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97화 (97/121)
  • 97화. 묵시록 (5)

    벤자민 홉스와의 만남은 별 의미 없는 감상만을 남긴 채 이상할 정도로 소득 없이 끝났다.

    어쨌든 변호사 사무실을 나설 때 즈음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밀리엄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에 들어서는 나를 보며 제임스는 한숨을 쉬었다.

    쉬라고 보내놨더니 웬 묵직한 책을 들고 반나절 만에 돌아온 것이 영 마음에 차지 않는 눈치였다.

    “벌써 오시다니. 못해도 하루 정도는 푹 쉬고 오시라는 뜻이었는데요.”

    “알차게 몰아서 쉬고 왔어요.”

    “저택에 다녀오신 것도 아니지요?”

    “어어…….”

    “입으신 옷에 변화가 없어 넘겨짚어 봤는데 역시나인 모양이군요…….”

    제임스 로웰이 이마를 짚었다.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이 이어졌고, 졸지에 거짓말을 들켜버린 나는 입술을 꾹 사리문 채 제임스의 시선을 슬슬 회피했다.

    “남작님. 켄트우드 씨를 걱정하시는 마음은 알겠습니다. 도저히 맘 편하게 쉬실 수 없으리란 것도 압니다. 남작님만큼은 아니겠으나 제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켄트우드 씨는… 저라면 몰라도 남작님께서 당신 때문에 무리하셨다는 걸 알면 분명 괴로워할 겁니다.”

    “침대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정도를 가지고 거창하게 무리라실 것까지야…….”

    “몸도 몸이지만 제가 염려하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언제 깨어난다는 기약도 없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 불안해하는 일은 정신을 갉아먹죠.”

    요컨대 제임스가 염려하는 것은 내 정신이 의식불명 상태의 밀리엄을 지켜보다 한계에 부딪치는 일이란 뜻이었다.

    나는 이미 한번 죄 없는 밀리엄 켄트우드의 정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바 있는 제임스 로웰이 내 정신을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아주 조금 가소롭기까지 해서, ‘당신은 원래 남의 마음 같은 걸 신경 쓰는 인간이 아니었다’고 말해줄까 하는 충동이 일 정도였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충동에서 그쳐야 할 생각이었다.

    나는 조용히 날숨을 내쉬며 눈앞의 상대를 그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과거로부터 애써 분리시켰다.

    내가 그렇게 생각을 갈무리하느라 달리 대답을 하지 않자, 제임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밤은 제가 여기 있을 테니, 제발 저택에 돌아가 쉬셨으면 좋겠습니다.”

    “로웰 씨.”

    그러나 내게는 저 남자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를 너그러이 분리해 생각해줄 의향이 있을지언정, 이 순간 그의 뜻에 고분고분 따라줄 마음은 없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로웰 씨가 지금 앉아 계신 그 자리를 이 이상으로 양보해드릴 마음이 전혀 없어요.”

    일단 첫째로 내 정신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나는 밀리엄이 분명히 깨어나리라고 확신했다. 이건 딱히 근거 없는 낙관이나 기만적인 희망 따위도 아니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영영 깨어나지 못하게 만들 심산이었다면 차라리 그대로 죽게 했겠지.

    죽지 않고 의식불명에 빠진 캐릭터는 언젠가 눈을 뜨는 것이 불문율 아니겠는가.

    다만 언제 깨어나리라는 기약이 없어 조금 답답할 뿐이고, 내 정신을 갉아먹는 무언가가 있다면 바로 그 답답함이겠으나…….

    고작 답답함 정도로 한계에 몰릴 가녀리고 약해 빠진 정신머리라면 외려 이 참에 단단히 담금질을 해두는 것이 나으리라.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제임스 로웰에게 늘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나는 다른 이유를 꺼내들었다.

    “말씀하신 대로 켄트우드 씨는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상태죠. 저는 그래서 더더욱 여기에 있고 싶은 거예요.”

    제임스를 설득하기 위해 꺼내든 비장의 패인지,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진심인지.

    대체 어느 쪽인 건지 좀체 스스로도 분간할 수 없는 말이 유수처럼 입밖으로 흘러나갔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켄트우드 씨가… 밀리엄이 깨어나는 순간에 곁을 지키고 있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거든요.”

    “남작님…….”

    “보시다시피 제 정신은 이런 되도 않는 욕심을 부릴 수 있을 만큼 멀쩡하고 확고한데, 그래도 계속 저와 이 비생산적인 입씨름을 이어나가실 요량인가요?”

    내 질문에 무어라 입을 열려다 이내 맥없는 웃음을 터뜨린 제임스가 천천히 마른세수를 했다.

    아니라거나, 알겠다거나 하는 말이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것이 항복의 제스처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리고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과 함께 이마를 긁적인 제임스가 마침내 침대 옆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고용주 걱정에 잠 못 이루실 휴스턴 집사님과 고용인분들에게 켄트우드 씨의 상태를 전하는 일은 오늘도 제가 맡도록 하죠.”

    “감사해요.”

    “집사님이 오늘은 무조건 남작님을 저택으로 돌려보내달라고 당부하셨는데, 이거 참 제 면이 서질 않게 되었군요.”

    “아하하…….”

    휴스턴 씨가 내 걱정까지 하고 있다는 건 좀 의외였으나, 걱정을 받는 기분 자체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나는 제임스가 앉아 있던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서, 의자에 앉기에 앞서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좋은 밤 보내세요, 로웰 씨.”

    “남작님께서도 부디 평안한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제임스는 병실 문을 연 채 나를 돌아보고서, 여전히 조금 마음에 걸린다는 기색이 묻어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닫혔다.

    나는 책을 무릎에 놓으며 의자에 앉아,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는 밀리엄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깨어나는 순간에 곁을 지키고 싶다니.

    그사이 좀 같이 지냈다고, 생각해보면 낯뜨겁기 이를 데 없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재주가 옮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그 낯뜨거운 욕심이야말로 내 진심인가……. 그건 정말 곤란한 일인데.

    나는 한없이 외면하고만 싶은 곤란의 구렁텅이로 송두리째 굴러떨어지려는 정신머리를 애써 부여잡으며 밀리엄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무릎에 올려둔 책을 다시 펼쳤다.

    예정된 낭패라면 그때 가서 죽도록 맛보는 걸로 하자. 지금은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지.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 <녹스빌 저택의 수수께끼>……가 아니라 ‘레나 엘모어의 연구노트’는, 애석하게도 미쳐버린 난해함을 뽐내고 있었다.

    이게 뭐지?

    외계어인가?

    아니, 따지고 보면 외계어가 맞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는 글자를 읽고 해석하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었는데.

    애초부터 정연하게 정돈할 생각 따윈 요만큼도 없었다는 양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는 메모들.

    어떤 글귀는 너무 휘갈겨 쓴 탓에 제대로 읽을 수조차 없었고, 그나마 읽을 수 있는 문구도 당최 무슨 의미로 쓰여진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결정적으로 질서란 게 전무해서, 대관절 무엇부터 어떤 순서로 읽어나가야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중간중간 그려진 정체불명의 그림이며 알 수 없는 수식들은 그렇잖아도 반쯤 가출한 정신을 아예 아득한 지평선 너머로 내던져버렸다.

    이게 연구노트라니. 차라리 마도서라고 하는 편이 훨씬 그럴듯하지 않을까…….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아무것도 없는 우주를 정처 없이 유영하는 기분이 들었다.

    광활하고 막막하고 아득하고… 무엇보다 눈이 핑핑 돌았다. 그렇다고 기껏 찾은 단서를 내팽개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즈음에서 한낱 평범한 미물에 불과한 나는 눈앞에 펼쳐진 우주적 무언가에 대한 논리적인 이해를 포기했다.

    대신에 보다 단순하고 단편적인 접근을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애초에 그러라고 손에 들어온 단서일 수도 있지 않겠냐는 자기위로는 덤이었다.

    나는 일단 눈에 들어오는, 그러니까 내 선에서 어찌어찌 해석이 가능한 단어나 문구를 닥치는 대로 꾸역꾸역 머릿속에 눌러 담기 시작했다.

    적합자. 영혼. 소환의식. 종말의 조건…….

    이 정도면 정말 마도서라고 보는 게 맞지 않나 싶을 정도로 괴상한 것들이 우후죽순 튀어나와 머릿속을 통통 튀어다녔다.

    개중에는 ‘예언’이나 ‘이방의 신’ 같은 낯익은 단어도 몇 개 보였다.

    ……물론 낯이 익다고 해서 괴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 하나 분명하고 그나마 현실적으로 해석되는 사실은 독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는 점.

    정확히는 독자의 존재 자체를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본인 이외의 누군가가 읽게 될 경우를 염두에 두고 쓴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최소한 이 노트를 쓸 당시의 레나 엘모어는 이것을 베로니카에게 남길 생각이 없었던 게 확실했다.

    아니면 애초에 베로니카가 태어나기 전에 쓰여진 것일 수도 있지.

    어느 쪽이든 간에 이건 누가 읽으라고 쓴 게 아니었다.

    이렇게 중구난방이어서야 써재낀 본인도 두어 달쯤 뒤에 펼쳐보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끄적여놨지?’ 라고 자문하게 될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걸 딸에게 남겼다는 건 이해하기 쉽고 일목요연하게 요점만 간추릴 여유가 없었거나, 그랬다간 외려 이걸 보지 말아야 할 인물에게까지 들킬 위험이 있어 모쪼록 딸이 자기 뇌구조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영특하길 바랐거나, 혹은 둘 다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어쨌든 이 내용은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말고 아무도 믿지 말고 최대한 빨리, 아주 멀리, 누구도 너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치라’던 유언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을 터였다.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그런다고 정말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을 것 같지 않아서, 나름대로는 설명이랍시고 남겨둔 것일지도 모르…….

    “으윽…….”

    줄줄이 이어지던 생각을 끊은 것은 별안간 들려온 신음소리였다.

    나는 일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가, 소리의 출처가 너무도 자명하다는 사실을 선득하니 깨달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