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검은 밤의 만찬회 (12)
아무래도 저걸 가지고 주방에서 나오는 길이었던 모양이다. 오늘은 느닷없이 등 뒤에서 칼을 꺼내거나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웬 빵이니?”
그 즈음 옆에서 제임스의 퍽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자, 내가 빵바구니를 든 어린애 앞에서 ‘저 애가 날붙이를 들고 있지 않아 다행이다’ 따위의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못내 황당해졌다.
나는 내심 헛웃음을 터뜨렸고, 그러는 사이 우물쭈물하던 이바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루크 오빠에게 가져다주려고요. 아까 저녁 내내 음식에 손도 못 대던 걸 봐서…….”
그걸 본 게 나만은 아니었군. 나는 제임스가 ‘그렇구나’ 하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한 번, 아이가 든 바구니 속의 빵을 한 번 보았다.
바구니 속에는 하드롤 네댓 개와 사등분된 바게트 조각이 들어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음씀씀이는 갸륵한데 왠지 보는 나까지 턱 근육이 아려오는 구성이었다.
[ 1. 좀 더 부드러운 음식이 좋지 않을까?]
[ 2. 착한 아이네. ]
그리고 그런 내 심경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느닷없이 선택지창이 뵤로롱 떠올랐다.
이 타이밍에 선택지라니 대체 뭐냐 싶은 생각과는 별개로 나는 주춤했다. 두 번째 선택지가 묘하게 부담으로 다가온 탓이었다.
착한 아이네.
분명 무난하고 어른다운 반응은 그것일 텐데도 솔직히 거부감이 들었다.
다짜고짜 남의 배를 칼로 쑤시는 애한테 착한 아이라고 말해주고 싶지는 않다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자존심이 고개를 들어서였다.
정말이지 우스운 이유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차마 그 거부감을 꺾지 못한 채, 최대한 부드럽게 들리도록 질문을 건넸다.
“좀 더 부드러운 음식이 좋지 않을까?”
그러자 이바나는 다시 우물쭈물하며 동그란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이내 다시 한 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그리고 이어진 말은, 나와 제임스의 걸음을 곧장 돌려버리기에 너무나도 충분한 것이었다.
***
그래, 어째 너무 술술 풀린다 싶었지.
‘오늘 주방에 있는 것 중에 달걀이 안 들어간 건 이것뿐이라고 해서요.’
‘달걀이 안 들어간 것?’
‘네. 루크 오빠는 달걀이 들어간 음식은 못 먹거든요. 잘못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했어요…….’
그게 있었는데 왜 미처 생각을 못했을까!
제임스와 함께 이바나가 알려준 루크의 방 쪽으로 내달리며 나는 내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고 보니 이건 송년회 자리였다고 했지요. 그런데 달걀을 먹지 않았다, 라.’
애당초 달걀을 먹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송년회 자리에서 달걀을 먹지 않아도 이상할 게 없었겠지.
시스템이 반응을 보인 단서를 좀 더 중요하게 여겼어야 했다.
시스템창이 홀로 멀쩡한 달걀을 품고 있던 에그홀더에 반응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범인에게 달걀 알러지가 있다는 암시였던 거야.
달걀을 먹지 못하는 데다 젊은 남자고, 이름의 머릿글자는 LE.
조금 더 빨리 깨달았다면 진작 용의선상에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후회를 몇 번이고 반복하며 루크 엘모어의 방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방 문을 두드리기에 앞서 일단 숨을 골랐다.
다시 한번 찬찬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루크 엘모어는 달걀을 먹지 못한다. 잭슨 하디의 증언에 부합하는 조건을 가진 것도 맞고, 이니셜도 L과 E로 한스 엘모어의 다잉메시지와 일치한다.
하지만 루크 엘모어를 범인으로 상정할 경우, 라이오넬 에버렛을 범인으로 여겼을 때는 그럭저럭 맞아떨어졌던 몇 가지 정황에 문제가 생긴다.
첫째는 마스터키를 가지고 있지 않은 그가 어떻게 스위트룸에 드나들 수 있었는가.
둘째는 라이오넬 에버렛의 방에서 발견된 수면제와 독약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셋째는 라이오넬 에버렛이 범인이 아니라면, 그는 어째서 침묵보다 적극적인 형태로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아, 남작님. 여긴 제 아들 루크랍니다.’
나는 정말이지 정다워 보였던 모자지간의 모습을 떠올렸다가 애써 도리질을 쳤다.
그렇게 다정히 굴어놓고는 바로 그날 밤에 모친을 살해했다니. 솔직히 그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쫙 끼쳤다.
하지만 그 부분은 루크 엘모어의 가증스러운 연기였다고 생각하면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는 대목.
문제는 앞의 세 가지 정황이다. 이 부분을 설명하지 못하면 수사관들을 설득할 수는 없겠지.
그러나 우리는 ‘에버렛 삼남매가 마스터키를 가지고 있다’고 지배인에게 들어 알고 있을 뿐, 그들 전원이 현재 실제로 그것을 잘 가지고 있는지까지 확인하진 않았다.
그리고 만약 루크 엘모어가 마스터키 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 상태라면, 라이오넬 에버렛의 방에 숨어 들어 수면제와 독약을 숨겨두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체포된 이후로 내내 입을 다문 채 수사관의 질문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있다는 라이오넬의 태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만 어쨌든.
우선은 루크 엘모어의 신병을 확보한 뒤에, 멜리사에게 이 새로운 정황을 잘 설명하고, 마스터키를 새 쟁점으로 수사의 방향을 조금 틀어서…….
―까지 생각했을 때, 갑자기 눈앞의 문이 벌컥 열리며 루크 엘모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좋은 밤입니다, 남작님. 로웰 씨.”
아까와 다를 바 없이 초췌한 낯의 루크 엘모어는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제 방 앞까지 달려오던 뜀박질 소리의 주인이 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 순간 나는 기묘하기 짝이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얼마 전에도 분명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언제였더라?
“그렇게 서 계시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시죠. 이바나, 미안하지만 오빠가 정말 입맛이 없어서 그러는데 빵은 도로 가져가줄 수 있을까?”
어느새 우리를 뒤따라온 이바나에게 차분히 말을 건네는 루크 엘모어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나는 기시감의 정체를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루크의 말을 들은 이바나는 조금 풀이 죽은 듯한 얼굴로 빵바구니를 든 채 뒤돌아 걸어갔다.
루크 엘모어는 그런 이바나의 뒷모습을 어딘가 씁쓸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이내 나와 제임스를 향해 조금 더 문을 활짝 열며 들어오라는 몸짓을 했다.
제임스가 내 옆을 지나 문 안쪽으로 들어가는 사이, 나는 계속해서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루크 엘모어의 씁쓸해 보이는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다 마침내 기시감의 근원을 떠올렸다. 맞아. 그때. 그때 그 사람이.
‘저는 또다시 거짓이 승리하는 꼴을 보자고 그들을 심판한 게 아니라서요.’
앤서니 롭이, 꼭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엘모어 씨.”
“네, 남작님.”
“혹시 오늘 제가 여기에, 당신의 자수를 들으러 온 건가요?”
내 말을 들은 제임스는 방으로 들어서던 걸음을 멈추었고, 루크 엘모어는 말없이 빙긋 웃었다.
그 웃음조차 앤서니 롭의 그것과 몹시 닮아 있어서 나는 도리 없는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한숨이나 다를 바 없는 실소가 입술 사이로 터져나감과 동시에, 루크 엘모어가 조금 전까지 쥐고 있던 왼손 주먹을 내 눈앞에서 활짝 펴 보였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자상이 길게 나 있는 루크 엘모어의 손바닥 위에는, 번호 없는 금색 키홀더가 달린 열쇠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이브리안 호텔의 마스터키로군요.”
“레너드 씨에게서 잠시 빌린 물건입니다. 빌릴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돌려드릴 계획이었는데…….”
“왜 계획을 바꿨죠?”
“그러게요. 저도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몹시 궁금해하고 있는 참입니다.”
“그게 무슨…….”
“어째서 라이오넬 씨가 체포된 거지요?”
당당히 마스터키를 내보이며 자신이 범인임을 밝힌 루크 엘모어는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도리어 질문을 던졌다.
저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황당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나 대신 입을 연 사람은 제임스 로웰이었다.
“라이오넬 씨의 방에서 수면제와 독약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죠. 몰랐다고 말하려는 겁니까?”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것들은 제가 에버렛 양의 방에 놓아드린 선물이었으니까요.”
그는 멀쩡한 얼굴로 자신이 리디아 에버렛의 방에 수면제와 독약을 놔두었다고까지 실토했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다.
그렇다면 리디아 에버렛의 방에 있었어야 할 유리병들은 왜 라이오넬 에버렛의 욕실 벽에서 발견되었단 말인가?
아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 말은, 계획과 달리 라이오넬 에버렛 씨가 범인으로 몰려서 자수를 결심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정확히 들으셨군요.”
“어차피 무고한 사람이 범인으로 몰리는 건 마찬가지인데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다고 이러는…….”
“남작님! 캠벨 남작님!”
무슨 차이가 있다고 이러는 거냐 물으려는 바로 그 찰나, 다급한 뜀박질 소리와 함께 들려온 익숙한 외침이 대화의 흐름을 끊어냈다.
퍽 급박해 보이는 목소리였기 때문에, 나는 일단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빠르게 내가 서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이바나가 보였다.
나는 또다시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가, 아이의 손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사이 코앞까지 다가선 이바나가 가쁜 숨을 내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니?”
“나, 남작님. 방금 막 수사국에서 남작님께 보냈다는 사람이 왔는데요.”
“수사국에서 나한테?”
고개를 끄덕인 소녀의 눈이 잠시간 내 눈치를 살폈다.
말을 꺼내도 좋을지 고민하는 듯한 모양새였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바나의 다음 말은 참다 못한 내가 그녀를 닦달하기 전에 이어졌다.
“네. 그게, 밀리엄 켄트우드 씨의 부고를 전하러 오셨다고…….”
내 반응의 무엇이 문제였는지 아이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고, 어느 시점엔가 굳어버린 나는 아이에게 되묻지 못했다.
누구의 뭘 전하러 왔다는 거냐고.
물어야 할 말 대신 찾아온 것은 정적이었다.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고, 모두가 해야 할 말을 잃어버린.
아주…… 지독한 정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