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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93화 (93/121)
  • 93화. 묵시록 (1)

    “우리는 위험한 일을 하고 있죠.”

    노을을 등지고 선 밀리엄이 말했다. 나는 ‘그 이야기라면 전에도 하지 않았냐’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래서 대신 생각을 했다. 그래. ‘우리’는 위험한 일을 하고 있었지.

    그런데도 지금껏 나는 누군가 당신을 노릴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지 못했다.

    당신이 잘못되는 일 같은 건 애초부터 상상도 하지 않았다.

    내 목숨이 수십 번을 오락가락할지언정 당신은 괜찮을 거라고 여겼어.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구태여 믿을 필요도 없이 그 어떤 염려조차 하지 않고.

    “애초에 당신은 그걸 감수하겠다고 했고, 그러니 내게 당신의 행동이나 선택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아요.”

    밀리엄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고, 나는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갔다.

    내 선택에는 미래가 존재했다. 집으로, 현실로,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는 미래.

    나는 그 미래로 향하기 위해 고를 수 있는 단 하나의 선택지를 골랐다. 그걸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무언가를 버리거나 희생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밀리엄의 선택에도 미래가 있었을까.

    밀리엄 켄트우드의 삶은 그가 진실을 쫓지 않고, 교단의 비밀을 파헤치지 않을 때 더 안전했을 것이다.

    양친의 죽음도 여동생의 죽음도 결국은 지나간 일.

    과거에 매달리는 삶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나와 공조하기로 한 밀리엄의 선택이 그의 미래를 저당잡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하지만, 가능하다면 베로니카…….”

    그런데도.

    당연하다는 듯 멍청하게 내 목숨만 생각하던 나와 달리, 자기 목숨이 똑같이 위험하다는 걸 뻔히 알았을 텐데도.

    “당신을 지키는 일은 내가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그런 마음을 품을 수가 있었냐고.

    어째서 마음만으로 끝내지 못했느냐고.

    생각은 결국 질문으로 귀결되었으나 나는 여전히 입을 열 수 없었다.

    말 없는 나를 향해 밀리엄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기가 막혔다.

    뭐가 좋아서 저렇게 웃나 싶다. 자긴 하고 싶은 일을 했다 이건가. 정말로, 정말로 기가 막혔다.

    ……뭘 잘했다고.

    ***

    깜빡 잠이 들었었나.

    영 좋지 못한 꿈을 꿨다.

    눈을 뜨기 전부터 찾아든 감상은 눈을 뜨고 나자 한층 짙어졌다. 꿈에서 본 야속한 얼굴이 깨어난 뒤에도 눈앞에 있는 까닭이었다.

    나는 한쪽 뺨에 닿는 부드러운 시트의 감촉을 느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좁아진 시야 끝에는 여전히 밀리엄이 있었다.

    며칠째 감긴 채로 뜨일 생각을 하지 않는 눈. 쓸데없이 평온해서 순간순간 심장을 철렁하게 만드는 얼굴. 그래도 어쨌든 미약하게 오르내리고는 있는 가슴.

    잠들기 전과 조금도 변함없는 모습이다.

    잠기운이 싹 가시는 풍경에 한숨을 내쉬며, 나는 침대에 엎드려 있던 상반신을 일으켰다.

    온몸의 관절이 비명을 질러대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누워본 게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사흘 전, 아니 나흘 전이었던가? 뭐, 의외로 반나절 전이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뚝뚝 소리를 내는 어깨를 돌리고 목을 좌우로 꺾었다. 좀 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오래 갈 성싶지는 않았다.

    적당히 관절을 풀어주고 나자 또다시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깔끔한 1인실은 지나치게 고요해서 이따금 사람의 정신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는다.

    뭘 해야 할까. 높다란 벽을 앞에 두고 질문을 던져보았다. 당연하게도 벽은 대답이 없었다.

    “밀리엄.”

    이쪽도 대답이 없기는 마찬가지.

    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부름을 거듭하는 이유는, 이 공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이것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익숙하고도 지독한 무력감을 맛보며 가만히 밀리엄을 응시했다.

    벌써 수일이 지나버린 그 밤.

    내 앞을 가로막고 레너드 에버렛의 칼에 찔린 밀리엄은 의식을 잃은 채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의사는 상처가 깊긴 했으나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식이 돌아올지는 지켜봐야 알 것 같다는 말도 함께였다.

    솔직히 말해 이 세계의 외과술이란 게 믿을 만한 수준이긴 한 건지부터가 가장 의심스러웠지만, 나는 진상짓을 하는 대신 얌전히 의사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루를 지켜보고 이틀을 지켜보고 사흘을, 나흘을 지켜봤다.

    내가 중간에 셈을 그르친 게 아니라면 밀리엄은 오늘로 닷새째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봉합한 상처가 다시 벌어지지도 않았고 착실하게 숨도 쉬고 있으니 분명 좋은 징조라고 의사는 말했으나 애석하게도 내 인내심은 슬슬 한계였다.

    이대로라면 길어야 이틀을 갈까 말까. 그 뒤에도 이 남자가 일어나지 않으면 나는 본격적으로 진상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 생각을 이틀 전에도 했다. 숫제 공갈이란 뜻이다.

    엄한 사람을 들들 볶아 해결될 일도 아닌데 괜히 에너지를 낭비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쯤 버텼으니 언제가 됐든 일어나긴 하리라는…… 뭐라고 해야 할까, 플레이어로서의 확신이 들기도 했다.

    그냥 전개상 잠시 밀리엄의 부재가 필요한 모양이지.

    그러니까 사실 나는 생각보다 제법 침착하고 이성적이며 이래저래 괜찮은 상태였다.

    솔직히 단 한순간도 이성을 잃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거짓말이 되겠지만…….

    일순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뇌리를 스쳐서, 나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병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노크 후에 바로 문이 열렸다면 의사거나 간호사거나 제임스겠거니 했겠지만, 문 밖의 방문객은 아무래도 안쪽에서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렇다면 누굴까. 멜리사인가?

    “네, 들어오세요.”

    나는 찡그렸던 미간을 꾹꾹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그제야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어색하게 과일 바구니를 슬쩍 들어 보인 주인공은 멜리사가 아니었다.

    “……에버렛 씨?”

    나는 애써 펼쳐놓은 미간을 도로 구기며 상대를 불렀다.

    딱히 악의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방금 전의 좋지 않은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만드는 상대라서였다.

    “올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오는 게 도리인 것 같아서 왔습니다.”

    착잡한 얼굴로 침대 위의 밀리엄을 잠시 일별한 라이오넬 에버렛은 그렇게 말하며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침대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를 의자에 앉은 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루크 엘모어가 자수한 이후 풀려났다는 이야기는 들어서, 한 번쯤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직접 찾아와줄 줄이야.

    내가 말없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라이오넬 에버렛은 금세 침대 바로 앞까지 다다랐다.

    “우선은 사죄부터 해야겠죠.”

    “에버렛 씨가 사죄하실 일은 아니지 않나요.”

    “내 책임이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한테 사죄하실 일도 아닌 것 같은데요.”

    “물론 켄트우드 씨에게도 사죄해야겠지만, 애초에 형이 죽이려던 사람은 남작님이셨을 텐데요.”

    퍽 정확한 지적과 함께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그는 잠시간 무언가를 굉장히 주저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가 주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자, 라이오넬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고맙습니다.”

    “뭐가요?”

    “그날… 형을 죽이지 않아 주어서요.”

    역시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군.

    그것 또한 딱히 그의 잘못은 아닐 텐데도 괜히 심사가 뒤틀린 나는 잔뜩 비뚤어진 눈으로 라이오넬을 올려다보았다.

    “별걸 다 고마워하시네요. 제가 거기서 레너드 에버렛 씨를 죽이는 편이 자연스러웠다고 말씀하시려는 건가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는 생각합니다. ……나라면 쐈을 테고.”

    잘하면 나도 쏘았을지 모른다.

    나는 그때 이성을 잃은 상태였고, 내 손에 들린 총은 레너드 에버렛을 겨누고 있었고, 그대로 총을 쏴버렸다 해도 그가 다시 칼을 집어 달려들려 했다고 말하면 모두가 믿어주었겠지.

    상황도 핑계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참아낸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고 싶지는 않다.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참은 게 아니니까. 지금도 순간순간 후회하고 있고요.”

    엄밀히 말하면 그 순간 나는 인내한 것이 아니라 도망친 것이었다.

    내가 총구를 겨누었을 때 레너드 에버렛은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떨어트린 칼을 주워들기는커녕 나를 다시 어찌해봐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자기가 정말 사람을 찔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존재 자체로 위협이기는 했다. 날 죽이려 했던 것도 사실이었고, 내 앞에는 밀리엄이 그의 칼에 찔려 쓰러져 있었다.

    공포든 분노든 방아쇠를 당길 이유로는 충분했으리라.

    그러나 최후의 순간에 나는 도망쳤다.

    그 언젠가 에드워드 녹스를 향해서는 망설임 없이 당길 수 있었던 방아쇠가 그날만큼은 더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단순히 상대가 달라서였을까.

    아니면 그사이 내 마음가짐이 어딘가 달라져버린 탓일까.

    그거야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간에 나는 경찰이 올 때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고 레너드 에버렛은 산 채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는 나의 도망에 감사를 표하는 인간이 서 있다. 아주 우스운 일이었다.

    순간순간 후회하고 있다는 내 말에 라이오넬 에버렛은 그 또한 이해한다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랬다가 금방 다시 입을 열었는데, 이번에는 어째 조금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작님의 반응을 보아하니,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를 사죄와 감사의 표시라고 말하는 건 실례가 되겠군요.”

    “더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메이슨 교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심드렁하니 눈을 굴리던 나는 난데없는 화제에 번쩍 정신을 차리고 라이오넬을 보았다.

    “남작님께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만큼은 전부 털어놓을 작정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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