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96화 (96/121)
  • 96화. 묵시록 (4)

    일단 겉보기에 <녹스빌 저택의 수수께끼>는 조금 두껍고 묵직한 점을 제외하면 딱히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평범한 책이었다.

    당연히 메이슨 교단의 예언서인지 범행계획서 나부랭이인지 모를 그 문제적 괴서처럼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사실 튜토리얼 때도 마음만 먹었다면 나는 이 책을 펼쳐볼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쓸모가 없어 보인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무시해버리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관점을 조금 바꾸어 생각해보자.

    어쩌면 튜토리얼에서 이 책을 만졌을 때 굳이 그런 내용의 문구가 떴던 것은, 애당초 플레이어가 그 시점에 이 책을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가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블루 달리아>의 스토리 구조가 직선적이기 때문에, 게임에서 얻을 수 있는 단서들에도 나름 철저한 순서가 부여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르긴 몰라도 이건 먼저 얻어봐야 의미가 없거나, 해석 또는 이해가 불가능한 단서였을 터다.

    나는 이 책에 쓸모가 부여된 시점이 정확히 언제쯤이었을지, 지금 이전이었을지 아니면 바로 이 순간일지를 가늠해보며 조심스럽게 표지를 넘겼다.

    그리고 표지 안쪽에 적힌 손글씨를 발견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필체였는데, 내용을 확인하고 나자 곧장 그것이 언제였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사랑하는 우리 딸 베로니카에게. 엄마로부터.’

    아무래도 레나 엘모어가 베로니카에게 남긴 유품은 보육원 묘지에 넣어둔 쪽지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책장을 몇 장 넘겨보았다. 이어진 내용은 지극히 평범한 소설이었다.

    굳이 특이한 점을 하나 말해야 한다면, 엄마가 어린 딸에게 남기기에는 썩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정도.

    일단 책 자체가 상당히 무거웠고, 앞의 몇 장을 읽어본 바 내용은 결코 동화가 아니었으며, 글씨도 어찌나 깨알 같은지 아이가 읽기엔 여러 모로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그냥 딸이 성장한 뒤에 읽기를 바라서 남겨둔 책인 걸까?

    하지만 뭐든 다 뒤로한 채 하루라도 빨리 먼 곳으로 떠나라는 유서를 남겨놓고 이렇게 무게감 있는 유품을 ‘그냥 읽어보라는’ 의미에서 함께 남기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나는 영 꺼림칙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채 머리를 긁적이다가, 오른편에 두텁게 남은 책장들을 뭉텅이로 잡고 한두 장씩 놓아보기 시작했다.

    책장들은 촤라락 소리와 함께 엄지를 스치며 빠르게 넘어갔다.

    그렇게 수 초간은 앞의 몇 장과 같은 소설책의 페이지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오른손 안의 책장들이 절반 정도로 줄었을 즈음, 아무것도 인쇄되어 있지 않은 누런 빈 종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책장들을 놓고 그 부분을 쫙 펼쳤다. 그리고 처음 표지를 열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다시 천천히, 한 장씩 종이를 넘겨갔다.

    그렇게 한 다섯 장쯤 넘겼을까.

    인쇄된 글자나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여백 대신, 한 페이지 가득 손으로 정신 없이 휘갈긴 듯한 메모가 나타났다.

    [ ‘레나 엘모어의 연구노트’를 획득했다. ]

    이거다, 하는 순간 시스템창도 덩달아 반응했다. 그러나 떠오른 문구는 조금 뜻밖이었다.

    ‘연구노트’라니.

    레나 엘모어가 모종의 연구를 하고 있었다는 뜻인가? 하지만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난데없이 인풋된 레나 엘모어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두고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일단 책을 덮었다.

    뒷장을 대충 넘겨본 바 노트의 양이 제법 되었던 터라, 해석은 둘째치고 앉은 자리에서 전부 독파하는 것부터가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좀 많이 무겁고… 가방에도 안 들어갈 크기긴 한데, 어쨌든 잘 들고 병실로 돌아가서 차근차근 읽어보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지금은 일단 더 늦기 전에 벤자민 홉스의 사무실로 가봐야지.

    거추장스러운 짐이 생겼으니, 좀 미안하긴 해도 간식거리를 사들고 가는 건 포기해야겠지만.

    ***

    “세상에, 캠벨 남작님!”

    “아하하,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바쁘신 와중에 너무 불쑥 찾아뵌 건 아닌지 염려가 되네요…….”

    “아이고, 아닙니다. 전혀 바쁘지 않았어요. 짐이 무거워 보이시는데 얼른 들어와 앉으시죠.”

    벤자민 홉스는 선약도 기별도 없이 웬 묵직한 책 한 권을 품에 안고 찾아온 불청객을 감동스러울 정도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벤자민 홉스가 안내해준 소파에 앉아 그가 차를 내오기를 기다렸다.

    물론 그사이 옆자리에 책을 내려놓고 어깨를 두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연약한 몸뚱이가 빙의자를 잘못 만나 고생이 많구나 싶었다.

    내가 돌아가고 나면 모쪼록 원래 주인과 무사히 재회해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우아한 대부호의 삶을 영위…… 음.

    그러고 보니 내가 현실로 돌아가면 그 뒤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 몸에 베로니카 캠벨이 되돌아오긴 할까?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몸 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는 설정인가?

    아니, 다 떠나서 여긴 게임 속 세상인데. 게임이 끝나고 나면 어떻게 되는…….

    “어서 오십시오, 남작님. 공사다망하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아쉬운 마음에 보내본 편지였는데, 정말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왠지 영 좋지 못한 부분을 관통하려던 생각의 줄기는, 티세트와 쿠키가 올라간 쟁반을 든 벤자민 홉스의 귀환으로 다행히 푹 꺾여 사라졌다.

    나는 정말로 왠지 모르게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그 생각을 재빨리 털어낼 겸 벤자민 홉스를 향해 사과의 말을 전했다.

    “정말 죄송해요, 변호사님. 실은 제가 집을 떠나 있느라 보내주신 편지를 오늘에야 봤거든요. 제때 받았다면 늦지 않게 왔을 텐데…….”

    “제게 죄송해하시다니 그러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늦지 않게 와주셨는걸요. 얼굴을 뵙고 떠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어디…… 가시나요?”

    “그게, 실은 사무실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나는 사무실의 풍경이 전에 왔을 때보다 많이 휑하고 다소 어수선하다는 걸 깨달았다.

    사무실에서 짐을 빼고 있을 정도면 진짜 곧 떠날 예정이란 뜻이니, 정해진 전개였다곤 해도 정말 아슬아슬하게 찾아온 셈이었다.

    “조금만 늦게 왔으면 못 만나 뵐 뻔했네요. 고향에서 새로 사무실을 여시는 건가요?”

    “글쎄요. 그건 어떻게 될는지…….”

    벤자민 홉스가 애매한 얼굴로 웃으며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혹시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겨서 내려가는 걸까? 오래 알고 지낸 사람도 아니니 솔직히 내 알 바가 아니긴 하지만 정말 그런 거라면 좀 마음이 불편할 것 같은데.

    그러나 조심스레 자기 눈치를 살피는 내 행동을 기민하게 읽어낸 것인지, 벤자민 홉스는 금세 다급하게 손을 휘휘 저었다.

    “아, 노파심에 말씀 드리는데 무언가 좋지 못한 사정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주위에서 하도 새 시대가 시작된다고들 하니 괜히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는지 저도 뭔가 새로운 출발을 해보고 싶어지더라고요.”

    아, 새로운 출발이라. 좋은 울림이기는 하다. 누구나 한번쯤 꿈꿀 법한 단어지.

    1899년이 끝나기까지 이제 정말 열흘도 남지 않은 오늘.

    그러고 보면 요 며칠 동안 병원을 오간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제 곧 새로운 백년이 시작된다는 이야기가 제법 들려왔던 것 같다.

    새 시대. 새로운 백년.

    한쪽에서는 다가오는 새해를 그렇게 받아들이며 저다지도 설레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른 한쪽에선 이 해의 마지막 날 세계가 멸망할 거라는 둥 하는 뭣 같은 예언을 믿고 낙원행이라는 이름의 집단자살을 계획 중이라니.

    정말이지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다.

    뭐 극적인 대비이긴 한데 이렇게까지 극적일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하여간에 백해무익한 사이비들 같으니라고.

    나는 새 출발을 앞둔 벤자민 홉스에게 나의 언짢은 기분이 전달되지 않기를 바라며,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시군요. 어디서 무슨 일을 하시든 잘되셨으면 좋겠어요. 응원할게요, 변호사님.”

    “그렇게 말씀해주시다니 감사드립니다, 남작님. 저도 늘 남작님을 응원하겠습니다. 꼭 바라시는 바를 이루실 수 있도록.”

    공사다망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더니 내가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짐작한 모양인지, 벤자민 홉스는 퍽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 진지한 표정은 단지 인사치레가 아니라 정말로 내가 바라는 바를 꼭 이루었으면 하고 응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립서비스라면 대단한 것이었고, 진심이라면 고마운 일이었다.

    내 바람을 너무 원대한 무언가로 여기고 있는 눈치라 좀 부담스럽기는 했으나.

    뭐, 어쨌든 일차적인 목표는 적폐 사이비 종교집단의 미친 짓을 막고 정의의 철퇴를 내리는 것이니 이 세계의 구성원 입장에서는 원대한 일이 맞을지도… 모르지.

    내심 어깨를 으쓱해 보인 나는, 적당히 따뜻한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서 벤자민 홉스를 향해 마땅한 인사를 전했다.

    “……저도 감사드려요.”

    그러자 벤자민 홉스 역시 덩달아 찻잔을 들어 올리며 빙긋 웃어 보였다.

    벤자민 홉스. 내가 이 몸에 들어와 제일 처음 마주했던 사람. 고작 두어 번 만난 상대일 뿐인데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조금 특별하게도 느껴진다.

    피차……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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