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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89화 (89/121)
  • 89화. 검은 밤의 만찬회 (11)

    내가 유리병들을 발견해 욕실을 나선 이후, 일은 아주 당황스러울 정도로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두 개의 유리병은 곧장 멜리사와 다른 수사관들에게 전달되었다.

    밀리엄과 제임스를 포함한 모두가 그 내용물을 수면제와 독극물이라고 추측했다.

    그 추측이 사실임을 아는 나는 입술을 꾹 사리문 채 고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때 같으면 ‘정체불명의 액체가 든 유리병들을 획득했다’ 따위의 문구가 떠오를 타이밍 아니었나?

    시스템이 갑자기 과도하게 편리해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하지만 시스템의 변화가 의미하는 바야 어쨌든 간에 병 속에 든 건 수면제와 독약이 맞았고, 모두의 추측은 지극히 타당했다.

    기실 나 또한 시스템이 알려주지 않았더라도 내용물이 수면제와 독약이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했을 터였다.

    그리고 그러한 추측에 밀리엄이 발견한 잭나이프의 존재가 더해진 결과란 너무도 자명한 것이었다.

    수사관들은 곧바로 라이오넬 에버렛을 체포했다.

    아직 병 속 내용물의 정체가 확실해지지 않은 상태라 정중히 모셔가는 형태를 취하긴 했으나, 어쨌든 체포는 체포였다.

    라이오넬 에버렛은 유리병들이 자기 방 욕실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나라면 놀라는 척 정도는 했을 텐데. 어떤 수사관은 그 반응 자체를 일종의 자수로 해석하기도 했다.

    라이오넬은 체포되어 마차로 향할 때만 조금 착잡한 표정을 지었을 뿐 시종일관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리디아 에버렛은 동생이 범인으로 몰려 잡혀가는 것을 보고도 화내거나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스티브 에버렛의 죽음에 보였던 반응과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의 반응은 잡혀가는 라이오넬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담담했다.

    당사자조차 담담함을 유지하는 그런 상황이었던 터라, 레너드 에버렛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분노하다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린 것은 오히려 의외였다.

    아직 혐의가 완전히 벗겨진 게 아니니 호텔을 벗어나지 마시라는 수사관의 말을 들은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몸을 떨다가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몸을 돌리기 직전 나를 노려본 것 같긴 했지만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동생의 욕실에서 유리병을 발견한 사람이 나라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지.

    병의 내용물이 정말 수면제와 독약으로 밝혀졌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이틀 뒤의 일이었다.

    멜리사의 말에 따르면 체포된 라이오넬은 며칠간 쏟아진 모든 질문에 대해 완전히 침묵만을 고수했다고 한다.

    그 밖에 리디아 에버렛이나 레너드 에버렛이 딱히 동생을 위해 수완 좋은 변호사를 기용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전해졌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사건이 그렇게 일단락되는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것이 몹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손쉽고 싱겁게 끝나버린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에 이런 식으로 술술 풀려 휘리릭 끝나버리는 사건이 어디 있느냐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엄연히 <블루 달리아>의 일부인 사건이 ‘술술 풀리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이번 에피소드가 범인이 미리 상정된 상태에서 그 동기나 내막을 쫓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상한데. 너무 이상한데.

    결국 그 모든 위화감의 끝에서 내가 고른 선택지는, 수사협조인의 신분으로 수사국에 출두하게 된 밀리엄의 옷자락을 붙잡는 것이었다.

    “저기, 밀리엄.”

    “네. 베로니카.”

    물론 ‘사건이 너무 술술 풀려서 이상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조금 빙 둘러가는 길을 고르긴 했지만.

    “우리한텐 다른 것보다 동기를 확실히 아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당신도 저번에 말했다시피, 단순히 경영권 다툼 때문에 벌인 사건이라기엔 현장이…….”

    “너무 거창했지요. 기억합니다. 나도 그 부분은 여전히 미심쩍어하고 있는 참이에요.”

    “사건을 메이슨 교단과 연결할 만한 근거도 애매하고요.”

    내 말에 밀리엄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김에 그 부분을 좀 더 파달라는 뜻이죠?”

    “네. 부탁할게요. 나도 같이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민간인 협조자 전원이 수사국에 드나드는 건 곤란하다는 게 데이 국장님의 뜻이시라니 어쩔 수 없죠.”

    그렇게 말한 밀리엄은 모자를 고쳐 쓰고서, 집사가 건네는 지팡이를 받아들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베로니카. 각자 잘 다녀오도록 하죠. 엘모어 씨에게 나도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꼭 전해줘요.”

    “알겠어요. 밤에 봐요.”

    내 인사를 들은 그는 하얀 장갑을 낀 손을 살갑게 흔들며 싱긋 웃어 보인 뒤 몸을 돌렸다.

    나는 그렇게 현관을 나서는 밀리엄의 뒷모습을 나도 모르게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습관처럼 회중시계 아이템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회중시계는 이미 손 안에서 사라진 뒤였다.

    왜 굳이 이 시점을 저장하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어찌 되었건 나 또한 슬슬 나갈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

    제임스와 엘모어 보육원에 도착한 것은 저녁식사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나는 네댓 살부터 많게는 십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 수십 명이 조용히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식당 안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빙 둘러 움직인 시선은 우리와 같은 테이블에서,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루크 엘모어에게 닿았을 때야 멈췄다.

    루크 엘모어는 어제 내 앞으로 초대장을 보냈다.

    호텔에서는 본의 아니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드렸다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정중한 초대장이었다.

    어머니들끼리 절친하셨다고 들었다, 양친의 장례를 치르는 대신 보육원 아이들과 함께 두 분을 애도하는 저녁식사 자리를 가지기로 했는데 괜찮으시다면 자리해달라…….

    그리하여 오늘 밀리엄은 수사국으로 가고, 나와 제임스는 엘모어 보육원을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엘모어 보육원은 더 찾을 단서가 없다 해도 한번쯤 다시 방문해보고 싶은 곳이었으니까.

    나는 며칠 사이 반쪽이 된 듯한 얼굴로 양친을 애도하고 있는 루크 엘모어를 빤히 바라보았다.

    모두가 조용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와중에 혼자 이러고 있자니 조금 양심이 쑤시긴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루크 엘모어의 상황이 보편타당하게 안타까운 것과는 별개로, 내가 여기서 진짜 애도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솔직한 심정으론 과연 애도할 만한 사람들이긴 했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고 말이지…….

    나는 루크 엘모어와 다른 보육원 교사들, 그리고 제임스와 아이들이 기나긴 묵념의 시간을 갖는 동안 이리저리 눈알만 굴려댔다.

    묵념이 끝난 뒤에는 다 함께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메뉴는 꽤 푸짐했고, 만든 사람의 정성이 느껴졌다. 요리사의 솜씨가 좋은 모양인지 맛도 아주 훌륭했다.

    나는 일단 초대받은 입장에서 ‘음식 맛이 좋다’는 말이라도 하기 위해 루크 엘모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조용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루크 엘모어는 자기 앞에 놓여진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곤 하나 남의 부모를 애도하려 모인 자리에서 제대로 묵념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괜히 더 양심을 찔러왔다.

    사위는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로만 가득하고, 아무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집주인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는…… 아주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식사가 그렇게 두어 시간 정도 이어졌다.

    식사를 마친 뒤 나와 제임스는 루크에게 미리 허락을 받은 대로 보육원 안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제임스는 지난번 방문 때 나를 찾아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지만, 내가 걸어나왔던 숲길 쪽을 제외하면 딱히 수상한 곳은 없었다고 전해주었다.

    실제로 내가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원장부부의 급사 탓에 아이들까지 침체되어, 가뜩이나 오래된 건물이 한층 우중충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어느 쪽으로 걸음을 해도 수상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건물 곳곳을 지나칠 때마다, 개중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아이들이 이쪽을 힐끔거리긴 했지만 그 또한 크게 이상한 점은 아니……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음식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주방이 가까운 듯한 어느 복도에서, 나는 낯익은 아이와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남작님.”

    양갈래로 땋아 내린 연한 갈색머리가 살랑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이의 이름을 떠올리기도 전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부터 쳤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다음 순간에는 서늘한 소름이 척추를 타고 내려갔고, 그 다음에는 목구멍이 바싹 말라왔고, 그 다음에야 아이의 이름이 입밖으로 흘러나갔다.

    “아, 안녕. 이바나.”

    “이름을 기억해주셔서 기뻐요.”

    선한 낯을 한 아이가 생긋 웃어 보였으나 나는 차마 마주 웃어주질 못했다.

    눈앞의 소녀가, 저렇게 선량한 얼굴을 한 어린애가 내 배에 날붙이를 꽂던 순간이 끔찍하게도 생생히 떠오른 탓이었다.

    저 애는 결코 기억하지 못할, 이제는 없던 것이 되어버린 일이지만 내게는 그때의 충격과 고통과 죽음의 공포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나는 제임스가 내 이상징후를 눈치채지 못했기를 바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오직 안심을 위해 아이의 두 손을 살폈다.

    다행히 이바나는 양손으로 빵바구니를 든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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