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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100화 (100/121)
  • 100화. 묵시록 (8)

    최후의 속죄 어쩌고 하는 그 말을 끝으로 시간이 다 되었다며 들어온 멜리사 덕에 나는 아리송한 기분으로 면회실을 나서야 했다.

    수사국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차는 병원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내달렸고, 나는 마차에서 내려 병원에 들어서기까지 한참 동안 루크 엘모어의 마지막 말을 생각했다.

    최후의 속죄. 최후의 속죄라.

    어쨌든 루크 엘모어는 ‘저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홀로 움직인 게 아니라는 뜻.

    또 다른 파벌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지만 그 엇비슷한 세력이 교단 내에 존재하고 본인도 그 일부인 건 맞다는 소린데.

    거기까지 긍정해놓고도 정작 가장 결정적인 설명은 생략했단 말이지…….

    그 침묵을 거창하게도 최후의 속죄라고 여기시겠다니, 어쩌면 ‘그들’은 루크 엘모어의 동지인 동시에 그가 제 부모의 죄를 대속해야 할 상대인지도 모른다.

    병원 로비에 들어선 이후에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여태까지 풀리지 않은 떡밥들에 대한 생각이었다.

    대표적으로는 교주의 정체와 아리아 오큘러스의 가면 속 모습, 그리고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한 에드워드 녹스가 있겠지.

    조금 더 기억을 되짚어 보자면, 성 조나단 병원 사건에서 나와 밀리엄을 구관 204호에 가두고 도망친 정체불명의 인물은 누구인지를 고민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건의 범인이었던 수잔 로이드를 감금범이라고 보기엔 이동경로상의 모순이 생기니, 분명 제3자가 있었을 텐데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그러고 보면 왕립수사국 사건에도 남은 떡밥이 있었다.

    앤서니 롭이 어떻게 피해수사관들의 야근 계획을 알았으며, 에드워드 녹스는 대관절 어느 틈에 탈출했냐는 것.

    체포된 앤서니 롭은 모든 혐의를 인정했으나, 에드워드 녹스의 탈출을 도운 바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난리통에 여차저차 하다 자력으로 탈출했다는 건 너무 맥빠지는 설명 아닌가?

    게다가 당시 수사국의 출입구는 모두 밖에서 봉쇄되어 있었으니, 애초부터 에드워드 녹스를 빼낼 심산으로 움직인 외부의 누군가가 있었으리라는 쪽이 더 그럴듯한 가설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브리안 호텔 사건도 그렇다. 오밤중이 되어서야 지하를 탈출해 일행과 조우했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루크 엘모어를 보았다.

    밀리엄과 제임스는 내가 사라진 이후부터 줄곧 루크 엘모어가 그들과 함께 나를 찾아주었다고 했다.

    그럼 루크 엘모어는 대체 어느 틈에 모친을 호텔로 옮긴 걸까?

    약을 먹여 재워두었다가 내가 돌아간 이후 데려갔다 해도, 너무 늦은 시각에 호텔에 들어섰다면 직원들의 기억에 남을 위험이 있었을 텐데.

    애초에 협력자가 있어서, 루크 엘모어가 나를 찾는 사이 그 협력자가 넬리 엘모어를 호텔로 데려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제작진이 앤서니 롭과 루크 엘모어가 그토록 쉽게 자수를 선택하도록 안배해둔 것은 어쩌면 그들이 단독범일 경우 미처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에 필요 이상의 무게가 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요컨대 만에 하나 성 조나단 병원 사건에서 나와 밀리엄을 가둔 인물이 왕립수사국 사건에서 에드워드 녹스를 빼낸 인물이고, 그 인물이 다시 넬리 엘모어를 이브리안 호텔로 데려간 인물로서 세 사건의 연결고리가 될 수도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 미뤄두거나 무시할 수 있다 해도, 이 게임엔 아직 가장 크고 가장 풀린 바 없는 결정적인 떡밥이 하나 남아 있다.

    기억을 잃은 제임스 로웰의 존재가 바로 그것.

    그 같은 초대형 떡밥이 여태까지 이토록 조용히 서브 조력자 포지션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앗, 남작님. 수사국엔 잘 다녀오셨습니까?”

    아무래도 양반은 못 될 요량인지, 나는 병원 로비에서 제임스 로웰과 마주쳤다.

    한 손에 물병을 들고 있는 걸 보니 물을 뜨러 내려온 참인 모양이었다.

    “네. 보시다시피요. 병실엔 밀리엄 혼자 있나요?”

    “아니요. 조이가 와 있습니다. 켄트우드 씨까지 잘못되는 줄 알았다면서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달래느라 꽤 애를 먹었어요.”

    “의젓하게 굴기에 괜찮은 줄 알았는데 역시 마음고생을 했던 모양이네요. 뭔가 맛있는 거라도 사 먹여야겠어요.”

    나는 좋은 생각인 것 같다며 웃는 제임스 로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요즈음의 그는 나와 밀리엄의 조사에 협력해주느라 정작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 보는 일에 소홀한 상태다.

    그런데도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고 있다.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오히려 제임스 본인보다도 밀리엄 쪽.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제임스 로웰의 기억상실은 대체 무엇을 위한 전개인 걸까.

    단지 전작 주인공이었던 그를 이번 작에 등장시켜 조력자 캐릭터로 활용하기 위한 구실……이었다고 하면 좀 실망스러울 것 같은데.

    “저, 남작님.”

    “아, 네. 로웰 씨.”

    내가 본인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용건이 있는 것인지, 갑자기 제임스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번뜩 고개를 들고 대답한 뒤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이어진 말은 조금 뜻밖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요사이에 말입니다. 굳이 언제라고 이야기해야 한다면 처음 엘모어 보육원에 갔던 날부터요. 사실 저는 그 즈음부터 남작님께서 켄트우드 씨나 저에게, 신경 쓰시는 사실 가운데 무언가 한두 가지씩을 말씀하지 않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고 있는데요.”

    “어…….”

    “물론 제 착각일 수도 있고, 설령 사실이라 해도 남작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시는 데는 분명 나름의 이유가 있으시겠지만… 오래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라면 함께 고민해보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요? 그, 주제 넘은 참견이었다면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로웰 씨. 신경 써주셔서 외려 감사한 걸요.”

    은근히 뼈를 때려오는 제임스의 말에 나는 지금껏 밀리엄과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을, 더불어 오늘 알아내었으나 그들에게 굳이 말할 생각이 없었던 사실들을 잠시 되새겨보았다.

    이를 테면 베로니카 캠벨에 대한 메이슨 교단의 기묘한 특별대우라거나, 뭐 그런 것들.

    그리고 그때였다.

    [ 1. 사실은 몇 가지, 아직 확실치 않아서 말씀드리지 않았던 것들이 있는데요…….

    2. 전부 말씀드리지 못한 건 사실이에요. 다만 제 입장에서 다소 개인적인 문제가 섞여 있어서요. 조금만 더 혼자 고민해보고 싶어요. ]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선택지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아하니 첫 번째는 말하지 않은 사실들을 털어놓는 선택지인 것 같고, 두 번째는 계속 숨기는 쪽인 모양인데…….

    이 선택지창이 밀리엄도 아닌 제임스를 앞에 두고 튀어나왔다는 사실은 좀 기묘했지만, 일단 나타나버렸으니 선택을 하기는 해야 했으므로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솔직한 심정으론 가뜩이나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굳이 1번을 골라서 저쪽의 반응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저 마음 편하자고 2번을 고르자니, 정황상 클라이막스를 앞둔 시점이라는 부분이 영 걸렸다.

    무언가 말하지 못한 정보가 있다면, 이쯤에서 전부 털어놓는 것이 전개를 위해서는 외려 좋지 않을까?

    비단 제임스에게뿐만 아니라 병실에 있을 밀리엄에게도.

    여기가 게임 속이라거나 내가 빙의자라거나 하는 이야기는 물론 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할 수 있는 선까지는 말이다.

    그래. 그냥 얘기해버리자.

    레나 엘모어의 유품이고 베로니카 캠벨에 대한 교단의 태도고 뭐고 다 이야기해버리고 광명을 찾자!

    저번까진 없던 자신감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은 몇 가지, 아직 확실치 않아서 말씀드리지 않았던 것들이 있는데요…….”

    결국 나는 결심을 굳히고서 입을 열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

    내 이야기를 들은 제임스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다가 이내 알았다고, 함께 고민해볼 기회를 주어 고맙다고 말하며 물을 뜨러 갔다. 벌써부터 고민에 들어가 주었는지 아주 진지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문제는 밀리엄이었다. …이걸 문제라고 불러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의 거리를 고려해서든 양심을 고려해서든 제임스에게만 말하고 말 수는 없는 노릇이라, 침상의 밀리엄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쭉 늘어놓았는데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던 것이다.

    “왜 말하지 않았는지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조금 서운하군요. 베로니카. 내가 그렇게 신뢰하지 못할 상대였다니.”

    물론 그는 진심으로 서운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서운한 척을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훤히 드러나는 얼굴이었고, 어쩌면 그런 장난스런 반응으로 내 미안함을 덜어주려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마침 바라는 게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기회를 잡았다고 좋아하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문제였다. 그래서.

    “서운하다면 미안해요. 당신을 믿지 못한 건 아니고… 그냥 내가 좀 무서워서 그랬어요.”

    “그래도 이젠 전부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어요. 당신에 대해 내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면 뭐든지요.”

    “난 메이슨 교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나에 대한 사실로 이야기가 튀는 거죠?”

    “글쎄요. 어째서라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말하며 빙글빙글 웃는 낯이 아주 힘껏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로 얄궂었다.

    어째서인지도 뻔했다. 뻔한 것을 굳이 내 입으로 듣고 싶다는 심사가 아주 유리구슬처럼 투명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는 꼴이 밉지 않았던 걸 보면 나도 중증이긴 한 모양이지만…….

    하여간에 그것이 대관절 왜 문제였느냐 하면.

    ‘나에 대해 밀리엄이 모르는 사실’이 너무나 많고, 개중 어느 것은 지독하게 근본적이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에게 이야기해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조금 침울해졌다.

    이런 정보불균형은 옳지 않다는 마음에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나는 그에 대해 정말이지 온갖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 뿐이랴. 나에 대해서도 있는 대로 전부 숨기고 있지.

    그런데 밀리엄은 이제 나에 대해 자기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면 뭐든지 알고 싶단다!

    진작 털이 보송보송 나서 어지간한 공격에는 멀쩡하리라 자부했던 양심이 미친 듯이 쑤셔왔다.

    나는 차마 밀리엄에게 알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냥 알았다고 답한 뒤에 입을 닦으면 그만인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놈의 양심, 이 죽일 놈의 양심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어째서라고 생각하냐’는, 짐작컨대 상당히 낯뜨거운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질문으로 잠시 화제가 옮겨간 틈을 노려 재빠르게 말을 돌렸다.

    전부 이야기해달라는 말이 아니라 어째서라고 생각하냐는 말을 피하려는 양, 나름대로는 퍽 교묘하게.

    “밀리엄. 못 본 사이 반쪽이 된 우리 조이한테 내가 맛있는 걸 좀 먹이고 올 참인데,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사다 줄게요.”

    “그런 식으로 대답을 회피하고는 심지어 다시 나가기까지 하겠다는 겁니까? 몰랐는데 아주 매정한 사람이군요.”

    “모르는 사실이 있다면 알려달라면서요. 실망했나요?”

    “그럴 리가. 나는 애타는 심정도 기꺼이 즐길 줄 아는 남자랍니다.”

    “……아, 그래서 뭐가 먹고 싶냐니까요.”

    내가 눈을 흘기자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린 밀리엄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대답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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