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묵시록 (3)
라이오넬이 대화를 끝내고 돌아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임스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결연한 표정으로 다가온 제임스는 오늘이야말로 꼭 교대를 해야겠으니 제발 저택에 돌아가 쉬라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도 그제도 단칼에 거절했던 간청을 내가 순순히 받아들이자 제임스는 잠시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러나 금세 잘 생각하셨다며 빙긋 웃어 보였다. 내가 정말 저택에 돌아가 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이었다.
신뢰로 가득한 그 표정에 나는 아주 미약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병실을 나섰다.
당연한 소리지만 내 머릿속에 저택으로 돌아가 쉰다는 계획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잠든 밀리엄의 곁을 지키느라 게임 진행을 등한시한 지난 며칠이 곧 휴식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관절이 비명을 내지르는 요란뻑적지근한 휴식이긴 했지만, 어쨌든 간에.
마차를 부른 나는 켄트우드 저택 대신 베로니카의 집으로 향했다.
메이슨 교단이 조지 캠벨의 죽음 이전부터 베로니카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게 밝혀진 데다 네 번째 사건을 앞두고 있는 지금.
게임의 시작점이나 다름없었던 그곳으로 돌아가면 무언가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발상에서였다.
마차는 금세 베로니카의 방이 있는 건물 앞에 멈춰 섰고, 마차에서 내린 나는 위층의 방을 올려다보며 심호흡을 했다.
지난번의 일도 있고, 에드워드 녹스의 행방이 여전히 묘연한 상태라 자연히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순간 밀리엄과 함께 왔다면 조금 더 안심이었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급히 도리질을 쳤다.
지금, 특히 이런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썩 바람직하지도 않고 딱히 도움이 되지도 않는 일이다.
나는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고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랐다.
문 앞에 도착하자, 우편함 가득 쌓여 있는 우편물들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사건에만 신경 쓰느라 켄트우드 저택의 고용인에게 우편물을 전달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언제부터 쌓인 것인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는 우편물들을 꺼내 안고서 방 문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 곧장 눈에 들어왔다.
근래 지낸 곳들에 비하자면 분명 좁고 초라하지만 나름대로 갖출 건 다 갖춰진 평범한 가정집.
어쨌든 베로니카 캠벨에게는 그녀가 사는 세계의 전부였을 공간.
나는 품 안의 우편물들을 대충 정리해 문 옆의 테이블에 올려둔 뒤, 문을 닫고 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자…… 일단 오긴 왔는데 이제 뭘 어떡한담?
‘아무것도 아니었던 시절의 베로니카 캠벨에게 메이슨 교단의 교주가 미행을 붙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 시절의 그녀가 살던 이곳에 오는 것이 나름 괜찮은 판단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서 너무도 전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을 막연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혹시 내 촉이 잘못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스멀스멀 싹트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가…?
그냥 똥촉이었던 걸까?
하지만, 라이오넬의 이야기를 듣고도 가만히 앉아 밀리엄의 병실이나 지키고 있는 것이 이 타이밍에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닐 터다.
나는 이 시점의 내가 발로 뛰어서 알아내야 할 정보들이 분명 존재하리라고 반쯤 확신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전개는 어째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가는 모양새인데도 나는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고, 아직 풀리지 않은 떡밥도 몇 개나 남은 상황이지 않나.
네 번째 사건이 터지기까지의 짧은 말미 동안 내가 더 알아낼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는 방 한가운데 가만히 선 채로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일단은 여기서 시작하자. 그 다음엔 수사국을 찾아가서 멜리사에게 요 며칠간의 이야기를 좀 들어봐야지.
가능하다면 루크 엘모어와 레너드 에버렛을 만나보는 것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거기까지 계획하고 보니 당장 용건이 떠오르는 장소 가운데 탐색을 해볼 만한 곳은 이 방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보자. 남은 모노클은 두 개인데.
지금이 탐색 타이밍이라는 보장도 없고, 네 번째 사건이 발생할 피아벨 대수도원에서의 쓸모를 생각해 지금은 아껴두는 것이 좋을까?
으음…….
아니야. 여유분으로 하나 정도만 남겨둬도 충분할 것 같다. 운이 좋으면 그 사이에 더 생길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심지어 여긴 저번에 한번 쭉 훑어본 장소라 그런지 어딜 뒤져야 할지 영 감이 안 잡히는 데다가, 나는 원체 아이템을 아끼거나 부러 쓰지 않는 타입의 플레이어도 아니다.
결국 나는 모쪼록 미래의 나에게 굿럭이 있기를 기원하면서 모노클 아이콘을 눌렀다.
처음 렌즈를 눈에 가져다 대었을 때는 특별히 빛나는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제발 내가 또 모노클 낭비를 해버린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넓지도 좁지도 않은 방 안을 천천히 빙 둘러 살폈다.
그러다 마침내 내가 들어온 문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반가운 금색 빛무리가 문 옆에서 그 반짝임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여기에 오는 게 맞았어! 나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빛이 나는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빛무리는 조금 전 내가 테이블에 내려둔 우편물 뭉치 위를 맴돌다가, 모노클과 함께 스르륵 사라졌다.
나는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앉아 우편물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캠벨 남작 앞으로 온 파티나 사교모임 초대장들이었고, 시스템창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초대장을 열댓 장 정도 넘겼을 즈음, 다른 것들과 달리 유난히 수수하고 깔끔한 편지봉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봉투를 뒤로 돌려 보낸 사람의 이름을 확인했다. 벤자민 홉스.
[ ‘벤자민 홉스의 편지’ 를 획득했다. ]
이 타이밍에 갑자기 벤자민 홉스가 튀어나오다니.
처음 베로니카의 몸에서 깨어나 이 방을 나서서 향했던 곳이 벤자민 홉스의 사무실이기는 했지.
혹시 지금은 내가 이 몸에 빙의한 이후 들렀던 장소들을 하나하나 다시 돌아보며 떡밥들을 되새겨야 하는 그런 상황인 걸까?
꽤 일리 있는 가설 같아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다시금 봉투를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수려한 필치로 적힌 이름 옆에 새끼 손톱만 한 붉은색 도장 자국이 보였고, 그 아래로 보낸 날짜가 적혀 있었다.
사나흘도 아니고, 보낸 지 열흘이 족히 넘은 편지였다.
날짜를 확인한 나는 급하게 봉투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편지를 꺼내 펼쳤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간단한 안부인사로 시작된 편지는 혹시 가까운 시일 내에 사무실을 방문해주실 수 있겠냐는 질문으로 맺어져 있었다.
역시 조금 전의 가설이 맞았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나는 본의 아니게 남의 연락을 씹어버렸다는 사실에 약간의 가책을 느끼며 뺨을 긁었다.
이미 ‘가까운 시일’이라고 부를 기간은 지난 것 같지만…… 지금이라도 확인했으니 가보는 게 맞겠지.
죄송하니까 뭐 간식거리라도 사들고 가야겠다…….
나는 편지를 접어 다시 봉투 안에 넣은 다음, 조심스럽게 가방 안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순간 관절이 다시 쑤셔오기 시작했다.
며칠을 혹사시키더니 기껏 쉬겠다고 나와서 어디 눕기는커녕 계단까지 오르게 만들었다고 시위라도 하겠다는 건지.
나는 묘하게 연약한 베로니카의 몸뚱이를 욕하며 허리를 좌우로 돌리다가, 그만 그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문 맞은편에서 미친 존재감을 뽐내며 나를 한껏 유혹하고 있는 ‘침대’를 말이다!
그것은 밀리엄이 내어준 방이나 이브리안 호텔에서 묵었던 방의 침대들만큼 크고 고급스럽지 않았지만, 잠시 누워 휴식을 취하기엔 차고 넘치도록 푹신해 보였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번뇌했다.
……이왕 여기까지 왔고, 다음에 어디로 갈지도 정했는데, 리프레시 차원에서 잠깐만 누워 있다가 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애초에 제임스에겐 저택에 돌아가 쉬고 오겠다고 말한 참 아닌가.
여기가 저택은 아니지만 어쨌든 저기 누워 쉬었다 가면 완전 거짓말은 하지 않은 셈이 되니 일석이조일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몸뚱이는 이미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아주 그냥 날 죽이지 그러느냐며 비명을 내지르던 관절들은 마침내 찾아온 힐링타임을 즐기는 중인지 어느새 고요를 되찾은 상태였다.
나는 멍하니 누운 채로 낡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편하긴 하다. 요 며칠 너무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래. 휴식은 중요하지.
그렇게 한동안 천장을 보다가 질려버린 나는, 시야를 바꾸고 목운동도 좀 할 겸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돌아간 시선 끝에는 낮은 탁자가 있었다.
튜토리얼 때 본 기억이 나는 탁자 위에는, 마찬가지로 튜토리얼 때 보았던 낡고 두꺼운 책이 놓여 있었다.
와, 이렇게 생각하니까 되게 옛날 일 같은 느낌이 드네. 제목이 분명히… 무슨 저택의 수수께끼였던 것 같은데.
나는 노곤함에 반쯤 감긴 눈으로 책등을 응시했다. 세로로 길게 쓰여진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녹스빌 저택의 수수께끼.
맞아, 맞아. 녹스빌 저택이었…….
“……어?”
일순 머리를 스쳐가는 장면에 나는 좀 전까지의 나른함도 잊고 퍼뜩 상체를 일으켰다.
누군가 뒤통수를 턱 치고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맞아. 저 책은 분명히 튜토리얼 때…….
[ ‘<녹스빌 저택의 수수께끼>’를 획득했다. 지금은 쓸모가 없어 보인다. ]
한번 생각해내고 나자 어제 일처럼 또렷이 떠오르는 문구의 내용에 나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시스템창이 반응했던 물건이다. ‘지금은 쓸모가 없어 보인다’고 해서, 그럼 나중에 필요하겠거니 하고 무시했다가, 그대로 오늘까지 잊고 있었던 물건.
나는 탁자 위에 미동 없이 놓여 있는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이 책에 닿은 순간, 시스템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 ‘<녹스빌 저택의 수수께끼>’를 획득했다. ]
떠오른 문구는 그것이 전부였고, 나는 내 손에 들린 묵직한 책을 내려다보며 거의 탄성에 가까운 실소를 터뜨렸다.
하하, 그래. 그러니까 이 책이.
지금은 쓸모가 있다는 뜻이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