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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92화 (92/121)

92화. 검은 밤의 만찬회 (14)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제일 처음 보인 것은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앞뒤 생각 않고 무작정 걸음을 움직여 현관 밖으로 달려나갔다.

“밀리엄!”

한 손으로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을 붙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 밀리엄의 팔을 낚아채며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느닷없이 내게 팔을 붙잡힌 밀리엄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베로니카?”

당황한 얼굴이 곧장 시야를 가득 채웠다.

크게 뜨인 금빛 눈을 마주하자 왠지 목구멍에서 무언가가 울컥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에게 내 표정이 어떻게 보일지도, 내 목소리가 어떻게 들릴지도 생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저절로 입이 열렸다.

“저기, 그게… 안 가면 안 되나요?”

조금도 정돈되지 않은 말이 열린 입 사이로 횡설수설 흘러나갔다.

당연하게도 밀리엄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어…… 수사국에 말인가요?”

나는 밀리엄의 팔을 붙든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고개를 기울였다.

급할 것은 없으니 차근차근 말을 정돈해 꺼내는 편이 좋으리란 걸 머리로는 알았다.

그러나 멍청한 입은 머리에게 생각할 시간을 허용하지 않은 채 말을 쏟아냈다.

“이상하게 들릴 거라는 건 알아요. 갑자기 괴상한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해도 할 말 없고요. 그런데, 그래도 부탁이니까.”

“베로니카, 일단 진정하고…….”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나랑 같이 가줘요…….”

기어이 그 말을 꺼내버리고 만 뒤에야 나는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몸도 함께 떨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건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밀리엄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 내게 잡히지 않은 쪽 손을 들어 내 뺨을 감싸온 바로 그 순간에.

“베로니카. 괜찮아요?”

“아무것도 묻지 말라니까요…?”

“다른 건 안 물을 테니까 대답해요. 괜찮은 거 맞습니까? 안색이 새파란데.”

“……괜찮아요.”

나는 괜찮다. 하지만 이대로 가버리면 당신은 안 괜찮아질 거야.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목구멍 아래로 눌러 담으며 나는 간절하게 밀리엄과 눈을 맞췄다.

원하는 대로 대답해주었는데도 밀리엄은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뚫어지도록 들여다보았다. 뺨을 감싼 손도 그대로였다.

남의 속도 모르는 그 느긋함에 조바심이 난 내가 참다못해 다시 헛소리나 다름없는 억지를 늘어놓으려던 참이었다.

“알았어요.”

언제 시간을 끌었냐는 듯 깔끔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잠깐 당황해서 눈만 깜빡이다가, ‘수사국엔 내일 가도 되고…….’ 하는 밀리엄의 중얼거림에 급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 수사국에도 같이 가요.”

“하지만 국장님께서…….”

“밖에서 기다릴게요. 건물 입구까지만 같이 가면 되잖아요.”

“되기야 하지만 왜 굳이.”

“떠, 떨어져 있기 싫어서 그래요!”

급한 마음에 뇌를 거치지 않고 터져나간 외침 이후 찾아든 것은 기나긴 정적이었다.

외출하는 집주인을 배웅하기 위해 나와 있던 고용인들 사이에서 헉, 하는 숨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지만 그 직후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밀리엄은 날 내려다보며 눈만 깜빡일 뿐 한참을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나는 그 오묘한 정적 속에서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했는지 되새겼다.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되새겨보니 나의 외침은 ‘했다’기보다 ‘해버린’ 것에 가까운 데다 심각하게 문제적이기까지 한 발언이었던 것이다.

이 무슨… 돌이킬 수 없는 헛소리란 말인가…….

나는 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은 헛된 욕망에 휩싸인 채 불안하게 밀리엄을 재차 응시했다.

한참 눈만 깜빡이는가 싶던 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경련하는 것이 보였다.

내가 끔찍한 낭패감에 눈을 질끈 감았을 때에야, 밀리엄의 목소리가 귓가를 타고 들어왔다.

“알겠습니다. 내일도 같이 가죠.”

나긋한 음성에 섞인 잔잔한 웃음기가 울고 싶을 정도로 야속했다.

“그리고 오해할까 싶어서 말해두겠는데, 괴상한 억지라고 생각 안 합니다. 나한테는 마음껏 억지 부려도 괜찮고요.”

그제야 내 뺨에서 손을 뗀 밀리엄이 여전히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받아치고 싶었지만, 억지를 부려 뜻을 관철한 입장에서 취할 태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괜히 대화를 더 이어갔다가 밀리엄이 태도를 바꿔 이유를 캐물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기도 했다.

밀리엄은 미안하지만 조금 뒤에 나와 함께 나가겠다며 고용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나는 재미난 구경을 했으니 되었다는 듯 훈훈하게 웃고 있는 그들 덕에 까무룩 기절하고 싶은 기분을 맛보며 저택 안쪽으로 휙 몸을 돌렸다.

그러자 등 뒤의 밀리엄이 내 옆으로 성큼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정말이에요. 당신이 부리는 억지라면 뭐든 기쁘게 들어줄 자신이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 괜찮으면 다시 한 번만 말해주지 않을래요?”

“뭐, 뭘요?”

“떨어져 있기 싫다는 말이요.”

아악!

“안 괜찮아요!”

“아니면, 아무것도 묻지 말고 당신이랑 같이 가달란 말도 괜찮…….”

“안 괜찮아! 안 괜찮다니까요!"

결국 나는 반쯤 도망치듯 중앙 홀로 뛰어 들어가야 했다. 등 뒤에서 밀리엄의 느긋한 구둣발 소리와 웃음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정말이지 쥐구멍에 숨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한편으론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선명한 존재감에 안도감이 밀려 들어왔다.

***

밀리엄은 본래의 계획과 달리 나와 제임스와 함께 엘모어 보육원으로 왔다.

그 뒤의 일들은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로 시간을 돌리기 전과 똑같이 진행되었다.

원장 부부를 애도하는 저녁시간을 갖고, 보육원 안을 돌아보고, 그러다 이바나와 마주쳐 루크 엘모어의 달걀 알러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마침내 루크 엘모어의 방으로 달려가 그의 자백을 듣기까지.

밀리엄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전과 같았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회중시계를 이용해 밀리엄을 살리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는 확신도 함께 커져갔다.

“그 말은, 계획과 달리 라이오넬 에버렛 씨가 범인으로 몰려서 자수를 결심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정확히 들으셨군요.”

“어차피 무고한 사람이 범인으로 몰리는 건 마찬가지인데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다고 이러는 거죠?”

이번에는 내 말을 끊고 나타나는 이가 없었고, 나는 내 질문을 들은 루크 엘모어의 표정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명백히 황당해하고 있었다.

말이 안 되는 비교를 들은 양 조금 불쾌한 것 같기도 했으나, 대답만큼은 성실히 돌아왔다.

“커다란 차이가 있죠. 적어도 저에게는 라이오넬 씨가 리디아 에버렛 양과 다르니까요. 누군가에게 남작님과 켄트우드 씨가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루크 엘모어의 대답을 들은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어찌 보면 단순히 이해를 돕기 위한 비교인 것 같다가도 어딘가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는 말이었다.

‘세상에. 그럴 리가요.’

혹은 시간을 돌리기 전 리디아 에버렛이 했던 말이 떠올라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든 간에, 루크 엘모어는 다시 한번 자수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서 방을 나섰다.

나는 갑자기 몸상태가 안 좋아진 것 같다는 핑계를 대며 제임스에게 루크와 동행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냥 함께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밀리엄이 오늘 수사국에 가는 것을 막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까닭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임스에게 ‘만약 리디아 에버렛 양을 만나더라도 절대 교단에 대해 캐내려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나는, 두 사람이 탄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일단은 안심해도 되겠지.

이제 이대로 밀리엄과 함께 켄트우드 저택으로 돌아가면, 적어도 오늘 밀리엄이 죽을 이유는 없어진다.

그러니 내일부터의 일은 돌아가서 찬찬히 고민해 봐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캠벨 남작님.”

어둠 속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마차를 부르러 간 밀리엄을 기다리던 나는 상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레너드 엘모어가 보였다.

며칠 만에 마주한 에버렛 가의 둘째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다소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방을 조사하던 중 나누었던 짧은 대화를 떠올렸다.

보다 정확히는, 그 대화의 끝에서 레너드 에버렛이 보였던 영문 모를 원망의 눈빛을.

이것은 어쩌면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낼 기회일까? 아니면 그새를 못 참고 찾아온 새로운 위협?

전자라면 환영이지만 후자라면 조금 곤란한 상황이었다. 지금 내 수중에는 회중시계가 없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무기를 들지 않은 상대에게 다짜고짜 총을 겨누는 범죄자가 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저쪽에서 무기 같은 것을 꺼내면 곧장 누를 요량으로 시야 오른쪽의 리볼버 아이콘을 힐끔 보며 레너드 에버렛의 인사에 답했다.

“좋은 저녁이네요. 에버렛 씨. 이 시간에 여기까진 무슨 일로 오셨나요?”

“켄트우드 저택에 남작님을 뵈러 갔었습니다. 그랬더니 여기 계실 거라기에.”

“오늘 저를 꼭 만나셔야 할 용건이라도…?”

“용건이라면 용건이라고 할 수 있겠죠.”

양손을 코트 주머니에 꽂은 레너드 에버렛은 세 발자국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총이 들어갈 만큼 큰 주머니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가능하면 폭력적인 전개는 사양하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그가 나에게 가지고 있을 법한 원망을 하나 덜어보기로 결정했다.

“저, 저도 마침 전해드리고 싶은 소식이 있었는데 잘됐네요. 내일이면 알게 되시겠지만… 진범이 자백을 했어요. 지금 자수하러 수사국으로 간 참이니까, 동생분의 결백도 밝혀질 거예요.”

“그렇습니까? 그건 다행이군요.”

‘그건’ 다행이라니. 그렇다면 다행이지 않은 것도 있다는 소린가?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리고 그 순간 레너드 에버렛이 주머니에서 오른손을 꺼냈다. 나는 급히 뒤로 물러나며 그의 손에 들린 물체를 보았다.

커다란 손에 잡힌 나무 손잡이 위로 막 모습을 드러낸 칼날이 매섭게 빛났다.

‘누님 형님과 함께 맞춘 소중한 물건이라서요.’

아니 왜 살벌하게 잭나이프 같은 걸 가족템으로 맞추고 난리야!

나는 재빨리 리볼버 아이콘으로 손을 뻗었지만, 나보다는 레너드 에버렛의 움직임이 빨랐다.

내가 가까스로 손에 리볼버를 쥐었을 때 그는 이미 코앞까지 다가서 있었다.

늦었다는 사실을 황망하게 깨달으며 눈을 질끈 감은 순간이었다.

거센 아귀힘이 내 뒷덜미를 붙잡아 뒤로 휙 당기는가 싶더니, 그대로 자빠지려는 나를 누군가 앞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푹,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날 안고 선 누군가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통 어린 신음도 함께였다. 두려울 정도로 익숙한 음성이었다.

설마. 아닐 거야.

나는 선득하니 덮쳐오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지 못한 채 눈을 떴다.

내 앞을 막아선 넓은 어깨 너머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잭나이프를 든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레너드 에버렛이 보였다.

그는 무어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칼을 떨어트렸다.

내 앞에 서 있던 몸이 허물어진 것은 그때였다.

덩달아 주저앉은 나는 내 어깨를 붙잡은 채 덜덜 떨리는 손을 보았다가, 고통스런 숨을 내쉬고 있는 손의 주인에게로 눈을 돌렸다.

“밀…….”

“베로니카, 괜찮…….”

나를 감싸며 대신 칼을 맞은 밀리엄은 말을 채 끝맺지 못한 채 완전히 허물어졌다. 어깨를 잡고 있던 손도 함께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나는 내 치맛자락 위로 쓰러진 밀리엄의 등에서 번져가는 핏자국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밀리엄.”

시간이 멈춘 것 같다.

“밀리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머릿속은 의문으로 가득 찼다. 어째서. 왜 이번에도…….

“꺄악!”

정신을 차린 것은 누군가의 비명소리 덕분이었다.

나는 난데없는 아수라장을 발견한 충격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는 보육원 교사를 향해 외쳤다.

“경찰에 연락하고 의사를 불러주세요, 빨리요!”

그리고 난 뒤 주저앉은 상태 그대로 리볼버를 들어 올렸다.

흔들리며 올라간 총구가 레너드 에버렛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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