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묵시록 (6)
묵직한 책이 무릎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걸 신경 쓸 여유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한 손으로 침대를 짚어 몸을 지탱한 채 밀리엄에게로 상체를 숙였다.
아까까지 평온했던 미간이 일그러진 채 움찔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보였다.
흥분으로 가빠진 숨을 애써 진정시키며 나는 밀리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쿵. 쿵. 하는 심장박동이 귀밑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그리고 닫혀 있던 눈꺼풀 사이로 마침내, 지난 며칠간 보지 못했던 금빛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
“밀리엄!”
나는 환자인 그를 놀라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다급히 그의 이름을 소리쳤다.
잠시 천장을 향해 깜빡거리던 눈이 거짓말처럼 내게로 움직였다.
“……베로…니카?”
쇳소리가 섞여 반쯤 갈라진 음성. 그러나 또렷이 들리는 이름. 그 목소리를 듣고 나자 나는 더 이상 숨을 진정시킬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 아무 말도 잇지 못한 채로 가쁜 숨만 들이마셨다 내쉬기를 반복하다가, 다시 한번 들려온 신음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아니야. 이럴 때가 아니지.
“의, 의사 선생님을 모셔올…….”
“……다행이네요.”
병실 문쪽으로 곧장 달음박질치려던 내 걸음을 붙잡은 것은 밀리엄의 느닷없는 한 마디였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의문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다행이라고?
“뭐가요?”
그러자 밀리엄이 신음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힘없는 바람소리가 났지만 정말로 안도한 듯 보였다.
잠시간 희미하게 웃는 낯으로 나를 응시하던 그가 아예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당신이 무사해서.”
그렇게 말한 뒤에도 그는 웃었으나 나는 웃을 수 없었다. 표정이 딱딱히 굳은 채 도저히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리 굳어버린 것이 내 마음인 듯싶기도 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그리고 잠깐 입을 열었다가, 이내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두 번의 심호흡이 이어진 뒤에야 나는 눈을 떴다. 그 다음 다시 입을 열고 밀리엄을 향해 말을 꺼냈다.
“의사 선생님 모셔올 테니까 정신 제대로 붙잡고 있어요.”
“……그럴게요.”
“그사이에 또 쓰러지면, 다음에 일어났을 땐 다행의 다 자도 못 꺼내게 될 줄 알아요.”
순간순간 목끝까지 차올라 울컥거리는 무언가를 꾹꾹 억누르며 한 자 한 자 간신히 씹어 뱉고서, 그대로 도망치듯 병실을 나섰다.
병실 문을 쾅 닫고 난 손끝이 부르르 떨려왔다.
***
의사가 다녀간 병실에는 지독한 침묵이 감돌았다. 다분히 내게서 기인한 침묵이니 내 입으로 지독하다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의사를 데려온 뒤에도 밀리엄은 의식을 유지했다.
상처가 아픈지 간간이 신음을 내뱉기는 했으나, 멀쩡히 손발을 움직였고 의사와도 멀쩡히 대화했다.
나는 밀리엄과 대화하며 그의 상태를 살피는 내내 힐끔힐끔 내 눈치를 보는 의사에게 수술 직후에 이어 두 번째 감사인사를 전했다.
밀리엄이 깨어났다는 사실에 외려 나보다도 안심한 표정을 한 의사는 ‘캠벨 남작님께 두 번이나 감사 인사를 받다니 영광’이라고 말했다.
내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는 사람을 보는 건 베로니카의 몸에 들어와 캠벨 남작이 된 이후 여러 번 겪은 바 있는 상황이다. 몇 번쯤은 유용하게 써먹기도 했더랬지.
그러나 겪어본 바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목적이 있을 때 써먹기 좋은 방법인 것은 분명하나 그런 상황 자체가 그리 유쾌하지는 못한 것 같다.
누군가 내 눈치를 보는 상황이라니 불편하기 짝이 없고 괜히 찝찝하기나 할 뿐이다.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수술이 끝난 뒤 의식이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도 착실하게 감사하다고 했을 뿐인데.
의사 멱살을 잡고 저 사람이 왜 눈을 뜨지 않느냐며 닦달하는 진상짓도 딱 상상까지만 하고 말았는데.
그토록 점잖게 굴었건만 마치 내가 뭐라도 한 것마냥 비위 맞추기에 급급한 상대를 보고 있자니 가뜩이나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속에 기름을 들이붓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의사가 나갈 때까지 충실하게, 선량한 보호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환자가 깨어나긴 했으나 당분간은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주의해달라는 말에도 성실히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무지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 와중에도 말이다. 착실하기도 하지.
그렇게 의사가 나간 이후로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밀리엄이 도로 잠들어서는 아니었다. 밀리엄 켄트우드 씨는 지금도 아주 멀쩡히 깬 채 앉아 계신다.
벌써 몇 분째 인위적인 정적이 이어지고 있는 상태라, 의사가 말한 안정이란 걸 제대로 취하고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나는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밀리엄을 바라보는 중이다.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장담컨대 썩 고운 눈빛은 아니리라.
그리고 밀리엄 또한 그런 나를 조금 전부터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참이다. 내가 먼저 무슨 말이라도 꺼내길 기다리는 것처럼.
……솔직히 말해서, 감동해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알고는 있다.
어쩌면 눈을 뜨고 나를 발견했을 때 저 작자가 기대한 내 반응이란 감동한 채 울며불며 자길 끌어안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깨어나 제일 처음 꺼낸 말이 무엇이든 나 대신 칼에 맞아 사경을 헤맸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닐 텐데도,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여태 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더불어 지금의 내 분노가 과하다는 것도 안다.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 하필 내게 칼을 꽂으려 달려들던 레너드 에버렛의 모습이고, 상황이 제대로 마무리되기 전에 쓰러졌으니 의식을 놓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 안위를 걱정했을 수도 있지.
그러다 깨어나서 무사한 내 모습을 확인하고 나니 다행이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알고는’ 있다. 지금 내가 취하고 있는 태도가 몹시 배은망덕하고 몰상식하며 아주 글러먹었다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젠장, 아는 데도 화가 나는 걸 어쩌란 말인가?
숨이 다시금 떨려왔다. 나는 입술을 꾹 사리물고 최대한 흔들림 없는 눈으로 밀리엄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기실 말없이 시간을 끈 것은 화가 나서이기도 했지만, 무슨 소리든 태연하게 멀쩡한 목소리로 말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최후의 자존심 같은 것일까. 나는 밀리엄 켄트우드에게 꼴사나운 모습도 약한 모습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눈에 뵈는 것 없이 화가 난 모습이든, 형편없이 무너진 모습이든.
혹은 그저 우는 모습이라도.
그래서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낼 수 있을 타이밍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사이 밀리엄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면 곤란해졌겠지만, 그는 대화를 시작할 권리를 완전히 내게 넘긴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한껏 세우고 있는 같잖은 자존심을 꿰뚫어보고 배려해주려는 사람처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순간 비참해졌지만 나는 그 또한 간신히 억눌렀다.
그리고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대체 무엇 때문에 이토록 화가 났고, 무엇 때문에 그의 앞에서 이토록 자존심을 챙기려 드는지까지 사실은 전부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은 채로.
“나는 고맙다는 말 안 할 거예요.”
“하지 말아요. 당신이 바라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 내 멋대로 한 일이니까.”
“왜 그랬어요?”
“그건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요. 당신을 지키는 일은 내가 하고 싶다고.”
“아니, 내 말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냐는 거예요. 당신도 해야 할 일이 있었잖아. 아직 아무것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목숨을 던져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했으니까요.”
“무…….”
“나는 그 순간 당신을 구하는 일이, 부모님과 동생을 죽인 원수들의 음모를 파헤치는 일이나 내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쉬웠어요. 고민할 필요조차 없더군요.”
잔잔한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과 나긋한 목소리에선 야속할 정도의 진심만이 묻어났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독한 낭패감이 뇌리를 강타했다. 아, 인정해야 하는구나. 당신이 나를 기어이 그렇게 만드는구나.
차라리 앞뒤 생각 없이 몸이 앞서나갔다고 말해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실수였다고, 너무 급한 나머지 몸부터 들이밀 수밖에 없었다고 말해주었다면.
“당신 대체 왜 나를 좋아하는 거예요…….”
그랬다면 나는 끝끝내 당신을 외면하고 당신의 무게를 외면하고.
“그러는 당신은 나를 왜 좋아하는데요?”
그렇게 계속해서 나를 외면할 수 있었을 텐데.
“몰라요. 미쳤나 보죠.”
“이런. 한 번쯤은 부정할 줄 알았는데.”
“그럴 것 같아서 안 하기로 했어요.”
이 세계에서 제정신으로 버티기 위해 결코 인정하지 말았어야 할 내 마음을.
“나한테 미쳐줘서 고맙습니다.”
“착각이 지나치시네. 당신한테 미쳤다곤 안 했거든요…….”
“그럼, 아직 나에게 미치지는 않으신 내 친애하는 숙녀분.”
“왜요.”
본래의 삶으로 무사히 돌아가기 위해 끝까지 무시했어야 할 내 변화를.
“키스해도 됩니까?”
“나 아직 화 안 풀렸어요.”
“언제 화났었는지 기억도 안 나게 해줄게요.”
“…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요…….”
착잡하게 내뱉은 한숨은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 못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뺨을 감싸오는 손과 곧장 깊이 맞닿아오는 입술의 열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다행히 꼴사납게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험하고 버거워도 목적지 하나만큼은 분명한 길을 가고 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는데.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난데없이 길 끝에 드리워진 안개가 그저 황망했다.
하지만 정말로 미쳤는지,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