 나는 여전히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것들이었지만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맛있는 걸 먹이겠다고 호기롭게 데리고 나온 참이었던 터라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을 좀 했는데, 조이는 아주 맛있다며 환히 웃어 보였다.
내 기분을 생각해서 해준 빈말 같지는 않았다.
나는 조이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카운터 안쪽에서 내게 손짓하는 안나를 발견했다.
어차피 밀리엄에게 사다줄 디저트는 뭐가 좋을지 손튼 부인에게 물어보려던 참이라, 마침 잘됐다 싶었던 나는 겸사겸사 안나의 용건에도 응답할 겸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이. 먹고 있을래? 나는 잠깐 손튼 부인과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앗, 네. 다녀오세요!”
조이의 씩씩한 인사를 뒤로한 채 카운터로 향하자, 입가를 손으로 가린 안나가 나를 향해 조용한 질문을 건네왔다.
“남작님. 저 애요. 저렇게 입고 있지만 사실은 부잣집 도련님인 거죠?”
“응? 글쎄, 내가 알기론 아닌데…….”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저희 같은 출신의 애들은 저런 식으로 능숙하게 주문할 줄 모른다고요.”
“그건 아마 사회생활에 익숙해서 그런 거 아닐까? 얼마 전까진 탐정조수로 일했고, 지금은 수사국에서 심부름꾼일을 하거든.”
“그렇지만 얼굴도 뽀얗고 손도 완전 곱던걸요. 혹시 남작님께도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요? 사실은 몰래 성밖 구경을 나온 왕자님이라거나…….”
“와, 그거 되게 소설 같네.”
“헉, 어떻게 아셨어요? 어제 손튼 부인이 주신 소설책에 나왔던 이야기인데.”
“구체적인 상상에는 보통 원전이 있기 마련이지요, 공주님. 우리 왕자님한테 반했으면 가서 말동무 좀 해줘. 나는 손튼 부인께 여쭤볼 게 있거든.”
나는 아무래도 어제 본 소설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듯한 소녀의 등을 은근슬쩍 떠밀었다.
그러자 안나는 새초롬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조이가 혼자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달려갔다.
정말로 반한 거였나? 조이 쟤가 좀 미소년과긴 하지.
뭐 그런 생각을 하며 소년과 소녀의 만남을 가만 지켜보고 있자니 등 뒤에서 흐뭇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손튼 부인의 것이었다.
나는 그제야 본래의 목적을 떠올리고 다시 몸을 돌렸다.
“저, 부인. 실은 다름이 아니라 제가 밀… 켄트우드 씨한테 줄 디저트를 사야 하는데 뭘 사가야 좋아할지 영 감이 오질 않아서요. 혹시 켄트우드 씨의 취향에 대해 부인께 고견을 좀 여쭈어도 될까요?”
어르신께 걱정을 끼쳐드려서 좋을 게 없었으므로, 굳이 밀리엄이 칼을 맞았다거나, 그래서 며칠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거나, 지금도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손튼 부인은 조금 전 안나와 조이를 보았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든 남작님이 고르신 걸 제일 좋아할 거랍니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힌트라도 좀…….”
“답을 알려드렸는데 힌트를 달라셔서야.”
“……정말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하세요?”
“젊은 나이에 너무 의심이 많은 것도 좋지 못해요. 참견 하나 하자면 아마 그냥 사다주는 것보단 사가서 같이 먹는 걸 더 좋아할 거고요.”
그, 그런가……?
나는 흡사 부정할 수 없는 예언처럼 들리는 손튼 부인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저번에 밀리엄이 나에게 시켜줬던 메뉴를 두 개 포장해달라고 부탁했다.
손튼 부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조이와 안나는 죽이 꽤 잘 맞는 모양인지 즐거운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혼자 남아버린 상황에 뺨을 긁적이고 있는데, 옆에서 딸랑 하는 종소리가 들리며 찬바람이 휙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조이와 이야기하던 안나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손님을 맞이했다.
나는 내가 카운터를 막고 서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하게 발을 움직였다.
피차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인지, 그러다 도리어 손님과 몸을 부딪치고 말았지만.
“앗, 죄송합니다…….”
“아니요, 아니요. 제가 죄송…… 어, 남작님?”
떨어트린 물건을 줍고자 허리를 굽히던 여자가 돌연 멈칫하며 말했고, 가해자 된 도리로 그녀보다 먼저 물건을 주우려 몸을 숙였던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
“위브 수사관님?”
나와 부딪친 손님의 정체는 다름 아닌 멜리사 위브였다.
그녀는 잠시간 멀뚱히 나를 내려다보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아, 하는 탄성을 작게 내질렀다.
“남작님께서도 선배님 드릴 디저트를 사러 오신 건가요?”
내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멜리사는 역시 그러셨군요 하며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밀리엄이 이 가게의 단골이란 건 꽤나 여기저기 잘 알려진 사실인 모양이었다.
하긴 후배들을 데리고도 몇 번인가 왔었다고 했으니, 멜리사가 알고 있다고 이상할 것은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숙인 나는 멜리사가 떨어트린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머리 위에서 ‘아, 감사합니다.’ 하는 멜리사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내 손에 들린 물건을 그녀에게 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대신에 나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제의 물건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특이한 모양의 검고 무거운 만년필.
다른 만년필보다 길고, 펜촉 반대 부분이 두꺼운…….
메이슨 교단의 교주가 떨어트리고 갔던.
“수사관님!”
나는 황급히 멜리사 위브의 어깨를 붙잡으며 그녀를 불렀다.
“어, 어……. 네, 남작님.”
“이 만년필, 어디서 나셨어요?”
그러자 그녀는 나보다도 당황한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어디서 났다고 하긴 좀 애매한데요. 왕립수사국 수사관들에게 인장 겸용으로 지급되는 물품이라서요.”
“인장 겸용이요?”
“네. 여길 보시면…….”
내 손에서 조심스럽게 만년필을 빼간 멜리사가 펜촉 반대쪽을 돌려 열더니 그 단면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특수잉크가 묻은 왕립수사국 인장이 들어 있는 구조거든요.”
나는 왕립수사국 출입대장의 비고란에 찍혀 있던 인장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황급히 들고 있던 가방을 뒤적였다. 꺼낸 기억이 없으니 아마 들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
가방을 빠져나온 손에는 지난번 지하에서 주웠던 교주의 만년필이 들려 있었다. 심장은 물론 머릿속까지 쿵쿵거리는 것 같았다. 메이슨 교단의 교주는 왕립수사국의 수사관인 걸까?
“저, 그럼 혹시 이것도 왕립수사국에서 지급된 만년필일까요?”
“글쎄요. 보기엔 그렇게 보이는데, 제가 알기로 비슷한 용도의 만년필을 지급받는 직업이 몇 개 더 있어서……. 아마 인장을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멜리사의 말에 나는 조금 전 그녀가 했던 대로 만년필 뒷부분의 두꺼운 부분을 돌려 열었다.
그리고 그 단면을 곧장 손등 위에 꾹 찍어눌렀다.
“어, 이건 왕립수사국 인장이 아니네요.”
내 손등에 찍힌 동그란 잉크자국을 보며 멜리사가 말했다. 왕립수사국 인장은 아니란 말이지. 하지만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그럼 어디 인장인지…….”
“제 기억으로 이 형태는 소속이 아니라 자격을 증명하는 인장입니다. 아주 필수적인 부분만 제외하면 변호사 개개인에게 모두 다른 모양이 주어지는 걸로 알고 있어요.”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술술 흘러나온 멜리사의 설명 중간에서 전혀 생각지 못한 단어를 들은 까닭이었다.
“저기, 위브 수사관님. 방금… 변호사라고 하신 게 맞나요?”
“네. 맞습니다.”
정확히 어느 변호사의 인장인지를 찾아내는 건 좀 고단한 작업이 되겠지만요, 하고 덧붙이는 멜리사의 말이 들렸지만 나는 내가 그 고단한 작업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 내 손등에 찍힌 것과 같은 도장 자국을 어디서 보았는지 떠올리고 말았으므로.
나는 다시 한번 가방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어제 넣은 물건들이 그대로 들어 있는 가방 안에는, 내가 찾는 그것 또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방에서 꺼낸 하얀 편지봉투 위에 찍힌 도장 자국과 내 손등 위의 자국을 비교한 나는 일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감각을 맛보며 급히 카운터를 손으로 붙잡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가빠져왔다. 나는 다 알면서도 굳이 한 번, 도장 옆에 쓰여진 이름을 확인했다.
벤자민 홉스.
사람 좋은 얼굴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어느샌가 이쪽으로 다가온 조이와 멜리사가 내 안색을 확인하며 괜찮으시냐고 연달아 물어왔지만 신경 쓸 새가 없었다.
[ 과제 012. ]
교주의 정체 달성! (보상 : 모노클 1개)
나는 확인사살처럼 떠오른 시스템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제 나눈 소득 없는 대화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소득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애초에 이 편지는 벤자민 홉스를 찾아가라는 의미의 단서가 아니었을 테니까.
나는 괜찮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나를 염려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조이에게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을 전했다.
“조이, 미안한데 병원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깐 어딜 좀 들러야 할 것 같아. 괜찮겠니?”
***
그렇게 찾아간 홉스 변호사 사무실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황망하게 계단을 내려온 나는 벤자민 홉스의 사무실이 있던 건물을 닭 쫓던 개처럼 멍청하게 올려다보았다.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이가 다시금 걱정스레 질문을 건네왔다.
“저, 남작님.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어, 으응. 괜찮아.”
나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괜찮지 않아봤자 이미 비어버린 사무실에서 뭘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금 놀랄 일이 있어서 그랬어. 이제 그만 병원으로 돌아…….”
나는 돌아가자는 말을 미처 끝맺지 못했다.
말을 꺼내며 몸을 돌렸을 때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이, 버둥거리는 조이의 입을 막고 있는 웬 거한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장면이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지나갔다.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가기도 전에 등 뒤에서 덮쳐온 누군가가 젖은 천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저항은 짧았다.
갑작스레 전개된 상황 속에서 속절없이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 이외에 어떤 것도 파악하지 못한 채,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